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퇴'에 보인 담임 선생님의 반응 "배추 장사나 한다", "시집 못 간다"
프레시안 : 청소년 인권 운동가가 된 계기가 궁금하다. 아무래도 청소년기 경험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 같은데, 여러분의 학창 시절을 소개해달라.
난다 : 고등학교 입학 첫날부터 '야자(야간자율학습)'를 하면서 학교 생활에 일찍이 답답함을 느꼈다. 시험을 보다가도 창밖의 화창한 날씨와 예쁘게 핀 꽃을 보면서 '여기는 내 자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집안 형편상 학원을 다닐 수 없었는데, 수학 시간에는 이미 선행학습이 돼 있는 걸 전제로 진도가 나갔다. 그리고 시험을 보면 떨어진 점수만큼 매를 맞는데 나는 당연히 성적이 좋지 않았으니 많이 맞을 수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 학교는 쉬는 시간에만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수업 마치는 종은 울렸지만 수업이 다 끝나지는 않은 상태에서 전화가 왔다. 나는 "이따 전화하겠다"며 전화를 받자마자 껐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휴대전화기를 압수하셨다. 나는 종이 쳤으니 문제 없는 것 아니냐고 항변했지만 선생님이 '규칙은 지켜야지'라고 하셨다. 내가 계속 항의하니 "구제불능"라면서 졸업할 때까지 휴대전화기를 안 돌려준다고 했다. 그래서 홧김에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 이후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잊을 수 없다. 어머니를 모셔 오라고 해서 어머니와 함께 상담을 받았는데, 저한테는 '아무것도 모르고 깜깜한 터널 속을 걷고 있다', '이러고 나가면 배추 장사나 한다'고 했다. 어머니한테는 '따님 이러면 나중에 시집 못 간다'고도 했다. 어머니가 상담이 끝나고 '너희 담임 선생님 이상하다'고 하셨다. 그길로 학교를 나왔다.
프레시안 : 어떻게 '청소년 인권 운동'의 길에 접어들게 됐나.
난다 : 마침 자퇴 직후 미국산 쇠고기 촛불집회가 열려서 집회에 열심히 참가했다. 그 이후 알게 된 인권·시민단체분들의 권유를 받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의 수원지부를 만들었다. 그렇게 활동을 하다 보니 김상곤 전 경기도 교육감 측 요청으로 학생인권조례 제정 공약과 관련해 자문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당시에 이미 학내 체벌이랑 집회 권리를 두고 논란이 뜨거워서 학생인권조례 제정 관련 공청회를 열었다. 패널 구성을 일단 교사와 학부모, 학생으로 나누고, 그 안에서 각각 찬·반을 나눴다. 다른 분들은 괜찮은데 학생 측 반대 논리가 치명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각자 주장을 이야기하고, 마지막 차례로 학생 측 반대 토론 순서가 됐는데 그 학생이 '나는 사실 선생님이 그냥 나와보라고 해서 왔고 막연히 학생인권조례가 안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와서 찬반 이야기를 들어보니 찬성 입장이 됐다' 이렇게 소신 발언을 한 것이었다. 저희에게는 큰 힘이 됐다. 그래서 이 일을 계기로 좀 더 열심히 활동하게 된 것 같다.
프레시안 :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국내 최초의 학생인권조례인데, 이에 큰 역할을 했으니 뿌듯했을 것 같다.
난다 : 그때 조례안 통과될 때 도의회 본회의 방청을 처음 해봤는데, 생각보다 금방 통과돼서 처음에는 얼떨떨했다. 당연히 기뻤다. 가장 논란이 됐던 두발 자유화와 체벌 금지를 명문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통과된 조례안은 사실은 우리 입장에서는 아쉬운 'B'안이었다. 집회의 자유가 빠졌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아쉬웠지만 모든 것을 얻을 순 없었으니 통과됐다는 점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프레시안 : 공현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들어보자.
공현 : 전북 전주에 있는 자율형사립고에 다녔는데, 그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이 가위 들고 다니며 두발 단속을 하고 야자도 강제로 시켰다.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제 옛날 블로그를 보니 뒤져보니 2004년에 이미 학생 인권에 대한 생각을 써놨더라. 그땐 딱히 운동이라는 인식은 없고 그냥 학교와 선생님들의 지시가 부당하다는 생각들이었다. '유엔이 청소년한테 이러이러한 권리가 있다고 하는데 학교는 왜 안 지키나' 류의 글들이었다. 그러다가 2005년에 내신등급제 반대 촛불집회, 두발 자유화 집회가 있다는 걸 언론 보도로 접하고 그 단체 이름들을 찾아서 광주까지 갔다. 학교 안에서도 뜻이 있는 사람들끼리 모아서 비공식으로 '전북청소년인권모임'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프레시안 : 대학 시절 자퇴 사실이 크게 보도됐다. 자퇴는 어떻게 결심하게 됐나. (☞관련기사 : "학벌 기득권 정점, 서울대를 떠납니다")
공현 : 고등학교 때도 자퇴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그때만 해도 '자퇴는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대학을 가긴 했지만, 흔쾌히 간 것은 아니었다. 입학해서도 별로 내가 그 학교 학생이라는 인식, 소속감 같은 것을 별로 못 느끼고 지냈다. 그나마 서울로 대학을 오니 인권 단체들도 많고, 2005년 두발자유 집회를 하면서 만났던 아수나로 분들이 있어 좋다는 정도였다. 대학 밖에서는 청소년 인권 운동을 하고, 대학 안에서는 평화운동 동아리에 가입해서 병역 거부도 고민하고 그러다 결국 대학 생활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 자퇴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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