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호재 안병하인권학교 대표 ⓒ 김종성
1928년 7월 3일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난 안병하는 도쿄의 중학교와 서울의 광신상고에서 공부한 뒤 1948년 11월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했다. 이듬해 5월 23일 소위로 임관한 그는 22세 때 발발한 한국전쟁 기간 중에 춘천전투와 음성전투에 참전했다. 그러고 나서 5·16 쿠데타 1년 뒤인 1962년 11월에 육군 중령으로 군을 나와 경찰의 길을 걸었다.
지난 9일 경기도 하남YMCA교회에서 인터뷰한 안호재 안병하인권학교 대표는 "부친은 처음에 경찰 발령을 받고 치안국에 있다가 곧바로 부산중구경찰서장으로 갔다"고 말했다. 특채 형식으로 총경 계급장을 달고 첫 발을 내디딘 34세의 안병하는 그 뒤 승승장구했다. 간첩 검거와 대간첩작전에서 성과를 거둬 내무부장관 표창과 중앙정보부장 표창도 받았다.
서울 서대문경찰서장, 치안국 과장, 강원도경국장, 경기도경국장을 거친 그는 51세 때인 1979년 2월에 전남도경국장에 취임했다. 마지막 임지가 될 광주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해 10월 박정희가 쓰러지고, 12월에 전두환이 쿠데타로 군부를 장악했다. 이는 안병하의 경찰 내 위상을 높이는 원인이 됐다. 그는 육사 11기인 전두환·노태우와 막역한 사이였다. 노태우와는 밤중에 만나 술도 마실 정도로 각별했다고 안호재 대표는 말했다.
안 대표는 1980년 전반기 상황과 관련해 "항간에 이야기 돌기로는 부친이 공직자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간다 그런 소문까지 나왔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부탁하러 연락하고 찾아오고 그랬어요"라고 한 뒤 아버지가 전두환과 가까워진 계기를 설명했다. 아버지가 경찰 지위를 활용해 전두환의 인맥 관리에 도움을 줬다는 것이 안 대표의 말이다.
"전두환이 정치군인이잖아요. 정치군인을 하려면 옛날에는 경찰 없이는 안 됐거든요. 누구를 만나게 해달라는 연락이 오면 (부친이 만나게 해주고). 특히 사업가들."
안병하는 대간첩작전뿐 아니라 시위 진압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안병하 평전>은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시위 진압도 남 못지않게 잘한다며 유능한 경찰로 평가를 받아왔다"고 말한다. 거기다가 신군부 실세인 전두환·노태우와도 친밀했다. 그랬기 때문에 1980년 5월 19일부터 안병하가 보여준 모습은 전두환·노태우에게는 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안병하는 5월 18일 새벽부터 치안본부의 강경진압 지시를 받았다. 평전에 따르면, 손달용 치안본부장은 그와의 통화에서 "계엄당국의 시각"이라는 표현을 사용해가며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평전에 따르면 안병하의 판단은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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