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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그리고 촛불정신

  • 분류
    운동론
  • 등록일
    2008/09/06 12:38
  • 수정일
    2008/09/06 12:38
  • 글쓴이
    서른즈음에
  • 응답 RSS
촛불 그리고 촛불정신
 
1. 촛불은 무엇인가?
번개 때, 처음 만난 사람들이지만 얘기는 한없이 즐겁고 함께하고 싶은 까닭은 무엇인가?
4달이 넘도록 KBS 앞에서 촛불을 들고 날을 새우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100여일 동안 함께 외쳤던 촛불은 누구이고, 위험과 두려움을 무습쓰고 가투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왜 우리는 촛불을 들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서 저항하고 있는가? 이 투쟁을 이끄는 힘은 무엇인가?
 
아마 맨 처음엔 제 나라 국민들에게 미친 소를 못 먹여서 환장한 넘들이 국민을 속이는 것도 모자라 방패로 찍고 군홧발로 밟아서 먹이려는 정권에 대한 분노였겠지요.
그 분노와 불신은 미친교육, 민영화, 뉴라이트, 조중동, 딴나라당에 대한 분노로 커져갔고 의제는 어디까지 확장될른지 우리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단지 이들 한무리의 세력들의 말도 안되는 처사에 대한 분노만이 우리를 이렇게 끈질기게 이끌어 온 힘일까요?
 
저는 우리가 비록 확실히 느끼지는 못할지라도 단지 분노만이 혹은 우리가 정당하다는 확신만이 우리를 여기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촛불을 들게 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학생과 시민과 임신부를 칼과 총으로 학살에 분노하여 일어선 시민군이 진압당한후에 즉 분노와 슬픔은 남아 있지만 더 이상 저항을 계속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즉 촛불에는 불의에 대한 분노외의 그 무언가가 촛불 속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어떤 사람은 날마다 kbs 에 가서 밤을 새우고, 어떤 사람은 자기돈으로 전단지를 만들어 뿌리는 걸까요?
 
저는 이 모든 저항이 자기실현의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쟁사회에 찌들은 소시민으로서 더 많이 가져야 되고, 더 높이 올라가야 되고, 단지 나와 내 가족만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했던 무기력이 세뇌된 인간들이, 처음으로 국가권력과 한줌의 세력들이 자신의 삶을 유린하고 부정하는 것을 깨우치고, 평화로운 촛불에 동참하면서 자신의 작은 실천이 유의미하고 역사를 바꾸는 힘이 된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실천 속에서 처음으로 내가 아닌 내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실천 속에서 자아의 해방을 맛 본 것입니다. 그 순간 존재의 합일화 즉 나와 남이 아니라 우리라는 합일화의 과정을 통해서 소외된 자아가 해방된 기쁨과 희열을 맛본 것입니다.
 
새문안 교회에서 버스를 끌어내기 위해 수백명의 사람들이 밧줄을 당길 때, 물을 가져오는 사람, 부채를 부쳐주는 사람, 떡을 가져 오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인생에 처음으로 정말 순수하고 정당한 열정 속에서 이름모를 사람들과 함께하는 희열감! 권위적이고 경쟁적이고 이기적인 사회 속의 왜소하고 고립된 소아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었던 타자와의 합일화를 통한 희열감과 행복감을 맛본 것이고, 그 속에서 의미있는 자아를 실현하면서 기왕에 쫒기듯 찌들어 살아왔던 소아가 무의미해지고, 매일의 작은 실천이 주는 자아실현의 행복에 빠져든 것이 아닐는지…
 
나와 내 주변이 모두 순수한 열정과 분노속에서 함께하고 있다는 것, 나도 그 속에서 존재의 해방감을 느끼면서 행복하다는 것, 바로 이 행복감과 해방감의 경험이 너무나 좋고(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의 본성에 합치하니까), 그 행복을 유린하는 권력이 너무나 밉고 용서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인류가 억압과 피억압의 역사를 시작한 이래 이처럼 뜨겁고 순수한 열정으로 희열과 행복을 느낀 경험이 거의 없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4.19 때 이승만을 쫒아 낸 기쁨이 우리에게 비할 수 있을까요?
 
도로에 나선 당당하고 수많은 촛불 속에서 느끼는 해방감과 수많은 사람과 함께하고 있다는 다시 말하여 나와 내 옆사람이 우리가 되어 서로 사랑으로 묶여가는 희열, 무의식 속에 잠재되었던 두려움과 억제로부터 벗어나 해방된 자아를 향해 나아가는 환희. 이 모든 해방감과 희열과 환희가 바로 촛불이 느끼는 행복감과 일체감의 근원인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가 처음으로 만나면서도 함께한다는 마음과 순수한 열정으로 하나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서로에게 엔도르핀을 주는 즉 인간의 본성에 합치하는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2. 광장민주주의에 대하여
 저는 촛불은 본질에 있어서 집단지성이 이끄는 광장민주주의이고 직접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국가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택하고 있고, 국민은 말로만 주권자일 뿐 선거 때만 주권을 행사하고 평소에는 국가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습니다.
주인인 국민을 주권자가 아니라 유권자로 보는 것이 이 체제의 비극의 시작인 것입니다.
 
고대의 아고라 후의 직접민주주의는 프랑스혁명 때였습니다. 당연하게 봉기군들은 스스로의 대표를 뽑고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었고, 함께 모여서 결정하고 함께 실천하고 투쟁했습니다. 앞장서는 사람에게 어떠한 특권도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직접민주주의이고 광장의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100일간의 촛불 내내 우리가 위대했던 것은, 사이비인 대책위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우리에게 명령하고 지도하는 권위를 갖은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모두가 주인이 되어 토론하고 결정하고 실천하고 함께 투쟁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촛불정신이 광장민주주의이고 직접민주주의의 구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어느 조직이든 대표자와 운영진을 뽑고 그들에게 결정과 집행을 맡깁니다. 심지어 작은 계모임도 그렇고 작은 동창회도 그렇습니다. 조직이 크면 클수록 그 성원은 조직의 주인자리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으로, 저는 우리 조직이 촛불정신에 투철하기 위해서는 구태의연한 우리 주의의 조직처럼 회장을 뽑고 총무를 뽑고 그들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모두가 주인으로서 동등하게 참여하는 새로운 직접민주주의의 틀을 구현해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운영의 편의상 대표와 머슴단을 두되 모든 일은 언제든지 함께 모여 결정하고 실천하자는 취지에서 모임의 기본운영방침과 틀을 제시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대표와 운영진에게 맡길 때 회원들은 수동적으로 되고 소외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까닭으로 머슴단이라는 표현을 쓰고 잇는 것이고, 모든 종류의 회의에 가령 운영진 회의에도 모든 정회원이 마음대로 참석하여 동등하게 토론하고 결정할 수 있는 개방적인 운영을 할려고 해왔던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결정에서 최대한 모두에게 개방하여 함께하는 것이 촛불정신에 합치할 것입니다.
 
3. 우리들의 언어에 대하여
 
먼저 저는 촛불은 미친소 미친 교육이라는 말도 안되는 억지와 부당함에 대한 항의에서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법연행, 공포분위기 조성 등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공권력을 빙자한 조폭들의 폭압과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저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모임에는 앞서는 사람도 있고 뒤쳐지는 사람도 있고, 시위도 마찬가지고 저희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100일간의 촛불이 위대했던 것은 그리고 815 평화행동단이 숭고했던 것은, 불의를 두려워하지 않고 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폭압이 아무리 심할지라도 저항을 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기가 옳다는 정당성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명칭은 존재를 규정지우는 것이고, 안티2mb나 민처협이나, 평화행동단처럼 그 조직의지향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우리 모임의 수식구는 그러한 저항의 지향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친목을 위주로 하는 ‘연행자모임’, 그리고 벌금 등의 공동대응을 위주로 하는 가령 ‘민변과 함께하는 연행자 모임’, 마지막으로 부당한 공권력과 공안탄압에 저항하는 ‘공안견찰과 정치떡찰에 반대하는 연행자 모임’이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 구성원의 성향이 변하여 친목위주의 모임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친목 위주냐 자구 위주냐 아니면 저항 위주냐의 문제에 있어서 주로 저항 위주의 동지들이 앞장서고 있고 자구 위주를 바라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물론 저항 위주라고 할지라도 조직의 계속성과 투쟁의 지속성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므로 합법의 틀내에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대다수의 성원이 동의해야 하기 때문에 낮은 강도의 저항부터 시작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나 자구만 할 것이냐 아니면 저항도 할 것이냐의 차이는 촛불을 계속할 것인지 아닌지의 차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점에서 우리가 촛불이었다가 아니라 촛불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한다면, 우리 존재의 가치는 부당한 공권력에 대한 저항과 촛불 승리를 위한 투쟁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작고 낮은 실천일지라도 저항을 멈추지 않는 것이 우리 존재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항의 출발은 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넘들의 협박에 위축되어 스스로 정당하고 당당한 언어를 자기검열하는 것이야 말로 촛불인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 스스로의 정당함을 확신하고 나아가기 위하여 당당하고 정당한 우리의 언어를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사파시스타의 부사령관인 마르코스가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무기 Our word is our weapon.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나는 동지들이 우리들의 정당한 언어이자 무기인, 공안견찰, 정치떡찰, 공안탄압에 대한 저항 등의 표현을 결코 스스로 먼저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결국 저항과 투쟁이란 두려움을 극복하고 우리의 언어를 당당하게 되찾는 과정인 것입니다.
 
4. 촛불은 이름없는 촛불이고 실천하는 촛불이어야 한다
저는 촛불이라면 우리의 뇌리에 박혀있는 모든 종류의 비민주적이고 반인간적이고 차별적인 권위를 인정해서는 안된다고 믿습니다. 누군가가 이 사회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무슨 지위에 있던간에, 촛불 속에서는 단지 순수함과 열정과 도덕만으로 판단된다는 것입니다.
촛불 속에는 기왕에 유명하고 명망있는 사람도 있고, 국회의원도 있겠지만, 직접민주주의와 직접행동은 모든 종류의 권위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짜르 치하에서 반란을 일으킨 병사 소비에트(평의회)처럼 해방된 공간에서는 계급도 필요없고 단지 전제정치에 투쟁하는 동지애만 인정되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광주항쟁 때 도청에 모였던 시민군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택시운전을 하던 사람이 사령관이 되고, 고등학생도 당당히 총을 들고 회의에 참가하여 발언하고 자신과 관련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87년 세대나 386이 과거에 한때 순수했을지라도 기존의 권위에 굴복하고 물드는 순간 그들은 순수함을 잃고 단지 과거의 명망을 자산으로 삼아 기존의 권위에 편입되었지만, 촛불은 집단지성의 힘으로 순수함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순수한 정열로 남기 위해선 끝까지 억압적인 사회 속에서 형성된 복종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나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때문에 무슨 명망과 권위를 내세을 때 그는 이미 촛불정신과는 먼 사람과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촛불 정신만이 21세기의 인류가 실천하고 이루어 갈 기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끝까지 이름없는 하나의 촛불로서 저항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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