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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운명 나락으로 끌고 간 150년 전 운요호 사건

이희용

hoprav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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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국에 당한 수법 따라하며 조선 개항 압박

증기선 운요호 최신식 함포로 강화도 진지 초토화

강화도조약으로 약육강식 세계 질서에 강제 편입

국권 잃으면서도 자기 이익만 챙긴 왕 등 지배세력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올해는 강화도조약 체결의 발단이 된 운요호 사건 150주년이다. 강화도조약은 쇄국주의를 고집하던 조선의 빗장을 열어 근대적 세계 질서 속에 편입시켰다. 그로부터 30년 뒤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맺고 한반도 식민화를 본격화했다.

올해는 1965년 한일 기본조약과 한일 청구권 협정이 체결된 지 60주년이기도 하다. 한국은 미국의 거센 압박에 떠밀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부터 일본과 외교 관계 수립을 위한 회담에 나섰고 박정희 정권 들어 해방 후 20년 만에 ‘국교 정상화’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한일 관계의 뼈대를 만들었다.

일본 국서에 ‘황제’ 표현 문제 삼아 접수 거부

1875년 5월 25일 부산 초량왜관 앞바다에 낯선 배 한 척이 나타났다. 일본이 영국에서 사들인 군함으로 범선이지만 증기기관을 달아 속도가 빨랐다. 길이는 35m, 폭은 7.5m에 이름은 운요(雲揚)호였다. 운요호의 입항을 목격한 조선인들은 이 배가 나라의 운명을 뒤흔들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조선의 운명을 뒤흔든 일본의 목조 증기선 운요호. 1869년 영국에서 제작됐으며 1876년 암초에 걸려 좌초된 뒤 퇴역했다.

조선인의 눈에는 운요호의 출현이 느닷없는 일이었으나 일본은 다 계획이 있었다. 미국 함대의 무력시위에 굴복해 1854년 강제로 개항 협정을 맺은 일본은 운요호를 앞세워 자신이 당한 것과 똑같은 수법으로 조선을 희생양으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그때까지 조선은 쓰시마섬을 대일본 외교나 무역 창구로 활용해왔다. 쓰시마 번주가 발행한 증명서를 지닌 일본인만 입국을 허가하고 부산 등의 왜관에서만 활동하도록 했다. 그러나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뒤 일본은 조선과의 외교 업무를 외무성 소관으로 옮기고 당시 부산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왜관을 일본의 외교 공관으로 바꾸기로 결정한 뒤 조선에 통보했다.

조선은 일본이 보낸 국서 접수를 거부했다. 문서에 일본 국왕을 뜻하는 천황(天皇)이나 중국 황제만이 써온 조칙(詔勅) 등의 단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기고 나머지 나라를 오랑캐로 여겨온 조선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표현이었다.

그러자 일본에서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한반도 침략을 주장하는 정한론(征韓論)이 일었다.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메이지 유신으로 몰락한 무사 계급의 불만을 달래려는 속셈도 깔려 있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 친정 체제가 들어서면서 일본 외무성 소속의 모리야마 시게루와 부산훈도인 역관 현석운의 회담이 이뤄졌다. 그러나 여전히 국서의 일부 표현이 문제가 됐다. 모리야마와 박제관 동래부사의 면담도 일본 측이 전통 복장 대신 양복을 입겠다고 고집하자 조선이 받아들이지 않아 무산됐다.

일본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무력 도발의 빌미를 만들고 이를 통한 조약 체결의 명분을 국내외적으로 착착 쌓아가고 있는 데 반해 조선은 시대 변화나 일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공리공론만 거듭하고 있었다.

운요호 공격으로 조선군 36명 전사, 일본군은 발목 삔 병사 두 명

사전 통고도 없이 운요호가 입항하자 조선은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운요호는 일본 거주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둘러댔다. 6월 12일에는 다이니테이보(第二丁卯)호까지 들어왔다. 이틀 뒤 현석운이 조사를 위해 배에 오르자 연습을 핑계로 함포 사격을 감행해 인근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기도 했다. 여전히 조선이 국서 접수를 거부하자 운요호는 해로를 측량한다면서 동해안을 따라 함경남도 영흥만까지 북상했다가 남하해 8월 1일 나가사키항으로 돌아갔다. 다이니테이보호도 일본으로 귀항했다.

운요호가 다시 나가사키를 출항한 것은 9월 12일이었다. 남해안과 서해안을 거쳐 19일 월미도 앞바다에 정박했다가 이튿날 10여 명의 일본군이 작은 배에 옮겨 타고 강화도 초지진으로 접근했다. 일본군이 무단 침입하자 조선 수비병들은 경고 사격을 했다. 그러자 보트에 탄 일본군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응사했다. 운요호로 철수한 뒤에는 초지진에 맹렬한 포격을 가해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최신식 함포의 위력 앞에 조선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일본군은 9월 21일 항산도 포대에 상륙해 불을 지르고 다음날에는 영종도의 민가를 습격해 약탈했다.

 

강화도에 상륙하는 운요호의 일본군. 1877년 제작된 일본 민화다.

초지진과 영종진 두 전투에서 조선군은 36명이 전사하고 16명이 포로로 잡혔다. 일본군은 2명의 경상자만 냈는데, 그나마 배에서 내리다가 갯벌에 미끄러져 발목을 삔 것이었다. 운요호에 탄 일본군은 65명에 불과하고 초지진과 영종진을 지키는 군대는 각각 300~400명에 이르렀는데도 굴욕적 패배를 당한 까닭은 무엇일까.

초지진과 영종진에 설치된 조선군 대포들은 사거리가 600~700m에 불과해 탄환이 운요호에까지 미치지도 못한 반면 일본군 함포 두 문의 사거리는 1㎞가 넘고 명중률과 파괴력도 월등했다. 개인화기인 소총의 성능도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더욱이 조선은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때 프랑스군과 미군 공격으로 진지가 파괴되고 대포들도 많이 빼앗겼는데도 재정 부족으로 복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운요호 일본군들이 영종도를 점령하는 모습을 그린 일본 민화.

진상 조작하고 새 조약 요구한 일본, 청나라는 방관

운요호의 영해 침범, 발포, 약탈 등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었다. 도쿄 주재 영국과 프랑스 공사관이 진상을 따져 묻자 일본은 딱 잡아뗐다. 깃발을 내린 채 접근해놓고 일장기를 달았다고 거짓말을 하는가 하면, 식수를 구하기 위해 접근했다는 핑계를 댔고, 3일간 교전한 것을 하루 동안 일어난 일로 조작했다.

한술 더 떠 일본은 조선에 사과와 함께 새로운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1876년 1월 30일 전권대표 구로다 기요타카를 비롯한 대표단이 6척의 전함과 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에 도착했다. 조선이 요구를 거절하면 군사행동도 불사하겠다는 협박이었다. 이처럼 일본이 막무가내식으로 나서는 데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뒤 특명전권공사 모리 아리노리를 중국(청나라)에 파견해 실권자 이홍장을 만났다. 모리는 “조선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쟁을 피하기 어렵다”고 말하며 중국이 조선 문제에 개입할 의사가 얼마나 있는지 떠봤다.

당시 중국은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면서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과의 분쟁으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홍장은 모리에게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당부하는 한편 고종에게 밀서를 보내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라고 권고했다. 일본은 이런 정황을 미리 파악하고 조약 체결 요구를 강하게 밀어붙인 것이다.

판중추부사 신헌을 비롯한 조선 협상단은 이번에도 조약 내용보다는 문구에 집착하며 왕의 체통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일본 대표는 국제 조약 관행대로 고종의 서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조선 대표는 “신하 입장에서 왕에게 청할 수 없는 일”이라며 반대했다.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어보(御寶·임금 도장)를 새로 만들어 찍는 걸로 타협했다.

 

강화도조약 체결 장면을 담은 일본 신문의 삽화.

조약의 주체도 국제 관행에 따른 국가 원수가 아니라 국가로 바뀌었다. 일본은 전문 초안 맨 앞에 ‘대일본제국 황제 폐하와 조선 국왕 전하께서는’이라고 적었다. 조선은 ‘제국’이나 ‘황제’ 등의 표현에 극구 반대해 ‘대일본국’과 ‘대조선국’으로 수정했다. 그러나 나머지 일본의 제안은 대부분 수용했다.

강화도 연무당에서 세 차례 회담을 연 끝에 양국 대표단은 1876년 2월 27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맺었다. 체결 장소를 따서 통상 강화도조약이라고 하고, 그해가 병자년이어서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국제 협약이다.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는 조선과 일본의 대표단.

무지한 조선 상대로 침략의 밑밥을 깐 강화도조약

강화도조약은 “대일본국은 대조선국과 본디 우의(友誼)를 두터이 해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지금 두 나라의 정의(情意)가 미흡한 것을 보고 다시 옛날의 우호 관계를 닦아 친목을 공고히 한다”로 시작하는 전문과 12개 조항으로 이뤄져 있다.

현존하는 조약 문서는 일본 외무성만 소장하고 있다. 우리 측 소장 자료에는 첫 문구가 “대조선국은 대일본국과”로 돼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적힌 문구도 위와 같이 돼 있는데, 이는 고종실록이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사정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제1조는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이다. 이는 조선에 대한 배려나 예우 차원이 아니라 중국의 개입을 차단하고자 넣은 조항이다. 중국은 1882년 조미(朝美)수호통상조약 체결 과정에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명시하려고 했고, 조선이 미국에 사절단을 파견할 때도 중국 공사에게 먼저 보고하라는 압박을 넣었다.

이 논란은 1894년 청일전쟁이 끝난 뒤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중국은 조선국의 완전무결한 독립 자주를 확인하며 이를 훼손하는 조선국의 중국에 대한 조공과 전례 등은 완전히 폐지한다”고 명시함으로써 마무리된다.

 

강화도조약을 담은 문서. 일본 외무성 소장 자료다.

2조에서는 수시로 사신을 상호 파견하기로 했다. 3조는 공문서 언어에 관한 규정이다. 일본은 일본어로 공문을 작성하되 향후 10년 간 한문 번역본을 첨부하고, 조선은 한문을 쓰기로 했다. 4조와 5조에서는 ‘20개월 내 부산 이외의 두 항구 개방과 통상 허가’를 약속했다. 조선은 개항의 의미를 왜관 추가 설치 정도로 해석했으나 일본은 무역과 통상 등에 자율권을 갖는 자유무역항을 요구했다. 이를 두고 갑론을박하다가 약속 기한을 넘겨 1880년 원산과 1883년 인천을 개방했다.

7조는 “조선국 연해의 도서(島嶼)와 암초는 종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해 위치와 깊이를 재고, 도지(圖志)를 제작해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 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였다. 이를 근거로 일본 군함이 아무 때나 조선 바다를 누비고 다닐 수 있게 됐다. 10조는 개항장에서 일본의 치외법권과 영사재판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문화국가 자처하다 열강의 아가리 속에 내던져진 조선

조선은 강화도조약을 전문에 쓰인 대로 “옛날의 우호를 회복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더욱이 국제 정세나 국가 간 협정 관행에 무지했기 때문에 조약 체결 뒤에도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맺은 불평등 조약의 골격은 1882년 미국, 1883년 영국과 독일, 1884년 이탈리아 러시아, 1886년 프랑스 등과의 조약에도 유지된다.

강화도조약 체결을 대하는 일본과 조선의 태도와 인식 수준은 양국이 기념으로 주고받은 선물에서도 잘 드러난다. 구로다는 고종에게 회선포(回旋砲) 1문과 포탄 2000발, 육연단총 1정과 탄약 100발, 칠연총 2정과 탄약 200발 등을 바쳤다. 고종은 구로다에게 사서(四書) 1질, 종이, 붓, 먹, 비단 등을 내렸다. 조선은 문화국가를 자처하고 일본은 군사국가를 자랑한 것으로 볼 수 있겠으나 당시는 무력이 앞서는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이제 조선은 명운이 열강의 각축전 속에 내던져지고 말았다. 일본의 음모와 계산, 중국의 무능과 방관, 조선의 무지와 착각이 빚어낸 불행한 사건으로 타의에 의해 근대화와 세계화의 막이 오른 것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앞둔 1887년, 열강에 둘러싸인 조선의 운명을 묘가한 프랑스인 조르주 페르디낭 비고의 풍자화. 군복 차림의 러시아인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가운데 일본인과 중국인이 'COREE(조선)'라고 적힌 물고기를 낚으려고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강화도조약 체결을 주도한 것은 고종과 민씨 외척 세력이었다. 개항을 통한 개화는 시대적 흐름이었고 일본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국익과 백성의 안위는 헤아리지 않은 채 왕실의 체면과 기득권 지키기에만 급급하며 주권을 고스란히 내준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이 같은 잘못은 30년 뒤 을사늑약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고종과 을사오적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 역시 황실 예우와 자신들의 이권이었다. 을사늑약 제5조는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였다.

어떤 자들은 왜 지금도 '일본의 마음이 중요하다'고 할까?

해방 후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하던 한일 협상은 박정희 정권의 2인자인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 밀약을 맺으며 급물살을 탔다. 한국은 경제개발 자금이 절박했고, 일본은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으며, 미국은 한일 협력 체제를 통해 동아시아 공산화 블록에 대항하려 했다. 한일 협정의 긍정적 측면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박 정권이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서둘러 협약을 체결했다는 비난은 피할 수 없다.

 

1962년 11월 일본에서 열린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의 회담 장면.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이웃이어서 호혜 협력이 절실하다. 그러나 과거사 문제를 두고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라고 말하는 고위 관료가 있고, 일본 자위대 창설 기념행사에 참석해 축하하는 국회의원이 있는가 하면,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국적은 일본이었다”고 주장하는 대선 후보가 있기 때문에 언제 또 불행한 역사가 반복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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