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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容疑者Xの獻身, 2006)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의 <용의자 X의 헌신>은 매우 성공한 추리소설이다. 일본 대중문학 신진작가들의 등용문이라 할 수 있는 나오키상 2006년 수상작이고, 한국에서도 처음 출판된지 1년만에 적어도 8쇄 이상을 찍어내는 데 성공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책을 누구 빌려주는 바람에 정확한 수치는 알 수가 없지만)

작가는 책 곳곳에서 단서들을 흘리고 독자들은 최대한의 두뇌를 동원하여 결말을 맞추려 하는 것이 추리소설인만큼, 추리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극과 극일수밖에 없다. 추리소설의 트릭이란 어린애도 눈치챌 수 있을만큼 허접해도 욕먹고, 누구도 맞출 수 없을만큼 복잡해도 욕먹고, 논리적으로 비약해도 욕먹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결말 부분에 앞의 스토리에 나오지 않은 근거를 갑자기 꺼내는 김전일은 재미가 없다.) 게다가 <용의자 X의 헌신>은 처음부터 범인의 정체를 드러내놓고 시작하기 때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한 번씩 돌려가며 범인을 찾는 쏠쏠한 재미도 없다. 이 책은 트릭 자체가 재미없으면 끝장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Notice : 아래 내용은 스포일러입니다. 책을 읽으시려는 분은 절대 읽지 말아주세요.

이렇게 위험한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용의자 X의 헌신>은 매우 성공적인 추리소설이다. "달마" 이시가미는 연정을 품고 있는 야스코 모녀의 살인을 은폐하기 위해 모종의 트릭을 꾸민다. 이시가미의 트릭은 매우 대담해서 원래 시체는 잘게 분리하여-_-;;; 딴 데 감추고, 자신이 노숙자 "기사"를 살해하고 그 시체를 원래 시체인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다. 이 트릭의 전모는 스토리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데, 이 트릭을 눈치채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 살인이 일어난 시점이 경찰이 시체를 발견한 날의 전날인 3월 10일이 아니라 3월 9일이었다는 점, 둘째, 노숙자 "기사"가 살인이 일어난 이후 갑자기 사라졌다는 점.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중요한 사실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스토리 곳곳에 이를 추리할 수 있도록 교묘한 장치를 해 놓았는데, 그 중 스토리의 제일 처음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 스토리는 이시가미가 "출근 길"에 노숙자들이 모여사는 강가를 지나가며 "기사"를 보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 장면은 그 다음 이시가미가 도시락 집에서 야스코를 만나는 장면으로 전환되며 금방 기억에서 사라져버렸는데, 만약 이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이시가미가 3월 10일, 11일 오전에 휴가를 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야스코 모녀의 살인이 이시가미가 출근한 날인 3월 9일이 일어났다는 점을 추리할 수 있었을 것이며, "기사"가 매일 앉아있던 벤치가 비어있다는 묘사를 통해 "기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추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를 추리할 수 있었으면 마지막 장면의 충격도 훨씬 덜했겠지만...

Notice : 스포일러 끝

물론 <용의자 X의 헌신>이 미덕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시가미의 트릭이 워낙 정교한 나머지 이시가미의 의심하며 그의 범행을 밝혀내는 유가와 마나부의 추리는 논리적이라기보다 직관적인 면이 강하다. 그리고 야스코를 헌신적으로 사랑한 나머지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는 이시가미나, 이시가미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그를 끝까지 의심하는 유가와 역시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두 얘들은 천재니깐 뭐...(천재면 용서된다-_-)

이 책의 리뷰 중 많이 지적되는 부분이 오자와 탈자 문제이다. 하지만 난 그닥 오자 때문에 불편하단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판을 거듭하며 개정된 결과인지 아님 오자에 신경쓸 여유도 없이 스피디하게 책을 읽어서 그런지 잘 모르겠다. <용의자 X의 헌신>은 결점도 많이 가지고 있는 책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시가미의 훌륭한 트릭과 히가시노 게이고의 치밀한 구성은 추리소설 본연의 재미를 느끼게 하는데 충분하다.

사실 <용의자 X의 헌신>은 "감성적인 추리소설"이라는 점을 크게 어필하며 인기를 끈 부분이 있다. 분명 야스코에 대한 이시가미의 말 그대로 헌신(獻身, 몸을 바침)적인 사랑은 다른 추리소설과 색다른 점이긴 한다. 하지만 <용의자 X의 헌신>은 정교한 트릭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훌륭한 추리 소설이라 생각한다. 역시 추리소설의 진정한 가치는 "누구나 맞출 수 있으면서도 쉽게 맞출 수 없는 트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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