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자유전 원칙이 훼손된 데는 부동산 투기세력의 역할이 컸다. 비농민이 농지를 매수해 토지투기를 하는 일은 공공연히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같은 훼손이 꼭 투기세력 때문에만 발생한 것은 아니다. 산업구조의 변화나 인구의 대규모 이동도 이 원칙을 약화시켰다. 농촌에 사는 농민 부모의 소유 토지를 도시에 사는 비농민 자녀가 상속하는 일이 많아진 1960년대 후반 이후의 산업환경 변화도 이 원칙의 현실성을 떨어트렸다.
농업만으로는 생계유지가 어려워 다른 직업을 겸하는 일이 많아지는 현상도 그런 영향을 끼쳤다. 농민 개인과 더불어 영농법인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농업환경 변화 역시 경자유전 원칙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럼에도 꾸준히 생존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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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일 세종시 전의면 신방리 일대 모습. 최근 국민권익위원회는 국민의힘 윤희숙 의원의 부친이 2016년 이 일대 논 1만871㎡를 사들였던 것과 관련해 농지법과 주민등록법을 위반한 것으로 판단했다. 2021.8.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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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런 요인들로 인해 경자유전 원칙이 사실상 무력해졌는데도 이 원칙이 여전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6월항쟁 직후에 등장한 1987년 헌법에서는 이전 헌법에는 없었던 경자유전 원칙이 새로이 규정되기까지 했다.
정부수립 당시의 1948년 헌법은 제86조에서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고 함으로써 농지개혁 원칙을 규정했지만 농지개혁이 경자유전 원칙에 입각해야 한다고는 규정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경자유전 원칙의 3대 요소인 비농민의 농지 소유 금지, 소작제 금지, 소유 상한 3정보 제한은 농지개혁법 같은 하위 법령에 규정됐다.
그 뒤 경자유전 원칙을 훼손하는 입법조치들이 꾸준히 시도됐지만, 이 원칙은 죽어 쓰러지지 않고 놀라운 생명력을 발휘했다. 해방 42년 뒤인 1987년에 이르러 헌법 규정으로 포섭된 것은 이 원칙의 생명력을 보여준다. 1987년 이후의 입법 조치들에 의해 사실상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지만, 이 원칙은 대한민국 헌법의 한 줄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회자되고 있다.
경자유전 원칙의 생명력은 농업을 홀대한 박정희 정권 하에서도 증명됐다. 경자유전 원칙과 그 3대 요소를 무력화시키려는 시도가 있을 때마다 이를 지키려는 힘들이 나타나곤 했다. 위의 조석곤 논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1967년 4월 마련된 농지법안 기초요강에서는 농지소유 상한을 폐지하고 법인의 농지소유도 인정하고 농지담보도 허용하였다. 1967년 11월에 성안된 농지법안에서는 기업농 육성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강구하는 조항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여론의 반발이 거셌다.<br /><br />1968년 4월 민주공화당은 3정보 소유상한은 원칙적으로 인정하되 3정보 이상을 소유·경작하고자 할 때는 구·시·읍·면장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기업농 육성에 관한 조항은 삭제하는 수정안을 제출했지만, 여론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하여 이 법안은 국회에서 심의되지 않은 채 보류되었다.
공업화 및 서비스업화가 진행되고 대중의 삶이 농업과 멀어지는 속에서도 경자유전 원칙을 지지하는 에너지가 필요할 때마다 결집되곤 했다. 그런 에너지가 6월항쟁 직후에 다시 결집돼 현행 헌법 제121조 제1항을 낳게 됐다.
경제정의와 토지공개념, 그리고 경자유전의 원칙
한국인들은 자기 삶의 중심이 농업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경자유전 원칙이 위협받을 때마다 이 원칙의 수호자가 되곤 했다. 농촌이 아닌 도시에 살고, 농업이 아닌 2차·3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이 원칙을 살리는 데에 힘을 보탰다. 공업화에 진입한 지 한참 지난 1987년에 제121조 제1항이 등장할 수 있었던 데는 비농민들의 지지도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이 이 원칙을 지지해온 것은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토지공개념과 이 원칙이 이념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주택임대차나 건물임대차와 관련된 경제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전반적인 토지정의 혹은 부동산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 원칙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관념이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70년대 한국은 강남 개발로 상징되는 부동산 투기 붐에 시달렸다. 이때 투기를 근절하기 위한 대응 논리로 활발히 논의된 것이 토지공개념이다. 당시 한국인들은 토지공개념의 당위성을 경자유전 원칙 같은 데서 찾아냈다.
그런 분위기를 반영하는 신문 기사 중 하나가 1978년 3월 17일자 <매일경제> '부상하는 토지공개념 (2): 토지제도의 변천'이다. 이 기사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당시의 후진국과 패전국을 주로 하는 각국이 농지관계의 입법에서부터 토지제도의 변화에 비상한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며 독일·인도·일본·타이완의 농지개혁 혹은 토지개혁 사례를 소개한 뒤 경자유전 원칙을 토지공개념과 연결시켰다.
기사는 "우리나라는 농지개혁으로 농지 소유 상한선이 3정보로 제한되어 있고 유휴 농지의 대리 경작권이 법제화됨으로써 경자유전 원칙에 따른 공개념이 오래 전에 도입되었다"라고 말한다. 토지공개념을 뒷받침할 이념적 자산이 예전에 이미 형성돼 있으며 그 자산이 바로 경자유전 원칙이라고 이해하는 관념을 이 기사에서 읽을 수 있다.
또 부동산 투기 문제를 다룬 1984년 7월 10일자 <경향신문> '투기의 핵 막을 대책 어디까지'는 "토지정책의 기본 정신은 토지를 점차 공개념화하고 토지개발 방식을 공영으로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며 "토지정책이 토지공개념과 공영개발 방식으로 이행되기 위해서는 토지소유 상한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라고 한 뒤 이렇게 말한다.
"현재 농지의 경우 경자유전의 원칙에 의해 최고 3ha로 소유 면적을 제한하고 있듯이, 주거지·상업지·공업지역들에도 이러한 상한제를 실시, 과다한 토지소유를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사들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한국인들이 공업화 단계에 들어선 이후에도 경자유전 원칙을 고수해온 것은 이 원칙에 담긴 경제정의 이념이 부동산 투기를 막고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사회적 공감대가 있기 때문에 이미 식물인간 상태가 된 이 원칙이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윤희숙 의원은 우스꽝스러운 이번 일이 민주당 정권의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가 곤경에 처한 근본 이유는 그의 가족이 경자유전 원칙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볼 만한 사정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경자'를 지켜 토지정의, 부동산 정의를 지키려는 우리 사회의 염원이 '희숙'을 곤란케 한 배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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