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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의 추억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의 추억
 
[정운현 칼럼] ‘TV토론’에서 불거진 박정희의 창씨개명 등 ‘화제’
 
정운현 기자 | 등록:2012-12-05 20:23:08 | 최종:2012-12-05 21:09:3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군관학교 예과 졸업 당시 박정희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제 말기 창씨개명한 일본식 이름이다. 이 말은 동시에 박 전 대통령의 일본군(만주군) 전력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말은 이제는 세간에 제법 알려졌지만 한동안은 박정희 연구자 등 몇몇 사람들만 아는 정도였다.

그런데 어제(4일) 대선후보 TV토론에서 이정희 후보가 거론하면서 갑자기 세간의 화제로 떠올랐다. TV토론 후 포털 사이트에서 인기 검색어 상위 순위에 오르는가 하면 언론에서도 이를 재조명하고 있다. 마치 ‘죽은 박정희’가 되살아나기라도 한 듯하다.

어제 TV토론에서 분위기를 주도했다는 평가를받고 있는 이정희 후보는 박근혜 후보와의 외교분야 1:1토론에서 돌연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를 거론했다. 얼핏 보면 부적절한 언급같지만 발언내용의 흐름으로 보면 전후관계가 그리 부적절한 것도 아니다. 이 후보의 발언 가운데 관련 대목을 옮겨보면,

“충성혈서 써서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키 마사오, 누군지 알 것이다. 한국이름 박정희. 군사쿠데타로 집권하고 한일협정을 밀어붙인 장본인이다. 유신독재를 하고 철권을 휘둘렀다. 뿌리는 숨길 수 없다. 박근혜-새누리당이 한미FTA를 날치기해서 경제주권을 팔아넘겼다. 대대로 나라주권 팔아먹는 사람들이 (오히려) 애국가를 부를 자격이 없다.”
 

4일 열린 TV토론에서 토론중인 이정희(왼쪽)-박근혜 후보

오늘 오후,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에 대한 문의전화를 두 통 받았다. 하나는 모처에서, 또 한 군데는 <미디어오늘> 조현호 기자였다. 두 사람 모두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에 이어 박정희의 또다른 창씨개명으로 알려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 實)’에 대해서도 진위 여부를 물었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오카모토 미노루’는 근거가 미약해 인정하기 어렵다.

 

먼저 ‘창씨개명’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면, 일제는 징병제 실시에 앞서 1940년 2월 11일 일본의 ‘기원(紀元) 2600년’을 맞아 조선 전역에서 실시했다. 접수마감은 이로부터 6개월간인 동년 8월 10일까지. 이 제도가 실시되자 초창기 조선민중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우리 속담에 ‘성을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인들은 성씨에 대해 강한 집착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문경보통학교(현 초등학교)에서 교사를 하던 박정희는 군인이 되기 위해 만주행을 꿈꿨다. 교사 3년차인 1939년 가을 만주로 가서 군관학교 입교 시험을 본 그는 이듬해 4월 입교하였다. 조선에서는 그의 입교 2개월 전에 창씨개명이 시행됐으며, 같은 일제의 식민지였던 만주국에서는 그로부터 얼마 뒤에 시행됐다.
 

만주국 소위 임관 직전의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

일제의 강압으로 불가피하게 창씨개명을 하게 되더라도 한국인들은 자신의 ‘뿌리’를 남겨두려고 애를 썼다. 성씨를 가문의 상징으로 여겨온 한국인들은 ‘문중회의’를 열어 거기서 집안의 ‘창씨(創氏)’를 결정하였다. 한 예로 김(金)씨의 경우 ‘원래 김씨였다’는 의미에서 ‘金’을 ‘金原’, 또는 ‘본래 김씨였다’는 의미에서 ‘金本’으로 창씨했다.

 

더러는 본관을 따서 씨(氏)로 삼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안동(安東) 권씨 화천군파 종중은 서울에서 각 파 종손이 모여 협의한 결과 본관과 성에서 한 자씩 떼내 ‘安權’으로 창씨하기로 결의했다. 또 전주 이씨의 경우 조선왕가의 일가라 하여 대개 궁본(宮本), 국본(國本), 조본(朝本) 등으로 창씨 하였다.

그럼 박정희와 그의 형제들은 집안은 어땠을까?

박정희 집안도 이런 예를 따랐다. 박정희의 창씨개명(‘高木正雄’) 가운데 창씨 ‘高木’의 경우 ‘高’는 ‘고령(高靈) 박씨’에서, ‘木’은 ‘박(朴) 씨’에서 나무 목(木)을 따온 것이다. 또 개명(改名)인 ‘正雄’의 경우 ‘正’은 본명 ‘정희(正熙)’에서, ‘雄’은 일본식 남자이름의 어투에서 따온 것이다. 참고로 박정희의 맏형 박동희(朴東熙)는 ‘高木東熙’인데, 창씨만 하고 개명은 하지 않았다.

박정희의 창씨개명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는 말로만 전해온 것이 아니라 공식문서 등에서 확인된 바 있다. 지난 97년 박정희의 만주 시절 행적을 취재 중이던 필자는 그의 군관학교 동기생이 소장하고 있던 신경군관학교 예과 졸업 앨범에서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를 확인한 바 있다. 또 일본 육사 졸업생 명부에서도 역시 확인됐다.
 

박정희 '병적기록표'. 오른쪽은 '高木正雄'은 박정희, 왼쪽 '高木東熙'는 그의 큰형 박동희임.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2005년 2월 <연합뉴스>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병적기록표를 입수해 공개했다. ‘임시육군군인군속계(臨時陸軍軍人軍屬屆)’라는 제목의 이 문건은 박 전 대통령의 큰형 박동희 씨가 박 전 대통령의 병적사항을 알리기 위해 1945년 3월 작성해 경북 구미 면사무소에 제출한 것으로 공식문서인 셈이다.

이 문건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1940년 4월 1일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해 예과 2년을 마친 뒤 1942년 10월 1일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본과 2년을 마친 뒤 1944년 12월 23일에는 보병 소위로 임관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기록은 사실과 약간 차이가 있다. 박정희는 1944년 7월 1일 소위로 임관했고, 만 1년 만에 중위로 승진했다.)

한편,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입교 ‘혈서’를 쓴 적이 있다.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에 실린 ‘혈서 군관지원(血書 軍官志願)’ 제하의 기사에 따르면, 박정희는 당시 입교 연령이 지나 입교가 불가능하자 군관학교로 혈서를 써서 보내 ‘충성맹세’를 하였다. <만주신문>에 실린 그의 혈서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계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만주국군)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박정희 '혈서' 기사(만주신문, 1939.3.31)

 

‘혈서 편지’에 이어 주변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군관학교에 입교한 박정희는 우수한 성적으로 예과를 졸업한 후 일본 육사로 진학해 57기로 졸업했다. 그리고는 견습사관을 거쳐 만주군 보병8단에 근무하다가 임관 1년1개월만에 해방을 맞았다. 일제 패망으로 중국군에게 무장해제 당한 박정희 일행은 북경으로 나와 ‘해방 후 광복군’에 잠시 몸을 의탁했다가 그 이듬해(1946년) 5월 중국 톈진에서 미군 수송선 LST를 타고 귀국했다.

박정희는 ‘제2의 반민특위’랄 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국가공인 친일파’ 1006명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해방 당시 박정희는 중위였으니 ‘소위 이상’을 대상으로 한 특별법의 조사대상자에 포함됐다. 그러나 백방으로 찾아봐도 ‘전투일지’ 등 박정희의 친일행각을 입증할 구제척인 자료를 찾지 못해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제외시켜야만 했다. (‘혈서 편지’ 역시 선정작업이 끝난 직후에야 발견돼 아쉬움을 남겼다)

2012년 대선 정국에서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가 등장한 것은 분명 돌발적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군 장교의 딸이 집권여당의 대선후보로 출마하였으며, 현 시점에서는 당선이 유력시 되고 있다는 점이다. 친일과 독재로 얼룩진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가 남긴 유산은 아직도 한국사회에 깊은 상흔으로 남아 있다. 그의 딸 박근혜 후보로서는 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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