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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3/08/16
    여왕의 교실 (2013.07.19)
    구르는돌
  2. 2013/08/16
    나부터 행복하고 보기. (2013.05.29)
    구르는돌
  3. 2013/08/16
    김정하 단상 (2013.04.11)
    구르는돌
  4. 2013/08/16
    교사 세미나를 하면서 들었던 생각 (2013.04.25)
    구르는돌
  5. 2013/08/16
    이계삼, <삶을 위한 국어교육> 발췌독 (2013.03.04)
    구르는돌
  6. 2013/08/16
    용서에 대하여 (2013.02.10)
    구르는돌
  7. 2013/08/16
    명인의 'Re: 서른즈음에'에 대해서 (2013.01.02)
    구르는돌

여왕의 교실 (2013.07.19)

최근에 그래도 고발성이 짙은 영화들은 대부분 흥행을 거뒀다. 도가니, 남영동1985, 부러진화살... 그리고 노리개(는 흥행했는지는 잘 모르겠고)까지...

내가 의문인건 여왕의 교실도 나름 고발성 짙은 작품인데 왜 시청율이 바닥이냐는 것이다. 그 의문에 대해 나름 감을 잡았다. 도가니를 위시한 영화들은 가해자들을 실컷 욕할 수 있었다. 파렴치, 개만도 못한 새끼들, 독재의 하수인, 더러운 수컷들... 시청자는 전적으로 피해자와 동일시 할 수 있으니까.

근데 여왕의 교실은 그게 잘 안된다. 마여진 선생을 욕할 수는 있지만, 선생이 얘들한테 체벌을 하거나 그러는 건 아니다. 마선생이 행하는 건 우리가 사회와 교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쟁의 원칙을 다소 강도 높게 적용한 것 뿐이다. 솔직히 나는 초중고를 다...니는 동안 선생 쭉정이들 한테 마여진 선생의 발언보다 심한 얘기 더 많이 들어봤다. 니들 부모님들은 대학도 못나와서 니네가 그모양인 거다부터 시작해서... 학교는 사실상 모욕을 체험케 해주는 공간 이상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에 대처하는 아이들의 대응이다. 선생이 조별과제를 내고는 조에서 가장 불성실했던 사람 이름을 적어 내라고 한다. 가장 많은 표를 받은 학생은 최하점이다. 이에 전교 일등 김서현은 반 아이들에게 모두 자기 이름을 써 내서 마녀쌤의 전략에 맞서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이를 간파한 마 선생은 모두가 한 표씩 나올 때는 모두 최하점을 줄 거라고 협박한다. 그 말에 학생들은 여지없이 흔들리고, 고작 4명 중에 한명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버린다.

마선생도 시원하게 욕할 수 없는데 그렇다고 얘들을 욕할 수도 없다. 얘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모습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나 대신 희생할 사람을 만들어야하는 사회, 오히려 그것으로 즐거움을 얻는 사회. 근데 그게 또 현실이고...

오늘 마 선생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진심이 통하는데도 한계가 있을 거라고. 드라마 초반에 심하나의 진심은 오히려 가식으로 오해받았다. 그게 왕따를 더 심하게 당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껏 심하나의 진심은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릴 때에도 꿋꿋하게 친구의 닫힌 마음을 향해 따스한 손을 내밀었다. 진심이 오해받는 세상에서 바보같은 우직함으로 마녀 쌤에게 맞선것이다.

여왕의 교실 같은 캡짱드라마가 외면받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진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자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기엔 두려운 것들이 너무 많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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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터 행복하고 보기. (2013.05.29)

 

 

수업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박사과정 선생님 한 분을 만났다.

그분이 내게 물어보시길, 금철씨는 나중에 뭐하고 싶어?

저, 귀농하고 싶은데요.

자본주의가 이런데 귀농해서 자연 찾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 .... ....

저는 자본주의 망할 때까지 기다리기엔 수명이 너무 짧을 것 같고, 일단 저부터 행복하고 봐야겠네요ㅠ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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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하 단상 (2013.04.11)

Jung Ha Kim 단상.

아래는 오늘 오전 국회에서 열린 복지국가 연속세미나에 참석하려고 김정하 옹과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든 생각들. 악의는 전혀 없다는 것은 읽어보면 알 것이고, 훌륭한 대선배님이 살아오면서 쌓아온 귀여운(ㅋㅋ) 버릇을 바라보는 후배의 시선이라고 봐주길 바람.

1. 과잉친절

이 세미나에 참여할 사람은 미리 연락하라길래 김정하 옹에게 연락함. 반가워 하시는 김정하 옹은 지난주 지지난주 세미나도 재밌었는데, 왜 안왔냐고 살짝 핀잔을 줌. 나는 고3수험생도 아니고 매주 하루씩 7시반에 어떻게 가냐고ㅋㅋ 다음주 세미나는 갈꺼랬더니, 오는 길을 한 5분(살짝 뻥 섞어서)가량 설명. 나는 의원회관 어딘지 나도 안다고,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 안해도 된다고 했더니, 거기가 새로 지어진 신관이라... 찾기 어려울거라며 또 한참을 설명.

정하님, 너무 그렇게 모든 일에 열심이지 않으셔도 돼요ㅠ 어차피 입구에서 경비아저씨한테 물어보면 되는데..... 난 가끔 누나의 넘치는 성실함과 친절이 무서워요ㅠ

2. 여전한 학생회장 포스

오늘 오전 강의를 듣고 바로 이어서 질의응답시간. 옆에 있던 정하님 왈, "야, 질문해, 질문."
이 말을 할 때 정하님 표정에는, 마치 대학 운동권 선배가 함께 온 후배의 반응을 민감하게 체크하려는 의무감 같은게 느껴졌다. 이런게 총학생회장 출신의 아우라인가. 그런데 순간 밀려드는 이 부담감은 뭐지?ㅋㅋ

어쨌든 결론은 정하느님 존경합니다! 진심이에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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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세미나를 하면서 들었던 생각 (2013.04.25)

토요일날 야학 교사들과 <프레이리의 교사론>을 읽고 세미나 하기로 해서, 아직 집에 안가고 남아서 요러고 있다.

그리고 오늘은 수원시평생학습관에서 열린 <시민제작 일상학습>이라는 심포지엄에 다녀왔다. 방통대 교육학과 정민승 교수의 기조발제가 있었고, 몇몇 지역의 우수한(!!) 평생학습 사례들이 발표되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정민승 교수의 발제문은 매우 흥미롭고 유익한 내용이었고, 발표된 사례들도 귀가 솔깃해지는 것들이긴 했지만, 뭔가 떫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민승 교수 발제문의 주제는 <교육의 경계를 허무는 시민의 힘>이다. 제도화된 교육이 '경계'를 확정하고 교수자와 학습자의 위계라는 형식으로 재생산되는 것이라면, 사회운동 또는 '학습운동'으로서의 교육은 그 경계에 구멍을 내는 것, 그래서 교...수자와 학습자간의 위계를 평등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 교수는 지금까지 사회운동에서의 교육도 사실상 (프레이리 식으로 말하면) '변혁'이라는 내용을 예금하는 은행저금식 교육이라고 비판한다. 즉, 학습자 또는 민중을 지속적으로 '무지한 자'로 재생산하는 교육이라는 것이다. 이 얘기를 하며 랑시에르를 인용한 것부터, 그리고 필리핀 민중교육 교본에 나오는 '우물안의 3마리 개구리'이야기까지 너무나 완벽한 논리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이어지는 사례발표들은... 솔직히 너무 훌륭한 사업들을 하셨고 멋지기까지 한데, 나는 도저히 보고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서울로 올라와버렸다. 활발한 주민참여, 지식 공유... 다 좋다 이거다. 그런데, 파주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시도했다는 '똑똑도서관'이라는 곳의 사례를 보면, 왜 여기 참여자들은 다 '전업'주부들일까? 남편들은 다 어디갔나? (똑똑도서관의 관장은 30대 중반의 남성) 또한 이 프로그램을 통해 진행된 수업은, 리본 만들기, 요리수업, 데일리드로잉... 이런 것들이다. 이런 교육이 (여성적 이미지가 부여되기 때문에) 수준이 낮다거나 그런 얘기는 아니지만, 뭔가 '학습자의 자율성'이라는 게 보이지 않는 천장 아래에 갇혀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얼마 전 이계삼 선생님이 쓰신 글을 통해 알게 된 것인데, 문화학자 엄기호는 언젠가부터 (교육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유행이 되기 시작한 '자기주도학습'의 끝은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라고 지적했다 한다. 선험적으로 가정된 학습자의 주체성은, 학습자 개인이 주체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며칠이고 인터넷을 붙잡고 있게 만들것이고, 결국 고립된 자신의 지식 자본에 갇혀 히키코모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오늘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몇몇 사례에서는 주민 간의 지식 공유 사례들을 보여줬지만, 그 지식이 '공유'되기 이전에 어떻게 '생산'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레이리의 교사론>의 발문을 쓴 도날도 마세도의 이런 지적이 눈에 띈다. "(한 자유주의자 백인 교수는) 그 위원회에 지역민들이 빠져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지역사회가 가진 지식 기반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곧 낭만적인 온정주의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그 지역민들이 대학 교수들보다 많이 알고 있으므로, 교수들이 지역민들을 가르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지역민들이 교수를 가르쳐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이 입장은 교수들이 상당한 혜택을 누렸던 문화자본을 지역민들은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실질적인 권한부여에 대학의 문화자본이 꼭 필요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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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말은 이렇게 장황하게 했지만... 그래서 내가 뭘 어쩌겠다는 건가. 며칠 전 내가 야학에서 맡은 과학수업을 마치고 나서 나는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분들은 수업 시작하자마자 2분도 안되어 하품하고 있고, 나는 초등학생, 중학생들이 교과 보조용으로 보는 만화책으로 수업하면서, 그 내용을 설명하겠다고 수소는 H고, 산소는 O고, 질소는 N이고... 뭐 이딴 걸 칠판에 적고 있었다. 김상봉 선생이 쓴 <세 학교 이야기>를 보니까 80년대 야학인 까르딘학교에서는 기계적인 교과교육이 되기 쉬운 과학과 지리는 아예 없애버렸다는데, 우리 야학에서도 그렇게 하자고 말하고 싶(지만, 우리는 특수교육법에서 정한 '학교형태의 평생교육시설'이어서 안되겠지?ㅠ.ㅠ)

나도 자기주도학습으로 수업 진행해 보고 싶다. 그런데, 달랑 두 세 문단 밖에 안되는 짧은 글도 혼자 읽고 이해하는 것도 힘든 사람들에게 '자기주도학습'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랑시에르가 소개한 조제프 자코토의 교육 실험(불어를 모르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불어로 된 책 읽히기)을 과연 일반화 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과연 '설명하는 일'을 중지하고 지능의 평등성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능의 평등성'이라는 명제 위에서 오로지 교육자의 '의지'에 학습자를 연결시킴으로써 학습자의 지능을 작동케 할 수 있을까?

일단 나는 "뭐 공부하고 싶으세요?"라고 물었을 때, 애*누나가 "그냥 선생님 하고 싶은거 하세요"라고 말하지 않고 다른 대답을 해줬으면 좋겠다. 일단 그것부터라도...

엉. 이게 다 뭔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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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삼, <삶을 위한 국어교육> 발췌독 (2013.03.04)

몇 년 전, 한 결손 가정 아이의 집에 가정 방문을 갔던 기억이 있다. 엄마도 아빠도 없는 집, 안팎으로 발 디딤 틈도 없이 쓰레기와 옷가지로 가득 찬 방에서 새우잠을 자고 학교로 오는 아이가 있었다. 우리는 그 아이의 '빈곤'을 '풍요'로 바꿔어줄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아이의 '빈곤'을 '가난'으로, 보살핌과 우정으로 견딜 만한 조건으로 만들어주는 일이다.
모든 교육적 상황은 백 가지 문제에 대한 백 가지 답을 가진, 근원적으로 무정부적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풀려는 노력은 '법과 제도'라는 시스템의 그릇 속으로 옮겨 담아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방향으로 흐른다. 이것을 사람들은 '개혁'이라 부른다.
감각적이고, 질감이 있으며, 육체성을 가진 교육이 사라지면 인간적인 상호 접촉의 중요한 형식 하나가 사라진다. 오늘날의 교육개혁이란 이 살아 있는 대면 관계의 '황무지'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바로 '안락'에 대한 편집증이 낳은 비극이다. 교사에게, 그리고 전교조에게 필요한 것은 '자동차'가 아닌 '걸음'걸이의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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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대하여 (2013.02.10)

용서와 사과.

요즘 나는 기독청년아카데미에서 하는 누가복음 강의를 듣는다. 한번도 성경을 접해보지 않은 나이지만, 여인과 사마리아인의 편에서, '하나님 나라'를 설하시는 예수의 모습이 경이롭다.

그런데 엊그제 했던 강의 중에 나온 이야기가 계속 머릿속에 남아 날 괴롭히는데, 그것은 바로 용서에 대한 것이다.

강의하시는 김재흥 목사님이 잘 아시는 한 목사님은 평소 개량한복을 즐겨 입으시고 수염을 기르고 다녀서 산에서 내려온 '도사님'으로 종종 오해받는다고 한다. 어느날 이 도사님 같은 목사님이 지방에 일정이 있어서 한 여관에 묵게 되었는데, 역시 이번에도 목사님을 어느 산에서 내려온 도사님이라고 생각한 여관 주인이 방에 쫓아와 묻더란다. "도사님, 제가 정말 잘 살고 싶은데, 그러려면 어찌해야할까요?" ...이 목사님이 순간, 직관적으로 판단키로, 이 작은 시골마을에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것 같은 여관 주인을 하고 있는 여인의 삶에 제일 큰 문제는 뭐니뭐니해도 남자 문제일 것이라 판단하시고 한마디를 던지셨단다.

"그 놈을 용서해"

그랬더니, 갑자기 이 여관주인의 얼굴색이 변하면서 정색을 하고 말하더라는거다.

"절대 그럴 수 없어요!"

이 대답을 듣고 도사님, 아니 목사님은 무엇을 느끼셨을까? 나의 짧은 생각으로는 목사님의 말씀이 다소 경솔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문득 그날 낮에 한겨레 신문에서 봤던 '법륜스님의 쾌도상담' 코너가 생각났다.

http://m.hani.co.kr/arti/society/women/573322.html

상담의뢰자는 어릴적에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고, 이로 인한 가족에 대한 미움이 쌓여 있는 여성이다. 이런 상처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법륜스님의 쾌도상담?은 이런 식이다.

"‘아버지가 나를 성추행했다’는 생각도 사실은 하나의 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내 손을 잡았던 그 순간에 그는 내 아버지가 아니라 그냥 한 남자였을 뿐입니다. 그러니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어머니 아버지 감사합니다.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매일매일 어머니한테 108배, 아버지한테 108배, 오직 감사하다는 기도만 하세요."

ㅡㅡㅡㅡㅡㅡㅡ

나는, 화가 난다. 종교인들은 가끔 이렇게 너무 쉽게 용서를 말한다. 하도 이상해서 노들야학 학생이시고 토요일마다 내가 활동보조하는 호식이형한테 물어봤다. 형은 형의 형님을 용서할 수 있냐고. 어릴적부터 자신을 병신이라고 무시하고 때리던 형을, 그래서 5분도 안되는 거리에 살면서도 얼굴도 안보고 산다는 형을 용서할 수 있겠냐고. 그런데, 호식이형은 내 질문 자체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엉뚱한 대답만 늘어놨다. 내 질문은, 그냥 우스워졌다.

어느 날 문득, 아버지 집에 불을 질러 버리겠다고 하던 ●●●형에게 용서는 대체 무슨 의미인가?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종교인들은 그렇게 입이 닳도록 용서를 외치면서, 왜 '사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가. 요새 힐링타령 해대는 유명인사들도 상처를 내려놓으라면서 용서를 말하지만, 누구도 '사과'를 말하지 않는다. 용서는 피해자를 향한 요구이지만, 사과는 가해자를 향한 요구이다.

다음 누가복음 강의 때는 이 이야기를 꼭 해야겠다. 용서가 아니라 사과가 먼저라고. 이렇게 써놓고 보니 예전에 김상봉선생이 경향신문에 썼던 칼럼의 첫구절이 생각난다.

"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친 뒤에 제자들이 행여 오해할까봐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덧붙였다. 우주적 평화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그 평화를 짓밟는 불의에 대한 깊은 분노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이어져 있는 것이어서 결코 분리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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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그것은 억눌린 자들이 가진 유일한 권력이다. 함부로 용서하지 말자. <레 미제라블>이 (김재흥 목사님 말대로) 사랑의 혁명일 수 있는 것은 장발장이 자베르를 죽일 수도 있는 위치에 섰기 때문에 (그러나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장발장이 부랑인 수용소에서 매번 쫓겨나고 굶주릴 때, 자베르를 용서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했다고 해도 결국 장발장의 삶을 갈기갈기 찢어놨을 것이다.

영화 <밀양>에서 자기 아들을 살해한 남자가 태연하게 자신은 이미 용서받았다고 말했을 때, 전도연의 삶을 짖밟은 것처럼.

ㅡ 법륜스님이 던져준 불편한 화두에 대한 나의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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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의 'Re: 서른즈음에'에 대해서 (2013.01.02)

요즘 출퇴근 하면서 명인의 'Re: 서른 즈음에'를 자주 들었는데, 이제 진짜 서른이다. 노래 가사대로라면 난 이제 슬픔을 팔아야 장사가 되는 나이이고, 이룬건 하나없고 잃을건 많은 나이이자, 더 이상 무엇에도 전부를 걸지 않을 나이이다. 한마디로 빌어먹을 서른 즈음이다.

이걸 들을 때면 좀 슬퍼지기도 했지만, 지금 내 기분은 명인씨에게 '메롱'을 날려주고픈 마음이다. 난 이제 오히려 슬픔은 팔아봤자 적자라는걸 깨달았고, 이룬건 하나없지만 잃을것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전부를 걸지 않는건 그러기엔 하고 싶은게 너무 많기 때문에 몰빵을 피할 뿐인 거다.

나에겐 서른이라는 나이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있던 20대보다 오히러 더 영광스러운 나이이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조금 부담이 더해지긴 했지만,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위해 다시 학생이 된건, 삼십대를 시작하는 나에겐 더 없이 설레는 일이다.

우리 모든 서른들에게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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