1988년 광주청문회에서 5.18 당시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와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을 증인으로 채택했으나 이들은 출석을 거부했다. 대신 미국은 “1980년 5월 광주 사건에 대한 미합중국 정부 성명”이라는 서면 답변을 보내왔다.
서면 답변에 따르면 미국은 “10.26 박정희 암살을 사전에 알지 못했고, 12.12 사건에 대해 사전 통보받지 않았고, 5.18 당시 광주에서 어떤 폭력 상황이 벌어졌는지 몰랐”다.
“12.12도 미국이 지원했고, 5.18 진압도 미국이 승인했다는 <소문>은 전두환 신군부세력이 언론에 조작한 것”이라고까지 주장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많은 진실이 밝혀졌다. 5.18 당시 미국이 모든 전개 과정을 알고 있었으며, 미 백악관에서까지 대책 회의를 진행했으며, 전두환 세력으로 하여금 군부를 앞세워 광주 민주화운동을 진압하라는 ‘승인’이 내려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미국 관련 세 가지 문제가 있다.
미국은 한국군의 움직임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서울 시각으로 12월 12일 초저녁, 전두환 보안사령부 및 일단의 한국군 장교들이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정승화 장군을 체포하고, 그 과정에서 서울 남부 중심지(용산)에서 몇 발의 총성이 들렸으나 사망자는 아직 보고되지 않았음.”
1979년 12월 12일 당일 미 국무부가 백악관, 주한미대사관, 주한미군, 미 국방부 등을 수신처로 보낸 ‘한국에서 군부의 실력행사 발생’이라는 문서의 일부이다. 또한 미국은 한국군 일각에서 전두환 파벌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다.
“한국공군 및 해군의 일부 고위 멤버들이 1979년 12월 13일 육군의 권력장악 사건을 주도한 전두환 소장이 사임하거나 어떤 형태로든 권력이 억제되지 않으면 그와 그의 파벌에 대한 대응을 고려하고 있다 함. 이들은 전두환이 계속해서 최규하 정부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다면 해병대를 동원하여 그 파벌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수립 중이라고 말했다 함.”
1980년 1월 9일 미 국방정보국 정보요원이 작성한 ‘첩보’ 문건에 담긴 내용이다. 그런 미국이 전두환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음은 상식에 해당한다. 다음은 1980년 3월 12일 주한미대사관에서 국무부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일부이다.
“지배 구조 내에서 특히 우려되는 현상은 전두환이 가지고 있는 권력임. 그는 정부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해 때를 기다리는 것 같다는 인상을 주고 있음.”
12.12로 군부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이 기다리는 ‘때’란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2차 쿠데타를 의미한다. 이미 미국은 3월부터 전두환이 2차 쿠데타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문제의 5월, 전두환이 군사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5월 7일 주한미대사관에서 미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이다.
“위 2개 여단(제13공수여단, 제11공수여단)의 총병력은 약 2,500명이며, 학생 시위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서울로 이동하고 있음. 또한 미군은 포항 주둔 해병대 제1사단이 대전과 부산 지역에 필요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음. 해병대 제1사단은 연합사 작전통제 병력이며 이동을 위해서는 미국의 승인이 필요함. 아직 이러한 요청은 없으나 유엔군사령관은 요청이 있을 경우 승인할 계획임.”
그리고 잘 알려진 5월 22일 백악관 상황실에서 미국 정부의 주요 결정자들이 모여 “최소한의 무력으로 광주 질서 회복”을 결정한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