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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워싱턴 울린 승려들 '침묵의 순례'

박철 시민기자

pakchol@empas.com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예수살기 대표.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전 상임의장. 탈핵부산시민연대 전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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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일 간 텍사스~워싱턴 3700 킬로미터 걸어

증오 · 혐오 난무하는 분열된 미국에 평화 메시지

진보 · 보수 떠나 주민들 환영… 합장하고 꽃 선물

평화의 걷기는 권력의 언어에 대한 비폭력적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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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26일, 텍사스주 포트워스의 맑은 가을 하늘 아래에서 몇몇 불교 승려들이 조용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목적지는 미국의 정치적 심장부인 워싱턴 D.C였다. 자동차도, 비행기도 아닌 오직 두 발로 108일 동안 약 3700킬로미터를 걷는 여정. 이름하여 ‘평화를 위한 순례(Walk for Peace)’. 처음 출발할 때만 해도 그것은 소수 수행자들의 결연한 수행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 순례는 한 종교의 수행을 넘어, 미국 사회 전체를 울리는 상징적 사건으로 확장되었다.

3700킬로미터는 결코 가벼운 거리가 아니다. 사막과 평야, 도시와 농촌, 고속도로 곁의 먼지 날리는 길과 이름 없는 시골길을 지나야 했다. 때로는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고, 때로는 갑작스러운 비와 추위가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그러나 순례단은 속도를 재촉하지도,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구호를 외치기보다 침묵을 택했고, 주장보다 걸음을 앞세웠다. 그 침묵의 행렬이 오히려 더 큰 울림을 만들어냈다.

이들이 거쳐 간 도시마다 예상치 못한 장면이 펼쳐졌다.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와 꽃을 건넸고, 아이들은 손을 흔들었다. 어떤 이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어떤 이는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종교가 달라도, 정치적 성향이 달라도, 걷는 이들의 고요한 결의 앞에서 사람들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평화라는 단어가 뉴스의 수사나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땀과 물집과 침묵으로 구현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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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보수 성향이 강한 ‘바이블 벨트’ 지역에서의 반응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종교적, 문화적 차이가 뚜렷한 공간에서 불교 승려들의 순례가 환영받을 것이라고 쉽게 예상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수천 명이 길가에 모여 이들을 맞이했고, 일부는 침묵 속에 행렬 뒤를 따르며 동행했다. 이는 특정 종교에 대한 호감의 표현이라기보다 분열과 갈등에 지친 미국 사회가 ‘평화’라는 단어에 얼마나 목말라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108일이라는 시간 또한 상징적이다. 불교에서 108은 번뇌의 수를 의미한다. 인간을 괴롭히는 수많은 집착과 분노, 탐욕을 상징하는 숫자다. 순례단은 매일의 걸음을 통해 그 번뇌를 하나씩 내려놓겠다는 의지를 몸으로 드러냈다. 그들의 발걸음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내면의 수행이자 사회적 메시지였다. 갈라진 공동체, 증오와 혐오가 난무하는 공적 공간 속에서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도 말할 수 있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워싱턴에 도착한 날, 그들의 모습은 처음 출발할 때와 사뭇 달랐다. 얼굴은 햇볕에 그을렸고, 발은 상처로 가득했지만 눈빛은 더욱 맑아 보였다. 순례의 끝은 곧 새로운 시작이었다. 정치적 중심지에 도달한 그들의 침묵은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던졌다. 과연 평화는 선언으로 오는가, 아니면 이렇게 한 걸음씩 내디딜 때 비로소 가까워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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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회가 이 순례에 열광한 이유는 어쩌면 단순하다. 거대한 담론과 날 선 논쟁에 지친 사람들이, 말보다 삶으로 보여주는 태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평화를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평화를 위해 3700킬로미터를 걷는 이는 드물다. 그 드묾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평화를 위한 순례’는 하나의 이벤트로 끝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발자국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길 위에서 사람들은 잠시 속도를 늦추었고, 서로를 향한 적의를 내려놓았다. 어쩌면 평화는 거창한 합의나 대단한 결단이 아니라, 그렇게 누군가가 먼저 걷기 시작할 때 비로소 현실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눈 덮인 워싱턴을 울린 침묵의 행진은 단순한 종교적 이벤트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장면이었고, 동시에 하나의 질문이었다. 눈 위를 맨발로 걸어가던 승려들의 발걸음은 느렸지만 단호했다. 입을 닫은 채 합장하고 걸었던 그들의 침묵은 오히려 어떤 연설보다도 또렷했다. 그날의 행진은 오늘의 미국 정치, 더 나아가 세계 질서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묻는 도덕적 경고였다.

워싱턴 D.C.는 폭설 직후의 차가운 정적에 잠겨 있었다. 영하의 기온, 얼어붙은 도로, 흰 눈 위에 선명히 남는 발자국. 그 위를 맨발로 걷는다는 것은 수행의 차원을 넘어 상징적 행위였다. 불교 전통에서 맨발은 겸손과 비움, 그리고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서원을 뜻한다. 그들은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가하고 있는 상처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걸었다. “몇 초면 누군가를 상처 입힐 수 있다. 대신 그 몇 초를 평화의 시작으로 쓰라.” 이 문장은 그날 행진의 핵심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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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진은 국회의사당 인근에서 시작해 링컨기념관 방향으로 이어졌다. 동선 자체가 하나의 선언이었다. 내전의 분열을 넘어 연방을 지켜냈던 링컨, 그리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선언을 다시 역사 위에 세운 장소. 그 앞에서 울린 침묵은, 오늘날 미국 사회가 겪고 있는 극단적 분열과 맞닿아 있었다. 참가자들은 “증오를 멈추라”, “자비는 힘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속해 있다”는 작은 팻말을 들고 있었지만, 구호는 외치지 않았다. 확성기도 없었다. 침묵이 곧 메시지였다.

이 장면이 특별히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는, 도널드 트럼프라는 이름이 다시 미국 정치의 중심에 서 있는 시점과 겹치기 때문이다. 한쪽에는 절제와 성찰의 발걸음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힘을 과시하며 세계의 규범을 흔드는 정치가 있다. 대비는 선명하다. 평화의 걷기는 특정 후보를 겨냥한 선거운동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 행진이 던진 질문은 분명히 오늘의 권력을 향해 있었다. 우리는 어떤 리더십을 원하는가. 힘으로 군림하는 정치인가, 아니면 규범을 존중하는 정치인가.

트럼프식 정치는 스스로를 “강한 리더십”이라 부른다. 거래를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고, 동맹을 압박의 수단으로 활용하며, 국제 규범을 재협상의 대상으로 돌리는 접근은 단기적으로는 결단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 강함이 무엇을 남겼는지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동맹은 신뢰의 공동체가 아니라 협상 테이블의 카드로 취급되었고, 국제기구와 다자협약은 불신과 탈퇴의 위협 속에 놓였다. 기후협약, 무역 질서, 인권 담론, 동맹 외교 — 수십 년간 축적해온 합의의 구조는 “미국 우선”이라는 구호 아래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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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질서는 완전하지 않다. 불평등과 위선, 이중 기준이 존재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는 최소한의 예측 가능성과 규범 위에서 유지되어 왔다. 약속은 지켜질 것이라는 믿음, 협정은 존중될 것이라는 신뢰가 있었다. 트럼프식 일방주의는 바로 그 토대를 잠식한다. 힘이 곧 정의라는 메시지가 반복될 때, 국제사회는 규범이 아니라 공포와 계산으로 움직이게 된다. 강대국은 더 강하게, 약소국은 더 위축되며, 다자주의의 공간은 축소된다.

문제는 외교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국내 정치에서도 갈등은 조정되기보다 증폭되었다. 상대를 협상 파트너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는 언어, 언론과 사법부 같은 제도적 견제 장치를 불신의 대상으로 몰아붙이는 태도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다. 민주주의는 승자의 독주가 아니라 패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체제다. 다수의 선택이 존중되되, 소수의 권리가 보호되는 구조다. 그러나 힘의 정치에서는 다수의 환호가 곧 정당성의 전부가 된다. 그 순간, 규범과 제도는 걸림돌로 취급된다.

그의 정치적 언어는 두려움을 동원해 지지를 결집시키는 방식에 의존해왔다. 이민자를 위협으로, 비판자를 배신자로, 타국을 착취자로 규정하는 단순화된 서사는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두려움은 쉽게 분노로 전환되고, 분노는 합리적 토론을 마비시킨다. 그 결과는 사회적 피로와 불신의 누적이다. 공동체는 하나로 묶이기보다 서로 다른 진영으로 고착된다. 민주주의의 심장은 타협과 숙의에 있는데, 그 공간이 점점 좁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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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평화의 걷기는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말의 속도에 맞서 걷기의 속도를 택하는 것. 빠른 분노 대신 느린 성찰을 선택하는 것. 지도자의 몇 초짜리 발언이 시장을 흔들고, 외교적 긴장을 고조시키며,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시대에, 침묵으로 걷는 행위는 상징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권력의 언어에 대한 비폭력적 응답이다.

세계는 미국을 단순한 한 국가로 보지 않는다. 미국 대통령의 말과 행동은 국제적 신호가 된다. 만약 미국이 다자주의를 경시하고 동맹을 압박의 수단으로만 다룬다면, 다른 강대국들은 그 틈을 활용한다. 규범이 약해진 공간에서는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 냉혹한 세력 균형의 시대가 다시 도래할 위험이 있다. 트럼프식 접근은 단기적 협상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도덕적 권위를 약화시킨다. 권위는 군사력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신뢰와 일관성, 약속을 지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링컨기념관 앞에서 되새겨진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문장은, 그래서 더욱 무겁다. 평등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다. 인권은 협상의 카드가 아니다. 국제 규범 역시 일시적 편의에 따라 버릴 수 있는 소모품이 아니다. 미국이 스스로 세워온 질서를 스스로 허무는 순간, 그 불안정은 결국 미국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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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은 필요하다. 국가는 안보를 지켜야 하고, 자국의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힘이 절제되지 않을 때 그것은 보호가 아니라 지배가 된다. 동맹을 설득하기보다 압박하고, 국제 규범을 개선하기보다 탈퇴로 위협하며, 내부의 비판을 포용하기보다 배척하는 태도는 지도자의 강함처럼 보일지 모르나, 실은 불안을 드러낸다. 진정한 강함은 규범을 지키는 데서 나온다. 법과 제도를 넘어서는 충동을 억제하는 데서 나온다.

평화의 걷기는 미국 곳곳에서 이어져온 비폭력 시민행동의 흐름과도 연결된다. 교회와 사찰, 시나고그와 모스크, 시민단체와 지역 공동체들이 이민자 보호, 총기 희생자 추모, 기후 정의 요구 등 다양한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왔다. 이번 행진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종교가 권력을 쟁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잊기 쉬운 윤리적 기준을 상기시키려는 움직임이다.

눈 위에 남은 맨발의 자국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 장면이 던진 질문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힘을 선택할 것인가. 두려움과 분열을 동원하는 힘인가, 아니면 자비와 절제를 바탕으로 한 힘인가. 민주주의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더 큰 목소리보다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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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필요한 것은 또 다른 구호가 아니다. 규범을 복원하고 신뢰를 회복하려는 의지다. 트럼프 개인을 넘어, 힘으로 군림하는 정치 전반에 대한 성찰이 요구된다. 미국이 다시 세계의 리더십을 말하고자 한다면, 먼저 세계가 신뢰할 수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눈 덮인 워싱턴을 걸었던 승려들의 침묵은 바로 그 점을 일깨운다. 몇 초의 말이 아니라, 오래 남는 태도가 역사를 만든다.

눈 위의 발자국은 사라지지만, 역사의 기록은 남는다. 세계의 규범을 존중한 지도자로 기억될 것인가, 아니면 힘으로 질서를 흔든 인물로 기록될 것인가. 선택의 무게는 권력을 쥔 이들에게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을 지켜보는 시민들의 발걸음 또한, 여전히 눈 위를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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