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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 칼럼] ‘민심’과 ‘명심’

전우용 역사학자

histopia@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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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자가 민심 따라야 하는 것이 민주공화정

세상은 지금 근왕주의·귀족주의 부활하는 듯

미국은 트럼프에 신음, 한국은 윤석열 내쫓아

그럼에도 ‘명심팔이’ 너무 심한 지방선거 국면

민주공화국 공직자라면 간신 습성부터 버려야

'진해군항제' 개막일인 27일 오후 경남 창원시 진해구 여좌천 일대에서 경남도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와 학생들이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를 독려하고 있다. 2026.3.27. 연합뉴스

현재의 서울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주차 헌병대 사령부가 있었다. 사령부에서는 매일 정오에 공포탄 대포를 쏘아 시각을 알렸는데, 이를 ‘오포(午砲)’라 했다. 남산 기슭 일본인 집거지의 시계포 주인들은 오포 소리에 맞춰 시계 바늘 위치를 조정했다. 사람들은 일본 헌병대가 어떻게 정확한 시각을 아는지에 궁금증을 품었다. 가장 널리 퍼진 이야기는 ‘헌병들이 망원경으로 일본인 시계포의 시계를 보고 오포를 쏜다’는 것이었다. 사실은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가 전신선을 이용해 매 시각 전 세계로 발신하는 ‘시보(時報)’에 따른 것이었지만, 대다수 ‘조선인’은 일제 식민통치의 본질에 대한 생각을 이 이야기에 담았다. 조선총독부를 ‘절대 지지’하는 조선 거주 일본인들과 그들의 ‘여론’에만 신경을 쓰는 총독부 권력의 결탁구조가, 조선인들이 생각한 식민통치의 본질이었다. 실제로 총독 정치의 혜택은 주로 조선 거주 일본인들에게 돌아갔다.

‘지당하시옵니다’ 아첨 속에 묻혀지는 민심=천심

왕은 하늘의 명을 받아 세상을 다스리며, 사대부는 하늘의 뜻을 살펴 왕을 보필한다는 것이 전근대 한자문화권의 보편적인 정치관이었다. 하늘은 자기 뜻을 백성의 마음=민심(民心)으로 드러내니, 여기에서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래서 왕이 민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려고 할 때 목숨 걸고 간(諫)하는 신하를 ‘충신(忠臣)’, 민심따위는 아랑곳 없이 왕의 비위만 맞추려 드는 신하를 ‘간신(奸臣)’이라고 했다. 왕조시대 우리나라에서도 “아니되옵니다”나 “통촉하시옵소서”는 충신이 자주 쓰는 말이었고, “지당하시옵니다”나 “영명하시옵니다”는 간신이 늘 입에 담는 말이었다.

민주공화정은 ‘민심’을 ‘천심이 표현되는 것’에서 ‘천심 그 자체’로 전변시켰다. 국민들로부터 통치권을 위임받은 자도 ‘민심을 살피는 자’에서 ‘민심에 따르는 자’로 바뀌었다. 그러나 최근 세계 곳곳에서 민주와 공화의 이념이 퇴조하고 근왕주의와 귀족주의가 부활하는 양상이 뚜렷해졌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뒤, 오랜 세월 민주주의의 ‘원조(元祖)’이자 모범 구실을 해온 미국의 도덕적, 규범적 권위가 급속히 무너져내리고 있다. 트럼프는 ‘이민자의 나라’ 미국을 분열시켰고, 약탈적인 관세정책으로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악화시켰으며 급기야 이란을 상대로 명분없는 전쟁까지 일으켰다. 최근에는 트럼프 일가 또는 측근들이 전쟁을 이용해 막대한 이익을 얻은 정황도 드러났다.

‘트럼프 왕’ ‘윤석열 왕’에게 절대 충성하는 현대판 간신들

그런데도 미국 정부 관리들은 트럼프를 ‘신격화’하기에 급급하다. 그들은 거의 매일 말을 바꾸는 트럼프를 두둔하기 위해 스스로 바보가 되는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 재무부는 100달러짜리 지폐에 트럼프의 서명을 넣겠다고까지 한다. 미국 행정부 관리들은 ‘트럼프의 마음만 얻으면 된다’는 확신으로 똘똘 뭉친 듯하다. 미국의 민심이 트럼프에게 등을 돌리는 현상이 뚜렷해졌고 관리 몇 명도 트럼프의 ‘망녕된 행동’을 비판하며 자진사퇴했지만, 그럴 수록 미국 행정부 내에서 트럼프에게만 ‘절대 충성’하는 현대판 간신들의 구성비는 높아졌다. 전쟁이 끝나면 호르무즈 해협의 이름을 트럼프 해협으로 바꾸겠다는 트럼프의 망언을 뒷받침한 것은, 그에게 ‘절대 충성’하는 간신들이었다. 유사 이래 폭군과 혼군, 암군의 짝은 언제나 간신이었다. 미국에서 반(反) 트럼프 시위의 구호를 ‘No Kings'로 압축시킨 건, 역설적으로 트럼프와 그의 행정부다.

우리나라에서도 윤석열 정권 때 통일부 장관 김영호는 “대한민국 국민 5천만 명이 모두 주권자로서 권력을 직접 행사한다면 무정부 상태로 갈 수밖에 없다”며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하는 것은 전형적인 전체주의적 사고”라고 주장했다. 국민이 일단 대통령을 선출한 이상, 대통령은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논리로서 “군주는 오직 신에게만 책임지며, 국민은 왕이 어떤 짓을 해도 비판할 수 없다”던 17세기 ‘왕권신수설’의 완벽한 재현이었다. 12.3 내란 당시 윤석열 정부 국무위원 절대 다수가 헌법 유린과 민간인 학살 기획에까지 동조했던 건 이런 왕조시대 ‘간신의 덕목’을 공유했기 때문이고, 내란이 실패로 끝난 지금까지 한국의 극우세력이 ‘윤 어게인’을 부르짖는 것도 대통령을 헌법 위에 놓는 왕조시대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현상이 미국과 한국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왕조의 망령’을 부활시키는 것은 전 세계 극우세력 공통의 욕망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미국에서 ‘왕’이 새로 출현한 이 때, 한국인들은 ‘왕’을 끌어내렸다는 점이다.

‘명심’ 매달리는 정치인들, 왕조시대 간신과 무엇이 다른가

그런데 상대적으로 민주와 공화의 원칙을 중시하는 민주당 정치인과 그 지지자들 중에도 ‘왕조의 망령’을 떨쳐버리지 못한 사람이 적지 않은 듯하다. 지방선거가 다가오니 후보자들의 홍보 메시지가 매일 서너 건씩 휴대전화기로 들어온다. 얼핏 보면 이재명 대통령이 전국 모든 곳에 출마했나 착각할 정도로 모든 후보자가 ‘명심’을 앞세운다. 그들은 저마다 이재명 대통령의 마음을 제일 잘 아는 사람, 이재명 대통령이 가장 믿는 사람, 이재명 대통령과 가장 잘 어울릴 사람이라고 자기를 소개한다. 돌이켜 보면 지난 번 당정청이 ‘검찰개혁법’을 확정하는 과정에서도 이런 담론이 지배적이었다. 많은 정치인과 인플루언서가 검찰개혁에 대한 ‘국민의 뜻’이 어떤지를 살피기보다는 ‘대통령의 뜻이 정해졌으니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했다. 심지어 자기가 대통령의 뜻을 가장 잘 아니, 대통령의 뜻에 반발하는 자들은 다 ‘반명’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임금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역적 짓”이라던 옛날의 간신들과 무엇이 다른가?

전우용 역사학자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율이 워낙 높으니 정치인들이 그의 옆에 서려는 욕망을 품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대통령 스스로 여러 차례 공언했듯이, ‘정치는 정치인이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국민이 하는 것’이며, ‘정치인은 국민의 도구일 뿐’이다. 게다가 대통령은 바쁜 와중에도 국민들과 SNS로 직접 소통하며 그 뜻을 따르려 애쓰고 있다. 민주공화국의 공직자라면 왕조시대 간신의 습성부터 버려야 한다. 자기가 ‘명심’에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지 자랑할 게 아니라, ‘민심’을 얼마나 잘 파악하고 전달할 수 있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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