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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만났던 사람들,,,

  • 분류
    단상
  • 등록일
    2005/03/13 15:02
  • 수정일
    2005/03/13 15:02
  • 글쓴이
    서른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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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3일, 국보철폐문화제가 열리고 있는 광화문, 지구당 깃발이 안 보인다. 할 수 없이 버스노조와 사회진보연대 중간의 빈자리에 앉았다.
사진연의 젊은 동지들이
‘선배님 요즘 일산에서 이주노동자 사업하신다면서요?’
-소문도 빠르군, 이상훈 동지가 소문냈나…, -

 

바로 전날 민노총 뒷풀이에서 모연맹 간부가 어디서 왔느냐고 묻길래, 진보넷 후원회원으로 있다고 소개했었다. 최경순동지는 내가 직함이 많지 않느냐고 하지만, 자본가라고 할 수도 없고, 민노당이 잘하고 있지도 않고, 평화바람 역시 아직 내세울만한 정도가 아닌데 소문만 나서 쪽팔리는 것같아 어디가든지 진보넷 후원회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 자리에 p모 여성동지가 있었는데, 명동성당 이주노동자 농성에 처음부터 결합하고 있는 친구다. 석사학위도 있고 원고료도 안주는 운동잡지에 국제운동에 대한 논문도 가끔 발표하는 30대 초반의 유부녀인 이 동지는 운동 때문에 애 낳는 것도 미루고 직장도 팽개치고, 밤이고 낮이고 뛰어 다닌다. 똑똑하고 치열한 젊은 동지들이 참 많다.

 

이어지는 사진연 동지들의 얘기, ‘요즘 이주노동자사업이 중요한 것같아요. 한모동지도 인천에서 이주인권센터를 만들었는데 굉장히 잘 된데요.
그래? 어떻게 잘되는데?
자원봉사자가 많이 결합해서 하고 있데요.
언제 한번 견학을 가봐야 겠다고 생각한다.

 

잠시 뒤 최경순동지가 오고, 최동지와 친한 서모 중앙위원이 옆에 앉는다.
기름끼 없는 얼굴과 넉넉해 보이지는 않는 옷차림(나와 비슷하다), 가끔 중앙위에서 깡다구있는 발언도 잘하는 50대 중반의 운동가. 궁궁해서 이것저것 묻는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가 수송대에서 일한 것이 사회에 나와서 버스 일을 하게 됐단다. 그러다가 노조만들고. 짤리고, 또 취업해서 노조운동하고, 또 짤리고, 이러기를 7번인가 10번인가 하다가 블랙리스트로 취업도 안되어 버스노조 일도 좀 하다가 요즘에는 지구당사업에 전념한단다.

 

구로을 지구당에서 중앙위원을 하면서 당 사업도 열심히 하고 구로노동상담소에서 상근자로 일한단다.

상담소는 월에 한번 모이는 운영위원회와 매주 하는 상근자회의가 있고, 의사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후원회가 월 150만원쯤 걷어준단다. 그래서 내가 상근자 한사람 월급은 되겠네요 했더니, 상근자가 네명인데 20만원씩 받고 임대료와 사업비로 쓰면 빠듯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지역신문에 상담광고를 많이 하는데 요즘 이주노동자 상담이 많이 늘었다는 것과, 근로감독관 새끼들 하는 짓이 꼭 악질회사 총무과장같는 수작만 해서 열받는 일이 많고 가끔 가끔 싸운다고 한다. 그럼 사모님이 잘 버시겠네요하고 물었더니, 근처 공장에서 100만원 정도 번다고 한다. 큰아들은 군대갔다와서 유통업체에 취직했고, 둘째는 군대갔다와서 복학했다고 한다. 큰아들하고 가끔 술을 먹는데 먹을 때마다 노조에 가입해서 활동하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삶에 대해 부끄럽기도 하고 왜 우리 운동이 이런 운동가를 이 정도밖에 뒷바라지하지 못하는가, 이 사람이 이렇게 살아가게 하는 힘은 무었인가, 여러가지를 생각게 하는 대화였다.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을 찾다가 모연맹 도지부장인 이모 위원장을 만났다. 여전히 넉살좋고 친근한 말투로 ‘아이고 형님, 얼마만이요? 어디가서 술이나 한잔합시다’ 결국 문화제는 땡땡이 치고 근처 순대집에서 막걸리를 마시게 되었다.
‘다음달에 연맹위원장 선거한다든디 유모위원장좀 밀어줘’
‘형님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고라, 사정이 좀 복잡해서 저는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는디요’
‘아 그려? 내가 사정도 모르고 훈수했구만. 하여튼 조직을 올바른 관점에서 잘 이끌어나갈 사람 뽑으면 되제.’

 

그때 옆자리에서 노인 한분이 일어나더니 이모위원장을 보고 아는 척을 한다. 70이 다된 성남 중원지구당의 열성당원 왈 ‘노세극이 정말 싸가지 없더라고. 지 때문에 선거를 두번씩이나 하게 됐으면 사과부터 하고 유세를 해야지 기본이 안되었더라고. 그래서 내가 당대표와 사무총장한테 항의편지를 썻당께’

 

다음에 뵙기로 하고 술잔을 돌리는데, 이번에는 이모위원장을 따라온 40쯤 되어 보이는 동지가 한마디 한다. 그 이주노동자들 법대로 추방을 해야지요. 현장에서는 이주노동자들 때문에 한국사람들이 일자리를 얻을 수가 없어요. 건설현장의 2/3가 이주노동자예요.’ 내가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고 한참 얘기했지만 수긍을 하지 않는 눈치다.

 

술집에서 나온 후 민애청(민주주의 애국 청년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30대초반의 후배를 만났다. 총회원이 70명인데 오늘 60명이 참석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회비는 십일조지만 대개 4-7만원씩 걷으면 월 150만원의 예산이 되는데 상근대표 50만원 주고 임대료와 분담금 그리고 사업비로 지출한다고 한다. 전번에 국보철서명을 1인당 1,000명씩 받기로 했는데 3,000명 받은 사람도 있다고 한다. 우리와 다른 점이 뭐고 배울 점이 뭔가를 생각해 본다.

 

돌아오는 길에 연합의 상근자였던 박모동지가 논쟁을 제기한다. 문화제라면 이렇게 하면 안된다. 보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더 부드럽게 해야된다. 당면한 적은 한나라 수구꼴통들인데 열우당과 연대해서 한나라당을 고립시켜야한다. 신자유주의 앞잡이하고 무슨 연대냐고 했더니, 우리가 통일을 하고 사회주의사회를 이룩하려면 당면투쟁에서는 국보법철폐투쟁이 정말 중요하다. 열우당과 시민단체와 손잡고 투쟁을 열심히 하자고 한다. 대화는 계속되어도 평행선...

 

다음날 아침 동창회 체육대회를 하는데 날 꼭 좀 보자고 해서 참석했었다. 40명 가까운 동창들은 내년이면 장군될 친구도 있고, 중앙부처의 국.과장도 있고, 대기업의 이사나 상무도 있고, 고참 지점장도 있고 의사, 변호사, 교수, 건설회사 사장 등 참으로 다양하다. 그들에게 공통적인 점이 있다면 다 먹고 살만하다는 것과 그래도 스스로를 상류층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친구가, 기여입학제를 허용해야만 사학이 산다고 열변을 토한다. 학점 안되면 졸업 안시키고, 기여금으로 장학금주고, 학교 발전시킬 수 있는데, 왜 국민정서 운운하느냐고 열변을 토하는 친구도 있고, 무역 얘기, 중국 투자 얘기, 몇십억 설비 낙찰 얘기 등 상당히 전문분야의 얘기들이 재미있기도 하고 재미가 없기도 하다.

 

마침 통일부에서 개성공단기획팀장을 맡았던 친구가 있어서 열심히 묻는다.
월급은 50불, 사회보장료 15%  합계 57.5불(중국은 20%이므로 60불)인데, 북한 주민 월급이 보통 2불이라고 한다. 요즘 개성공단에 취업하는 것이 북에서는 최고 인기있는 직장이란다. 공단이 완공되면 대략 8-13만명 정도 고용을 창출할 것이라고 한다. 버스와 철도도 제대로 다니지 않고 자재와 전력생산도 부족해서 공장들이 제대로 돌아가지를 않아 계획경제는 포기하고 각 기업체들이 알아서 먹고 살아라는 현실이라고 한다. 북의 현실과 통일문제는 항상 답답하기만 하다.

 

어쨌든 몇 년전 졸업 25주년 땐 모교장학금으로 8,000만원이나 걷어 준 이 동창회와 서모 중앙위원이 일하는 노동상담소는 별개의 세상이면서 같은 세상 속에 있다. 그 속에 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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