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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단계 촛불조직론 소고

  • 분류
    운동론
  • 등록일
    2009/01/29 16:37
  • 수정일
    2009/01/29 16:37
  • 글쓴이
    서른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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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단계 촛불조직론 소고
 
1.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서의 촛불
2.       신자유주의 세력의 본질로부터 유래하는 억압과 독재에 대하여
3.       대체권력의 맹아로서의 자주적 조직의 민주적 특질에 대하여
4.       촛불조직의 민주주의
5.       새로운 형태의 조직으로서의 촛불조직
6.       민주적 조직의 사례검토-촛불연행자모임과 815 평화행동단
7.       연대와 관련하여-위로부터인가 아래로부터인가? 지도체인가 헌신체인가?
8.       결어
 
1.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서의 촛불
 
2008년을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은 무엇이었는가에 대하여, 주체의 측면에서 계급이나 대중의 틀로 파악되지 않는 다중의 자주적이고 직접적 행동이었다고 본다면, 대상 또는 지향의 측면에서는 형식적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의 폭발로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의 노래가 폭발적인 공감을 얻은 것은 이를 반증한다.
 
하나의 정치체제로서 근대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형식적인 대의제 민주주의의 극단으로서, 아무리 보통 직접 평등 비밀의 선거를 하더라도,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은 단지 이념일 뿐이고 실제로는 4년에 한번 투표권을 행사할 때만 유권자일 뿐, 평상시에는 통치의 대상 혹은 피치자일 뿐이다. 즉 국민이 뽑은 정치인들이 국민으로부터 독립된 권력으로서 국민에게 대립물로 서서 국민을 소외시키는 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마치 1844년 경제철학초고에서 맑스가 언급한 것처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하에서는 인간이 생산한 상품과 사회적 관계가 인간으로부터 독립하여 인간에 대한 적대적인 대립물로서 나타난다 것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촛불은 단지 광우병 협상이라는 행정행위가 위험하고 잘못되었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국민이 뽑은 권력과 대통령이 국민의 뜻을 받들고 복종하기는커녕 배반하고 적대하는 것에 대한 분노의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이것은 형식적이고 기만적인 부르주아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분노로서, 그 자체에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포함하고 있다. 즉 자신들이 뽑아 준 권력이 맘에 안들 때 4년이나 5년 후에 표로 심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분노가 너무 커서 당장 갈아치우자는 열망이 명박퇴진으로 나타난 것이고, 이는 기껏해야 조작과 동원의 대상이었던 유권자인 시민이 정치로부터 소외되고 억압받는 피치자이기를 거부하고 주권자로서 직접 정치에 개입하는 행동이다.
 
2.      신자유주의 세력의 본질로부터 유래하는 억압과 독재에 대하여
 
또한 촛불의 촉발 요인이 미국산 소고기 수입 협상이었고, 미국산 소고기 수입이 한미 FTA협상의 전제조건이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2008년 한국에서의 촛불항쟁은 단순히 반민주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대통령이나 강부자 뉴라이트 세력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그 본질에 있어서 축적위기에 몰린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본질에서 강요되는 반민중적 억압에 대한 필연적인 반발과 저항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고, 그 점에서 저항의 지향을 분명히 하지 않는 한 이 항쟁은 불충분한 미완의 혁명이 될 수도 있다.
 
한국적 특수성이 있기는 하지만, 의료보험의 민영화라든지, 물 전기 수도 가스 철도의 민영화와 사유화, 비정규직의 양산으로 표현되는 노동의 유연화, 금융의 개방과 자유화, 복지의 축소, 이 모든 것들은 70년대말 영국의 대처나 레이건으로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인 것이고, 그 본질은 축적위기에 몰린 자본의 노동에 대한 공격이다. 이러한 공격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위기의 폭발이 바로 작금의 경제위기인 바, 이는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국가와 권력이 반민중적인 억압을 심화시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명박 정권이 파쇼적 독재로 나아가는 것은 단지 그가 정신병자여서가 아니라, 시민과 민중을 억압하지 않으면 안되는 신자유주의 세력에 기반한 정권이라는 본질 때문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촛불을 단지 반동적이고 반역사적인 하나의 정권이나 집권자에 대한 저항으로 보고, 단지 매국집단이나 뉴라이트 반대 혹은 MB악법이나 MB정책의 취소로서 똑 같은 신자유주의 세력인 (광우병 협상보다 100배나 반민중적인 한미 FTA협정을 국민에게 강요한) 노무현 정도의 시절로 돌아가자는 것은, 왜 국민이 뽑은 정권이 국민을 배반하고 대다수 민중을 억압할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는 MB의 모든 정책이 한줌도 안되는 신자유주의 세력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서 그 반민중적 본질 때문에 민중과 촛불을 억압하고 끝내는 파쇼독재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는 점만 지적하자.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정치적 소외의 극단적 형태로서의 대의제 민주주의 혹은 민주주의를형해화한 이명박 정권의 억압과 탄압이 전 세계의 축적위기에 몰린 신자유주의 세력의 생존을 위한 발악의 일환이란 점에서, 촛불의 꿈과 지향은 단순히 보다 품성이 좋은 대통령을 뽑고, 보다 서민적인 당을 다수로 만드는 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다는 점은 명백할 것이다. 따라서 촛불은 형해화한 대의제 민주주의(대리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직접민주주의의 열망과 최소한 반신자유주의의 기치를 분명히 하지 않는 한, 반동적이고 반민주적인 억압세력과 올바르게 싸울 수가 없을 것이다.
 
3.      대체권력의 맹아로서의 자주적 조직의 민주적 특질에 대하여
 
그렇다면 촛불의 미래 혹은 촛불의 이상 즉 정치적 소외의 극복은 어떠한 모습일 것인가? 그에 대한 해답은 촛불이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대중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자주적인 직접행동에 기반한 광장의 민주주의 혹은 집단지성이라고 한데서 알 수 있듯이, 어떠한 기성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광장에 평등하게 나서서 모두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참여한다는 점에서 직접민주주의의 이상을 품고 있는 것이고, 실은 이러한 직접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도 프랑스혁명 때의 파리콤뮨이나, 러시아혁명 때의 평의회(소비에트), 광주항쟁 때의 시민광장과 시민군에서 보듯 피치자에 대한 억압의 도구로서의 본성을 갖는 국가라는 권력장치를 부정하는 즉 억압과 소외의 기제를 부정하는 혁명적 민주주의에 다름 아닌 것이다. 억압과 소외를 부정하고 참다운 민주주의와 평등세상을 꿈꾸는 모든 실천은 이처럼 궁극적으로 직접(혁명적)민주주의의 틀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고, 이러한 직접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 대중의 자기 통치, 혹은 자기 지배의 실현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직접민주주의의 이상에도 불구하고 냉정히 생각해보면, 비록 우리들이 비민주주의에 대해 분노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중이 자기지배를 관철할 때에 민주주의가 관철되기 위해서는 민주적 경험으로 단련된 수많은 민주적 조직들이 전제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즉 비민주에 대한 혁명적 분노를 통해 대중이 국가권력을 장악했을 때, 민주주의를 관철할 수 있는 것은 민주적 경험으로 단련된 수많은 자주적이고 민주적 조직들이 있어야만 한다.
 
즉 자기 운명을 자기가 결정하지 못하고 4년마다 그렇고 그런 정상배들이 표를 구걸하는 대상으로서의 유권자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중요한 결정을 모든 국민이 직접 참여하여 결정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쟁취는, 사회의 모든 단위와 단계에서 직접민주주의를 관철할 역량이 선행되어야 혹은 최소한 맹아적으로라도 키워내고 쟁취하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촛불의 자주적 조직들이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할 담보로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고 허구적 민주주의 위에 선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국가를 대신할 대체권력의 맹아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촛불조직에서의 민주주의는 단지 카페 성원간의 소통과 단결을 진작시키는 도구라는 점만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억압과 소외를 극복하고 인류의 이상을 관철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담보라고 해야 할 것이다.
 
4.      촛불조직의 민주주의
 
그런데 어떤 결정과 행동이 비민주적이라고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은 쉽지만,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비민주적이라고 비판하는 우리들 자신이 한번도 제대로된 민주적인 조직생활을 경험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군대는 물론이고 가정, 직장, 학교, 이 모든 것들이 실은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원리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비민주적이고 권위적인 것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우리 자신이 세뇌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달리 말하여 대기업의 주주총회에서 다수결로 이사회가 선출되었다고 하더라도 나아가 대표이사의 독단이 아니라 이사회가 충분한 토론과 만장일치로 모든 일을 결정하여 집행했다고 해서, 전체 주주나, 모든 회사원에 대하여 민주주의일 수는 없다. 이사회의 결정에 참여하기는커녕 복종의 의무만 있는 다수의 종업원에게는 독재일 것이고, 결정에 직접 참여할 수 없는 다수의 주주는 위임권만 행사했을 뿐 냉정하게 말하여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갖은 평등한 주체는 아닌 것이다
 
가령 누군가를 카페 대표로 선출하면 회원들과 상의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장처럼 혼자서 결정한다든지, 집행부를 선출하면 회원들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자기들끼리만 판단한다든지 하는 것은 냉정히 말해서 민주주의가 아니다.
 
직접민주주의란 모두가 소외되어서는 안되는 평등한 주체라는 의미에서, 무엇보다도 전체 성원의 정보의 공유와 충분한 토론을 통한 결정과 자발적인 역할의 분담과 집행, 그리고 투명한 보고, 모두가 겸허한 평가, 이런 모든 것들이 충족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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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결코 다수결이 아니다. 민주주의란 참여하는 모든 성원이 결정되어야 하는 문제에 대하여 모두 자세히 알고 함께 판단하는 것이지, 어떤 판단과 결정이 가공되고 선별적으로 주어진 정보에 의해 유도된다면-이런걸 집행부 프리미엄이라고 한다-, 그것이 아무리 민주적인 절차를 거쳤을지라도 민주주의는 아니다. 마치 북한의 최고인민회의가 아무리 만장일치의 결정을 하더라도 민주주의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하나의 광장에 모일 수 있는 몇 백명이나 몇 천명이 아니라 수십만 수천만이 모였을 때는 어떻게 직접민주주의를 관철할 것인가? 매사를 국민투표에 부칠 수 없는 만큼, 이 경우 불가피하게 토의와 결정을 위해서 대표나 대리인을 선임하거나 선출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선출된 소수의 대리인이 다수의 위임인에 대하여 위계적 특권적 권위적이 아니라, 특권이 없는 머슴이어야 한다면, 언제든지 해임 소환할 수 있고, 수시로 보고를 받고 중요사항에 대하여 주인의 뜻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은 명백할 것이다.
 
참고로 러시아 혁명 때는 전투의 지휘(군령권)는 지휘관이 하지만, 일상적 병영의 업무(군정권)는 병사평의회가 관장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전문성과 도덕성의 조화 혹은 모순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보일지도 모른다. 또한 만약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국민의 뜻을 배반할 때 소환할 수 있는 제도 즉 국민소환제가 있었다면, 지난 쇠고기 정국 때 국민의 종이어야 할 그들이 그토록 국민의 뜻을 배반하지 못했을 거란 점에서 국민소환제의 관철은 미디어와 여론의 조작이나 일삼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직접민주적 견제장치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모든 자주적 민주적 조직은 언제든지 대표를 해임하거나 소환할 수 있는 토대 위에서(소환권 recall), 모든 사항에 대하여 최대한 보고받을 수 있는 권리와(정보공유권), 함께 토론할 수 있는 권리(공동결정권, 참여권), 비판할 수 있고, 비판이 합당하다면 수용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비판권)는 기본적인 것이고, 그 대신 토의의 과정과 결정에 적극 참여하고, 민주적인 결정을 존중하는 품성이 요구된다고 하겠고, 이러한 참여와 존중을 끌어내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 역시 민주적 조직의 리더쉽이라고 할 수 있다.
 
5.      새로운 형태의 조직으로서의 촛불조직
 
오늘날 사회운동체를 보면, 먼저 시민단체는 직업적 상근활동가와 그들의 생계비와 사업비를 지원하는 후원조직으로 되어 있다. 이중에서 정부나 사회단체의 지원보다 후원조직에 의존하는 단체를 NGO라고 하는데, 어쨌든 소수의 활동가와 다수의 후원가의 구조로 되어있고, 이에 비해 대중조직인 노조를 보면 직접 선출된 대의원들과 위원장 등이 집행부를 꾸리고 일상적인 사업과 보고를 하면서 파업 등 중요사항은 대의원대회나 조합원총회를 통하여 결의하고 승인받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즉 노조는 조합원이 회비납부만이 아니라 선출된 집행부와 함께 결의하고 실천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고, 대부분의 활동가 운동체는 이러한 구조로 운영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카페 조직은 카페지기와 운영자에게 게시판 운영권이나 등업권 강퇴권 등을 부여하는 등 중앙집권적으로 설계되어 있기는 하지만-즉 자칫하면 중앙집권적이고 비민주적으로 운영될 소지가 크기는 하지만- 회비나 실천 등의 의무를 강제하지 않고 낮은 참여율을 높이기 위한 소통의 노력(즉 민주적 운영을 위한 노력)이 운영진의 민주적 품성에 많이 의존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어쨌든 독재는 중앙집권적이고 위계적 수직적인데 반해, 민주주의는 수평적 참여를 지향한다고 볼 때, 즉자적 다중의 직접참여라는 특성을 갖는 촛불들은, 다수를 그저 회비나 내는 수동적 존재로 만드는 시민단체와 같은 상근자운동체와는 거리가 멀고, 노조나 여러 정치운동체처럼 비록 민주적으로 선출된 집행부와 민주적 의결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중앙집권적이고 위계적인 조직방식과도 친화하기 어려운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직업적인 활동가가 아닌 생활인으로서 참여하는 촛불조직은, 활동과 참여와 의지의 강도가 시민단체나 대중조직과는 전혀 다른 참여 형태를 가길 수 밖에 없다. 즉 속박이 강하지 않은 혹은 성원의 자율을 침해하지 않고 나아가 강력한 참여나 결의를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대의에 공감하고 참여하는 공동체인 바, 이 공동체는 개방적이고 수평적이며 민주적인 의결과 실천구조에서 낮은 단계의 실천을 추구하는 즉 즉자적 다중이 결합하여 대자적 다중으로 전화되는 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촛불에 관한 글들을 보면 촛불을 다중으로서의 자주적 자율적 개방적 성격을 상찬하는 글들이 주를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다중이 즉자적 다중으로만 멈춘다면 승리를 기약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목적과 지향을 분명하게 하는 의지와 실천의 공동체의 성원으로서의 대자적 다중으로 전화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촛불은 카페라는 틀을 매개로 하여 온오프의 활동을 통해서 그러한 전화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이처럼 체제 내에서 비판과 개량을 추구하는 시민단체가 다수의 참여를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구조라면, 체제저항적인 대중운동체가 민주적이면서도 중앙집중적인 구조를 갖는 것과는 달리, 촛불조직은 낮은 단계의 참여와 실천을 수렴하는 직접민주적이고 개방적인 틀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제3의 새로운 형태의 조직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촛불조직 혹은 카페는, 즉자적 다중이 의지의 공감에 따른 자발적 가입으로 이루어지고 회비와 규율의 강제가 없는 카페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수 성원은 즉자적 다중의 흔적을 가질 수 밖에 없고, 이 때문에 대부분의 카페는 회원의 결합도가 10% 내외에 그치고 있다.
 
즉 촛불조직을 평가하고 판단함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대중조직과 다중조직의 차이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카페에 가입한 회원이더라도 카페의 사업이나 결정에 따르는 것은 개별회원의 자율에 달려있다. 마치 광장의 토론이나 깃발모임에서 무엇으로 결정되든 실천에 옮기는 것은 여전히 개인의 자율이란 점에서 카페는 위계적 집행부와는 친화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점에서 위계적이 아닌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집행부이어야만 한다.
 
나아가 혼자서 판단하고 실천하는 습성이 있고 실천의 동기가 자기설득(확신)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대안으로 성원의 다수의 공감이 없는 한 어떠한 동원도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떠한 결정과 실천도 위임받은 집행부만의 결정이 아닌 성원들이 직접 참여한 합리적인 토론의 과정이 성패의 핵심일 것이다.
 
6.      민주적 조직의 사례검토-촛불연행자모임과 815 평화행동단
 
먼저 촛불연행자모임을 보면, 머슴단은 헌신할 의무 외에 아무런 특권이 없고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음을 명시하고 있으며, 모든 단위의 회의에 모든 정회원이 참여하여 머슴단과 동일하게 토의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것은 의지가 다양할 수 있는 처지의 공동체에서 최대한의 민주주의를 위한 설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모든 회의는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는 취지와 함께 사전에 공지되어야 한다는 것과, 모임의 사정과 사업에 대해서 수시로 보고하고, 안건에 대한 이해도의 공유를 위해 회의안 역시 충분히 사전 공지되어 토론될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소흘히 할 때 연행자모임 역시 민주주의가 형해화 될 위험이 있다고 할 것이다. 최대한 함께 알고 함께 판단하고 함께 실천하고, 보다 더 많은 성원이 참여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을 하는 것에 민주적 조직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할 것이다.
 
815 평화행동단은 매우 독특하게도 위계적 집행부를 갖지 않고, 기획팀(짱구팀)을 비롯한 팀별 회의체 구조를 가지고 있고, 3개월마다 팀장직을 돌아가면서 맡는 점, 총괄적인 조정은 팀장회의나 사안별 회의에서 결정하는 것, 특히 기획팀의 사업안을 전체성원의 모임에서 토의하여 결정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 등에서, 특권의 우려가 있는 대표나 집행부의 존재를 두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민주적 조직임을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표결이 아닌 설득을 통한 최대다수의 의지의 집결을 관행화하고 있는 점 역시 민주주의가 단순한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력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의지의 공동체인 이 모임은 각 성원간의 목표나 수단 의지에 대한 차이가 심각할 때, 혹은 비폭력 기조에 대한 공감이 깨어질 때 어떻게 될 것인지는 속단할 수 없지만,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조직으로서의 모범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7.      연대와 관련하여-위로부터인가 아래로부터인가? 지도체인가 헌신체인가?
 
촛불 승리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승리를 위해서 어떤 준비가 필요한 것인지에 대하여는 많은 토론과 실천과 시행착오가 필요할 것이다.
작년 가을이래, 투쟁승리를 위한 연대체의 건설 혹은 지도체나 지도구심을 만들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자율적이고 자발적이고 느슨한 즉자적 다중들의 의지의 공동체인 카페와 그 성원은 민주집중제나 중앙집권제와 친하지 않고, 따라서 연대의 틀 역시 느슨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중앙집중적인 지도체나 연대체를 위로부터 건설하려는 시도는 대체로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권위가 아니라 동등함으로부터, 배제가 아니라 차이를 존중하고 공존하는 문화로부터, 결정과 지시가 아니라 토론과 상의로 낮은 단계의 정보의 공유를 위한 네트워크로부터 점차 긴밀도와 결합도를 넓혀가는 작업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즉자적 다중의 자발성과 창조성이 최대한 발휘되는 것을 보장하면서, 마찬가지로 수많은 촛불 자주 조직이 서로 존중하고 상의하고 협력할 수 있는 연대의 틀을 우선 성격이나 지향이 같은 카페들부터 낮은 단계부터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2008년 8월 이전의 촛불들이 즉자적 다중 혹은 개별적 참가가 주된 형태였다면, 2008년 가을부터는 저항을 추구하는 지역별 의제별 카페들을 통하여 결합하고 실천하고 있고, 이러한 키페 역시 즉자적 다중의 흔적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촛불을 동원의 대상 혹은 지도의 대상, 일사분란한 의지의 통일체-결국 중앙집중적 권위체-를 만들려는 시도는 개개의 촛불과 촛불조직의 특성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차이를 존중하고 개방적이고 느슨한 결합을 내세워도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현단계에서 누군가가 혹은 어느 조직이 지도구심을 자임하거나 연합을 통한 상층 지도체를 건설하려는 것은 전혀 난센스일 뿐이다.
 
촛불들의 평균적인 결의는 승리를 위한 기획을 공유하고 전체 투쟁의 부분적 성원으로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잘 이끌면 강력한 소속감 없이 따라가고 참여하는 정도라고 했을 때, 이러한 촛불과 촛불조직들을 단일한 의지를 갖는 군대와 같은 조직을 만들려는 시도는 벽에 부딛힐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차벽에 막혔을 때 누군가가 밧줄을 준비해 온다든지, 전대협과 같은 조직이 훌륭하게 리딩을 자임한다든지, 깃발회의를 소집한다든지, 내가 아닌 누군가가 스티로폼이나 마이크를 준비해올 때, 다중인 촛불은 그들을 신뢰하고 함께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올 여름에는 차벽을 넘기 위해 중장비를 준비하는 조직도 생겨날 것이고, 지난 가을과 겨울을 거쳐 다져진 신뢰를 기반으로 총괄기획을 전담하는 조직도 생겨날 것이다.
 
어쨌든 대중의 신뢰와 권위는 자임해서가 아니라, 대중보다 앞장서서 헌신적으로 실천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것이라면, 별로 공감할 수 없는 지도체를 건설하려 할 것이 아니라, 헌신체의 결성과 실천이 급선무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무수한 부침을 통해 대중 속에서 도덕성과 능력을 인정받은 헌신체가 다중에 친화적인 민주적 권위를 형성해 갈 수 있을 것이고, 이들과 강력한 활동가 조직이 신뢰를 기반으로 한 역할 분담 속에서 촛불은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8.      결어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촛불은 신자유주위에 대한 반대와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최소한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소환제, 집회 시유의 자유 쟁취)을 분명히 해야한다는 점과,
촛불조직내에서 민주주의를 관철하는 것은 대체권력의 맹아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점과,
직접민주주의 혹은 최대한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함께 알고, 함께 토론하고, 함께 결정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중시하는 새로운 형태의 개방적이고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촛불조직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과,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다중에 기반한 촛불조직들이 승리의 전망을 갖기 위해서는, 각각의 특성에 맞는 헌신체로 전화하고, 이러한 헌신체들이 보다 합리적인 실천을 위해 네트워크와 다양한 형태의 연대를 통한 실천 속에서 신뢰를 쌓아가고, 신뢰에 기반한 역할분담의 강화와 확장 속에서, 승리를 위한 총괄기획의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촛불승리를 위해서는 즉자적 다중에서 대자적 다중으로 전화해야 한다는 것과, 이 과정은 다중의 특성이 존중되는 새로운 형태의 민주적 조직을 통해서 이루어 진다는 것, 이러한 조직 가운데에서 다중의 민주적 신뢰를 획득한 헌신체를 중심으로, 협력과 역할분담 그리고 연대의 수준을 높여가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낡은 운동권 역시 기존의 대중운동의 관점이 아니라 다중의 특성이 존중되는 개방적인 새로운 운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한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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