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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시의 마법사 (A Wizard of Earthsea, 1968)

얼마 전 포스트에서 지브리의 완성도 지지리도-_- 낮은 <게드전기>에 대해 혹평을 했었는데, 원작도 안 읽어보고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게 좀 민망스러워 <어스시의 마법사>를 읽기 시작했더랬다. <빼앗긴 자들>과 <바람의 열두 방향>에서 르 귄이라는 작가의 책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이번엔 마음 단단히 먹고 스타트를 끊었다. 그런데 이게 웬 걸. 생각보다 책이 술술 읽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4권인 <테하누> 전까지의 얘기였지만-_-

(네오스크럼님이 알려주신대로) 르 귄의 <어스시> 시리즈는 5권의 장편과 7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국내에는 <테하누Tehanu: The Last Book of Earthsea>까지 장편 4권만 번역되어 들어와 있다. 단편 중 두 편은 <바람의 열두 방향>에 실려있는데, 나머지 단편들은 아직 번역 안된 듯하다.

주의 : 이하 스포일러성입니다.

<어스시> 시리즈에서 주인공은 "새매"라 불리우는 "게드"다. <게드전기>를 보면서 상당히 궁금했던 점 중 하나가 주인공은 아렌인데 왜 작품 이름은 "게드전기"인가...하는 것이었는데, 사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게드의 활약상은 3권인 <머나먼 바닷가The Farthest Shore>까지가 마지막이다. 4권인 <테하누>에서 게드는 마법사로의 힘을 잃고 자신감까지 잃어버려 존재감이 매우 희박해진다. 대신 2권인 <아투안의 무덤The Tombs of Atuan>에서의 "아르하"가 성장한 "테나"와 화상입은 꼬마아이 "테루"가 <테하누>의 스토리를 끌어가게 된다.

위의 설명만 봐도 <어스시> 시리즈가 상당히 방대한 스토리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리즈의 미덕은 스토리의 덩치만 큰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잘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스시>라는 또 하나의 세계는 "칼과 마법과 용"으로 대표되는 판타지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독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 진부한 전형성을 탈피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어스시>의 이름의 법칙을 들 수 있겠다. <게드전기>에도 이 내용이 다뤄지기는 하지만 그닥 중요하단 느낌을 받지는 못했는데, <어스시의 마법사>에서 게드가 로크에서 거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 들콩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줄 때,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려준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행위인지 느낌이 팍 온다. 또한 용의 존재 역시 여타 판타지 소설들과 다르다. <어스시> 시리즈에서 용은 인간의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아예 다른 존재다. 하지만 <테하누>에서 용과 인간이 사실은 한 종족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것을 암시하는 노래가 나오는데, 이러한 발상들 자체가 <어스시> 시리즈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구성하는 요인이 아닌가 한다.

<어스시> 시리즈의 평을 검색해 보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3권인 <머나먼 바닷가>를 최고의 작품으로 친다. <머나먼 바닷가>는 악의 화신인 거미과 맞선 게드의 이야기이도 하고, 고귀한 핏줄을 타고난 소년 아렌의 성장기이도 하다. 어떻게 보면 <머나먼 바닷가>는 판타지 소설의 공식에 상당히 충실한 작품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나 싶은데, 어떻게 보면 르 귄의 작품치고는 상당히 의아한 작품이 아닌가 한다.

개인적으로는 시리즈 중에서 <테하누>를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고 싶다. <테하누>에서 르 귄은 마법사 세계의 뿌리깊은 가부장적 가치관을 다루고 있다.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주인공의 위치를 게드가 아닌 테나와 테루가 담당하고 있는데, <테하누>는 이들이 마초스런 남성들-마법사, 불량배, 심지어는 테나의 아들까지-에게 당하는 고난이 스토리의 대부분이라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 과정을 거치면서 테나는 가부장적인 부조리한 세상을 인식하게 되고,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1~3편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바른 사고방식을 가진 것처럼 묘사되었던 게드마저도 자신이 지닌 가부장성을 드러내는 부분이 재미있다.

<테하누>에서는 분명 전편이 지닌 경쾌함-주인공이 악의 무리를 해치우는-은 발견할 수 없다. 대신 테나와 테루가 여성-장애인으로 겪게되는 갖은 고난을 따라가며 분노와 함께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답답함의 시간이 길어서였는지, 마지막에 칼레신이 등장하여 악당들을 쓸어버렸을 때의 통쾌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 같다-_-ㅋ

스포일러 끝

이건 달군의 이야기였지만, <게드전기>의 개봉을 계기로 <어스시> 시리즈의 나머지 번역판이 나와주길 바랬는데, 흥행 실패 때문인지-_- 영 소식이 없는 듯 하다. <테하누> 이후의 이야기인 는 2001년에 출간되었는데, <테하누>의 부제에서 "어스시 마지막 이야기"라고 해 놓고 후속작을 낸 이유도 심히 궁금하다. 얼렁 번역되어 나와 줬으면 하는 바램이 있네~

* 번역안된 단편들과 에 대해 싸락눈님이 쓰신 글들이 있다. 원서를 마음껏 읽을 수 있는 분들, 부럽기 짝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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