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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통일열사. 사형수 신향식 선생 추도

 
 
반제 자주와 반파쇼 민주화 위해 헌신한 불꽃 삶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5/10/09 [20:17]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자주통일을 위해 불꽃 같은 삶을 살다 사형이라는 극형으로 생을 마감한 신향식 선생을 기리는 추도 모임에 참여한 단체 인사들이 자주 통일을 외치고 있다.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아직은 할 일도 많고, 가야할 길도 멀리 남았지만 사대에 쪄들은 독재의 망나니짓에  생을 마감해야 했던 시대의 표상이 있다.

 

연탄배달과 가정교사를 하며 한국의 최고학부인 서울대에 25세 늦깎이로 입학해 사회정의를 위해 학생시절을 바치고, 얼음장사와, 월부책장사를 하며 조국의 자주화와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신향식 선생이 바로 그이다.

 

▲ 신향식 선생은 영정으로 남아 남은 자들을 맞이했다.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선생의 피를 수혈 받아 자주통일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전남 고흥이 고향이었던 선생은 고학으로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노동청 공무원과 출판사 편집자 등을 지낸 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수감되어 3년 6개월을 감옥에서 지낸 뒤 출소했다.

 

신향식 선생의 감방 출소는 더 큰 유신의 감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 선생의 정의의 양심은 민족자주화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조직을 만들어 투쟁했다.

 

신선생은 1976년 서울대 동문인 이재문 선생 등과 함께 ‘반유신민주화, 민족해방을 목표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약칭 남민전)를 결성하여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선생은 1979년 10월 검거될 때 까지 미국과 일본 제국주의와 유신독재정권을 반대하는 투쟁에 전력을 다했다.

 

신향식 선생의 민족자주화와 반파쇼 민주화에 대한 불꽃같은 삶은 전두환 군부독재에 의해 1982년 10월 8일 사형이라는 극형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 범민련 성원들과 장기수 선생들이 신향식 선생의 유지를 받들 것을 결의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하지만 선생의 넋은 자주. 민주. 통일을 바라는 겨레의 가슴에 살아 오늘도 투쟁의 불을 지피고 있다.

 

자주통일인사들은 신향식 선생의 불꽃 같은 삶을 기리기 위해 9일 선생이 묻힌 경기도 광주 공원 묘원에서 추도식을 가졌다.

 

추도식은 류경완선생이 신향식 선생의 걸어오신 길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약력 소개에 이어 감남주 선생이 육성으로 남긴 시 전사2가 녹음을 통해 울렸다.

 

전사2

 

  해방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많은 사람이 실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수천 명이 죽어갔다
  수만 명이 죽어갔다
  수십만 명이 다시 죽어갈지도 모른다
  지금도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나라 곳곳에서 거리에서 공장에서 감옥에서
  압제와 착취가 있는 곳, 바로 그곳이다.

  어떤 사람은 투쟁의 초기 단계에서 죽어갔다
  경험의 부족과 스스로의 잘못으로
  어떤 사람은 승리의 막바지 단계에서 죽어갔다

 

  이름도 없이 얼굴도 없이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내는 지하의 고문실에서
  쥐도 모르게 새도 모르게 죽어갔다
  감옥의 문턱에서
  잡을 손도 없이 부를 이름도 없이 죽어갔다

 

  그러나 보아다오 동지여!
  피의 땀과 눈물의 양보없이 
  자유의 나무는 자라지 않는다 했으니
  보아다오 이 나무를
  민족의 나무 해방의 나무 투쟁의 나무를
  이 나무를 키운 것은 
  이 나무를 이만큼이라도 키워 낸 것은
  가신 님들이 흘리고 간 피가 아니었던가

 

  자기 시대를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자기 시대와 격정적으로 싸우고
  자기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 데
  기꺼이 동의했던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오늘 밤
  또 하나의 별이 
  인간의 대지 위에 떨어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투쟁의 길에서 자기 또한 죽어갈 것이라는 것을
  그 죽음이 결코 헛되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렇다, 그가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은
  어머니인 조국의 대지에 스며들어 언젠가
  어느 날엔가는
  자유의 나무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이며
  해방된 미래의 자식들은 그 열매를 따먹으면서
  그가 흘린 피에 대해서 눈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쑥스럽게 부끄럽게 이야기할 것이다.

 

▲ 서울대 동기동문이었던 조영건 명예교수가 신향식 선생의 뜻을 받들어 우리민족끼리 기치를 높이 들고 자주통일의 길로 나아가자고 호소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남민전 활동을 함께 했던 신우영 선생은 추도사를 통해 “자주통일을 염원하다 사형을 당한 신향식 선생이 더욱 그립다”면서 “신향식 선생은 언제나 조용한 어투로 모두가 잘 살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회고했다.

 

서울대 동문인 조영건 명예교수는 “신향식 선생은 만학도로 서울대에 입학하여 엄혹한 시대를 뚫고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헌신했다”면서 “6.15시대에 우리는 신향식 선생의 넋을 이어 받아 우리민족끼리의 기치를 높이 들고 분단장벽을 돌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신향식 선생의 장남인 신원호 씨는 아버지 같이 살 수는 없지만 자주 통일을 위한 길에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유족인 장남 신원호 선생은 “아버님과 같은 삶을 살 수는 없지만 자주.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겠다.”고 유족을 대표해 약속했다.

 

50여명이 참여한 이날 추도식은 ‘우리의 소원은통일’ 노래로 막을 내렸다.

 

약력

1934년 전남 고흥 출생

1958년 서울대학교 철학과 입학

1964년 노동청 산재보상과 근무

1966년 동아출판사 편집부 입사

1968년 통일 혁명당 사건으로 투옥, 3년 6개월형 선고받음

1972년 비전향 만기출소

1976년 남민전 결성, 중앙위원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

1980년 대법원 사형 확정 판결

1982년 10월 8일 사형 집행

           경기도 광주공원묘지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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