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항쟁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동시에 직접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유보시킴으로써 현재의 불평등을 잉태한 ‘미완의 체제’였다.
‘87년 헌법’은 대통령 단임제라는 권력 분산에 집중했을 뿐, 자본의 독주를 제어하거나 시민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보장하는 데는 실패했다. 2017년의 촛불집회는 이러한 ‘87년 체제’의 한계를 돌파하기보다는, 훼손된 87년 체제를 복원하려는 성격이 강했다. 이는 광장의 열기가 제도권 정치로 흡수되자마자 급격히 식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정권은 교체되었으되 삶은 바뀌지 않는 ‘헬조선 신양반제사회'의 현실은 지속되었다.
12ㆍ3내란을 극복하며 국민주권정부라는 이재명 정부가 들어섰지만 여전히 취약한 87년 민주주의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시스템 안에서 국정을 운영해나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민주진보세력을 과다 대표하는 민주당이 위기에 빠지면, 시민들은 또다시 ‘민주당이라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도돌이표 민주주의’가 반복되는 상황을 목도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해 보게 된다. 왜 그 치열했던 촛불혁명과 빛의 혁명이 광장을 벗어나면 시민들의 혁명적 열기는 사그라들고 말까? 그리고 함께했던 대의정치인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제도권 대의정치의 늪에 빠져들어 혁신적 정치발전은 오리무중이 되어버릴까?
풀뿌리직접민주주의 주민자치 제도화 실패
이렇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광장에 모였던 시민들이 그 열기를 조직적 대오로 만들어 헌정 직접민주주의(국민발안, 국민소환, 국민투표)와 풀뿌리직접민주주의 주민자치를 제도와 시스템으로 만드는 운동을 끈질기게 전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국민주권정부를 천명하였다. 그러나 ‘for the people’을 넘어, ‘of & by the people’의 국민주권정부가 되어야만 한국은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있다. ‘of & by the people’의 국민주권정부가 되려면,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빼앗긴 직접민주주의 3법(국민발안, 국민소환, 국민투표)을 되찿아야 하고, 국민주권 보장 기본법을 제정해야 한다. 더 나아가 시민의회와 시민법정 그리고 풀뿌리 주민자치와 지방자치 분권 실현을 위한 국민주권의 제도화가 필요하다. 이러한 일을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팔 걷어부치고 직접 나서야지 다른 어느 누구도 국민주권을 제도화해 주지 않는다. 설령 국민주권이 제도화된다 하더라도 그 걸 운영할 자주적 의지와 주체역량이 없으면 보수반동세력에게 업어치기 당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눈앞의 대의정치 생태계에 매몰된 정치인들
다른 하나는 그 광장의 혁명적 열기와 함께했던 대의정치인들은 새로운 정치의 큰 비전과 밑그림을 그려볼 여유를 갖지 못한 채, 당면한 눈앞의 대의정치 생태계 안에서 벌어지는 “소용돌이 정치 메커니즘”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소용돌이 정치메커니즘은 필연적으로 선동정치와 팬덤정치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소용돌이의 한국정치>의 저자 그레고리 핸더슨은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하며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깊은 관심과 해박한 지식을 가졌던 사람이다. 이 저자는 “한국정치는 원자화된 단위들이 중앙권력을 향해 돌진하며,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소용돌이 정치”라 했다. 여기서 소용돌이(Vortex)란 한국사회가 보이는 고도의 동질화와 중앙집중화 현상 때문에 사회의 모든 분야와 개체들은 ‘원자화 된’ 상태에서 오직 권력의 중심만을 향해 돌진하는 사회정치적인 상승기류를 은유한 것이다.
소용돌이 폭풍이 일어나면 그 거대한 흡입력은 모래알의 정치개체를 빨아들여 어떤 이성적인 성찰도, 여야 간의 타협도, 정책을 위한 진지한 토론도 마비시키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치발전에 필수적인 요건인 정치개체 간의 응집을 배양할 수 있는 토양은 황폐화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정치 풍토에서 한국정치의 발전 방향은 ‘다원화를 통한 응집’으로 가야 한다고 권고한다. 어떤 정치의제나 정책을 곧바로 제도화하기보다는 원자화한 모래알들을 접합시키는 것이 제도화의 선결조건이라는 것이다. 비유로 말하면, 모래알을 진흙으로 만드는 응집력이 더욱 긴요한 것이며, 그 다음에야 제도화의 벽돌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좌절의 10년 주기를 끊기 위해서는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 투표일에만 투표권을 행사하는 수동적 ‘소비자 시민'에서, 자신의 삶과 마을, 생산 수단을 직접 통제하고 소유하는 ‘생산자 시민'으로의 진화가 그것이다. 생산시민민주주의로의 진화다. 이러한 생산시민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려면 직접민주주의와 생명지역주의가 함께 어깨동무해야 한다. 생산시민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 그리고 생명지역주의가 함께 어깨동무할 때, 한국민주주의는 선진화된 K-민주주의로 진화 발전하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과 같은 대의민주주의 일변도의 한국민주주의는 절반의 외발 민주주의이기에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러한 체제 하에서는 언제든지 윤석열 정권같은 기형아적 정권이나 극우정권이 등장하여 내란과 참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진화 발전하는 K-민주주의와 제7공화국을 여는 길
지금의 한국정치체제는 불안한 외발민주주의와 보수양당의 적대적 공생체제라는 87년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 한국민주주의는 진화발전하는 선진국형 K-민주주의와 제7공화국을 여는 길을 갈 것이냐, 아니면 지금과 같은 개발도상 중진국 민주주의체제를 유지할 것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형식적 민주주의를 이룩했던 87년 체제는 이제 그 수명을 다했다. 현행 대의민주주의 체제는 엘리트 정치 카르텔이 권력을 독점하는 적대적 공생체제로 굳어졌고, 시민들은 선거철에만 동원되는 수동적 소비자로 전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 시대는 AI로봇 기반 초록문명시대로 급격히 재편되고 있다. 일반대중도 손안의 AI 만능비서를 통하여 수만 명의 석학과 대화하고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그런데 정작 대의정치인들은 문맹율 95%시대에 생긴 대의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전부인 것처럼 자기기만하는 정치행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의제와 직접숙의민주제의 상호보완적 협치
시급히 대의제와 직접숙의민주제가 상호보완적으로 협치하는 구조로 정치시스템을 재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AI친화적으로 살면서 똑똑해진 대중들이 기능상실의 대의민주주의체제를 조롱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때 그 빈틈을 파고들어 국가공동체의 운영을 훼절시킬 수 있는 것이 극우 전체주의 선동정치와 팬덤정치다. 지금 그러한 전조현상이 오늘의 한국정치에서 나타나고 있다.
’국민의힘당’은 윤석열의 12ㆍ3내란 이후에도 극우전체주의 선동정치의 자장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은 ‘더불어민주당’이 그런 ‘국민의힘당’을 저만치 따돌리며 속도감 있는 사회 대개혁과 함께 직접민주주의 국민주권의 제도화를 추진해 나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와는 거리가 먼, 민주진보시민들이 가장 경멸해마지 않는 ‘국민의힘당’과의 적대적 공생의 모습을 6ㆍ3지방선거와 8ㆍ17 전당대회를 통해서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더불어민주당이 민주주의를 가장한 정치 유투버들이 주도하는 팬덤정치의 늪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도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라 여겨진다.
한국민주주의와 정치가 이러한 오류의 늪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시급히 다음과 같은 과제 해결을 위해 정진해야 한다.
그 과제 해결의 첫 번째는 풀뿌리 민주주의 확립이다. 이는 생산시민민주주의와 생명지역주의 그리고 직접숙의민주주의 기반 전국 3500여 개 마을자치 정부 건설에서 시작된다.
두 번째는, 제도적 혁신이다. 이는 직접민주주의 3법(국민발안, 국민소환, 국민투표) 개헌 그리고 직접숙의민주제와 대의제 협치시스템을 통한 제7공화국 기틀 마련이다.
세 번째는, AI 기본사회 초록문명 선도국가이다. 이는 AI 기본사회 모델 제시를 통한 양극화 해소 및 세계 평화 문명에의 기여로부터 시작된다.
아렌트 “파시즘 막는데 실패한 프랑스혁명”
한나 아렌트는 그의 책 ‘혁명론’에서, 풀뿌리민주주의는 파시즘을 막는 최후의 보루라는 관점에서, 프랑스혁명은 실패한 혁명이고 미국독립혁명이야말로 성공한 혁명이라 했다. 그 이유는 미국혁명은 타운홀 미팅(마을자치 원탁회의)과 타운리퍼불릭(마을공화국)같은 풀뿌리민주주의 시스템(토마스 제퍼슨이 제안한 와드시스템, Ward System)에 기초하여 버텀업 방식의 연방제 국가를 건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프랑스혁명은 빈곤과 민중의 고통해결 같은 ‘for the people’의 사회경제적 문제에 매몰되면서, ‘of & by the people’ 차원의 자유와 자치의 제도화에 실패하고, 결국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와 권력집중으로 변질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미국민주주의, 엘리트주의와 관료주의 타락
아렌트가 미국혁명을 높이 평가하면서 크게 우려한 것이 있다. 그것은 미국의 건국자들이 미국 연방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대의제와 연방제 중심으로 구성하고, 혁명기의 소중한 보물과 같았던 풀뿌리민주주의 시스템(타운홀 미팅과 와드 자치공동체)을 헌법적 제도로 공식화하지 않고 배제했던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미국 건국 아버지들의 비극적인 큰 실수라 지적하였다.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공적 영역에 참여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자치공간”이 빠진 대의제는 결국 엘리트주의와 관료주의로 타락하게 되고, 위기시에는 전체주의 파시즘에 잡아먹히게 될 수 있음을 그는 경고했다.
아렌트의 지적과 경고는 오늘날 망가진 미국 민주주의에서 그대로 적중되고 있다. 미국 독립혁명기의 그 역동적이고 참여적이고 공동체적인 미국의 풀뿌리민주주의 시스템은 거의 온데 간데 없어졌다. 대의민주주의 엘리트체제와 군산복합체의 유착 카르텔체제로서의 미국 민주주의는, 그 타락한 민낯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트럼프체제야말로 이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실패한 미국 민주주의냐 세계 최고의 K-민주주의냐
지금 한국 민주주의는 기로에 서 있다. 미국 민주주의와 정치체제를 모범교과서로 여기며 진행된 한국정치가 미국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유턴하여 미국 혁명기의 풀뿌리 기반 미국 민주주의체제와 새롭게 도래하는 디지털AI민주주의 트렌드와 결합하여 세계최고 수준의 K-민주주의로 진화 발전해 나갈 것인가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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