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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과 함께 떠난 청전 스님의 우여곡절 라닥 의료봉사길

신부님과 함께 떠난 청전 스님의 우여곡절 라닥 의료봉사길

 
청전 스님 2013. 08. 09
조회수 29추천수 0
 

 

 

<신부님과 동행한 라닥 의료 봉사의 길 ①>

 

필자에게 여름이 오면 연례적인 길을 해마다 꼭 걷는 곳이 있다. 히말라야 오지 중의 오지인 인도 북부 라닥 지방에 들어가는 일이다. 문명의 혜택이 없는 곰빠(절)와 계곡 마을을 위한 의료 봉사의 길이다. 단순한 진료가 아닌 별의 별 약품부터 돋보기안경, 보청기, 학용품이나 옷가지까지 문명의 이기물인 생필품을 나른다. 이 세세한 물품은 근 일 년 동안 준비하는 소중한 것들이기도 하다. 아는 지인으로부터나 멀고먼 유럽이나 미국 등지에서도 많은 약품을 공수 받는다. 안면이 전혀 없는 이들에게서도 연락이 되어 갖가지를 받는다.

 

라닥 지방은 고지대라서 여름 입구에서야 긴긴 겨울 속에서 잠이 깬 높은 고개가 하나씩 하나씩 열린다.

함께 길을 갈 대원은 이미 한해 전에 이미 결정이 난다. 올 해는 세분이 지원하여 각자 개인적으로 출발 며칠 전에 들어왔다. 한국에서 교수 한명과 재가 불자 한명, 그리고 멀리 빠리에서 유학중인 한 스님이다. 항상 인원 제한을 하는데 인도산 찌프차에 정원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그 많은 짐 때문이다. 며칠간 심사숙고 끝에 지역별로 나눈 짐이 대형 큰 가방으로 일곱 개나 된다. 거기에 최소한의 개인 짐이며 약간의 취사도구와 먹 꺼리가 딸린다. 탑승 인원은 운전수 포함 다섯이니 늘 비좁기만 하다.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한 달이 넘는 험한 고난도 봉사 활동기간이라서 집 떠난 뒤 마음가짐도 예사로운 게 아니다. 그런데 출발 전전날 이른 아침에 뜬금없는 전화벨 소리다. 뜻밖의 방문객으로 지금 막 델리에서 밤 버스로 올라와 다람쌀라에 도착 했단다. 좀 어설프고 꾀죄죄하게 도착한 두 분은 카톨릭 수사 신부님이다. 지금 네팔에서 에베레스트며 마나슬루까지 트레킹 마치고 올라오신다는 두 신부님, 안식년을 맞아 이리 오게 되었단다. 좀 나이 들어 보이는 신부님은 첫 말씀이 이색적이다. “저는 밥돌이 신부여요.”라는 말씀, 알고 보니 프란치스꼬 수도회에서 매일 노숙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일을 하신단다. 일이 바빠 30년 만에 첨 얻은 안식년이란다. 사실 다른 한 신부님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신부님으로 얼마 전 휴심정란에 글을 쓰게 된 장본인으로써 바로 이 신부님께 양고기 조리법을 전수한 신부님이기도 하다. 두 분 다 수도원장을 엮임 한 것으로 안다.

 

 

<<라닥의 첫번째 관문 조지라 패쓰(Zoji La Pass):3650m>> --- 이 고개 넘다가 흔히 조질수가 있음돠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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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못된 습관 중 하나가 함께 할 사람 만나면 으레 따짐성 질문하나가 바로 병역 사항이다. 이유는 이것을 빌미로 기선제압을 위한 질문인 것이다. 만일 방위나 병역면제 또는 장교 전역이라면 끝까지 그걸 꼬투리로 말끝마다에 되받아 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의료봉사 길에서도 교수님과 스님은 장교 전역자이니 필자가 정한 함정에 늘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함께 들어오신 노신부님을 첨 뵙기도 하지만 한 달이 넘는 험한 노정에서 안내 및 총괄 책임자인 필자로서 여러 가지로 신경 쓰일 일도 많아 예전처럼 신부님은 군에 다녀오셨는지를 물었다. 근 칠십 줄 연배에 당연히 군에는 안 갔을 거라는 짐작에서다. 그런데 뜻밖의 말씀이란 게 강원도 최전방 보병 7사단 3연대에서 3년 동안 기관총 사수로 근무했다니!!! 아니 그러면 내 직속 최 고참병이 아닌가. 필자도 7사단에서 3년간 막말로 뺑이치다가 전역했기 때문이다. 바로 입에서 나온 말이라니, “충성! 썬배님! 이번 길에 최선을 다해 정성껏 모시지라, 지도 같은 사단이었걸랑요.” 속으로는 “아이고 인제 나 죽었네.”를 뇌이며.............

 

 

<<고개를 넘자마자 만난 양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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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닥 의료봉사 길의 장도에 함께 하기로 결정을 했다. 문제는 그 좁은 찌프차에 이 많은 인원이며 짐을 어찌 탑재할 것인가이다. 짐칸을 따로 긴급으로 방법을 만들어야했으니, 바로 인도식인 차량 위에 철제 구조물을 만들기로 했다. 이 차에 첨 붙여보는 구조물이다. 그래도 인원과 짐이 많아 우선 두 신부님이 사흘거리인 카길(Kagil)까지는 먼저 가서 기다리는 각개 약진을 하기로 했다. 그 지점에서는 라닥 수도인 레(Leh)와 쟌스카(Zanskar)로 길이 나뉜다. 약 보따리 네 개는 따로 빼내어 아는 가게에 맡겨두고, 그 빈 자리에 두 신부님이 탑승할 비좁은 자리가 생기는 것이다. 쟌스카 일마치고 되돌아오는 길에 그 짐을 다시 실으면 되는 것이다. 카길 중심 마당에 자리한 제법 큰 호텔을 접선장소로, 어느 날과 시간까지도 정확히 오후 몇 시로 정해뒀고, 두 신부님은 오자마자 다시 길을 떠나도록 했다. 무슨 전시 작전이라도 된 듯 그런 기분으로 헤어졌다. 그리고는 만에 하나 인도 땅에서 변수가 생겨 일이 그르칠 수도 있음을 가만하여 사건이 발생하면 전화하도록 했다.

 

아니나 다를까 떠난 다음날 새벽에 걸려오는 전화라니, 잠무(Jammu)발 스리나가르(Srinagar)행 밤 버스가 가다가 되돌아왔다며 어찌 할 건가를 묻는데 출발부터 한심하다. 저녁 내내 뜬 눈으로 버스 안에 갇혀있었다니. 우기 철답게 길에 큰 산사태가 나서 모든 운행 차량이 원위치 했다는 보고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카길의 약속한 장소에서 날짜와 시간에 만나야 됨을 명령하다시피 했다. 이미 곳곳의 곰빠와 마을 주민들에 우리 도착 일정이며 세세한 의료 진료계획을 전달했기에 하루만 늦어도 일은 낭패를 당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서너 시간 후에 연락이 오는데 소형차로만 산사태를 통과할 길이 열렸다며 택시 한 대로 인도인과 동행하는 방법으로 다시 길을 떠난다는 전갈이다. 휴우! 우선 다행이다. 그러나 속으로는 나이가 있는 두 신부님의 철야 뜬눈의 하룻밤이 걱정이 된다. 전화를 받고서 같은 길을 달려야하는 우리 차도 긴장 속에서 일단 떠나고 봐야 했다. 그리고 문제는 서로 간에 연락이 두절되는 게 인도방식의 전화 연결 씨스템인데 그 주에서는 그곳만의 전화기 심카드를 써야 되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도 영감들이 거리에 주저앉아 담소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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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그날 그 시간 그 지점에 가야한다는 압박감이 사흘 길 내내 큰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첫 관문이라 할 조지라 패쓰(3650m)를 무사히 넘었는데 빠리의 스님은 완전 겁을 먹는다. 허긴 포장이 되어있나 길가에 난간이 있나 그저 산사태 안 만나고 넘기만 해도 감지덕지한 인도판 히말라야 천 길 낭떠러지 고갯길인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길을 수없이 넘어야함을 모르는 유럽판 선진국 길과는 너무나 차이나는 소름끼치는 길이기도 하겠지.

 

 

<<이런 멋진 계곡을 통과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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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후 카길의 시장터, 맡겨둘 짐을 안면 있는 가게에 내리면서 일행 중 한 사람을 약속한 호텔에 나가 보라하니 그 약속된 호텔에 한국인이 머물지 않았다며 그냥 돌아온다. 시간이 좀 일러서 일거라며 다시 가 보라 했다. 분명 그 시간대에 나타나실 거라 믿었는바 비록 그 예정된 호텔에 묵지 않았다 해도 근처 값이 싼 다른 게스트 하우스에 묵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예정된 호텔은 제법 큰 호텔이기에 장기간 여행자로써는 선뜩 맘이 내키지 않을 그런 비싼 호텔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조금 후에 함께 나타나는 밝은 모습의 세 사람, 예상대로 방값이 너무 비싸 다른 여관에 묵다가 시간에 맞춰 나왔다는 것이다. 상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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