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국가와 혁명

국가와 혁명

 

들어가며

 

이 글에서는 국가와 혁명 그리고 이행기 국가와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와 레닌 등의 언급을 살펴보면서, 실천상의 함의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1. 사멸시켜야 하는 국가

 

“현대 산업과 세계시장이 확립되면서부터는 마침내 (부르주아지는) 스스로의 힘으로 현대의 대의제 국가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현대국가의 집행기구는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동사를 관리하는 위원회일 뿐이다.”(공산주의자 선언)

 

“국가는 사회가 화해불가능한 자기모순관계에 빠져 있다는 점과 그 사회가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는 화해불가능한 적대감으로 분열됐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계급간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이 계급들 간의 적대감으로 인하여 자신과 사회가 무익한 투쟁을 벌이지 않기 위해서는 외견상 사회 위에 군림하는 하나의 권력이, 즉 질서라는 테두리 안에서 그 사회를 유지하고 계급간의 갈등을 조화시킬 권력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 즉 사회로부터 나왔지만 사회보다 상부에 위치하며 사회로부터 그 자신을 점점 소외시키는 권력이 바로 국가인 것이다.…

계급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필연적으로 사멸한다. 그때의 사회는 생산자들간의 자유롭고 평등한 상호결합에 기초하여 생산관계를 재조직하게 될 것이며, 모든 국가기구들을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로, 즉 고대 박물관으로 보내어 물레나 청동도끼 옆에 나란히 전시하게 될 거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권력을 잡고 나서는 먼저 생산수단을 국유화한다. 또한 그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는 프롤레타리아트로서의 자신을 폐지하고 모든 계급차별과 계급 적대감을 폐지하며 또한 국가로서의 국가를 폐지한다. … 마침내 국가가 진정 사회전체를 대표하게 될 때에 국가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복종해야 할 그 어떠한 사회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자마자, 그리고 현재와 같은 생산의 무정부성에 기초한 자신의 존립을 위한 개별적 투쟁과 이 투쟁에서 발생한 갈등 및 과잉생산 등이 계급통치와 함께 사라지게 되자마자, 복종을 위한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게 되며, 그 어떤 특수한 강제권력 즉 국가는 필요없게 된다. 국가가 진정 사회전체를 대표하게 되고 사회전체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게 될 때, 제일 먼저 취하는 행동은 바로 국가로서의 최후의 독자적 활동으로 되어버릴 것이다. 차츰 모든 영역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에 대항 국가의 개입이 불필요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국가는 사멸하게 되는 것이다. 개별적 인간들로 구성되었던 정부는 자원에 대한 통제기능과 생산과정에 대한 관리기능으로 대체된다.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멸하는 것이다.”(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

 

“사회적인 힘 즉 분업 속에 조건지워진 다양한 개인들의 협업에 의해서 성립한 다기한 생산력은 그 협업 자체가 자유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연성장적인 것이기에 이들 개인들에게 자신들의 단결된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밖에 있는 하나의 낯선 힘으로 나타나는 바,…

오직 생산력들의 보편적인 발전으로써만 비로소 인간의 보편적 교류가 확립되며, 따라서 한편으로는 모든 민족들 속에 ‘무산자’대중이라는 현상이 동시에 만들어지고(보편적 경쟁) 각 민족들이 다른 민족들의 변혁에 의존하도록 되어 결국에는 세계사적인 경험적으로 보편적인 개인들이 지역적 개인들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이것 없이는 1. 공산주의는 하나의 지역성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며, 2. 교류의 힘들 자체도 보편적인 힘들, 그리하여 견딜 수 없는 힘들로서 발전할 수 없을 것이고, 향토적 미신적 상황에 머무르고 말 것이며, 그리고 3. 교류의 모든 확장이 지역적 공산주의를 폐지할 것이다. 공산주의는 경험적으로는 오직 주된 민족들의 ‘일거의’또한 동시적인 행동으로서만 가능하며, 이는 생산력들의 보편적인 발전 및 그와 결부된 세계적 교류를 전제로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부른다.

이러한 노동이 완전히 불안정한 처지에 놓이는 것은 세계시장을 전제로 한다. 이렇듯 프롤레타리아트가 오직 세계사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음은 그들의 사업인 공산주의가 세계사적 존재 일반으로서만 현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토대, 즉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생산을 공산주의적으로 조절하고 그러한 조절을 통하여, 인간들이 그 자신들의 생산물에 관계할 적에 가지게 되는 낯설음을 철폐하는 것과 함께 수요 공급관계의 힘이 소멸되어버리는 일이, 인간이 다시 한 번 교환, 생산, 인간들의 서로서로에 대한 행위의 방식을 장악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공산주의적 혁명을 통하여 전면적인 의존성, 즉 개인들의 세계사적인 협업의 이 최초의 자연성장적 형태는, 인간 상호간의 작용으로부터 창출되었지만, 지금까지는 인간에게 완전히 낯선 힘으로서 외경시되어 인간을 지배해 왔던 이러한 힘들에 대한 통제와 의식적 지배로 바뀌게 된다.”(독일 이데올로기)

 

이처럼 국가는 화해할 수 없는 계급적대의 산물이고, 따라서 계급적대가 종결되었을 때에만 그 필요성도 종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 특히 현대 자본주의 국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국가는 신분제 국가가 아니라 만인의 국가, 국민의 국가라는 외양과 형식을 가지고 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1조의 가사처럼 모두의 국가 즉 보편성으로서의 국가를 형식으로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현대국가의 집행기구는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동사를 관리하는 위원회일 뿐이다”는 맑스의 언급처럼 국가가 지배계급의 도구라는 입장도 있고, 국가는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다는 입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실천의 차이를 가져온다. 국가가 무계급적인 공간이고, 의회에서 다양한 세력이 각축하는 장이라면 개량의 여지도 있고, 평화적 이행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모두의 국가라는 형식 속에서 그들만의 이익이 관철되는, 즉 보편의 형식 속에서 특수의 이해가 관철되는 것은 본질과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겠고, 우연 속에서 관철되는 필연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즉 총자본의 이해는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서 궁극적으로 관철된다. 그러므로 모든 현상을 본질로 환원하려는 태도도 문제이겠지만, 형식의 보편성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부르주아지도 겉으로는 부정할 수 없는 모두의 국가라는 명제는 모두의 국가이어야 한다는 당위의 투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당위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의 투쟁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의 이용가능성을 열게 된다. 보편적 정의를 궁극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부르주아 국가의 허구를 폭로하는 데에 중요하다. 또 한편으로는 체제에 대한 환상 혹은 개량주의에 대한 환상을 없애기 위해서 항상 비타협적 태도를 견지할 필요가 있고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본질을 폭로할 필요가 있다.

 

2. 혁명

 

“폭력혁명 없이 부르주아 국가를 프롤레타리아 국가로 대체할 수는 없다. 즉 국가 일반의 폐지는 사멸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국가와 혁명)

 

“공산주의 혁명은 전통적 소유관계와의 가장 근본적인 결별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혁명의 발전은 전통적인 사상과의 가장 근본적인 결별을 포함한다.…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것, 민주주의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임을 보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점차로 일체의 자본을 빼앗고, 모든 생산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총생산력을 가능한 한 빨리 증대시키게 될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소유권과 부르조아적 생산조건에 대한 전제적 침해를 통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경제적으로는 불충분하고 무리한 듯이 보이지만 발전해 가는 가운데 스스로를 뛰어 넘어 낡은 사회질서에 대한 더 이상의 침해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조치, 생산양식을 전면적으로 혁명화하는 수단으로서 불가피한 조치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은 물론 나라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선진적인 나라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매우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잇을 것이다.

1. 토지소유를 폐지하고 모든 지대를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한다.

2. 소득에 대해 높은 누진과세를 적용한다.

3. 모든 상속권을 폐지한다.

4. 모든 망명자와 반역자의 재산을 몰수한다.

5. 국가자본과 배타적 독점을 가진 국립은행을 통하여 신용을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한다

6. 전달`운송 수단을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한다.

7. 국가소유의 공장과 생산도구를 증대한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공동의 계획에 따라 토질을 개선한다.

8. 모두가 똑같이 노동의 의무를 진다. 특히 농업을 위한 산업군을 편성한다.

9. 농업과 제조업을 결합한다. 인구를 전국적으로 보다 균등하게 분배함으로써 도시와 농촌간의 차별을 점차 폐지한다.

10. 공립학교에서 모든 어린이를 위한 무상교육을 실시한다. 현존하는 어린이의 공장노동을 폐지한다. 교육과 산업적 생산을 결합한다, 등등.

발전과정에서 계급적 차별이 없어지고 모든 생산이 광범위한 전국적 단체의 손에 집적되면 공권력은 정치적 성격을 잃게 된다. 이른바 정치권력이란 본래 단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는 조직된 힘일 뿐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와의 싸움에서 상황의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계급으로서 조직하게 되면, 또 혁명을 통해 지배계급으로 자라나고, 그 자체로 낡은 생산조건을 무력으로 없애버리게 되면, 그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들 생산조건과 더불어 계급적대와 계급일반의 존재조건을 없애버리게 될 것이며, 또 그럼으로써 한 계급으로서 가지는 자신의 지배권도 폐지하게 될 것이다.”(공산주의자 선언)

 

“노동자 계급이 투쟁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국에서 계급으로 조직되어야 하며, 국내가 그들의 투쟁의 직접적 무대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그러한 한에서 그들의 계급투쟁은 내용상으로가 아니라 ‘공산주의당 선언’에 씌여 있듯이 ‘형식상으로’ 일국적이다.…

계급차이의 폐지와 더불어 그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사회적 및 정치적 불평등도 저절로 소멸한다는 점을 말해야 했다.”(고타강령 비판)

 

“즉 국가가 화해불가능한 계급적대감의 산물이고 사회의 상부에 위치하면서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점점 소외시키는’ 권력이라면, 억압받는 계급의 해방은 폭력혁명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이 창출했고, 또한 이러한 소외를 이루고 있는 몸체인 국가권력기구의 파괴를 통하지 않고서는 계급해방이 불가능하다는 명백한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그 권력은 자신들 마음대로 사람들을 처분할 수 있는 감옥 등을 지닌 특수한 무장조직체를 보유하고 있다. 우리가 특수한 무장조직체라고 부르는 것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모든 국가의 속성인 공권력은 무장한 대중과도, ‘자활적인 무장조직’과도 ‘직접적으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엥겔스에 의하면 부르주아 국가는 사멸되는 것이 아니라 폐지되는 것이다. 혁명 후에 사멸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가, 또는 준국가(semi-state)이다.”(국가와 혁명)

 

“인간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완벽한 양과 질의 먹을 것과 마실 것, 집과 옷을 조달할 수 없는 한 해방될 수 없다는 것. 해방은 하나의 역사적 행위이지 사상 속의 행위가 결코 아니다.

현실에 있어서, 그리고 실천적 유물론자들 즉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현존 세계에 혁명을 일으키는 것, 기존의 사태를 실천적으로 공격하고 변화시키는 것…

분업은 물질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의 분할이 등장하는 시점으로부터 비로소 진정으로 분업이 된다.

특수이해와 공동이해 사이의 이러한 모순으로 말미암아 공동이해는 현실의 개인 및 전체 이해에서 분리된 채 국가로서 그리고 동시에 환상적 공동(체)성으로서 독자적 형태를 취한다…. 국가 내부의 모든 투쟁들, 민주제 귀족제, 군주제 사이의 투쟁, 선거권을 쟁취하려는 투쟁 등등은 상이한 계급들간의 현실적 투쟁들이 수행되는 환상적인 형태-일반적으로 보편적인 것은 공동적인 것의 환상에 불과하다-에 지나지 않는다. 지배를 추구하는 모든 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우처럼 비록 그들의 지배가 모든 낡은 사회 형태 전체와 지배 일반의 폐지의 조건이 된다고 할지라도, 자기 계급의 이해를 다시 보편적인 것-정치적 지배를 추구하는 모든 계급은 최초의 순간에는 이를 지향해야 한다-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정치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독일 이데올로기)

 

“지배계급의 사상들은 어떠한 시대에도 지배적 사상들이다. 즉 사회의 지배적 물질적 힘인 계급은 동시에 사회의 지배적인 정신적 힘이다. 물질적 생산수단을 제 마음대로 처분하는 계급은 이로써 동시에 정신적 생산수단도 제 마음대로 처분하며, 그 결과 정신적 생산수단이 박탈된 계급의 사상들은 이로써 동시에 대체로 지배계급에 종속된다. 지배적인 사상들이란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들의 관념적 표현, 즉 사상들로서 파악된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들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따라서 한 계급을 지배계급으로 만드는 관계들의 관념적 표현, 그러므로 그 지배계급의 지배사상 이상의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모든 새로운 계급은 그들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반드시 그들의 이해를 사회의 모든 성원의 공동이해로서 제사할 필요가 있는 바, 그들의 사상들에 보편적인 형태를 부여하고 이것들을 유일하게 이성적이며 보편타당한 사상들로서 제시할 필요가 있다. 혁명을 일으키는 계급은 바로 그들이 하나의 계급에 대립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계급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전체의 대표자로서 등장하며, 그 유일한 지배계급에 맞서서 사회의 전체 대중으로 나타난다.”(독일 이데올로기)

 

“뿌리를 박은 현실주의적 파악을 다시 민주주의자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에게 익숙한 이데올로기적 권리설이나 다른 속임수를 통해 왜곡하려는 것이 얼마나 나쁜지…

이른바 분배를 가지고 야단법석을 떨고 거기에 중점을 두는 것은 도대체 잘못된 것이다.…

소비수단의 그때그때의 분배는 생산조건 자체의 분배의 귀결일 뿐이다. 그런데 생산조건의 분배는 생산방식 자체의 특성이다.”(고타강령 비판)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생각은 “폭력혁명 없이 부르주아 국가를 프롤레타리아 국가로 대체할 수는 없다. 즉 국가 일반의 폐지는 사멸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공산주의 혁명은 전통적 소유관계와의 가장 근본적인 결별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혁명의 발전은 전통적인 사상과의 가장 근본적인 결별을 포함한다.…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것, 민주주의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임을 보았다.”라는 문장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모든 혁명은 궁극적으로는 폭력적인 투쟁이지만 평화적인 이행의 가능성을 소진한 후에야 폭력혁명이 현실성을 가지게 되고 선동이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혁명은 현실대중의 공감과 참여가 필수적이라고 할 때, 활동가가 아닌 대중에게 체제와의 모순을 심화시켜 노골적 적대의 국면으로 발전시키기 전에는 폭력이 공감을 받기 어렵다. 최선을 다한 비타협적 투쟁만이 이행의 전망을 열어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남미 좌파정권의 집권의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들이 자본주의를 부정하거나 극복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하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한 것인가? 좌파의 제도내 집권은 이행에 유리한 고지임은 분명하다.

또한 혁명은 전통적인 소유관계와 사상과의 결별을 포함한다고 한다. 사적 소유의 사회적 소유로의 이행은 험난할 것이다. 인구의 3%도 안되는 자본가계급이지만 그들은 소부르주아지와 소유권 절대의 사상을 공유하고 있다. 또한 수많은 개미떼 주식투자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임대소득 혹은 불로소득으로 먹고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부득이 사회적 소유로의 이행은 단호하지만 점진적인 방식을 띠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대독점 자본과 금융자본이 해당될 것이고, 공공적 이익을 위해서 전기 수도 기타 통신과 같은 인프라 산업이 해당될 것이다. 또한 외국인 주식소유 비중도 문제가 된다. 결국 유상몰수 국유화의 방향을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혁명 직후 자본의 사보타지나 저항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섬세한 계획이 필요하고, 혁명 이전에 대중의 광범한 요구로 되어야만 한다. 한국은 자본의 집중도가 높은 만큼 대독점자본만 국유화하면 혹은 재벌 소유지분만 국유화해도 경제에 있어서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낡은 사상과의 투쟁 혹은 헤게모니 영역에서의 투쟁은 매우 중요하다. 대중이 사회주의를 꿈도 안 꾸는데 어떻게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겠는가? 사회주의에 대한 일상적 선전 혹은 강령에 입각한 일상적이고 과감한 선전은 반공에 쩔은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고, 이점은 현장활동가들의 몫이라기보다는 유기적 지식인들의 몫이어야 한다. 이점에서 지식인들은 분발해야 한다.

또한 최근 ‘보장소득론(기본소득론)’ 혹은 ‘건강보험 하나로’ 등의 담론에서 보듯, 분배나 복지란 결국 계급투쟁의 결과임에도 자본의 부정이나 자본과의 적대적인 투쟁없이 조세만으로 무슨 복지를 이룰 수 있다고 헛소리를 하는 소부르주아지들이 있는데, 가차없는 사상투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대중에게 자본에 적대하고 사회주의를 꿈꾸게 하는 작업은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지겠지만, 전면적인 선동과 선전을 통해서도 이루어내야 할 작업이기도 하다.

 

3. 이행기 국가-프롤레타리아 독재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 사이에는 전자에서 후자로의 혁명적 전환의 시기가 놓여있다. 이 시기에 상응하는 정치적 이행기가 있으며, 이때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다.”(고타강령 비판)

 

“노동계급에 의해 주도되는 혁명의 첫 단계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으로 격상시키는 것이며, 민주주의를 위한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점차적으로 부르주아지로부터 모든 자본을 박탈할 자신의 정치적 대권을 사용하게 될 것이며, 모든 생산수단을 국가의 수중,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으로 집중시키게끔 자신의 정치적 대권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총체적인 생산력을 가능한 한 급속하게 증대시킬 것이다.”(철학의 빈곤)

 

“맑스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단지 사멸해가고 있는 국가 즉 성립과 더불어 즉시 사멸해가기 시작하는, 사멸해 갈 수밖에 없는 국가만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노동대중은 국가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만을 필요로 한다.

국가는 특수한 권력체이다. 그것은 계급억압의 수단인 폭력으로 조직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떠한 계급을 억압해야 하는가? 물론 오직 착취계급인 부르주아지뿐이다. 노동대중은 단지 착취자를 억압하기 위한 국가,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러한 억압을 지속할 수 있고 그 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국가만을 필요로 한다. 지속적으로 혁명적일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기 때문이며, 부르주아지와의 투쟁에 있어서 모든 노동대중과 피착취대중을 통일시킬 수 있고, 부르주아지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 곧 프롤레타리아 계급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타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서만 즉 자신의 경제적 전제조건이 이러한 임무에 대한 사전 기초가 되며, 임무수행 가능성을 제공하고, 그 임무 성취에 필요한 권력이 주어지는 특수한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부르주아지는 나뉘어지고 농민층과 여타 쁘띠 부르주아지를 분열시키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함께 뭉치고 단결하고 자신을 조직화한다. 대규모 생산에서 담당하게 되는 경제적인 역할 적분에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모든 노동대중과 피착취대중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기존의 착취자들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주의 경제를 구성하는 작업에 있어서 농민과 쁘띠 부르주아지와 반프롤레타리아트 등의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권력, 중앙집중화된 권력, 폭력의 조직화를 필요로 하게 된다.

노동자당을 교육함으로써 맑스주의는 권력을 쥘 수 있고. 전인민을 사회주의로 이끌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전위대를, 그리고 새로운 체계를 지도하고 조직할 수 있으며, 부르주아지 없이 그리고 부르주아지에 대항하여 모든 노동대중과 피착취대중이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스승과 안내자와 지도자가 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전위대를 교육하게 된다.”(국가와 혁명)

 

“보다 높은 국면의 공산주의가 도래하기까지는, 노동정책과 소비정책에 대한 사회와 국가의 최고로 엄격한 통제가 요구된다고 사회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 통제는 자본가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통제의 수립과 함께 자본가들이 지니고 있던 생산수단의 몰수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관료로 이루어진 국가가 아닌 무장한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국가에 의해 실행되어야만 한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국가의 한 형태이다. 결론적으로 여타 모든 국가와 같이 민주주의는 한편으로는 인간에 대한 권력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사용을 표현해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의 평등에 대한 형식적 승인과 모든 시민이 국가의 구조를 결정하고 국가의 행정가일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지녔다는 사실에 대한 형식적인 승인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민주주의의 일정한 발전단계에서 민주주의는 처음에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투쟁을 치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융합되고, 이어 자본주의를 산산조각내며, 모든 부르주아 계급과 공화적인 부르주아지와 국가기구 그리고 상비군과 경찰과 관료제까지도 이 지구상에서 싹쓸어버리고 그 대신에 보다 민주적인 국가기구로, 그것도 모든 대중을 포함하는 시민군을 형성하는 무장한 노동자들이라는 측면에서 본 국가기구로 그것들을 대체하게 된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만약 진정으로 모든 사람들이 국가의 행정업무에서 자기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면 자본주의는 더 이상 자신의 존재근거를 존속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자본주의의 발전은 진정으로 모두가 국가의 행정업무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전제조건을 창출한다. 이러한 전제조건들 중 일부 즉 일반적으로 일고 쓸 수 있는 능력은 대부분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이미 획득되어졌고, 또한 우편업무 철도 대규모 공장 대규모 상업 은행 등의 거대하고 복잡하며 사회화된 장치에 의해서 수백만 노동자들의 훈련과 학습은 이미 이루어졌다.…

회계와 통제-이것은 초초 국면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순탄한 노동과 적절한 기능을 위해 필요한 주된 것이다. 모든 시민은 무장된 노동자로 구성된 국가의 고용원으로 전환된다.”(국가와 혁명)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 사이에는 전자에서 후자로의 혁명적 전환의 시기가 놓여있다. 이 시기에 상응하는 정치적 이행기가 있으며, 이때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다.”라는 문장을 도해하면, 자본주의 사회-> 혁명적 전환기(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대)->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의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사회주의 사회의 성립은 생산수단의 사회화 혹은 자본가 계급의 일소로 적대적 계급의 소멸을 지표로 삼는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 즉 낮은 단계에서도 아직 국가는 소멸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르주아적 권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란 부르주아적 권리가 완전히 소멸된 사회, 더 이상 억압이 필요없는 사회이고, 국가의 소멸이 완성된 사회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자본가 계급과 그 잔당과 그 사상이 힘을 쓰고 있는 한 계속되어야 한다. 분명 국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성립된 그 순간부터 소멸하기 시작하지만 착취계급과 반동계급에 대한 억압은 낮은 단계에까지 계속된다.

이행기의 국가 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기에 중요한 것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이다. 사회를 어떤 구성원리로 조직할 것인가?

 

4. 코뮌의 경험

 

“노동계급은 기존 국가기구를 쉽사리 장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의도대로 휘두를 수도 없다.

코뮌은 각 지역에서 보통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지방자치 위원들로 구성되었으며, 그들은 책임성이 있었고 언제나 국민소환의 대상이 되었다. 자연적으로 코뮌 구성원의 대부분은 노동자들이거나 아니면 노동계급의 덕망있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대표자들이었다.…

그때까지 정부의 도구였던 경찰은 일시에 정치적 속성이 제거되었으며, 책임성있고 항상 소환될 수 있는 기구로 변했다. 행정부의 여타 모든 기관의 관리도 그렇게 변했다. 공화국은 코뮌의원 이하 모든 공직자들에게 노동자의 임금에 상응하는 보수를 지급했다. 국가기관의 고관이 지니고 잇던 특권과 대표에게 지불되던 고임금은 고관 자체의 소멸과 함께 사라져갔다. … 한꺼번에 상비군·경찰 등과 같은 구정부의 물리력 행사수단을 제거한 후에 코뮌은 즉시 정신적인 억압수단이었던 성직자 권력을 파괴해 나가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허울에 불과했던 독립성을 지니고 있던) 사법기관들도 그 거짓된 독립성을 잃었고, 그들은 인민에 의해 선출되고, 인민에 대해 책임을 지며, 국민소환의 대상이 되는 진정한 사법기관으로 변했다.”(프랑스의 내전)

 

“고급 국가관료의 급료를 노동자 임금 수준과 같이 낮춘 것은 ... (그것 말고는 어떻게 한 사람도 예외없이 대다수 및 인민대중 전체가 국가 기능의 수행을 인계할 수 있겠는가?) 자본주의 문화는 대규모의 생산, 공장 철도, 우편제도, 전화시설 등을 창조해 왔으며” 이러한 기반 위에 기존의 국가권력의 대부분의 일이 단순화되고-등기나 정리나 점검하는 것처럼- 아주 간단해졌기 때문에, 교육받은 모든 사람이 쉽게 그러한 일을 할수 있게 되고, 평범한 노동자 임금 정도로 그러한 일이 수행될 수 있는 바, 이러한 기능들은 또한 기존의 모든 특권의 그늘과 관료적 위엄같은 것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예외없이 모든 관료는 항시 선출되고 국민의 소환에 복종하며, 그들의 급료는 일반 노동자 임금 수준으로 삭감되었다. 이러한 단순하면서도 자명한 민주주의적 대책은 노동자와 대다수 농민의 이익을 통일 시키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교량 역할을 하게 된다.”(국가와 혁명)

 

“코뮌은 모든 부르주아 혁명의 슬로건이었던 값싼 정부를 두 가지 거대한 낭비의 원천이었던 군대와 관료제의 폐지를 통해서 현실화했다.…

코뮌은 단순한 의회가 아니라 활동하는 행정기관이면서 동시에 입법기관이어야만 했다.”(프랑스의 내전)

 

“코뮌은 부르주아 사회의 매판적이고 부패한 의회제도를 의사발표의 자유와 토론의 자유가 기만으로 전락되지 않는 기구로 대체했다. 그것은 곧 의회구성원 자신들이 일해야 하고, 그들 자신의 법에 따라 업무를 집행해야 하며, 실제로 얻어진 결과에 따라 스스로 평가하고, 그에 따라서 자신을 뽑아준 사람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대의기구는 잔존한다. 그러나 여기서 잔존하는 대의기구는 결코 입법과 행정의 노동을 분리시키거나 의원들의 특권적 지위와 같은 특수한 체계로서의 의회는 아니다. 우리는 대의없는 민주주의, 특히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상상할 수도 없다.… 노동자들의 표나 얻으려는 단순한 선거가 아닌 우리의 진실되고 성실한 열망이라면 의회없는 민주주의가 상정될 수도 있고 상정되어야만 한다.…

관료제를 일시에 모든 곳에서 완전히 폐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유토피아일 뿐이다. 그러나 낡아빠진 관료기구를 일시에 때려부수고 모든 관료제의 점진적인 폐지를 가능케 할 새로운 것을 즉각 세워 나간다는 것은 결코 이상이 아니며, 그것이야말로 코뮌의 경험이 시사하는 바이며,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수행해야 할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임무인 것이다.

자본주의는 국가 행정의 기능을 단순화한다. 그것은 즉 지배함을 포기하고 (지배계급으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화에 장애가 되는 모든 문제점들을 최소화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바, 그것은 곧 사회전체의 이름으로 ‘노동자들, 십장들 및 재정관리인들’을 고용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며, 모든 행정기관과 모든 예속상태가 일시에 없어지리라는 몽상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임무에 대한 몰이해에 기초한 이와 같은 무정부주의적인 몽상은 전체적으로 맑스주의와는 전혀 일치하지 않으며, 실제로는 단지 대중이 변할 때까지 사회주의 혁명을 연기하는 것에 일조하고 잇을 뿐이다. 반면에 우리는 현상태의 인민, 예속과 통제와 ‘십장들과 재정관리인들’을 떨쳐버릴 수 없는 현 상태의 인민과 더불어 사회주의 혁명을 꾀하고자 한다.

하지만 복종은 모든 피착취 노동대중의 전위 즉 프롤레타리아에게로만 행해져야 한다. 이것의 시작은 일시에 그리고 하룻밤 사이에 국가관료의 특수한 지배를, 십장들과 재정관리인들의 단순한 기능 즉 평균수준의 도시 거주자들의 능력과 노동자 임금만으로도 충분히 수행될 수 있는 기능으로 대체하면서 이루어질 수 있고, 또 이루어져야만 한다.

우리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이제까지 창출해 놓은 것을 토대로 하여 대규모 생산을 조직하게 될 것이고, 노동자로서 이제껏 쌓아온 경험을 신뢰하면서, 무장한 노동자들로 구성된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엄격하고 견고한 원칙들을 정립시켜 나갈 것이다. 우리는 국가관리의 역할을, 앞으로 잘못을 저지를 때에는 언제나 해임시킬 수 있고, 우리들의 지시를 책임지고 단순히 수행만 하는 역할로 축소할 것이다.(물론 모든 종류의 방식과 수준의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대규모 생산에 기초한 그러한 출발은 자연스럽게 모든 관료제를 점진적으로 사멸시키고, 하나의 질서-인용부호 없는 질서, 임금농와 유사한 그 어떠한 것도 배태하지 않은 질서-를 점진적으로 창출하는 일로 일어질 것이고, 그 아래에서 통제와 계산의기능이 점점 단순해질 질서가 하나씩 하나씩 순차적으로 형성되어질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것이 차츰 습관화되면, 마침내 공중의 특수부분으로 이루어졌던 특수한 기능으로서의 국가기구는 사라져버릴 것이다.”(국가와 혁명)

 

이상에서 알 수 있는 코뮌의 경험은 의결과 집행의 통일체이고, 선출제와 소환제가 이루어졌으며, 보수 등에 있어서 탈특권의 원칙이 관철되었다는 것이다.

대중의 자기지배는 대리주의와 관료제에 대립하고 있다. 부르주아 사회처럼 대의제는 유지된다. 그러나 피선출직은 선출한 시민들에게 복종한다. 이것은 일상적으로 사전사후 보고의무와 결합될 것이다. 그렇다면 전문적 위임은 어떨 것인가? 분명 위임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역시나 대중의 통제 혹은 피선출직들의 통제에 의존할 것이다.

전문직과 관료제를 하루아침에 없앨 수는 없다. 실을 거둘 수 있는 세련된 통제의 방법론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코뮌의 구성원칙(의결과 집행의 통일체, 선출제와 소환제, 보수 등의 탈특권) 외에 필자는 탈특권과 탈권위의 헌신의 원칙을 추가하여 이러한 원칙에 입각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저항체를 대체권력의 맹아로 키워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저항체만이 아니라 이행기의 생산현장과 사회적 조직의 모든 구성원칙으로써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을 필자는 ‘직접민주주의의 이상을 추구하는 혁명적 민주주의’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원칙은 생산현장만 염두에 둔 평의회 민주주의와는 다른 한 차원 높은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전세계적으로 대중들의 봉기 뒤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혁명적인 대중기관들 즉 파리코뮌만이 아니라 동학혁명시의 집강소라든지, 광주항쟁시의 광장집회라든지 시민군, 러시아의 소비에트 등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대중의 혁명기관의 구성 원리는 이러한 4가지 원칙이 관철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무장한 전인민의 국가라는 주장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군대가 장군과 장교들에게 맡겨져서는 안 된다. 그들은 국민의 군대에서 인민의 군대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시민들이 과연 현대와 같이 고도로 발달한 무장을 소유하고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첫째 군령과 군정의 분리부터 시작될 것이다. 러시아의 병사 소비에트는 군정에 있어서 소비에트가 통제하였다. 때로는 혁명 군사위원도 필요할 것이다. 전문가에 대한 대중의 통제는 군대만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부딪치는 문제일 것이다. 병사들의 자주적인 통제가 필요하다.

 

5. 공산주의 사회의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

 

“계급과 계급 적대의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 우리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전제조건이 되는 단체를 가지게 될 것이다.”(공산주의자 선언)

 

“사회적 총생산물에서 경제상의 필연(1. 소모된 생산수단의 보전분, 2. 확대재생산을 위한 부분, 3. 예비기금 또는 보험기금)을 먼저 제외하고, 사회적 공동부담(1. 일반관리비용, 2. 학교 등 공동의 수요, 3. 노동 무능력자 등을 위한 기금) 등을 제외하고, 노동제공에 비례하여 분배 받는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이 생산물의 가치로 나타나지 않는다. 노동수익도 의미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겨난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는, 낡은 사회의 모반이 모든 면에서, 즉 경제적 윤리적, 정신적으로 아직도 둘러붙어있는 사회이다.

개별 생산자들 사이의 소비수단의 분배는 상품 등가물의 교환에서와 같은 동일한 원리가 지배한다. 생산자의 권리는 그의 노동제공에 비례한다. 내용상 불평등의 권리이다.…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에서, 즉 개인이 분업에 복종하는 예속적 상태가 사라지고, 이와 함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도 사라진 후에; 노동이 생활을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차적인 생활욕구로 된 후에;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성장하고, 조합적 부의 모든 분천이 흘러 넘치고 난 후에-그때 비로서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한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는 필요에 따라!”(고타강령 비판)

 

“생산수단은 이제 더 이상 개인들의 사적 소유물이 아니다. 그때에 생산수단은 전체사회에 속하게 된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의 그 어느 한 부분을 수행하고 있는 모든 사회구성원들은 사회로부터 자신이 얼마만큼의 노동을 했는가 하는 그 결과물에 대한 증명서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 증명서를 가지고서 그는 공공 소비재 상점에서 그 노동에 상응하는 양만큼의 생산물들을 받게되는 것이다. 공공기금 명목으로 노동자들의 노동의 일정부분을 공제한 후에, 그에 따라서 모든 노동자는 자신이 공제했던 만큼의 사회복지 혜택을 사회로부터 받게 된다.

모든 부분에서 평등이 극명하게 실현된다.…

맑스가 말하기를 우리는 분명히 동등한 권리를 여기서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부르주아적인 권리이며, 여타 모든 권리와 마찬가지로 불평등을 함축하고 있다고 했다. 모든 권리는 실제로 동일하지 않으며 서로 동등하지 않은 각기 다른 인민들에게 동등한 척도를 적용하고 있다. 그것은 곧 왜 동등한 권리가 평등의 장애이고 또 하나의 불평등인가 하는 이유가 된다. 사실 타인과 동일한 양의 사회적 노동을 수행하는 만인은 (위에서 언급한 공제를 한 후에) 사회적 생산의 균등한 몫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인민은 동일하지 않다. 즉 강한 자가 있는 반면 허약한 사람도 잇고, 결혼한 사람이 있는 반면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며, 자녀를 많아 두고 적게 두고 등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흔히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공산주의 사회의 첫째 국면에서는 부르주아적 권리가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는다.…

동일한 양의 노동에 따른 동등한양의생산물이라는 사회주의의 원칙도 이미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산주의가 실현된 것은 아니며, 불평등한 개인들에게 불동등한 양의 노동의 대가로 동등한 양의 생산물을 주는 부르주아적 권리도 아직 완전히 철폐된 것이 아니다.”(국가와 혁명)

 

“보다 높은 국면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즉 개인을 노동분업에 노예적으로 복종시키는 대립이 제거되고 그와 더불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간에 존재했던 대립이 제거된 후에 또한 노동이 생산만이 아니라 삶의 제1의 욕구가 된 후에 생산력이 개인의 전반적인 발전과 더불어서 신장되고 모든 협동적인 부의 신장이 보다 광범위하게 물결친 후에 -바로 그때에만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지평은 그 조종을 울리게 되고, 사회는 자신의 진정한 기티아래 굳건하게 성립되는 바, 그 가치는 곧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가자는 필요에 따라!’가 될 것이다.”(고타강령비판)

 

“인간이 자연 성장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 한 , 따라서 특수이해와 공동이해간의 분열이 존재하는 한 그래서 활동이 자유의지에 의해서 분할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성장적으로 분할되어 있는 한, 인간 자신의 활동은 인간에 대립하는 낯선 힘, 인간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인간을 굴복시키는 힘으로 전화한다는 사실에 대한 최초의 실례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즉 노동이 배분되기 시작하자마자 모든 개인들은 그들에게 강요되는 그들이 벗어날 수 없는 특정한 배타적인 활동의 영역을 갖게 된다…. 반면에 아무도 배타적인 활동의 영역을 갖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도야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회가 전반적인 생산을 규제하게 되고, 바로 이를 통하여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 식사 후에는 비판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판가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독일 이데올로기)

 

공산주의 사회는 인류의 이상이고, 끊임없이 그 실현방도와 구현의 형태를 탐구해야 할 주제이다.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의 표지는 정식화되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만큼 분배받는 사회에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로의 이행이 그것이다. 풍요로운 사회에서는 다툴 필요가 없을 것이고 부르주아적 권리도 소멸할 것이다.

문제는 역사적 사회주의가 생산력의 발달에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사장의 경쟁 속에서 무수한 낭비를 거쳐 생산력의 발전이 강요된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사회는 무엇으로 생산력 발전의 추동력으로 삼을 것인가? 사회적 투자의 판단과 결정은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일국의 혁명은 세계시장에서의 경쟁을 종식시키지 않는다.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관계의 변화만으로 이런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소유관계의 변화혹은 ‘어떻게’라는 문제만이 아니라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의 문제도 중요하다. 과연 상품이든 상품이 아니든 부르주아 사회와 똑같은 생산물을 생산해야할 것인가? 역사적 사회주의는 왜 실패했는가? 왜 그 사회에서는 소비재 생산의 발전을 이루지 못했는가? 과연 관료제 때문이었는가? 각 생산단위의 합리성은 부르주아 사회보다 발휘되지 않았다. 이 문제의 해결은 시장 혹은 시장 사회주의밖에 없는 것인가? 물론 전면적인 시장이 아니라 소비재에 한한 시장이기는 하지만... 경제는 합리적으로 조직될 필요가 있다. 의료나 교육 보육 노후와 같이 전 사회적으로 탈시장화하여 해결해야 할 영역이 있고, 전기 수도 에너지처럼 이윤이나 시장의 작용을 억제하는 국가적 관리가 가능하고 필요한 분야가 있다. 그러나 의류나 먹거리 가전제품처럼 다양한 소비 즉 양으로 환원할 수 없는 소비재의 문제가 대중의 욕망에 부응하고 생산력을 고양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이런 분야가 일정정도 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것은 합리적일 수 있다. 결국 중앙집중적인 지령적 계획경제가 아니라, 막연한 민주적인 참여 계획경제가 아니라, 중앙은 거시적 계획에 종사하고 개별단위의 생산의 자율성은 은행 등을 총한 간접적인 통제와 생산대중과 주민의 통제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조돈문의 생각과 많은 점에서 같고 많은 점에서 다르다. 특히 국민 모두에게 주식분배 운운하는 것은 전혀 받아들이기 힘들다. 사회주의란 죽은 노동의 권리의 부정의 방향이다.-(조돈문, 2002))

이행기의 사회에서 소생산을 어느 단계까지 허용하는 것도 필요하고 어느 정도 규모의 자본가적인 경영도 허용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배고픈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 중앙집중적인 결국 중앙지령적인 계획경제는 실패하였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이전부터 교환의 장으로서 기능하였던 시장의 긍정적 역할에 대하여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외에도 혁명적 권력이 부딪치는 무수한 문제가 있다. 자본가와 소부르주아지의 저항은 물론이고, 외국자본의 문제도 있고, 무엇보다도 일자리의 문제와 무엇을 생산할 것인지의 문제가 있다. 그동안 이론들은 ‘어떻게’만 탐구하였다. 그러나 봉쇄될망정 고립을 자초해서는 안되는 혁명권력은 대중의 자기지배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의 문제만이 아니라, (물론 대중의 자발성과 창조성은 발휘되겠지만) 구체적인 세계경제 속에서 대중에게 보다 낳은 삶을 제공하지 않으면 실패할 것이다.

 

6. 나가며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자본주의 국가 안에서의 혁명은 심각한 고민을 요구하는 많은 문제가 있다. 고전은 방향만 제시했을 뿐이다. 혁명적이고 비타협적인 실천과 심장만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까지도 만족시킬 수 있는 이행 프로그램의 제시를 위해, 혁명적 지식인들의 지성을 모아 과제를 도출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과제는 멈출 수 없다. 그 실천은 오늘 우리가 처해 있고 함께 하고 있는 현실 대중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방안이어야 한다. 그 프로그램은 진지하게 탐구할 주제이고, 대중에게 선명하게 제시될 필요가 있다. 유기적 지식인은 더욱 분발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레닌, 『국가와 혁명』맑스, 『공산주의자 선언』

맑스, 『프랑스의 내전』

맑스, 『철학의 빈곤』

맑스, 『고타강령 비판』

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

조돈문, 2002. “국가사회주의의 실패와 대안체제의 가능성-민주적 시장사회의 모색”, 『동향과 전망』, 봄호(52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