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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영,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1탄. 읽고서 재미난 부분 중심으로 정리해 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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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영의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에 대한 감상

 

0. 이거 왜 쓰는지 말해 봐.

 

첫 번째 세미나 시간에 어쩌다보니 ‘장애개성론’, ‘장애문화론’ 과 같은 개념에 대한 토론이 오고갔다. 이와 함께 장애의 모든 문제를 사회적 차별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는 장애인 개인 또는 그 집단만이 갖는 불편함과 삶의 장벽 들은 어쩔 것이냐와 같은 이야기들을 나왔다.

나는 그 시간에 산재 장애인이신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며, 실제로 사회적 차별로 환원할 수 없는 그런 불편함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걸 (장애인운동의 입장에서) 어쩔 수 있겠냐라는 의문을 던졌었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보니 나의 이런 발언이 너무 비겁하게 이 쟁점에 대해 회피하려는 태도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만난 김원영씨의 책,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는 이 문제와 관련된 몇 가지 중요한 갈등 지점을 드러나 보이게 해 준다는 측면에서 아주 의미있는 독서 소재였다.

이 책의 내용을 다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고, 이 책에서 누가봐도 가장 센세이션 하게 느낄 법한 5장 “나는 ‘야한’ 장애인이고 싶다”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고자 한다.

 

저자 김원영에 대한 소개 : 골형성부전증으로 지체1급 장애인이 되었고, 열다섯 살까지 병원과 집을 오가는 생활만을 해 옴. 이후 검정고시를 통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재활학교 및 일반 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사회학과에 진학. 재활학교에서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하려는 노력은 해당학교의 입학 거부로 영영 꿈이 되어버릴 뻔 했지만, 봉사활동을 하러 오던 대학생을 통해 알게 된 장애인자립생활운동가들의 도움으로 일반고등학교에 진학 할 수 있었음. 대학 진학 후에는 장애인권연대사업팀 활동을 통해 장애 대학생의 권리 보장을 위한 활동을 해 옴. 현재 서울대학교 로스쿨 재학 중.

 

 

1. ‘장애를 정체성으로 긍정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라는 물음 앞에서.

 

“나는 장애인권연대사업팀 활동을 하면서, 장애를 가진 내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애썼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대화, 독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나는 자신을 ‘장애인’이라 당당히 칭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장애인 친구들에게도 장애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알려주고, 우리가 장애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여한 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달리 나는 여전히 질병을 가진 몸의 운명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과 싸워야 했다.”

 

“그런 의무의 진원지는 바로 내 몸이었다. (...) 나는 자신이 없었다. 장애인 인권 문제에 대한 거창하고 추상적인 담론을 떠들어대는 동안에도 내 신체는 약하고 볼품없었다. 나는 직립보행에 에로틱한 매력을 느낀다. 어깨의 움직임 그리고 팔과 다리의 교차. 나는 휠체어를 1.8초당 한 번씩 미는 것이 가장 섹시하다고 주장하고는 하지만 사실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170센티미터가 넘는 세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분, 누군가의 손을 잡고 지하철과 버스를 타는 데이트,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다른 손에는 책을 들고 거니는 캠퍼스. 나는 어느 순간 걷고 싶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때 나는 장애인권연대사업팀의 팀장이었다. 장애는 하나의 정체성이며, 손상된 몸은 곧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말해야만 했다. 그런 내가 ”사실 난 걷고 싶어요“라고 말한다는 것은 구차하고 비굴한 고백처럼 느껴졌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좀 놀랐다. 그런데 사실 이런 정도의 이야기는 얼마든지 예상 가능한 욕망의 표현이지 않은가. 근데 왜 나는 놀랐을까? 어쩌면 ‘장애’라는 개념은 사회구조적 차별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차별을 깨는 것을 통해 불합리한 ‘장애’개념을 깰 수 있다는 발언 구조 속에서 이런 욕망의 발화 자체를 억압해 왔던 것이 아닐까? 사실 이런 욕망은 저상버스가 100% 도입되고, 활동보조가 24시간 이상 보장된다고 해도 해결 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이런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 문제를 모종의 ‘억압’의 결과라고 부르는 것도 망설여지지만, 그 배경에는 인간 몸의 ‘탁월함’에 대한 서열화가 깔려 있기 때문에 그저 외면하는 것도 올바른 것 같지는 않다. 그럼 어쩌지? -_-;;

 

저자는 이어서 다른 장애인 친구들의 몸이 그 의문의 진원지임을 밝힌다. 재활원 동기였던 정훈이는 항상 쾌활하고 운동도 공부도 잘했지만, 근육장애가 점차 심해져 결국 휠체어를 혼자 밀 수 없는 상황까지 되었다. 결국 그는 스물 셋의 나이에 죽었다.

그런 그가 죽기 전에 저자는 정훈이를 찾아가 자립생활운동을 소개하고 활동보조서비스를 받으라고 권유했다. 우리에겐 활동보조인을 지원받을 권리가 있으며, 집에만 있을 이유가 없다, 당당하게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네 근육 장애, 그 자체가 너야, 인마. 너 중증인 거 내가 아는데, 그래도 밖으로 나와라. 다 살 길이 있다.” 그리고 한참 뒤에 입을 연 정훈이의 대답. “그건 형 정도의 장애니까 그런 거야. 혼자 휠체어도 밀고 다니고, 서울대도 다니잖아.”

 

정말 장애를 온전히 긍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저자는 혼란스럽다. 그렇다. 솔직히 아무리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쳐대서 자기 긍정을 해대려고 해도, 결국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인 것인데, 눈 앞의 친구에게 자신의 한 마디를 알아듣게 하는데 온 몸을 다 써도 1분 이상 소요되는 상황에서 자기 긍정이 말처러 쉬울 수 있을까. 나도 자신이 없어진다.

 

저자가 소개하는 만화 <슬램덩크>의 작가가 썼다는 또 다른 만화 <리얼>의 한 장면도 나를 얼어붙게 했다. 장애인 농구 국가대표가 된 경증의 장애인(키요하루)이 중증 장애인 친구(야마)에게 찾아가 농구팀의 소식을 전할 때, 친구가 한 말은 이랬다. “나한테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거냐?” / “니들 섹스는 했냐? 나는 섹스가 뭔지도 모르고 죽게 생겼다.” /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해보고 싶다. 섹스! 이런 나한테 뭘 어쩌라고! 팔을 들어 올리고 싶어도 들지를 못해. 이건 내 몸뚱이가 아니야!”

 

그리고 저자는 작은 챕터 하나를 마무리 지으면서 이런 말을 남긴다.

 

“키요하루 정도의 장애인이라면 의족을 달고 리프트가 달린 버스를 타고 ‘정상 세계의 거주민’으로 편입될 수 있을지 모른다. 장애인 운동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야마와 정훈이에게 더 길고 건강한 생명을 보장하거나 나와 같은 장애인에게 아름다운 사랑과 활력 있는 대학 생활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져야 할 운명, 신 앞에 무릎을 꿇고 구원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하늘의 영역’인 것처럼 보였다.”

 

 

2. 쿨해지는 것을 관두기.

 

이렇게 장애를 온전히 긍정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비굴하게 보이는 것도 싫은 딜레마 앞에서, 저자가 택한 방식은 ‘쿨’해지는 것이었다. 계단 앞에서 누군가에게 들어올려질 때, 자신을 돕는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그저 쿨하게 한마디 한다. “야, 이거 완전 왕이 된 기분인데?”

그런 쿨함이 (사실상) ‘강요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 바로 sexuality에 있다. 저자는 대학에 입학한 후 자주 만났던 H와 깊은 정서적 교감까지 나누게 되었으나, “난 너에게 속물적인 감정 따위는 없어. 오직 나이에 비해 똑똑하고 장애인 문제에 관심이 많은 너와 지적인 교류를 하고 싶을 뿐이야.”라는 듯 행동해야 했다.

 

그러나 우연히 H와 늦게까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자신의 방에 함께 들어오게 된 저자는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말을 꺼내 본다.

 

“저... 내 다리를 좀 봐 줄래?”

 

온갖 수술자국이 남아 있어, 어머니 말고는 어떤 여성에게도 드러내 보이지 않았던 다리. 절대 섹시해 보일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다리를 드러내 보이는 순간에 대한 그의 묘사는, 솔직히 너무 아름다워서 다른 말로 요약하며 담으려는 이상한 짓은 그만두겠다. 그냥 옮겨 적으련다.

 

“내가 물었을 때 H는 내 다리를 아무 말없이 바라보았다. 내가 원하는 건 내 다리가 가진 오랜 투병의 기록, 고통의 경험, 질병의 흔적을 바라보는 게 아니었다. 만약 그런 것들이 드러난다면 내 다리는 결코 에로틱할 수 없다. 사랑은 불가능하다. 희생이나 동정은 가능할지라도. 그곳은 우리 둘 이외에는 누구의 시선도 없는, 오로지 우리만의 공간이었다. 장애인과의 에로스적 관계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침투해 들어올 틈이 없었다. 우리는 새로운 관계에 말려 들어갔다. 장애인의 몸에 씌워져 있던 동정, 시혜, 고통, 비극의 시선들이 괄호 안으로 들어갔다. 에로스는 평등한 인간의 관계에서만 출현한다. 누군가가 상대를 지배한다면, 또는 누군가가 상대를 도와야 한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내가 다리를 내보인 순간, 그동안 내가 어설프게 시도했던 지적인 동반자인 척, 쿨한 척, 숭고한 관계인 척했던 행위는 끝이 났다. 나는 더 이상 무성적 존재가 아니었다. 내 몸은 자유롭게 부유했다. 내 다리는 타인의 시선 앞에서 섹시함을 뽐냈다. 섬세한 감각들이 날을 세운 채, 그러나 결코 날카롭지 않게 내 자의식을 쓰다듬었다. 우리를 잇는 어떤 감정의 선들이 ‘자연적 질서’를 예리하게 걷어냈다. 상상과 몰입. 2평방미터쯤 되는 목성의 위성을 타고 지구에서 진화한 온갖 질서가 ”병신 육갑한다“라고 외치는 소리를 떠올릴 한치의 여지도 없는 시간을, 우리는 그렇게 보냈다. 나는 그녀의 다리에 키스했다.”

 

 

3. 그래도 어렵다.

 

그렇게, 김원영이라는 한 장애인은 쿨해지는 것을 관두고, ‘핫’한 장애인이 되었다. 하늘이 내려준 불운에 걸려 장애인으로 살게 된 사람들은 오로지 착하게 살아야한다고, 순수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를 가로질렀다. 이 횡단은 우리가 접해왔던 (장애인의 사회로의 출현을 촉발한) 장애인운동의 문제의식과 닮았으면서도 조금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고통과 욕망의 흔적들을 직시했다. 그래서 사실은 자신의 몸이 아주 유약하다는 것, 그리고 내 몸이 자유와 함께 사랑을 갈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래도 아직까진 어렵다. 그의 삶을 따라, 그의 욕망이 알을 깨고 내 눈 앞에 튀어나온 이 날것의 모습을 보면서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훈이의 말처럼, 그가 ‘핫’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혼자서 휠체어도 밀고 서울대도 다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아마도 그가 ‘핫’하고자 시도하기 전에는, 이 조차 불가능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계속 병원에 다니면 다른 사람들처럼 걸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기도원에 들어가려고 했었다고 말한다. 그 때 김원영의 삶은 말 그대로 “하늘이 준 불운”이었다. 그러나 김원영은 절대로 가능하지 않을 것 같던 일들이 “공동의 노력으로 통제되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사회적 불운”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우리는 손상된 몸의 어디까지가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장애’이며, 어디까지가 손쓸 수 없는 ‘하늘의 불운’인지는 완전히 알 수 없고, 또 최악의 경우엔 손상된 몸의 고통과 욕망을 자유롭게 하기란 아예 불가능한 세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것들조차 우리가 책임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칸트가 말하는 자유다. 다시 말해 죽음을 앞둔, 추하고 소외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의 욕망을 차단하는 것이 ‘자연적 질서’에 속한다 할지라도, 그러한 욕망을 우리가 책임질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과감히 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다.”

 

우리는 그가 말하는 대로 ‘하늘의 불운’을 역행하는 자유를 가질 수 있을까? 그런 자유를 갈망하는 ‘비정상’ 신체들의 삶을 서사화하고 핫하게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너무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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