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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혁명가의 여정

어느 혁명가의 여정<하>
 
무자비한 권력자가 아닌 인간을 위해 진정으로 고민했던 인간
 
김종익 | 2013-08-10 07:52:1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인쇄하기메일보내기
 
 


 

 

차베스를 ‘정치 군인’ 정도로 인식하는 한국 사회에 조금이나마 차베스를 이해하는, 그래서 인간 해방을 위해 자신을 헌신했던 한 혁명가의 삶을 이해했으면 합니다. 무자비한 권력자가 아닌 인간을 위해 진정으로 고민했던 인간, 그 모습이 미래의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필자 주

 

 

 

정치에 무관심했던 학생 시절

1966년, 국립 고등학교에 입학을 허가받은 젊은 우고는 고향인 사바네타를 떠나 바리나스주州의 주도州都 바리나스로 이주한다. 당시는 베트남 전쟁이 신문의 첫 면을 장식하고 있었고, 체 게바라가 머지않아 볼리비아에서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던 시대였다.

베네수엘라에서는 1958년에 민주제가 회복되었지만 게릴라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수많은 젊은이가 무장 투쟁에 참가했다. 그런데 젊은 차베스는 당시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지치지 않고 정열을 기우렸던 세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공부, 야구, 여자이다.

국립 고등학교에서는 차베스는 특히 물리, 수학, 화학 등 이과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리고 있었으며, 자신보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에게 자발적으로 보충 수업을 하고 있었다. 다양한 정치단체가 우고를 가입시키려고 심하게 경쟁하였고, 형인 아단은 극좌단체의 활동가가 되었지만, 우고는 야구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왼손 투수로 가공할 기량을 가지고 있었다. 지역 신문은 우고의 스포츠 재능을 상찬하는 것과 함께 개인적으로 독특한 분위기를 발산하는 점도 보도했다. 그는 이 국립 고등학교 시절에 개성을 확립했다. 스스로에게 자신을 가졌고, 웅변이며, 유머에 재능이 있어, 어떤 장소에서든 긴장을 하지 않았던 그는 <타고난 리더>라고 불릴 만한 학생이 되었다. 성적도 반에서 1등이며, 스포츠도 잘하는 두드러진 학생이었다.

우고는 프로 야구 선수가 되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카로레아(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하자, 군사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입학시험을 치르게 된다. 1971년에 시험에 합격하여 수도인 카라카스로 가게 되었다. 멀리 떨어진 지방의 주에서 온 촌놈인 그의 눈으로 보면, 카라카스는 미래 도시 같아서 현기증이 나는 도시였다.

군사 아카데미에서의 정치 세례

군사적인 사례는 바로 우고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야구는 잊고 군사에 관한 공부에 열중했다. 당시는 마침 군사에 관한 공부 시스템이 변경되었던 시기였다. 군사 아카데미로의 진학 허가 대상이 고등학교 졸업에서 대학 졸업으로 바뀌고, 교수진도 일신되었다. 당국은 부대를 지휘하는 데는 어울리지 않고 “성적이 뛰어나지 않다”고 판단된 장교, 또는 “보다 진보적”이라고 판단된 장교를 교원으로 선발하여 미래의 장교를 양성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1958년, 독재자 마르크스 페레스 히메네스가 타도된 이후, 주요한 정당인 민주행동당(AD)과 기독교사회당(COPEI)은 「푼토피호 협약베네수엘라 북서부 팔콘 주 북부에 있는 도시.」이라는 합의를 기초로 제휴를 도모하여, 교대로 권력을 공유했다. 부패는 나라를 괴사시키고 있었다. 1962년에는 푸에르토 카바죠와 칼파노에서 극좌조직과 제휴한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다른 군인들은 산악 지대에서 다양한 게릴라 활동에 참가했다. 억압은 무시무시했다. 즉결 처형, 고문, 그리고 <실종>. 미국의 이익을 대표하는 자들의 존재는 단순히 석유 채굴 현장만이 아닌 군참모본부 안에도 우굴 거렸다. CIA는 많은 첩보 요원을 파견하여 반란자의 추적을 도왔다.

차베스는 군사 아카데미에서 받은 이론적 수업을 문자 그대로 무조건 받아들였다. 교수 가운데 한 사람인 에세키에르 사모라 연구의 전문가였던 페레스 알카이스 장군은 차베스에게 「볼리바르주의란 우엇인가」를 가르쳤다. 차베스는 볼리바르의 저작 전체를 읽고 암송했다. 그것에 의해 지도상의 각 전쟁터에서 볼리바르가 채용했던 전략의 상세한 내용을 재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볼리바르 百科全書的 교사였던 시몬 로드리게스도 모두 읽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바의 <세 개의 근원>, 즉 로드리게스, 볼리바르, 사모라의 테제를 곧이어 발전시키게 된다.

이 세 명의 베네수엘라 사람이 저자인 정치적 교과서 속에서 차베스는 독립과 주권이라는 테제를 끌어냈다. 바로 사회 정의에 관한 테제, 포섭에 관한 테제, 평등의 테제,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통합에 관한 테제이다. 이것들은 나중에 차베스의 정치적 ․ 사회적 프로젝트의 주요한 지주가 된다.

차베스는 두뇌가 뛰어나고, 특히 이과계에 강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발군의 기억력으로 입학 후 바로 최우수 학생의 한 사람으로 사관후보생의 리더가 되었다. 마르크스, 레닌, 안토니오 그람시, 프란츠 파농, 체 게바라 등을 몰래 읽고 있었다.

<민 - 군 연합>에 의한 공화제의 재건으로

군사 아카데미의 외부 세계에서 차베스는 다종다양한 극좌 정치 서클을 빈번하게 오가며, 베네수엘라 공산당(PCV), 카우사R, 혁명좌익운동(MIR), 사회주의운동당(MAS) 등 정당의 리더들과 은밀하게 만나고 있었다. 거기에서도 또 각 정당은 차베스를 자신들의 정당에 입당하라고 유혹했다. 군부를 꾀어낸다고 하는 침투 공작은 베네수엘라 좌익이 가진 전통적인 야심이다.

베네수엘라 군에 의한 반란에 관하여 공부를 마친 후, 차베스는 언제나 변함없는 빈곤을 근절하기 위해 권력을 탈취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우익 군사 독재라는 <고릴라주의>로의 일탈을 피하는 유일한 수단은 군과 좌익 정당과 동맹을 형성하는 것이라는 점도 확신했다. 이 사고 방식이 바로 차베스의 행동을 함께 한 이념이 되었다. 바로 <민 - 군 연합>이다.

차베스는 라틴아메리카의 좌익 혁명적 군사 정권의 경험에 경도되었다. 특히 과테말라의 하코보 알벤스, 볼리비아의 후안 호세 토레스, 파나마의 오마르 토리호스, 페루의 후안 베라스코(알바라이드)와 같은 사람들의 경험을 배웠다.

예를 들면 1974년 연수 여행으로 페루의 수도 리마를 방문했을 때, 알바라이드와 면회하고, 아주 깊은 인상을 간직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5후인 1999년, 차베스는 권력을 탈취하여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 헌법」을 편찬하게 되었을 때, 알바라이드의 「푸른색의 작은 책자」와 동일한 형식으로 하도록 지시했다.

정치 문화를 배워서 익힐 수 없는 군사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서 4년 후인 1975년 21세 때 차베스는 아카데미를 졸업한다. 그는 머릿속에 단 한 가지 아이디어만을 가지고 졸업했다. 바로 부패한 체제를 타도하여 공화제를 재건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25년을 기다려야만 했다. 달리 말하면, 군대 내부에서 조용한 음모를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 번의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1989년에 일어났던 신자유주의의 쇼크 치료법에 반대하는 대규모 민중 반란(카라카소), 1994년 군대에 의한 반란의 실패, 2년간의 옥중 생활, 1994년에 피델 카스트로와의 만남.

1994년 이후, 선거에 의한 차베스의 승리는 확실한 것이 되었고, 1998년에 그는 대통령에 입후보했다. 차베스는 빅토르 위고를 인용하여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사고란 「때가 왔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Ignacio Ramonet
1943. 5월생. 스페인 가리시아 주 레돈티라 출신. 프랑스 저널리스트로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전 편집 총책임자. 시민단체 「ATTAC Association for the Taxation of Financial Transaction for the Aid of Citizens. 토빈세 실현을 목표로 하는 사회운동단체」 창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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