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쁘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中 (2010년 8월 발췌독)

 

 

하지만 슈타인라우프가 내 생각을 가로막는다. 그는 세수를 다 했고, 무릎 사이에 끼워두었던, 나중에 걸칠 아마포 상의로 몸의 물기를 닦는다. 그러고는 나에게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는데, 그 와중에도 자기가 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분명하고도 단호한 말들을,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하사관으로서 1914~1918년 전쟁에서 철십자훈장을 받은 슈타인라우프의 말들을 잊어버려 마음이 아프다. 그의 서툰 이탈리아어와 훌륭한 군인다운 단순어법을 믿음없는 인간인 나 자신의 언어로 옮겨야 하다니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에나 나중에나 그 말의 뜻만큼은 잊지 않았다. 그건 바로 이런 뜻이었다.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 우리는 나막신을 질질 끌지 말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

 

- 57~8쪽

 

(아, 이것이 프리모 레비 자유정신의 정수!!)

 

 

 

여기 내 누이가 있다. 그리고 정확히 누구인지 알수 없는내 친구들 몇명과 다른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모두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세 가지 음으로 이루어진 경적 소리, 딱딱한 침대, 옆으로 밀어버리고 싶지만 나보다 훨씬 히이 세기 때문에 잠을 깨울까 두려운 내 옆 사람 이야기다. 우리의 허기, 이 검사, 내 코를 주먹으로 때렸다가 피가 나니까 가서 씻고 오라고 한 카포에 대해 산만하게 이야기한다. 내 집에 돌아와 친한 사람들 속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강렬하고 구체적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다. 그러나 청중들이 내 말을 득고 있지 않다는 게 빤히 보인다. 그뿐 아니다. 그들은 완전히 무관심하다. 그들은 내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자기들끼리 전혀 다른 이야기를정신없이 나눈다. 누이가 나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그곳을 떠난다.

마음속에서 황폐한 슬픔이 서서히 자라난다. 현실감각이나, 갑자기 침입하는 외적 요인 따위에 길들여지지 않는 순순한 상태의 고통이다. 어린아이들을 울리는 것과 비슷한 아픔이다. 다시 한 번 표면으로 헤엄쳐 올라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호히 눈을 뜬다. 내가 실제로 깨어 있음을 확인해줄 어떤 것을 내 눈앞에서 찾기 위해서.

아직도 따뜻한 꿈이 내 앞에 있다. 잠을 깨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꿈의 고통에 사로잡혀 있다. 그때 이것이 우연한 꿈이 아니라 내가 이곳에 온 이후로 이미 꿨던 꿈이라는, 상황이나 세부 사항들도 거의 바뀌지 않고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꿨던 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나는 완전히 맑은 정신을 되찾는다. 이 꿈 이야기를 이미 알베르토에게 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가 자기도, 또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런 꿈을 꾼다고 털어놓았던 것도 생각난다. 그는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그런 꿈을 꿀지도 모른다고 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왜 매일매일의 고통이,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장면으로 거듭해서 꿈으로 번역되는 걸까?

 

- 88-89쪽

 

 

 

우리는 명백하고 손쉬운 추론을 믿지 않는다. 모든 문명적 상부구조가 제거되면 인간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잔인하고 이기적이고 우둔하다는 추론 말이다. 이러한 추론에 따르면, '해프틀링'은 거리낌이 없는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생각에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궁핍과 지속적인 육체적 고통 앞에서 수많은 사회적습관과 본능이 침묵에 빠진다는 것뿐이다.

 

- 132쪽

 

 

 

 

유대인 특권층들이 만들어내는 인간상은 슬프면서도 주목할 만하다. 현재, 과거, 고래古來의 고통들, 이방인에 대한 전승되고 학습된 적개심이 그들 안에서 하나가 되며,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을 비사교적이고 무례한 괴물로 만든다.

그들은 독일 수용소가 구조적으로 만들어낸 전형적인 작품이다. 노예 상태에 있는 몇몇 개인에게 특권을누릴 수 있는 자리, 어느 정도의 편안함과 높은 생존 가능성이 제공되는데, 대신 그들은 동료들과의 자연스러운 연대감을 배신하라는요구를 받는다. 물론 몇몇은 그 요구를 받아들인다. 그 사람은 일반 규정을 면제받고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래서 밉살스럽다. 사람들로부터 증오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에게는 더 큰 힘이 주어질 것이다. 불행한 사람들의 소대를 지휘하는 책임이 그에게 맡겨져 그가 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되면 그는 잔인하고 포악해질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 자리에 훨씬 더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다른 사람이 자기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을 압제하는 사람들에 대한 욕구불만의 찌꺼기를 자신이 압제하는 사람들에게 비이성적으로 퍼붓는다. 위에서 받은 모욕을 밑에 있는 사람에게 증오의 형태로 폭발시키면서 쾌감을느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피억압자들에 대해 갖는 이미지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 피억압자들은 저항을 하면서,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고통을 참으면서 서로 결속한다. 억압이 일정한 한도를 넘지 않았을 대, 혹은 억압자가 경험이 없거나 관대해서 그것을 용인하거나 조장했을 경우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음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이민족의침략을 받은 모든나라에서, 지배를 당한 사람들끼리 적대감과 증오심을느끼는 유사한 상황이 전개된 것은 사실이다. 다른 인간적 틀성들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수용소에서 특별히 잔혹한 증거들을 포착할 수 있다.

 

-137-8쪽

 

 

 

[부록 1: 독자들의 물음에 답한다]

 

Q. 당신의 책에서는 독일인들에 대한 증오도 원한도 복수심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을 다 용서한 것인가?

 

A. (...) 당시 우리를 박해했던 사람들은 이름도 얼굴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 책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멀리 있었고, 눈으로 볼 수 없었으며, 접근할 수도 없었다. 나치스 체제는 용의주도하게 노예와 주인이 최소한의 접촉만 하도록 마련되어 있었다. 이 책에서도 주인공인 필자와 SS와의 만남은 딱 한 번만 요사되며 그것도 나치스 체제가 붕괴되고 수용소가 해체되던 그 마지막 며칠 사이에 일어났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만일 내가 실제로 우리의 박해자들 중 한 명을, 아는 얼굴을, 그 오래전 거짓말을 다시 마주쳤다면 아마도 증오와 폭력의 유혹에 굴복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파시스트가 아니다. 나는 이성과 토론이 진보를 위한 최선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의를 증오 앞에 놓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책을 쓸 때 의도적으로, 희생자의 한탄 섞인 어조나 복수심을 품은 사람의 날선 언어가 아닌, 침착하고 절제된 증언의 언어들을 사용하고자 했다. 나는 내언어가 객관적일수록, 지나치게 흥분하지 않을수록 신뢰를 주고 유용하게 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할 때에만 정당한 증언이 제 기능을 할 것이며 바로 그 때 심판의 장이 마련될 것이다. 심판관은 바로 여러분이다.

 

Q. 독일인들은 알고 있었나? 연합군은 알고 있었나? 수백만 명의 집단학살이 어떻게 유럽 한복판에서 아무도 모르게 진행될 수 있었나?

 

A. (...)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는 특별한 불문율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과,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입과 눈과 귀를 다문 채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자기 집 앞에서 벌어지는 있는 일의 공범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는 것, 그리고 알리는 것은 나치즘에서 떨어져 나오는 방법(결국 그리 오래지 않아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나는 독일 국민이 전체적으로 이런 방법에 의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Q. 유대인에 대한 나치스의 광적인 증오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A. (...) 어쨌든 반유대주의의 본질에는 거부라는 비이성적 현상이 자리잡고 있다. 기독교 국가에서 기독교가 국교로 굳어져가기 시작하던 때부터 반유대주의가 종교적인,아니 신학적인 옷을 입게 되었다. 성聖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에 따르면, 유대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디아스포라의 형벌을 바았다고 한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형벌을 받았다는 것이 그 중 하나다. 또 하나는 유대인들이 사방에 존재하는 것이, 역시 사방에 있는 기독교 교회에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독교 신자들이 도처에서 형벌을 받으며 불행하게 살아가는 유대인들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죄를 저지른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영원히 증명해야만 하고, 그 결과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증명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존재는 없어서는 안 되며, 유대인들은 박해는 받아도 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교회가 항상 이렇게 온건한 모습만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교회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장본인, 간단히 말해 '신을 죽인 민족'이라고 심각하게 비난했고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었다. (...) 유대인들이 독을 풀어 페스트를 퍼뜨렸다, 습관적으로 성체에 신성모독을 가한다, 부활절에 기독교도 어린아이들을 납치해다가 아이들의 피를 발효시키지 않은 빵에 섞어 먹는다. 이런 신앙은 수많은 피의 학살을 벌러오는 핑곗거리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먼저 프랑스와 영국에서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추방을 당했고, 그 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

 

(...) 이와 같은 일은 어쩌면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해되어서도 안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정당화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내 말은 이런 뜻이다. 인간의 의도나 행동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원학적으로도) 그것을 수용한다는 것, 그 행동의 주체를 수용하고, 그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정상적인 인간 중에서 히틀러, 힘러, 괴벨스, 아이히만 등등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지만 안도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들의 말(이는 안타깝게도 행동으로 옮겨졌다)이 이해 불가능하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기도 하니까. 사실, 그것들은 인간적인 말과 행동이 아니다. 역사에서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고, 생존을 위한 가장 잔인한 생물학적 투쟁과도 비교가 어려운 것이다. 전쟁을 이런 투쟁과 연결짓는 것은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는 전쟁과는 아무련 관련이 없다. 그것은 전쟁의 에피소드가 아니다. 전쟁의 극단적인 형태가 아니다. 전쟁은 항상 끔찍한 사건이다. 유감스러운 사건이지만 우리의 내부에 포함되어 있다. 전쟁에는 이유가 있고, 우리는 그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나치즘의 증오 속에는 이유가 없다. 그 증오는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밖에 있다. 파시즘이라는 유해한 나무에 열린 유독한 열매지만, 파시즘 밖에 그것을 뛰어넘는 곳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해야 하며 경계해야만 한다. 그것을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인식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과거에 벌어졌던 일이 되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며 의식이 또다시 유혹을 당해 명료한 상태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까지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