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헌병감은 평안도에서 한국전쟁 직전 월남했습니다. 이후엔 육사 9기를 거쳐 갑종장교로 임관하는 특이한 이력을 지녔습니다. 특기가 헌병이었기에 자연스레 헌병 중대장과 헌병 대대장, 3군 헌병참모, 육군 헌병차감, 국방부 조사대장, 육군 헌병감 등을 지냈습니다.
과정에서 1979년 10.26이 발발하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체포 작전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50여 일 뒤 전두환 등 하나회 일당에 의해 일어난 12.12군사반란은 결국 막아내질 못했습니다.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총장의 체포 승인을 받기 위해 총리공관에 머물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체포하라고 직속 부하인 총리공관 헌병 특별경호대장 구정길 중령에게 명령하지만 헌병 경비 병력들이 하나회 병력인 대통령 경호실 병력에 의해 무장해제되며 실패합니다. 이에 김 헌병감은 휘하의 병력만을 이용해서라도 최 대통령을 구출하려 했지만 장태완, 정병주 장군처럼 부하들의 하극상으로 인해 실패하고 맙니다. 그 뒤 수도경비사령부 지휘부에서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에게 무장해제 됩니다.
김 헌병감은 국군보안사령부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비역 준장으로 자진 예편하고 군을 떠납니다. 예편 후엔 수원에서 농사를 짓다 반란군이 나라를 주무르는 것을 보고 이 모습이 보기 싫다 하여 아예 보문도라는 섬에 들어가 광어 양식업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물론 일생을 군인으로만 살아왔기에 사업은 크게 실패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1987년 6월 항쟁 등으로 전두환 정권이 무너져 내리자 그해 11월 정병주 전 특전사령관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신군부의 만행을 폭로했습니다. 그러나 정병주 장군은 이듬해인 1988년 10월 16일 밤 10시에 갑자기 행방불명됐습니다. 그리고 실종 139일 만인 1989년 3월 4일에 경기도 한 야산에서 목매달아 죽은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정 장군의 죽음은 자살로 처리됐습니다.
김진기 헌병감은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자 유화책 차원으로 진행된 여러 보직 제의를 모두 거절합니다. 문민정부 시대가 열리고 나서야 한국토지공사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1993년 예비역 장성들인 이건영, 하소곤, 정승화 등과 함께 전두환을 내란죄 등으로 고발한 겁니다. 해당 수기는 그즈음 남긴 기록입니다.
끝내 사과하지 않은 전두환과 반란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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