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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극즉반(物極必反): ‘어떤 일이든 극에 달해야 반전이 생긴다.

물극즉반(物極必反): ‘어떤 일이든 극에 달해야 반전이 생긴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박한표  | 등록:2024-02-13 08:03:22 | 최종:2024-02-13 09:03:21

설 연후로, 많은 사람들이 한가한 데, 이번 4월에 나올 총선 후보들만 분주하다. 그들만 새해 인사를 보낸다. 대부분 서민들은 걱정이 태산이다. 그러니 막연하게 ‘구세주’가 나타날 것을 기대하지 말고, 이번 총선에서 누구를 국민의 대표로 뽑을 것인가 고민을 하여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국민 대표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기석 목사의 글을 보고 정리하였다.

▪ 인문적 교양을 갖춘 사람: 복잡하고 다양한 인간의 실상을 깊이 통찰하고, 주변화된 이들의 소리를 귀담아듣고, 역사가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진 사람
▪ 우리 시대가 직면한 다양한 위기를 직시하고 그 위기를 헤쳐 나갈 실천적 지혜를 갖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
▪ 사고가 유연해야 하고, 인간 존중이 그의 심성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
▪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

그렇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것으로 자기 존립 근거를 삼으려는 사람들, 버럭버럭 피새(급하고 날카로워 화를 잘 내는 성질)를 부려 다른 이들의 입을 막아버리는 사람들은 뽑히지 않아야 한다. 정치는 어지럽고 경제는 어렵고 남북관계는 악화일로다. 기후위기는 이제 징후를 넘어 일상적 현실이 되었다.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 내어도 난마처럼 얽힌 현실의 실타래를 풀기 어렵다. 오만하고 무지하고 무정하고 남의 소리를 겸허하게 들을 생각이 없는 이들에게 우리 주권을 맡기는 것은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일과 다를 바 없다. 두려운 일이다.

지난 연말 한 인터뷰를 보고 적어 두었던 거다.  “30%의 국민 마음만 얻으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크다. 다수의 국민들은 등진 채 지지층 표심만 얻기 위해 이전투구하는 극한 대결을 이제는 멈춰야 한다”면서, 우리 정치에 “3치”가 사라졌다고 한탄했다. 지금 한국 정치는 “협치와 자치, 가치”가 사라져 가고 있다는 거다. 어서 ‘3치’를 회복해야 한다. 그건 유권자인 우리 국민들이 정신을 차려야 회복된다.

그 인터뷰는 ‘21대 국회’를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21대 국회는 ‘3치’가 고장 난 시간이었다. 대화하고 타협하는 ‘협치’, 삼권분립이 바로 서는 ‘자치’, 민생 우선의 ‘가치’. 진정한 정치가 실종된 국회로 평가받을 거라는 걱정이 크다.” 또한 “30%의 정치가 문제다. 현실에서 국민 중 40%가 투표를 안 한다 치면, 전체 국민 중 30%의 마음만 얻으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 결국 70%의 국민은 안중에 없는 ‘셈법’ 정치가 한국 정치의 슬픈 자화상”이라고 말했다. 적어도 50% 이상 국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시스템 개선은 물론 정치문화나 여야관계 개선 노력이 필요하고, 그런 역할을 할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없다.

왜 “3치”가 실종되었나?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3치’의 실종은 ‘어리숙한데, 아집만 가득한’ 굥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왜 대통령이 원내 1당 대표를 안 만나나? 백 번 양보해도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민주당은 어차피 정부를 안 도와 준다’는 게 일국의 최고 지도자가 가져야 할 생각인가? 대통령 참모들이 이를 설득해야 한다. 집권여당도 실력과 포용성을 갖고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전 정권 지우기, 야당 때려잡기에만 너무 많은 힘을 쏟았고 쏟는다. 지금 우리 사회에 수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하고, 그 해결의 기미도 보이지 않은 채 누적되어 가고 있다. 시급하다.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급하다.
▪ 기후위기
▪ 초 저출생,
▪ 심해지는 사회의 양극화,
▪ 지방소멸 문제

대전환기이다. 이젠 진보냐 보수냐를 따질 게 아니다. 그러나 <<주역>>을 읽기 시작하면서, 덜 걱정을 한다. 나는 거기서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는 말을 배웠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 극에 달해야 반전이 생긴다’는 거다. 나는 원래 ‘물극필반’이란 말을 믿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은 극에 달하면 반드시 돌아온다. 사물이나 형세는 고정 불변인 것이 아니라 흥망성쇠를 반복하게 마련이다. 진실 되게 살면,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난 세상에 정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거짓은 유통기한이 있다. 정점에 달하면 스스로 드러난다고 믿지만, 지금은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고 있다. 그래도 나는 어두움은 빛을 이기지 못하듯이, 거짓은 진실을 이기지 못한다고 믿고 기다릴 뿐이다. 아래로 떨어지는 공도 바닥까지 완전히 닿아야 다시 튀어 오를 수 있다. “민들레가 엉엉 울며 시멘트 조각을 밀어내는” 것처럼, 우리는 “솟구쳐” 올라야 한다.

솟구쳐 오르기 2 / 김승희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날게 하지 않으면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솟구쳐 오르게 하지 않으면

파란 싹이 검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나
무섭도록 붉은 황토밭 속에서 파아란 보리가
씩씩하게 솟아올라 봄바람에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나
힘없는 개구리가 바위 밑에서
자그만 폭약처럼 튀어나가는 것이나
빨간 넝쿨장미가 아파아파 가시를 딛고
불타는 듯이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나

민들레가 엉엉 울며 시멘트 조각을 밀어내는
것이나
검은 나뭇가지 어느새 봄이 와
그렁그렁 눈물 같은 녹색의 바다를 일으키는 것이나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삶은 무게에 짓뭉그러진 나비알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존재는
무서운 사과 한 알의 원죄의 감금일 뿐
죄와 벌의 화농일 뿐

오늘은  <<주역>> 독법에 중요한 개념인 ‘중(中)’과 ‘정(正)’ 이야기를 이어간다. 대성괘(大成卦)를 구성하고 있는 6효는 하괘와 상괘로 나뉜다. 하괘는 내괘(內卦)라고도 하고, 상괘는 외괘(外卦)라고도 한다. 하괘(내괘)의 정중앙은 二고, 상괘(외괘)의 정 중앙은 五다. 그래 제2효와 제5효를 ‘중(中)’이라 한다. <<주역>>에서는 가운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三과 上은 二와 五보다 높은 자리이지만, 二와 五의 ’중(中)’에 미치지 못한다.

제일 위에 있거나 제일 앞에 있는 것을 선호하는 경쟁사회의 원리와는 사뭇 다르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처럼,  우리는 중간을 무난한 자리라고 생각한다. 아마 “뒤로 돌아 갓”을 할 경우에도 별로 지장이 없다. 내내 똑 같은 자리이기 때문이다.  역사에는 뒤로 돌아가라는 구령이 떨어지는 경우도 없다. 그래서 세파를 많이 겪은 노인들은 모나지 않고 나서지 않고 그저 중간만 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중간과 가운데를 선호하는 정서는 매우 오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 신영복 교수가 중(中)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다. 중간은 그물코처럼 앞뒤로 많은 관계를 맺고 있는 자리이다. 그만큼 영향을 많이 받고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우리의 선망의 적이 되고 있는 선두(先頭)는 스타의 자리이고,  최고의 자리이다. 그 자리는 모든 영광이 머리 위에 쏟아질 것 같이 생각되지만 사실은 매우 힘든 자리이다.  경쟁으로 인한 긴장이 가장 첨예하게 걸리는 곳이 선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두가 전체 국면을 주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선두는 겨우 자기 한 몸의 간수에 여력이 있을 수 없는 고단(孤單)한 처지(處地)이다.  그와 반대로 맨 꼴찌는 마음 편한 자리인 것만은 틀림없다. 아마 가장 철학적인 자리인지도 모른다. 기를 쓰고 달려가야 할 곳이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쨌든 <<주역>>에서는 중간을 매우 좋은 자리로 규정한다. 그리고 가장 힘있는 자리로 친다. 

유가(儒家) 사상을 꿰뚫는 “중용(중용)”의 사상이 이 <<주역>>의 중 사상과 궤를 같이 한다. <<중용> 제1장을 공유한다.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이요 :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하고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요 : 성에 따름을 <도>라 하고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니라 : <도>를 닦는 것을 <교>라고 한다.
道也者(도야자)는 : <도>라고 하는 것은
不可須臾離也(불가수유이야)니 : 잠시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可離(가리)면 : 떠날 수 있으면
非道也(비도야)라 : <도>가 아닌 것이다.
是故(시고)로 : 이러하므로
君子(군자)는 : 군자는
戒愼乎其所不睹(계신호기소불도)하며 : 그가 보여지지 않는 곳을 조심하며
恐懼乎其所不聞(공구호기소불문)이니라 : 그가 들리지 않는 바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莫見乎隱(막견호은)이며 : 숨기는 곳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莫顯乎微(막현호미)니 : 미세한 것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故(고)로 : 그러므로
君子(군자)는 : 군자는
愼其獨也(신기독야)니라 : 그가 홀로 있음을 삼가는 것이다.
喜怒哀樂之未發(희노애락지미발)을 : 희로애락이 나타나지 않은 것
謂之中(위지중)이요 : 이것을 <중>이라 하고
發而皆中節(발이개중절)을 : 나타나 모두 절도에 맞은 것을
謂之和(위지화)니 : 이것을 <화>라고 한다.
中也者(중야자)는 : <중>이라는 것은
天下之大本也(천하지대본야)요 : 천하의 큰 근본이고
和也者(화야자)는 : <화>라고 하는 것은
天下之達道也(천하지달도야)니라 : 천하가 도에 달한 것이다.
致中和(치중화)면 : <중>과 <화>에 이르면
天地位焉(천지위언)하며 : 천지가 여기에 자리잡고
萬物育焉(만물육언)이니라 : 만물이 여기서 자라나는 것이다.

맨 마지막 문장 “치중화면, 천지위언하며, 만물육언이니라”가 <<주역>의 정신과 괘를 같이 하는 것이 아닐까?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감정이 일어나지 않아서 편벽되거나 치우치지 않은 마음의 상태를 중(中)이라고 하고, 감정이 일어나서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이에 중은 천하의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기본이 되고, 화는 천하의 모든 일을 처리하는 데 공통된 ‘도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에 서고 만물이 제대로 육성된다고 하였다. ‘중’과 ‘화’에 이르면, 천지가 여기에 자리잡고(位), 만물이 여기서(位) 자라나는 것이다. 내가 있는 자리(位)가 중요하다.

다음으로 <<주역>> 독법에 필요한 도구가 ‘정(正)’이다. 6효 중에 홀수는 양에 속하고, 짝수는 음에 속한다. 그래서 홀수의 자리, 즉 初, 三, 五에는 양효가 와야 하고, 짝수의 자리, 즉 二, 四, 上에는 음효가 와야 한다. 그래서 음효가 음의 자리에 양효가 양의 자리에 있는 것을 ‘정(正)’이라 한다. 혹은 ‘득정(得正)’ 또는 ‘당위(當位)’라 한다. 반대로 음에 양효가 오고, 양효에 음효가 오면, ‘부정(不正)’, 부당위(不當位) 혹은 실정(失正)이라 말한다.

고 하면서도 가운데 효가 즉 ‘중(中)’이 득위하였는가 득위하지 못하였는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따라서 음(陰) 2효와 양(陽) 5효는 ‘중(中)’이면서 득위(得位)하였기 때문에 이를 ‘중정(中正)’이라 한다. ‘중정(中正)’은 매우 높은 덕목으로 친다. 같은 ‘중정(中正)’이지만 양5효를 더욱 중요하게 본다. 음2효가 하괘를 주도(主導)하는 효임에 비하여 양5효는 괘 전체의 성격을 주도하는 효이기 때문에 그렇다.

흥미로운 것은 63번 <수화(水火) 기제(旣濟)> 괘는 전효가 ‘득정(得正)’이다. 그러나 <<주역>>의 마지막 괘인 64번 <화수(火水) 미제(未濟)> 괘는 전효가 ‘실정(失正)’이다. 63번 <수화 기제 괘>는 조하를 이루며 성공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져 있다. 이처럼 완벽한 체계를 가진 괘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여 사람들은 그 상황에 안주하기 쉽다. 그러나 세상사가 어찌 좋을 수만 있을까? 처음에는 완벽하여 좋지만 그 상태에안주하면 결국 끝에는 좋지 않게 되는 일이 수없이 많다. 그래 <<주역>>은 그 다음에 <화수 미제>괘를 기다리게 하였다. 목표를 완성한 것은 현재이니, 성공했으면 항상 조심하고, 안주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화수 미제 괘>는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을 말하며, ‘기제’로 완성의 끝이 있으면, ‘미제’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하늘의 운행이라는 것을 <<주역>>에서는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박한표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박사를 받고 국내에 들어와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문화원장을 하다가 와인을 공부하였습니다. 경희대 관광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며, 또한 와인 및 글로벌 매너에 관심을 갖고 전국 여러 기관에서 특강을 하고 있습니다, 인문운동가를 꿈꿉니다. 그리고 NGO단체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로 활동하다 그만두고, 지금은 인문운동에 매진한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마을 활동가로 변신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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