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

라라

지금도 그런 씨츄에이션이 없잖지만,

식사 도중에 말을 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줄들 알던 시절이 있었더랬죠.

 

대화가필요해 

개콘 <대화가 필요해> 중에서. 이 코너엔 오래도록 '소통금는 곧 위엄작렬'인 줄 아온 우'아버지'

의 권위(혹은 이걸 꼭지점으로 하는 가족 질서)에 한 유쾌한 비틀기의 재미가 있다.

 

 

일이 났대 봐야 입 속 밥알들의 돌연한 일탈을 목격하는 게 고작였을 텐데도

학교에선 학생답게 공부만, 작업장에선 근로자답게 일만 해야 하듯,

식탁에선 밥만 먹어야 하는 게 그저 미덕인 줄 알던 시절.

사실 따지고 보면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그래야 한다니 그러는 것들이 한둘이 아니라지만,

이러기로 치면 식탁에서 지키는 침묵만한 게 또 있을까 싶어요. 그렇다고 그 침묵을,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지켜야 했던 건 물론 아녔겠죠.

 

그럼 왜?

 

제 생각엔 그래요. 그 침묵이 자아내곤 하던 우리 ‘아버지’들의 근엄한 아우라가,

성원들과의 ‘소통’이 고통일 뿐인 그네들의 안쓰런 무능력을 뭔가 있어 보이게 하는 데

크게 쓸 만했어서가 아닐까. 그냥 있음 현상유지라도 할 걸,

잘못 입 열었다가 행여 없어 보일까 전전긍긍하는 어떤 두려움의 발로였달까요.ㅋ

없어 보인대 봤자 아버지도 자식들하고 별다를 것 없다는 게 고작였을 텐데 말이죠.

 

그 바람에, 본인이 소통을 계속 고통인 줄 아는 것만큼이나

자식 세대까지 애꿎게 그 고통을 분담당해야 했던 게 아녔을까 싶대요. 참 슬픈 일인 거져.

자기만 그렇게 무능하고 말아도 시원찮을 판에, 여럿이 그리 되고 말았던 셈이니까요.

 

혼자선 청산유수다가도 그 말을 다른 이들과 섞는 덴 놀라우리만치 서툰 경우를 곧잘 봅니다.

단적으로, MBC 100분 토론 같은 데 나오는 상당수 패널들을 보세요. 뜨르르한 학벌에,

뜨르르한 이력을 자랑한다는 그네들도, 막상 얘기 주고받는 거 보면 어쩜 저리도 서툴고

헛다리 대마왕일까 싶어 민망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죠.ㅋ; 이게 다,

당장 저부터도 그렇지만, 국민/초등학교 때부터 심지어 대학원 과정에 이르기까지

뭔가 안다는 걸 머리에 꾸역꾸역 집어넣는 걸로만 알았지,

이를테면 탁구나 테니스에서 곧잘 보는 긴(그래서 재밌는) 랠리의 산물이란 건

통 모르고 살아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자기 한 말에 대해 ‘토’를 달면 일단 언짢아하거나 심하면 화부터 내고 말이죠.

우리 ‘아버지’ 세대에서 유달리 그렇다뿐이지, 아버지 세대만 그런가요 어디.ㅋ

 

여하간, 자기네가 그나마 알고 있는 걸 주고받는 것만도 도무지 서툰

TV 속 이른바 '사회지도'층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간 우린 뭔가 안다는 걸 마치 스냅샷처럼 알고 있는 데 익숙했지,

정작 그렇게 찍힌 실제 대상에 대해선 무지해지는 법을 배워왔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하대요.

 

 

이렇게나 한껏들 잡고 있던 '폼'은, 정작 '소통의 입'이 열려야 할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돌연 증발하일쑤다. 생폼사라고, 아무리 제멋에 살고 죽는다지만, 그 (똥)폼 탓에 애꿎은 사람들까지 여럿 죽는 거면 얘기가 좀 다르다.

 

그래설까요. 《다윈의 식탁》 원고를 받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더랬어요.

이건 다윈이나 진화론에 대한 책이 아니구나 하는.

 

줄창 진화론 얘기구만, 뭔 소리냐구요? 물론 진화론이 메인테마긴 하죠.

그치만 굳이 진화론 아닌 다른 ‘론’이라고 해도 중요한 건,

그게 지적·정서적인 ‘랠리’ 과정을 거쳐 ‘생성’된다는 사실. 그래야 지식은,

이를테면 특정 시기에 소위 좋은 학교 가겠다고 억지로 쑤셔넣어야 할,

그래서 앎 자체에 대한 흥미마저 잃게 만드는 무미건조한 과정이 아니라, 때론 유쾌하고

때론 살벌한 수다 속에서 먹음직스레 영그는 열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려는 듯싶었습니다.

과학철학자라는, 그리고 다윈의 진화론만큼은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장대익 선생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말이죠.

 

이렇게 보면 《다윈의 식탁》은 ‘앎의 기술’에 대한 재기발랄한 매뉴얼이라 해도 되잖나 해요.

그 기술을 터득하는 건 혼자가 아니라ㅡ

설사 생각이 좀 다르더라도 여럿일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걸 아울러 보여주면서 말이죠.

기나긴 랠리의 즐거움을 우습게 아는 앎은,

아무리 고상한들 지적인 콜레스테롤 수치만 높일 뿐임을 보여준다고 할까요.


어쨌거나 이 원고를 통해 앎/지식이란 걸, 우리 삶을 망치는 흉기가 아니라

오롯이 담아낼 용기로 만드는 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는 거.

(장 선생님은 이 방법을 일러 '식탁하기tablize'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만..)

 

가공할 만큼 촉박한 일정으로 진행을 해야 했음에도 나름대로 므흣했던 건,

그나마 이래서가 아녔나 싶네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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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8 02:41 2009/05/28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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