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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그러진 오토바이, 하얀 국화꽃...동료 배달기사들은 발을 떼지 못했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21/08/28 10:02
  • 수정일
    2021/08/28 10:02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선릉역 오토바이 배달기사 사망사고’에 멈춰선 동료들 “마지막 모습 자꾸 떠올라”

추모하는 배달노동자ⓒ민중의소리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본 뒤로 일을 못 하겠더라. 고인이 하늘에서만큼은 편히 쉬셨으면 좋겠다.”

지난 26일 오전 서울 강남구 선릉역 대로에서 40대 배달노동자가 화물차에 치여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 뒤, 사고 현장에서는 추모행렬이 이어졌다.

여기저기 긁히고 찌그러진 고인의 오토바이는 선릉역 8·9번 출구 사이에 세워졌다. 사고 소식을 온라인 커뮤니티 ‘배달세상’ 등을 통해 접한 배달노동자들은 사고 현장을 찾기 시작했다. 하루 만에 고인의 오토바이 앞에는 수십 병의 소주·막걸리, 그리고 꽃이 쌓였다. “우리 모두 누군가에겐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라고 적힌 쪽지도 붙었다.

27일 이곳을 찾은 배달노동자들은 모두 크고 작은 사고 경험담을 들려주며 “남 일 같지 않다”라고 입을 모았다. 가장 수수료도 높고 건수도 많은 시간 때였음에도, 배달노동자들은 좀처럼 발을 떼지 못하고 그곳에 머물렀다.

선릉역 배달기사 사망사고 현장ⓒ민중의소리

수많은 술병 사이에 콜라 한 캔
자리 뜨지 못하는 배달노동자들
잠 못 드는 배달기사 “내 사고였을 수도”

 

이날 오전 10시30분경, 청색 옷을 입은 한 청년이 고인의 오토바이 앞에 콜라 한 캔을 놓고 묵념했다. 동대문구에서 킥보드를 타고 배달 일을 한다는 배달노동자 이 모(26) 씨는 “강남역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 잠시 들렀다”라고 말했다. 그는 “제가 배달 일을 해보니까, 알겠더라. 배달기사들이 늦는 데는 다 사정이 있다. 앞에 안 좋은 손님이 걸렸다던가, 가게와 갈등이 있었다던가”라며, 그의 죽음이 남 일 같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제가 술을 안 먹기도 하고, 평소 배달할 때 늦는다고 전화가 오면 콜라를 하나씩 드렸다”라며, 콜라를 놓은 이유를 설명했다.

10시40분쯤에는 정장을 입은 30대 회사원이 향을 꽂고 그 앞에서 묵념했다. 바로 옆 건물에서 일한다는 회사원 박 모(30) 씨는 “어제 점심을 먹고 회사로 들어가다가 사고가 났다는 걸 알게 됐다”라며 “저도 배달 일을 1년 정도 했다. 당시 사고를 겪었던 게 생각나기도 하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잠깐 회사에서 나온 김에 (추모를) 했다”라고 말했다.

추모 행렬ⓒ민중의소리

서울 서부지역에서 배달 일을 한다는 이도영(37) 씨도 “강남에 볼일이 있어서 온 김에 볼일 보고 이곳을 찾았다”라고 했다. 그도 강남에서 일하는 배달노동자들이 온라인 커뮤니티 ‘배달세상’에 올린 글을 보고 사고 소식을 알았다고 말했다. 이 씨는 “운전 중에도 ‘콜’이 계속 들어오고, 그걸 보면서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해야 한다. 그때그때 세워서 확인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또 항상 길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휴대전화와 교통신호를 번갈아 볼 수밖에 없다”라며, 항상 위험에 노출된 배달노동자들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예전보다는 훨씬 개선되긴 했는데, 여전히 위험하다”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11시쯤에는 주황색 옷을 입은 배달노동자가 오토바이를 근처에 세워두고 고인의 오토바이에 꽃다발을 놓았다. 그런 뒤, 그는 두 손을 모으고 한동안 고개 숙인 채 고인을 추모했다. 그의 추모가 끝날 때쯤, 또 다른 형광 옷 배달노동자가 꽃다발을 들고 와서 고인의 오토바이 앞에 놨다. “가시는 길 좋은 술 드시고 가시오. 다음 생에 좋게 태어나시고 명복을 빕니다.”라는 쪽지가 붙은 와인 한 병을 놓고, 술 한 잔 따른 뒤, 곧바로 배달 일을 하러 가는 요기요 배달노동자도 보였다.

추모하는 배달노동자ⓒ민중의소리
고인을 추모하는 배달노동자들ⓒ민중의소리

전날 사고가 발생한 시각인 11시30분쯤에는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서비스일반노동조합 배달서비스지부 소속 배달노동자들이 하나둘 모였다. 국화를 준비해 온 그들은 저마다 꽃 한 송이를 오토바이 앞 임시 분향소에 올리고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노조 소속 배달노동자 김 모(45) 씨는 관련 기사나 영상에 달린 댓글에 가슴 아파했다. 그는 “(댓글을 보다 보니) 잘 죽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더라”라며 “그게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지 않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선릉역 사거리에서 횡단보도에 줄지어 신호가 바뀌기만 기다리고 있는 배달노동자들을 보며 “교통법규 어기면서 일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상황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라고 한탄했다. 그러면서 “아마 오토바이 배달하셨던 분들은 웬만하면 공감할 것”이라고 말했다.

추모하는 배달노동자ⓒ민중의소리

10년 넘게 배달 일을 해왔다는 김 씨는 큰 사고를 한 번 겪은 적이 있어서 1년 동안 입원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그 뒤로 한 3년 동안 쉬었는데, 결국에는 다시 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경기도 양주에 살면서도 서울 강남에서 배달 일을 하고 있는 이창훈(32) 씨는 전날 벌어진 사고가 더욱 남 일 같지 않다. 그는 “어제 오전 11시 20분쯤 첫 콜을 잡고 이 앞을 지나다가 사고 직후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보게 됐다”라며 “불과 2~3분 차이로 현장을 지나고 있었기에, 어쩌면 내게 벌어졌을 수도 있는 사고였다”라고 말했다. 그는 ‘살아남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자체만으로도 고인에게 죄스러운 듯 “고인에게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이 씨는 “현장을 보고 난 뒤로 잠도 잘 안 오고 일도 못 하겠더라”라며 고인의 오토바이 앞을 떠나지 못해 했다.

임시 분향소에 놓인 와인병ⓒ민중의소리

앞서 지난 26일 오전 11시30분쯤 선릉역 교차로에서 40대 배달노동자가 23톤 화물차에 치여 현장에서 숨졌다. 경찰 조사에서 화물차 운전자는 정차 당시 운전석이 높아 화물차 바로 앞에 있던 배달노동자를 보지 못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배달서비스지부는 27일 ‘선릉역 오토바이 라이더는 우리의 모습이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지부는 “평범한 가장이 왜 자기 생명을 갉아 먹으며 급하게 달리는지, 자동차 사이를 뚫고 횡단보도 앞에 서는지, 신호와 핸드폰을 번갈아 보는지 알아야 한다”라며 ‘플랫폼 회사 사이의 속도 경쟁’을 지적했다. 이어 “100% 개인의 잘못인 사고가 어디 있나”라며 “우리도 안전하게 달리고 싶다”라고 강조했다. 또 부족한 안전교육, 보험가입 여부도 확인하지 않고 도로 위로 내보내는 배달 플랫폼 회사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한편, 최근 배달시장 규모가 커지면서 이륜차 사고는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다.

도로교통공단이 경찰·보험사·공제조합의 교통사고 자료를 수집·통합·분석하여 정보를 제공하는 ‘교통사고분석시스템’(TAAS)에 따르면, 2011년 1만170건이었던 이륜차 운전 교통사고는 매해 꾸준히 늘어 2020년에는 1만8280건에 이르렀다. 특히 2017년 1만3730건이었던 이륜차 사고는 2018년 1만5032건, 2019년 1만8467건 등으로 급격히 늘었다. 2011년 1만2102건이었던 부상자 수도 꾸준히 늘어 2020년에는 2만3673건이 됐다. 서울에서 발생한 이륜차 교통사고의 3분의 1은 배달노동자 사고인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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