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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유엔사” 가입은 정당한가

[기고] 이시우 사진가

서독정부는 1954년 5월 부산에 적십자병원을 설립해 1959년 3월까지 운영하였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으로서 서독정부의 인도주의적 지원에 감사를 표한다. 그러나 독일이 인도주의적 지원을 외교에서 부당하게 다루는 정책에 대해서는 단연코 반대한다. 독일 적십자병원은 정전협정 이후에 활동했기 때문에 2018년까지도 6·25전쟁 시기 의료지원 5개국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런데 2024년 8월 2일, 독일은 “유엔사”에 가입했다. 독일의 “유엔사” 가입은 정당한 것인지 의심된다.

 

첫째, 1953년 4월 7일 아데나워 서독 수상이 야전병원 파견을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에게 제안(주1)했을 당시 독일은 완전한 외교주권이 부재한 상태였다. 따라서 당시 결정이 서독의 정당한 주권행사범위에 있었던 것인지 의심된다.

연합국은 1945년 독일점령 후 ‘독일전체에 관련된 사안(matters affecting Germany as a whole)’에 대해서는 연합군관리위원회(Control Council)(주2)가 관할하도록 하였으며, 개별점령지구에서는 점령국최고사령관들이 독자적인 군사정부(military government)를 구성하여 점령정책을 수행케 하였다. 이를 군총독(Militärgouverneure)이라고 불렀다. 1949년 서독 분단정부출범과 동시에 적용된 점령조례(Besatzungsstatut)에는 외교‧안보문제 등을 점령국 고등판무관(Hohe Kommissare)들이 통제‧관할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주3)

예를 들면 점령국은 아데나워의 독일안보에 대한 발언이 점령조례 16조 위반이라고 못 박있다.(주4) 이처럼 독일안보에 대한 자유로운 의견개진은 연합국들의 점령조례에 의해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처벌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1949년 12월까지도 점령조례 24조에 의해서 확인된다.(주5)

1950년 5월 런던외상회담에서 향후 독일주둔 점령군대들은 단순히 독일의 비무장화 정책만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서부독일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으로 하며, 점령조례를 점진적으로 철폐함으로써 완전한 주권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며, 서유럽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서독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것을 새로운 임무로 한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주6) 5월 16일에는 점령국고등판무관들이 독일정부에 국내안전과 질서를 위한 문제에 한해서 정책을 수립할 수 있다고 통보했다.(주7) 그러나 여전히 외교‧군사문제는 포함되지 않았다.

한 달 뒤 한국전쟁의 발발은 아데나워가 자신의 안보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선전도구가 되었다. 그는 재무장으로 가는 첫 단계인 연방경찰 창설을 위해 한국전쟁의 충격을 이용했다. 아데나워는 한국전쟁 이전에는 서독의 안전보장보다는 완전한 주권의 회복, 즉 통일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전쟁발발이후에는 소련으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안전보장에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하였다.(주8)

아데나워는 1950년 8월 25일 고등판무관들의 요청으로 내각회의를 소집했다.(주9) 그는 내각 위원들에게 연방경찰 창설 의제를 바탕으로 한 서독의 재무장 계획을 알렸고, 처칠이 제안한 서독 군대의 파병을 포함한 유럽군대 창설가능성을 논의했다. 이와 관련하여 내무장관 구스타브 하이네만(Gustav Heinemann)은 오랜 토론에도 불구하고 이 회의에서 결의안이 통과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주10)

그는 아데나워의 결정을 두 가지 측면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첫째는 그가 건의서의 내용을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연방 총리가 내각 구성원들과 상의하지 않고 이 중대한 외교문제에 대해 독단적인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내각의 다른 구성원들과 상의 없이 점령국에 건의서를 넘긴 아데나워 총리의 정치적 독단에 반대해 공개적으로 사임을 선언했다.(주11)

아데나워가 서독의 재무장과 독일군의 유럽군대 기여에 반대한 하이네만의 사임을 받아들이면, 자칫 내각의 붕괴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아데나워 총리는 가능한 내무장관 하이네만의 사임을 수리하지 않고 보류하길 원했다.(주12) 그러나 하이네만은 끝까지 자신의 사임을 고집했고, 10월 10일 끝내 그의 사임은 수리되었다.(주13)

전쟁 중인 한국에의 의료지원은 분명 외교‧안보문제였고 점령조례가 약화되고는 있었으나 1955년 독일조약 발효로 폐지될 때까지는 엄연히 유지되었다. 이는 아데나워 정부의 야전병원제안에 대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수락문서가 본(Bonn)에 있는 미국 고등판무관실로부터 온 것에서도 확인된다. 서독은 당시까지 점령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1953년 한국전쟁 의료지원은 서독정부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독일은 2차대전 전범국으로 유엔헌장 제107조가 명시한 유엔의 적국이었다.(주14) 유엔헌장 제53조는 이들 적국의 침략정책 재발에 대한 조치에 대해서는 안보리허가조차 받을 필요가 없도록 하고 있었다.(주15) 서독의 재무장화는 국내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주변국들에게 침략정책의 재발가능성으로 받아들여졌고 특히 프랑스의 반대가 거셌다.

그럼에도 이 제안이 성사된 것은 서독재무장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아데나워 내각이 한국전쟁의 의료지원에 대해서 논의를 시작한 것은 미국의 요청 때문이었다.(주16) 한국전쟁 이전까지 독일의 군사적 참여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해왔던 미고등판무관 맥클로이도 전쟁발발 이후 개인적으로는 서독의 재무장이 서유럽 안보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맥클로이 고등판무관의 전보는 당시까지도 독일의 재무장이 시기적으로 이르다고 판단하였던 국무성의 태도를 변화시키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주17)

그리하여 한국전쟁 이전부터 독일 재무장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던 합참과 국방성의 계획안을 국무성이 합의해 주기에 이른 것이다. 아데나워는 서독의 선 재무장, 후 완전한 주권회복을 염두에 두었지만 사민당 당수 슈마허는 반대로 우선 완전한 주권회복, 즉 통일을 요구하였으며 그 후에나 대등한 관계속에서 서독의 군사적 참여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슈마허에게 있어서 독일의 재무장은 최후의 수단이었다.(주18)

한국과 직접적인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존재할리 없었고, 독일내‧외부의 거센 반대와 점령조례의 제약을 뚫고, 서독정부의 야전병원이 제안되고 결정된 배경에는 점령국인 미국의 입장변화와 역할이 있었다.

 

둘째, “유엔사령부”가 서독의 제안을 수용한 것은 정전이후인 1953년 9월 23일이었다. 이에 따라 서독과 미국정부는 1954년 2월 12일 ‘한국에서의 유엔작전에 관한 독일적십자병원 지원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유엔작전이 아닌 정전 후 자선활동을 하면서 한국정부와는 어떤 협정도 체결하지 않았던 것이 의심된다.

1950년 6월 27일 유엔의 군사조치결정은 없었다. 이는 1994년 유엔법률국의 입장표명으로 정리되었다. 설령 안보리의 군사조치가 있었다고 가정해도 그 효력은 정전협정과 함께 종료된 것으로 봄이 국제법학계의 일반적 견해이다.

‘안보리의 군사력 사용권한은 안보리에 의하여 명시적으로 그리고 만장일치로 지속적 효력을 갖는다는 결의를 하지 않는 한 정전협정의 체결로 종료된다.’(주19)

그런데 “유엔사”는 서독의 제안을 정전 이후에 수용함으로서 정전을 무시하는 양태를 보였다. 안보리 결의를 왜곡하여 결성된 “유엔사”는 어떤 국제법적 제약도 받지 않는 것처럼 자신들의 권한을 남용했다.

정전 이후 병원을 개설할 무렵 전상군인들은 충분히 치료를 받고 있었기에 야전병원 기능은 불필요했고 독일은 민간인 피해자에 대한 자선활동으로 임무를 바꾸라는 “유엔사”의 지시에 동의해야 했다. 독일적십자병원은 야전병원으로서가 아니라, 1954년 4월 15일 한국민사원조사령부로부터 구호기관(relief organization)으로 승인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독일 유엔대표부에서도 독일병원의 임무가 유엔작전이 아닌 민간인 치료가 될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였다.(주20)

독일적십자병원은 작전이 아닌 자선‧봉사활동을 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한국민에겐 소중한 지원이었다. 그런데 왜 무리하게 자신들의 활동을 “유엔사” 활동으로 해석하고 “유엔사” 가입의 논리로 삼는지 의심된다.

독일과 미국 정부는 1954년 2월 12일 ‘한국에서 독일적십자병원에 의한 지원협정’(주21)을 체결했다. 구 부산여고(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동1가 1-1)에 독일적십자병원이 개원되었다. 서독은 한국지원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면서도 한국정부와 어떤 협정도 체결하지 않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는 서독이 한국에서 어떤 법적 지위도 가질 수 없음을 의미했다. 한국정부가 “유엔사”에 절대복종할 때만 자신들의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병원으로 쓰던 부산여고 반환문제가 발생하자 한국정부와 아무런 협정도 맺지 않았던 독일정부는 속수무책이 되었다. 일부 여론으로부터 한국정부가 독일과의 협력에 소극적이라는 지적을 받았다.(주22) 그러나 미군의 통제를 받는 야전병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던 한국이 소극적이었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1958년 5월 28일 바이츠(Heinrich Weitz) 서독적십자 총재는 서독병원의 구호사업을 중지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 이유는 한국정부가 자발적인 봉사에 대해 감사를 표하지 않았고 병원에 아무런 원조도 하지 않았으며 의사와 간호사들이 가장 원시적인 환경 속에 일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보건사회부 의정국장은 우리나라와 아무런 협정도 체결하지 않았고 병원 측에서 아무런 원조 요청도 없었다고 반박했다. 독일의 인도적 지원에는 감사하지만 법적인 문제는 분리해서 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한국정부의 대응은 정당했다.

대학 병원 출신 로젠바움(Franz J. Rosenbaum)을 비롯한 일부 의사들은 후베르 원장의 독선적 운용과 외과 과장의 전문성 부족에 따른 환자사망 의혹, 구타 등을 폭로했다. 한 연구자는 파견된 의사와 간호사 가운데 나치주의에 동조해 인종주의적 행태를 보인 것을 지적하기도 했다.(주23) 이재승에 의하면 소련점령지구에서는 철저한 나치청산을 추진한 후에 사회주의국가 수립으로 이어진 반면, 서부 독일은 냉전의 강화과정에서 자유세력의 보루로 자리잡음으로써 청산작업은 ‘재나치화’라 부를 정도로 방향을 상실하였다.

이러한 기조 위에서 서독정부가 들어서고 정치세력 간의 타협이 이루어지고 나치범죄자에 대한 인적 청산작업은 매우 미미한 정도에 그쳤다.(주24) 또한 독일적십자사 본부와 노동재판소 등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동시에 병원의 폐쇄를 권고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독일적십자사 본부와 주한공사가 병원에 대한 감사를 진행했다.(주25) 이상의 복합적인 요인으로 결국 서독병원은 폐원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이때 독일정부는 의료단지원협정을 미국과 체결했기 때문에 폐원 전에 미국의 의중을 확인했다. 미 국무부도 동의했다.

독일적십자병원의 5년간의 활동에 대해 당시 공식통보를 받았던 외무부는 한국외교 30년을 발간하면서도 이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주26) 국방부가 1976년 9월 의료지원국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부산 태종대 의료지원단 참전기념비에도 독일은 제외되었다. 1967년 3월 4일 하인리히 리뷔케 독일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의 독일 방문에 대한 답방을 할 때 부산을 방문했지만, 부산시에서는 서독병원 터를 방문하도록 주선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병원활동을 강조하지도 않았다.(주27) 현재 독일적십자병원터에는 국가가 아닌 개인들이 세운 기념비가 서 있을 뿐이다.

[자료사진1] 독일적십자병원 기념비는 당시 산부인과 의사였던 최하진과 환자였던 이한식이 세웠다.(주28)

서독의 의료단지원이 한국을 위한 것인지, 미국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서독 자신을 위한 것인지 의심될 만한 정황 속에 특별한 반성 없이 독일은 다시 “유엔사” 가입을 결정했다. 독일의 결정의 정당성이 의심된다.

 

셋째, 미‧독 협정에 따르면 한국민사원조사령부(KCAC)가 독일적십자병원에 대한 작전통제를 하도록 정하고 있다. 한국민사원조사령부는 유엔과 무관한 조직이었으며, 독일적십자병원은 전쟁에 관련한 어떠한 작전통제도 받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왜 “유엔사”와의 인연을 강조하며 이제 와서 “유엔사”에 가입하는지 의심된다.

서독은 아마 미국을 개별국가로서가 아니라 유엔을 대표하는 국가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는 후베르 병원장의 인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후베르 원장은 병원임무 수행을 위해 “유엔사령부” 예하로 들어감으로써 실질적인 면에서 미 육군의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 중요했다고 여겼다. 미군은 필요한 도움을 요청하면 항시 기꺼이 지원했고, 때로는 분에 넘칠 만큼 제공하였다고 기억했다. 독일 직원들을 위해 현지에서 구입할 수 없는 일용품은 미군이 제공하여 독일요리를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고도 했다.(주29)

후베르 원장의 회고는 그가 접한 대상이 유엔이 아닌 미국이었음을 정확히 지시하고 있다. 독일적십자병원을 통제한 한국민사원조사령부(KCAC: the Korea Civil Assistance Command)는 유엔과 무관한 미8군 조직에서 시작되었다. 유엔의 명칭을 남용하고 유엔기를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자신들이 속한 “유엔사”가 유엔조직으로 착각된 것이다.

그러나 1994년 6월 유엔사무국법률과는 ‘유엔법률백서’의 ‘주한유엔사의 상태’란 글에서 “유엔사”란 명칭이 유엔과 무관한 “잘못된 이름”(misnomer)임을 명확히 했다.(주30) 또한 미‧독 협정문에는 서독의 참여가 유엔작전(UN operation)과 관련된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유엔의 조치가 아닌 각국의 조치일 뿐임을 유엔사무국법률과는 다시 명확히 했다.(주31) 한마디로 한국전쟁에서의 유엔작전은 없었다. 독일정부는 미국만을 믿고 부당한 협정을, 부당한 주체와 체결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부당한 행동을 한 셈이었다.

한편 1954년 3월초 독일 정부는 미 국무부에 독일 적십자병원의 존재에 대해 “유엔사령부”를 대표하는 미국정부가 유엔사무총장을 통해 북한과 중국공산 당국에 통보하기를 원했다. 이에 따라 함마슐드 유엔사무총장은 3월 19일 북한 박헌영 외상과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외상에 통보했으나 아무런 답신이 없었다. 5월 27일 재차 확인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주32) 이는 독일이 국제법상 교전단체로서 인정받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한국민사원조사령부(KCAC)의 복잡한 변천사는 그 시작과 끝을 보면 실체가 분명해진다. 1950년 11월 4일 미제8군 산하에 “유엔사령부보건복지파견대”(UNPHWD: UN Public Health and Welfare Detachment)가 설치되고 12월 10일 이 조직은 유엔민사원조사령부(UNCACK: U.N. Civil Assistance Command)로 개편된다.(주33)

“유엔사령부보건복지파견대”는 “유엔사령부” 산하가 아닌 미제8군 산하의 8201부대로 창설된 것이었다. 애초 “유엔사”와 무관한 조직으로 출발하였으나 미국의 임의조치에 따라 후에 “유엔사”에 편입되었을 뿐이다. 물론 UNCACK에 대한 유엔의 결정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정전 후 미국원조기구의 위상을 유엔과 구분하기 위해 UNCACK을 KCAC으로 개편할 필요성이 발생했다. UNCACK을 KCAC으로 개편할 때 명칭에서 ‘UN’을 탈락시켰는데, 이는 KCAC이 유엔원조와 구분되는 미국원조기구라는 점을 명확하게 하는 조치였다.(주34)

[자료사진2] 한국민사원조사령부의 활동사진(주35)

[자료사진3] 한국민사원조사령부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약도이다.(주36) 사령부는 통인동에, 서울팀은 소공동에, 관사는 동대문 근처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당시 통인동의 사진을 분석해보면 서양식건물은 친일파 윤덕영의 벽수산장과 박노수미술관뿐이었던 것으로 봐서 벽수산장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곳은 UNCURK 본부로도 알려져 있다. 소공동의 서울팀 사무소는 현 한화빌딩 자리로 확인된다. 관사는 과거 미군극동공병대터일 것으로 추정된다.

1952년 1월 초 서독이 혈액제공과 의료지원단(Medical Unit) 파견을 제안할 것이라는 정보가 처음 미국무부에 입수된 때로부터 미 육군부와의 사이에 수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주37) 하지만 이러한 논의가 유엔민사원조사령부(UNCACK)에 전달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주38)

상황이 이럼에도 독일적십자병원 관계자들이 유엔을 대표한 “유엔사”의 작전통제 하에 있었다고 여기는 것은 사실과 다른 착각일 뿐이었다.

 

넷째 서독은 1975년 유엔총회에서 “유엔사” 해체결의에 찬성했다. 그런데 미국이 해체약속을 어기며 유엔정신을 유린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기는커녕 왜 “유엔사” 재활성화에 들러리를 서고 있는지 의심된다.

1973년 9월 18일에야 동서독은 유엔의 적국에서 유엔회원국이 되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975년, 1976년 1월 1일부로 “유엔사” 해체를 약속한 유엔총회결의에 찬성표를 던졌다.(주39) 독일 국방부장관은 2024년 8월 2일 독일의 “유엔사” 가입 기념식에서 “우리는 ‘힘의 법칙’이 아닌 ‘규칙의 힘’을 믿는다”고 밝혔다. 힘의 법칙을 일극패권주의의 논리로, 규칙을 힘을 유엔헌장과 국제법의 논리로 생각한다면, 독일의 “유엔사” 가입결정은 자신의 신념을 스스로 탄핵하는 행위로 보인다. 70년 전에야 “유엔사”의 실체를 몰라서 그런 행동을 했다 해도 이제 모든 것이 명백해진 상황에서 유엔헌장을 우롱하며 유엔정신을 기만해온 대표적 기구, “유엔사”에 들러리를 서는 것이 일류국가인 독일의 위상에 맞는 것인지 나는 의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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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독일의 야전병원 파견 의사는 1953년 3월 말부터 추진되었다. 독일 아데나워 수상과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과 회담의제(Agenda for Adenauer Visit)로 처음 등장했다. “Memo by the Director of the Bureau of German Affairs(Riddleberger) to the Secretary of State: Agenda for Adenauer Visit” March 29, 1953,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 1952~54 v07 p1/d172(2024.9.1.검색)

2) 베를린선언(1945.6.5)과 동시에 연합국관리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45년 7월 30일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회합하였다. 관리위원회는 4개국 연합군사령관으로 구성되고 독일전체에 관련된 사안에 대하여 만장일치로 입장을 정할 수 있었다. 1948년 독일분단이 가시화됨과 더불어 관리위원회는 운명을 다했다.

3) 최형식,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아데나워의 안보정책-독일의 재무장을 중심으로」, 국제정치논총 36(2), (1997.2), p.128

4) 김건우, 「한국전쟁으로 인한 서독 아데나워 내각의 변화와 의료지원」, 복현사림Vol.39, (경북사학회 2021), p.37

5) Klaus von Schubert, Sicherheitspolitik der BRD, (Bonn, 1977), p.261; 최형식,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아데나워의 안보정책-독일의 재무장을 중심으로」, 국제정치논총 36(2), (1997.2), p.129

6) AdG 1950, P.2379 G

7) Hans Buchheim, "Adenauers Sicherheitspolitik 1950-1951" in Militärgeschichtliches Forschungsamt(MGFA) (ed), Aspekte der deutschen Widerbewaffnung, (Boppard a. RH., 1975), p.124; 최형식,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아데나워의 안보정책-독일의 재무장을 중심으로」, 국제정치논총 36(2), (1997.2), p.140 재인용

8) Konrad Adenauer, Erinnerungen Bd.1(1945-1950), (Stuttgart, 1965), p.367; 최형식,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아데나워의 안보정책-독일의 재무장을 중심으로」, 국제정치논총 36(2), (1997.2), p.145 재인용

9) Gerhard Wettig, Entmilitarisierung und Wiederbewaffnung in Deutschland 1943-1955. Internationale Auseinandersetzungen um die Rolle der Deutschen in Europa, (Müchen: Oldenbourg, 1967), p.334

10) Diether Koch, Heinemann und die Deutschlandfrage, (Müchen: Kaiser, 1972), p.168

11) Thomas Flemming, Gustav W. Heinemann. Ein deutscher Citoyen; Biographie (Essen: Klartext, 2014), p.220f.

12) Konrad Adenauer, Erinnerungen 1945-1953, 4th ed. (Stuttgart: Deutsche Verlags-Anstalt, 1980), p.373f ; 강혁, 「한국전쟁의 발발과 독일 개신교회(EKD)의 재무장 논쟁」, 韓國敎會史學會誌Vol.60, (한국교회사학회 2021), pp.8-9

13) 하이네만은 내각에서 나온 후 1952년 기민당(CDU)에서도 탈당하여 새로운 전독일국민당(GVP: Gesamtdeutsche Volkspartei)을 창당하여 재무장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였다. 하이네만은 그 후 1957년에 사민당에 입당해 대연정의 법무부장관(1966~1969)을 역임한 후, 사민당과 자유당의 지원으로 연방대통령(1969~1974)이 되었다.

14) 유엔헌장 제107조: 이 헌장의 어떠한 규정도 제2차 세계대전 중 이 헌장 서명국의 적이었던 국가에 관한 조치로서, 그러한 조치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정부가 그 전쟁의 결과로서 취하였거나 허가한 것을 무효로 하거나 배제하지 아니한다.

15) 유엔헌장 제53조:

1. 안전보장이사회는 그 권위하에 취하여지는 강제조치를 위하여 적절한 경우에는 그러한 지역적 약정 또는 지역적 기관을 이용한다. 다만, 안전보장이사회의 허가없이는 어떠한 강제조치도 지역적 약정 또는 지역적 기관에 의하여 취하여져서는 아니된다. 그러나 이 조 제 2항에 규정된 어떠한 적국에 대한 조치이든지 제 107조에 따라 규정된 것 또는 적국에 의한 침략 정책의 재현에 대비한 지역적 약정에 규정된 것은, 관계정부의 요청에 따라 기구가 그 적국에 의한 새로운 침략을 방지할 책임을 질 때까지는 예외로 한다.

2. 이 조 제1항에서 사용된 적국이라는 용어는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이 헌장 서명국의 적국이었던 어떠한 국가에도 적용된다.

16) 김건우, 「한국전쟁으로 인한 서독 아데나워 내각의 변화와 의료지원」, 복현사림Vol.39, (경북사학회 2021), p.42

17) Dean Acheson, Present at the Creation, (New York, 1969), pp.436-437

18) 최형식,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아데나워의 안보정책-독일의 재무장을 중심으로」, 국제정치논총 36(2), (1997.2), pp.147-151

19) Jules Lobel, Michael Ratner, “Bypassing the Security Council: Ambiguous Authorizations to Use Force, Cease-Fires and the Iraq Inspection Regime”, AJIL vol.93, (1999), p.144.

20) 「부산서독적십자병원 관계」1956~1959, 국가기록원, p.14. “Department to HICOG, Bonn”Sep. 29, 1953, Box 2~9/ RG 59 Records of Pertaining to UN Korean Relief Organizations, 1950-1960; 조성훈, 「6·25전쟁시 독일 의료지원단 파견과 성과」, 항도부산,Vol.36, (2018), p.147

21) 영문제목은 다음과 같다. ‘Agreement between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he Government of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Concerning Participation of a German Red Cross Hospital in Connection with the United Nations Operation’

22) 「인방의 원조를 받아들일 태세도 갖출 줄 모르는 정부」, 경향신문(1958.6.1.)

23) Young-Sun Hong, Cold War Germany, Third World, Global Humanitarian Regime, p.84).

24) 이재승, 「연합국의 독일점령과 사법정책에 관한 연구」, 민주법학제27호, (2005), pp.297-298

25) 「드러난 인술의 난맥지대」, 한국일보(1959.2.1); 「물의 속에 문닫는 서독병원」, 경향신문(1959.2.21.)

26) 외무부, 한국외교 30년 1948~1978, (1979), pp.50-51.

27) 「뤼브케 대통령 역사적 來釜」, 국제신보(1967.3.4.); 「1967년 부산 방문한 서독 뤼브케 대통령 환영」, 서울신문(2013.3.8.); 조성훈, 「6·25전쟁시 독일 의료지원단 파견과 성과」, 항도부산,Vol.36, (2018), p.159

28) https://www.unpm.or.kr/un2022/ (2024.9.2.검색)

29) 후버, 우원형 역, 「재부 주한서독적십자병원 5년기」, Komitee 100 Jahre Deutsh-Koreanische Beziehungen, 100 Jahre deutsch- koreanische Beziehungen Bilianz Einer Freundschaft(독일과 한국 100년 관계: 우정의 성과), (1984), p.57 ; 조성훈, 「6·25전쟁시 독일 의료지원단 파견과 성과」, 항도부산,Vol.36, (2018), p.149

30) UN Office of Legal Affairs, UN Juridical Yearbook, (1994), Chapter VI, pp.501-502

31) UN Office of Legal Affairs, UN Juridical Yearbook, (1994), Chapter VI, pp.501-502

32) “Red Cross Hospital of the Fed. Rep. of Germany in Korea”March 4, 1954, 국편 전자사료관 ; “USUN, New York to Department of State”June 3, 1954, 국편 전자사료관.

33) UNPHWD는 1950년 9월 30일경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갔고, 유엔군의 북한 점령에 따라 역할이 확대되었다. 또한 1950년 10월 9일자 행정명령에 따라 북한지역에서의 점령업무를 미 제8군과 군단, 사단이 담당하게 되며 UNPHWD의 활동은 종료되었다. 김학재, 「한국전쟁과 ‘인도주의적 구원’의 신화」, 서중석 외, 전장과 사람들, (선인, 2010), pp.51-52

34) 홍수현, 「1953~1955년 한국민사원조사령부(KCAC)의 조직과 활동」, (서울대석사논문, 2022), p.19

35) 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bradley_roger/index.htm(2024.6.21검색)

36) 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bradley_roger/index.htm(2024.6.21검색)

37) “DA to CINCFE, Tokyo” Jan. 12, 1952, Bx 4516/ RG 319 Army-AG,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38) 조성훈, 「6·25전쟁시 독일 의료지원단 파견과 성과」, 항도부산,Vol.36, (2018), p.139

39) A/10327 1975.11.3., pp.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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