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조에서는 수시로 사신을 상호 파견하기로 했다. 3조는 공문서 언어에 관한 규정이다. 일본은 일본어로 공문을 작성하되 향후 10년 간 한문 번역본을 첨부하고, 조선은 한문을 쓰기로 했다. 4조와 5조에서는 ‘20개월 내 부산 이외의 두 항구 개방과 통상 허가’를 약속했다. 조선은 개항의 의미를 왜관 추가 설치 정도로 해석했으나 일본은 무역과 통상 등에 자율권을 갖는 자유무역항을 요구했다. 이를 두고 갑론을박하다가 약속 기한을 넘겨 1880년 원산과 1883년 인천을 개방했다.
7조는 “조선국 연해의 도서(島嶼)와 암초는 종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해 위치와 깊이를 재고, 도지(圖志)를 제작해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 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였다. 이를 근거로 일본 군함이 아무 때나 조선 바다를 누비고 다닐 수 있게 됐다. 10조는 개항장에서 일본의 치외법권과 영사재판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문화국가 자처하다 열강의 아가리 속에 내던져진 조선
조선은 강화도조약을 전문에 쓰인 대로 “옛날의 우호를 회복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더욱이 국제 정세나 국가 간 협정 관행에 무지했기 때문에 조약 체결 뒤에도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맺은 불평등 조약의 골격은 1882년 미국, 1883년 영국과 독일, 1884년 이탈리아 러시아, 1886년 프랑스 등과의 조약에도 유지된다.
강화도조약 체결을 대하는 일본과 조선의 태도와 인식 수준은 양국이 기념으로 주고받은 선물에서도 잘 드러난다. 구로다는 고종에게 회선포(回旋砲) 1문과 포탄 2000발, 육연단총 1정과 탄약 100발, 칠연총 2정과 탄약 200발 등을 바쳤다. 고종은 구로다에게 사서(四書) 1질, 종이, 붓, 먹, 비단 등을 내렸다. 조선은 문화국가를 자처하고 일본은 군사국가를 자랑한 것으로 볼 수 있겠으나 당시는 무력이 앞서는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이제 조선은 명운이 열강의 각축전 속에 내던져지고 말았다. 일본의 음모와 계산, 중국의 무능과 방관, 조선의 무지와 착각이 빚어낸 불행한 사건으로 타의에 의해 근대화와 세계화의 막이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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