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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에코페미니즘>(반다나시바 & 마리아 미스)

예전에는 산모 그리고 산모와 아기 간의 유기적 통일성에 있던 초점이 이제는 의사가 통제하는 '태아라는 결과물'에 맞추어진다. 여성은 자궁은 활동력 없는 용기로 환원되었고 여성의 무지와 더불어 여성의 수동성이라는 관념도 조작되었다. 태아와 여성 간의 직접적인 유기적 결속은 여성을 훌륭한 어머니로 교육시킬 전문지식을 독점적으로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남성과 기계에 의해 매개되는 지식으로 대체된다.  (42-43쪽)

 

 

노동이 비노동으로 정의될 때, 가치는 무가치로, 권리는 무권리로, 그리고 침략은 개량으로 정의된다. '개량된 종자'와 '개량된 태아'는 사실상 '점령된' 종자와 태아이다. 사회적 노동을 자연상태로 규정하는 것이 이 '개량'의 본질적 요소이다. 이것은 다음의 세 가지를 동시에 획득한다. 1)그들이 착취하는 생상물의 원소유자의 공헌은 모두 버정하며, 그들의 활동을 수동적이라 치부함으로써 이미 사용되고 개바된 자원을 '사용되지 않고' '개발되지 않은' '버려진' 자원으로 변모시킨다. 2)착취를 '개발'과 '개량'으로 해석함으로써 '개량'했다는 주장에 근거하여 절도를 소유권으로 바꾼다. 3)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이전의 사회적 노동을 자연으로 정의하고 따라서 아무런 권리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민중들의 관습적, 집단적 용익권을 '해적행위'와 '절도'로 바꾼다.

아메리카 땅을 원주민들에게서 뺏는 것에 대해 토머스 모어 경이 적용한 논리에 따르며, "누구라도 쓸모없이 비어 있는 땅을 취할" 때 그 몰수는 정당화된다ㅏ. 1889년 로우즈벨트(Theodore Roosevelt)는 "정착민과 개척자는 그들 편에서 보면 기본적으로 저당성을 갖는다. 그들이 없었던들 이 거대한 대륙은 오로지 지저분한 야만인들을 위한 사냥금지구역밖에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49쪽)

 

 

 

"배의 맛을 알려면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 즉 입에 넣고 씹어봐야 한다." (마오쩌뚱, 1968)

 

 

 

최근의 생식기술과 유전공학은 지금까지 인간 개체, 한 사람 한 사람을 폭력적인 침략으로부터 지켜주고 한갓 연구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주던 최후의 경계까지도 무너뜨렸다. 이것은 특히 생식기술의 주된 연구대상인 여성들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주체와 대상, 인간과 비(非)인간을 가르는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이냐는 질문은 과학 내부에서는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적 패러다임은 과학적인 충동에는 한계가 없으며 추상적 지식에의 탐구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리라는 신조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연구과정 안에서는 어떠한 도덕적 간섭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은 스스로 윤리적인 질문에 답변할 수 없다. 하지만 과학자들 도한 보통의 시민이요 남편,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실험실에서 하는 작업에 관한 윤리적인 질문들과 갈수록 더 많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그들은 대개 이 문제를 과학적인 방법에 따라, 즉 허용된 것과 허용되지 않은 것을 가르는 선을 어딘가에 새로인 그음으로써 해결한다. 이는 곧 무엇이 주체디고 무엇이 객체인가에 대하여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비인간인가에 대하여 그리고 무엇이 허용된 것이고 무엇이 허용되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그들이 새로운 정의를 제공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방법의 한 예가 새로운 생명윤리학자들이 태아연구라는 까다로운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태아연구는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은 태아연구를 금지할 것을 요구한다. 영국에서는 워녹위원회와 자원검열국이 이 문제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발견했다. 그들은 임신한지 2주 후 생명의 시작으로 보았다. 2주 이전에는 태아가 아니라 전-태아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전-태아 시기에는 연구가 가능해진다. 명백히, 그저 어떻게 정의를 내리는가의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럭저럭 하는 사이에 이 정의는 생식기술을 규제하려는 여러 나라에서 받아들여졌다. 과학자들과 의료재단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태는 명백하다. 즉 생식기술, 특히 IVF공학이 성공하려면 더 많은 태아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모나시 대학의 생명윤리학자 헬가 쿠제와 피터 싱어는 정의를 내리는 능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들에게 2주 된 태아는 단지 '양상추'(lettuce)일 뿐이다. 그들은 호모 싸피엔스 종과 인간 개체 사이에 구별을 짓거나 선을 긋는다. (...)

쿠제와 싱어에게 2주된 태아는 "고려할 필요가 잇는 주체"가 아니며, 다라서 연구가 허용될 뿐만 아니라 남아도는 태아는 폐기하거나 인공적으로 낙태시킬 수도 있다. 그들은 경계선을 인간개체에 더 가깝게 설정하여 태아가 고통을 느낄수 있는 시기, 즉 중추신경계가 발달할 이후의 시기를 자신들의 정의로서 택하고자 했다. 그들은 이 시기가 18~20주경이 될 것이라 본다 .그리하여 그들은 제한시간을 워녹위원회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월러위원회가 설정한  현재 14일보다 한참 더 늦추어 잡을 것을 주장한다. 그들은 태아란 여성의 일부이며 여성과의 공생관걔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점은 어디서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최초의 분리는 여성과 태아의 분리이다.

생명윤리학자들에게 유전공학 및 생식기술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는 다만 정의(定義)의 문제에 불과하다. 과학자들은 주로 정의내리는 행위를 통해 폭력을 행사한다. 그것은 직접적인 폭력에서 겉보기에는 깨끗하고 순수해 보이는 구조적 폭력으로 변모했다.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이러한 정의의 힘이야말로 바로 나찌수용소에 갇힌 사람들 특히 정신장애자들을 상대로 연구를 행한 과학자들이 도덕적 제약을 무시할 수 있게 한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 사람들은 대상으로 기본연구를 행한 과하갖들은 정신장애자들이 비인간이거나 인간 이하라는 정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누가 인간이고 누가 비인간으로 정의되느냐는 것은 권력의 문제이므로 쿠제와 싱어가 내린 인간의 정의(이성적, 자기인식적, 자율적임)는 권력의 조작에 전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성 역시 오랫동안 이성적이며 자기인식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 간주되지 않았음을 떠올리게 된다. (67-69쪽)

 

 

 

 

착취를 바탕으로 하는 세계체제에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평등한 것이다." (91쪽)

 

 

 

경영자, 기술관료층이 최근 들어 자주 사용하는 언어는 여성을 아동의 수동적인 '환경'으로 묘사하거나 '인구폭발'의 주범인 '폭탄'으로 묘사한다. 이 두 경우에서 자녀의 생명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여성의 생명은 어린이와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통제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어머니의 자궁은 아이의 '환경'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상대적으로 보호받는 환경에서조차 태아는 완전히 보호받지 못한다. 아기의 건강상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잇는 어머니의 건강이 '태아환경 내의 한 요소'로 환원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아기 관계를 해체 하는 비슷한 관점이 작업장의 환경위험에 대처하는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태아보호 정책'은 임신한 (혹은 임신을 원하는) 여성을 위험지역에서 내보냄으로써 '태어나지 않은 아기를 보호'한다는 것으로, 고용주들은 위험한 생산에서 초점을 옮길 수단으로 이를 활용한다.

극단적인 경우, 여서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고 식탁에 올릴 음식을 얻기 위해 불임수술에 동의하기도 한다. 더 전형적인 사례에는 여성들의 생리주기를 감독하거나 고용하기 전에 유산을 하게 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린 넬슨이 말한 대로 "'오염을 가정하고' 작업장 재배치와 산부인과적 처치를 받기란 너무 쉬운 일이지만, 이것들은 병 자체가 아니라 증상에 대한 대응일 뿐"인 것이다. (114-115쪽)

 

 

 

 

독일에서 열린 유전공학에 대한 공개토론회에서 유전공학 분야의 한 선도적인 연구자는 이렇게 말햇다. "나는 그러한 한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특정 기술이 위험한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개발하고 응용해보아야죠. 그런 다음에야 민주적인 원칙에 따라 이 기술을 사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관해 공적인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원자력의 어ㅟ험을 알기 위해서는 원자폭탄을 만들어서 폭파시켜봐야 한다는 얘기이다. 유전공학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펼 수 있다. 많은 과학자들의 '가치로부터 자유로운' 연구가 도덕적인 고려나 사람들의 우려와 정서, 특히 정치가들의 자금규제로 인해 방해받고 있으니, 윤리와 도덕은 연구가 완료된 후 그것을 응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생겨날 때나 되어서야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는 거이다. 실제로 윤리위원회는 그후에느 생겨난다. 하지만 최종결정을 내리는 것은 정치가들이다. 다른 한편 이들은 오염허용치 등의 어려운 윤리적 결정을 내려야 할 경우 과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한다. 사실상 과학자나 정치가는 특정 기술에 투자할 돈이; 있고 이윤을 위해 그것을 개발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122쪽)

 

 

 

 

오리싸의 해안지대에서는 발리아빨(Balliapal) 부족이 7만명의 부족민을 그들의 비옥한 고향당에서 몰아낼, 국립 로켓시험지구 설정에 저항하고 있다. 반대자들은 되풀이해서 그들과 땅의 유대가 시험지구에 대한 저항의 근거라고 밝히고 있다. "땅과 바다는 우리 것이다. 목숨은 내줄 수 있어도 신성한 어머니 대지는 내줄 수 없다." 그들은 보상금 제안도 거절했는데, 보상금으로 발리아빨 농민들을 수세대애 걸쳐 보살피고 먹여살린 땅과의 깨어진 유대를 보상할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리야(Oriya)의 시인 브라즈나트 라이(Brajnath Rai)가 쓴 대로이다.

 

수마일이나 펼쳐진

코코아와 캐슈 농장.

헤아릴 수 없이 풍성한

비틀 덩굴이

갈색 모래카펫 위에

녹색의 예술적인 무늬를 그렸다.

고구마, 땅콩

머스크 멜론 덩굴이

당신의 먼지 낀 땅을

변치 않는 녹색으로 장식했다.

이것들은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번창한 삶에 대한  기운찬 희망을 주었다.

읠하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삶의 영원한 희망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오늘, 갑자기

권력에 미친 사냥꾼의 탐욕스러운 눈이

당신의 녹색 몸을 발견하고는

조각조각내고

신선한 붉은 피를 맘껏 마셔버렸다.

저주받은 사냥꾼은

내키는 대로

당신의 가슴을 겨냥하여

불타는 미사일을 발사했다.

 

(133-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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