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1월 초 서독이 혈액제공과 의료지원단(Medical Unit) 파견을 제안할 것이라는 정보가 처음 미국무부에 입수된 때로부터 미 육군부와의 사이에 수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주37) 하지만 이러한 논의가 유엔민사원조사령부(UNCACK)에 전달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주38)
상황이 이럼에도 독일적십자병원 관계자들이 유엔을 대표한 “유엔사”의 작전통제 하에 있었다고 여기는 것은 사실과 다른 착각일 뿐이었다.
넷째 서독은 1975년 유엔총회에서 “유엔사” 해체결의에 찬성했다. 그런데 미국이 해체약속을 어기며 유엔정신을 유린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기는커녕 왜 “유엔사” 재활성화에 들러리를 서고 있는지 의심된다.
1973년 9월 18일에야 동서독은 유엔의 적국에서 유엔회원국이 되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975년, 1976년 1월 1일부로 “유엔사” 해체를 약속한 유엔총회결의에 찬성표를 던졌다.(주39) 독일 국방부장관은 2024년 8월 2일 독일의 “유엔사” 가입 기념식에서 “우리는 ‘힘의 법칙’이 아닌 ‘규칙의 힘’을 믿는다”고 밝혔다. 힘의 법칙을 일극패권주의의 논리로, 규칙을 힘을 유엔헌장과 국제법의 논리로 생각한다면, 독일의 “유엔사” 가입결정은 자신의 신념을 스스로 탄핵하는 행위로 보인다. 70년 전에야 “유엔사”의 실체를 몰라서 그런 행동을 했다 해도 이제 모든 것이 명백해진 상황에서 유엔헌장을 우롱하며 유엔정신을 기만해온 대표적 기구, “유엔사”에 들러리를 서는 것이 일류국가인 독일의 위상에 맞는 것인지 나는 의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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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독일의 야전병원 파견 의사는 1953년 3월 말부터 추진되었다. 독일 아데나워 수상과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과 회담의제(Agenda for Adenauer Visit)로 처음 등장했다. “Memo by the Director of the Bureau of German Affairs(Riddleberger) to the Secretary of State: Agenda for Adenauer Visit” March 29, 1953,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 1952~54 v07 p1/d172(2024.9.1.검색)
2) 베를린선언(1945.6.5)과 동시에 연합국관리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45년 7월 30일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회합하였다. 관리위원회는 4개국 연합군사령관으로 구성되고 독일전체에 관련된 사안에 대하여 만장일치로 입장을 정할 수 있었다. 1948년 독일분단이 가시화됨과 더불어 관리위원회는 운명을 다했다.
3) 최형식,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아데나워의 안보정책-독일의 재무장을 중심으로」, 국제정치논총 36(2), (1997.2), p.128
4) 김건우, 「한국전쟁으로 인한 서독 아데나워 내각의 변화와 의료지원」, 복현사림Vol.39, (경북사학회 2021), p.37
5) Klaus von Schubert, Sicherheitspolitik der BRD, (Bonn, 1977), p.261; 최형식,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아데나워의 안보정책-독일의 재무장을 중심으로」, 국제정치논총 36(2), (1997.2), p.129
6) AdG 1950, P.2379 G
7) Hans Buchheim, "Adenauers Sicherheitspolitik 1950-1951" in Militärgeschichtliches Forschungsamt(MGFA) (ed), Aspekte der deutschen Widerbewaffnung, (Boppard a. RH., 1975), p.124; 최형식,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아데나워의 안보정책-독일의 재무장을 중심으로」, 국제정치논총 36(2), (1997.2), p.140 재인용
8) Konrad Adenauer, Erinnerungen Bd.1(1945-1950), (Stuttgart, 1965), p.367; 최형식,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아데나워의 안보정책-독일의 재무장을 중심으로」, 국제정치논총 36(2), (1997.2), p.145 재인용
9) Gerhard Wettig, Entmilitarisierung und Wiederbewaffnung in Deutschland 1943-1955. Internationale Auseinandersetzungen um die Rolle der Deutschen in Europa, (Müchen: Oldenbourg, 1967), p.334
10) Diether Koch, Heinemann und die Deutschlandfrage, (Müchen: Kaiser, 1972), p.168
11) Thomas Flemming, Gustav W. Heinemann. Ein deutscher Citoyen; Biographie (Essen: Klartext, 2014), p.220f.
12) Konrad Adenauer, Erinnerungen 1945-1953, 4th ed. (Stuttgart: Deutsche Verlags-Anstalt, 1980), p.373f ; 강혁, 「한국전쟁의 발발과 독일 개신교회(EKD)의 재무장 논쟁」, 韓國敎會史學會誌Vol.60, (한국교회사학회 2021), pp.8-9
13) 하이네만은 내각에서 나온 후 1952년 기민당(CDU)에서도 탈당하여 새로운 전독일국민당(GVP: Gesamtdeutsche Volkspartei)을 창당하여 재무장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였다. 하이네만은 그 후 1957년에 사민당에 입당해 대연정의 법무부장관(1966~1969)을 역임한 후, 사민당과 자유당의 지원으로 연방대통령(1969~1974)이 되었다.
14) 유엔헌장 제107조: 이 헌장의 어떠한 규정도 제2차 세계대전 중 이 헌장 서명국의 적이었던 국가에 관한 조치로서, 그러한 조치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정부가 그 전쟁의 결과로서 취하였거나 허가한 것을 무효로 하거나 배제하지 아니한다.
15) 유엔헌장 제53조:
1. 안전보장이사회는 그 권위하에 취하여지는 강제조치를 위하여 적절한 경우에는 그러한 지역적 약정 또는 지역적 기관을 이용한다. 다만, 안전보장이사회의 허가없이는 어떠한 강제조치도 지역적 약정 또는 지역적 기관에 의하여 취하여져서는 아니된다. 그러나 이 조 제 2항에 규정된 어떠한 적국에 대한 조치이든지 제 107조에 따라 규정된 것 또는 적국에 의한 침략 정책의 재현에 대비한 지역적 약정에 규정된 것은, 관계정부의 요청에 따라 기구가 그 적국에 의한 새로운 침략을 방지할 책임을 질 때까지는 예외로 한다.
2. 이 조 제1항에서 사용된 적국이라는 용어는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이 헌장 서명국의 적국이었던 어떠한 국가에도 적용된다.
16) 김건우, 「한국전쟁으로 인한 서독 아데나워 내각의 변화와 의료지원」, 복현사림Vol.39, (경북사학회 2021), p.42
17) Dean Acheson, Present at the Creation, (New York, 1969), pp.436-437
18) 최형식,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아데나워의 안보정책-독일의 재무장을 중심으로」, 국제정치논총 36(2), (1997.2), pp.147-151
19) Jules Lobel, Michael Ratner, “Bypassing the Security Council: Ambiguous Authorizations to Use Force, Cease-Fires and the Iraq Inspection Regime”, AJIL vol.93, (1999), p.144.
20) 「부산서독적십자병원 관계」1956~1959, 국가기록원, p.14. “Department to HICOG, Bonn”Sep. 29, 1953, Box 2~9/ RG 59 Records of Pertaining to UN Korean Relief Organizations, 1950-1960; 조성훈, 「6·25전쟁시 독일 의료지원단 파견과 성과」, 항도부산,Vol.36, (2018), p.147
21) 영문제목은 다음과 같다. ‘Agreement between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he Government of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Concerning Participation of a German Red Cross Hospital in Connection with the United Nations Operation’
22) 「인방의 원조를 받아들일 태세도 갖출 줄 모르는 정부」, 경향신문(1958.6.1.)
23) Young-Sun Hong, Cold War Germany, Third World, Global Humanitarian Regime, p.84).
24) 이재승, 「연합국의 독일점령과 사법정책에 관한 연구」, 민주법학제27호, (2005), pp.297-298
25) 「드러난 인술의 난맥지대」, 한국일보(1959.2.1); 「물의 속에 문닫는 서독병원」, 경향신문(1959.2.21.)
26) 외무부, 한국외교 30년 1948~1978, (1979), pp.50-51.
27) 「뤼브케 대통령 역사적 來釜」, 국제신보(1967.3.4.); 「1967년 부산 방문한 서독 뤼브케 대통령 환영」, 서울신문(2013.3.8.); 조성훈, 「6·25전쟁시 독일 의료지원단 파견과 성과」, 항도부산,Vol.36, (2018), p.159
28) https://www.unpm.or.kr/un2022/ (2024.9.2.검색)
29) 후버, 우원형 역, 「재부 주한서독적십자병원 5년기」, Komitee 100 Jahre Deutsh-Koreanische Beziehungen, 100 Jahre deutsch- koreanische Beziehungen Bilianz Einer Freundschaft(독일과 한국 100년 관계: 우정의 성과), (1984), p.57 ; 조성훈, 「6·25전쟁시 독일 의료지원단 파견과 성과」, 항도부산,Vol.36, (2018), p.149
30) UN Office of Legal Affairs, UN Juridical Yearbook, (1994), Chapter VI, pp.501-502
31) UN Office of Legal Affairs, UN Juridical Yearbook, (1994), Chapter VI, pp.501-502
32) “Red Cross Hospital of the Fed. Rep. of Germany in Korea”March 4, 1954, 국편 전자사료관 ; “USUN, New York to Department of State”June 3, 1954, 국편 전자사료관.
33) UNPHWD는 1950년 9월 30일경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갔고, 유엔군의 북한 점령에 따라 역할이 확대되었다. 또한 1950년 10월 9일자 행정명령에 따라 북한지역에서의 점령업무를 미 제8군과 군단, 사단이 담당하게 되며 UNPHWD의 활동은 종료되었다. 김학재, 「한국전쟁과 ‘인도주의적 구원’의 신화」, 서중석 외, 전장과 사람들, (선인, 2010), pp.51-52
34) 홍수현, 「1953~1955년 한국민사원조사령부(KCAC)의 조직과 활동」, (서울대석사논문, 2022), p.19
35) 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bradley_roger/index.htm(2024.6.21검색)
36) 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bradley_roger/index.htm(2024.6.21검색)
37) “DA to CINCFE, Tokyo” Jan. 12, 1952, Bx 4516/ RG 319 Army-AG,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38) 조성훈, 「6·25전쟁시 독일 의료지원단 파견과 성과」, 항도부산,Vol.36, (2018), p.139
39) A/10327 1975.11.3., pp.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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