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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5일 투쟁 참관기

11월15일 투쟁 참관기
 
11월 14일 애국촛불과 한국진보연대는 불법시위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집회가 불허되었습니다. 이에 한국진보연대는 “집회시위는 ‘신고제’이지 결코 ‘허가제’가 아니다. 우리는 국민의 정당한 기본권 행사를 위해 경찰당국이 위헌적인 집회허가제를 남용하며 폭력적으로 가로막는다 하더라도, 기어이 촛불집회와 거리행진을 성사하고야 말 것이다.”, “집회, 시위 장소 부근에 대한 공포분위기 조성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긴급성명을 발표했고, 15일 오후 3시 민노당이 신고한 집회에 결합한 후 경찰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오후 6시에 청계집회와 ‘경제파탄 국정실패 이명박심판 내각총사퇴 촛불대회를 한 후 명동성당까지 행진하겠다는 결의를 공지했습니다.
 
11월 15일 토요일 오후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촛불들은 오랜만에 한국진보연대의 결의에 환호했고 기대를 가지고 서울역에 결합했습니다.
이 시점 즉 이 정권이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조폭적인 발상으로 공안탄압을 밀어부치고 있는 시점에서 일개 경찰서장의 허가와 불허에 연연하지 않은 당찬 대응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진보연대의 이 성명이 밀리고 있는 국면을 만회할 조직적인 반격으로서 참으로 중요한 싸움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서울역에 모인 500 여명의 참가자 중에는 민노당과 진보연대에서 동원한 사람은 몇십명도 안되었다는 것입니다. 집회중에 민노당 사무총장은 단호하게 싸우겠다는 의지를 밝혔지만 제대로 된 아무런 동원이나 조직은 하지도 않으면서 말로만 과격한 투쟁사를 하는 것이 몹시 맘에 안들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5부터의 경찰청 항의기자회견에서 한국진보연대 소속의 활동가 2명이 연행되기는 했지만, 정작 자신들이 공지한 청계광장의 촛불대회에는 단 한 명도 얼굴을 내 보인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기어이 성사시키겠다는 결의나 안 밝혔더라면 즉 이날 집회의 중요성이나 부각시키지 않았다면 나았을텐데, 광장이 봉쇄되고 청계천에서 올라오는 계단이 봉쇄되고 모이기만 하면 밀어부치는 겁박을 당하게하는 상황을 만든 것입니다. 제 생각엔 민노당이나 진보연대가 정말 진정한 결의를 갖었다면 2,000 대오는 동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날의 투쟁은 경찰과 촛불이 향후의 투쟁에서 서로의 의지와 실력을 가름하는 전초전의 성격을 가졌던 것인데, 진보연대의 무책임한 허언으로 청계대회가 망가지고, 명동과 특히 홍대와 마포경찰서 앞에서의 침탈과 수모로 이어졌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날 한국진보연대가 보여준 작태는 비난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명동에 집결해서 대략 밤 9시까지 구호와 노래로 촛불들이 저항의 의지를 보인 것은 참으로 좋았습니다. 특히 롯데 건너편에서 경찰과 근접한 거리에서 대치를 한 것은 백미였는데, 침탈의 우려에 대해 충분히 고민한 리딩인지 아니면 침탈의 우려가 있는 약간 무모한 리딩이었는지는 판단을 보류합니다. 다만 일부가 롯데앞에서 가투를 시도하다가 7명이나 연행된 것은 무리했다고 할 것입니다.
 
어쨌든 밤 9시경 밀리오레 앞에서 (당시 대오는 150 명 정도) 해산을 결의한 것은 적절한 마무리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항과 타격의 의지를 보이면서 큰 손실없이 치고 빠지는 전술은 칭찬할만한 리딩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다시 밤 10시가 넘어 명동골목을 행진한 후 정리하지 않고, (전대협과 386 이?) 홍대 5번출구의 택을 때린 것은 몹시 적절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시위대보다도 더 많은 사복들이 섞여 있는 상황에서 공공연하게 택을 전달한 것은 더구나 홍대에 결집하면 주말 밤 11시가 넘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가투를 시도하는 것은 제대로 된 시위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기에 분명한 상황이었습니다.
 
홍대는 명동보다 도로가 넓고 유동인구가 훨씬 적은데도 굳이 늦은 시간에 장소를 옮겨서 가투에 집착하는 것은 어느 점에서 보아도 잘못된 리딩이라고 할 것입니다. 특히 이날 명동에서는 11시이후에 해산하는 조건으로 명동에서의 시위를 묵인받았다는 말도 안되는 얘기가 있었던 바, 나아가 11 해산하면 앞서 연행된 사람을 풀어주겠다는 거래까지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이런 거래에 개입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어쨌든 순수한 혹은 저항할려는 촛불은 아닌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10가 조금 넘어 홍대집결이 공지되었을 때, 소금사탕님이 평행단은 공식적으로 공동행동을 종료한다는 얘기를 하셨습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결단을 밝히는 것이 쉬운 건 아닌데 정말 평행단의 보배이시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후에 저는 개인적으로 어차피 홍대에 가봤자 늦은 시간이기도 하고 짭새들도 많아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할 것이라는 지레짐작 때문에 그리고 다음날 할 일도 있고 해서 일행들과 헤어졌습니다마는, 나중에 들은 바로는 평행단보다 먼저 도착한 분들이 전철역을 나와 대오를 정비하려하자 곧바로 사복들이 덮쳤고 이 과정에서 13명이 폭행당하고 연행되었고, 닭장차 안에서도 구타가 있었습니다. 이후에 도착하신 분들은 마포서에 가서 항의하고, 색소포를 맞고, 여고2년생은 전경이 가슴을 만지는 등의 성추행까지 당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마포서에서도 끊임없이 촛불이 항의대를 해산하면 6까지는 석방을 해주겠다는 약속에 따라 5시경에 경찰서 앞 자리를 피해주는 일도 있었고, 이후에도 계속 9 혹은 오후 몇시에 석방을 해주겠다는 경찰의 기만이 있었고, 이를 전달한 촛불이 있었던 것도 특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실력이 충분하고 경험이 있었다면 견찰의 선이행 혹은 동시이행의 조건으로 항의를 풀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협상이나 거래 혹은 딜이란 서로 비슷한 역관계와 대치를 풀어야 할 필요를 쌍방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경찰의 기조 자체가 초기 강경진압으로 촛불을 짓밟는 것이 분명한 데도 불구하고, 촛불들의 행동 가운데서 처음으로 경찰의 장난질을 중개한 사람이 나왔다는 것은 몹시 경계해야 할 부분으로 생각됩니다.
 
횟칼 테러를 당한 친구야 놀자님은 홍대 앞 연행과정 중 목과 머리를 심하게 맞았는데도 서대문 넘들이 다음날 6에나 병원에 이송시키는 일도 있었고, 유치장에서 조사실에 이동 중에는 수갑을 채우는 일도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항의와 경찰책임자 면담요청은 무시되었습니다.
 
11월 15일의 경과는 대강 이러합니다. 문제는 서로의 기싸움에서 첫번째는 한국진보연대의 무책임한 허언 때문에 촛불이 상처를 입었다는 점과, 기왕의 가투처럼 절도있게 싸움을 정리하지 못하고 많은 피해를 냈다는 점입니다. 나아가 견찰과 터무지 없는 딜까지 거래하고 전달한 사람이 생겨났다는 점 등이 앞으로의 투쟁에 참고 해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연행과정상의 경찰의 폭력, 닭장차 안에서의 폭행, 색소포, 성추행 등등 참으로 참을 수 없는 인권유린에 대해서 인권단체와 민변에 대응책을 상의했으나 별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점이 이 시점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 지를 고민해야 할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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