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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처럼 살아가자.
작은 풀처럼, 그렇지만 진실하고, 소박하고, 아름답게.
유언장
내가 죽은 뒤에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
1 최완택. 목사. 민들레교회.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은 착한 사람이다.
2 정호경. 신부.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
3. 박연철. 변호사. 이 사람은 민주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는 보통사람이다. 우리 집에도 두어 번 왔지만 나는 대접 한번 하지 못했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는 어린이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된다. 맡겨놓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이다.
유언장이라는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것이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거리다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저기 뿌려주기 바란다.
유언장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끝이다.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 죽은 뒤 환생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2005. 5.1
콩알을 불려두었다
오늘 다이소에 갔더니 배양토랑 씨앗이 있길래
배양토가 탐이 나 한 개 사 왔다
그 양으론 텍도 없겠지만 시험삼아서...
콩 싹을 틔워볼 생각이다
며칠 전 농장에 가서 싹튼 콩을 보고 너무 행복했었다
내가 틔운 건 아니었지만
땅을 볼 때, 땅에 호미질을 할 때 왜 그리 마음이 좋은지...
이것이 행복이다..
그리고 집 마당에 심은 열무랑 아욱도 싹이 텄다
꽃도 싹이 났고, 상추는 먹을만큼 자랐다
내겐 이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말처럼
급하지 않게
한 번 틔워볼련다
사실 작두콩 싹을 한 번 틔우긴 했는데
또 콩 싹을 틔워 그것을 보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지...^^:;;
내 곁에 있어준 친구
아니, 그 친구는 그 친구의 삶을 잘 살아가고 가끔 만나면 힘이 되는 친구
어느 애인보다도 그 친구가 나는 참으로 고마울 따름이다.
우리 벌써 10대 때 만나 30대에접어들었고...
그 친구가 내게 먼저 다가와 친구가 되었고
거저 친구를 얻고
이렇게 내게 힘을 주고 있는 그 친구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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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온전히 사랑하고
그대를 사랑하고
혹은 그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할 수있기를...
브라보!
사랑이란 말은 아껴두는 말이야.
우리가 같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님 내가 너의 영역으로 가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온다고 거기에 흔들리면 그건 나의 문제인거야
나무가 흔들리는 건 바람 때문만은 아니니까
혼란스럽기만 하네.
다시 그런 관계에 접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내가 성숙해지기 전까진...
규정짓지 말자고 했지만 규정지을 수가 없어
휘몰아쳐주지 말라구.너의 말처럼 넌 쿨한 거겠지
세상의 벽, 틀이란 걸 네 안에서 아직 발견하지 못했어
그게 너의 매력이지
어쩔 땐 한없이 편안하고부드럽고 어쩔 땐 다가가기 어려운 무표정함.
하지만 넌 닫혀 있지 않아서 좋아
언제나 내 스스로가 문제의 중심이고 열쇠임을
너는 내가 잊어버릴까봐 항상 지적해주고 있지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아
어쩌면, 내 스스로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할 수 없을 것 같아
글 쎄 잘 될 수 있을지..하지만 노력해볼게 친구로라도.. 내 친구여.
처음부터 알게 해 줘서 고마워 나의 한계를
멍청하게 환상만 키워가지 않게 해주고 있어서 고마워
처음부터 아는 게 좋아
나를 , 그리고 너를미워하지 않으려면...
좋아하는 감정에 매몰되는게 아니라
그러한 혼란을 사랑이라고 믿을 게 아니라
너라는 사람 자체에 집중해 너를 보고 좋아하게 될 때
그 때 사랑이라고 해야겠지
폭풍이 지나간 후의
그 고요함 처럼...지켜볼래
부모님께도 이야기드렸어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그랬더니 잘 만나보래
어떤 사이가 앞으로 될지는 모르지만, 미리 이야기해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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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유통기한은 왜 3년일까? | |
[매거진 esc] 이기호의 독고다이 상담실 | |
Q 왜 연애 유통기한은 3년일까요? 아무리 사랑에 빠져 죽을 것같이 좋다가도 3년이 되면 사랑이 식는 걸까요? 영원할 것 같은 사랑이 왜 3년이 되면 고비를 맞는 걸까요? 어떻게 하면 3년이라는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요?
A 영원하지 않을 걸 알면서 하는 게 바로 사랑의 위대한 점이로다 내가 미치거나 총 맞지 않고서야, 왜 이런 코너를 맡겠다고 홀라당 넘어갔는지 지금도 거 참,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주변에 총 갖고 다니는 사람은 없으니 분명 전자가 확실할 텐데, 그런 정신을 가지고 어떻게 남의 고민을 들어줄 수 있을지…. 새삼 온 정신으로 돌아와 걱정만 하고 있는데, 세 살짜리 아들놈이 등 뒤로 조용히 다가와 파워레인저 엔진포스 총을 쏘고 도망갔다. 아아, 그래서 걱정은 단번에 사라져버렸다. 그건 그냥 총 맞은 거였구나, 총 맞은 거였어! 그렇게 두 팔 벌려 환호작약한 다음,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총 맞고 난 뒤, 쓰는 원고라는 점, 유념해주길 바란다. 거 뭐, 무서운 건 하나도 없다. 자, 이제 시작해보자. 하나. 연애의 유통기한은 왜 3년일까요, 묻는 당신은, 안타깝지만 이 땅의 중등교육의 또다른 피해자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먼저 해본다. 3년이 지나면 왠지 졸업해야 할 거 같고, 그다음엔 다른 애인으로 진학해야 할 거 같고, 학용품도 새로 장만해야 할 거 같고, 뭐 그렇고 그런 모범생들 있지 않은가. 알게 모르게 주위엔 그런 모범생이 제법 많다. 50분 전화하고 10분 침묵하고, 50분 이야기하고 10분 섹스하고, 50분 술 마시고 10분 꺼이꺼이 울고. 연애를 학교 시스템에 맞춰, 똑같이 운용하는 사례들이 종종 있다는 소리다. 3년에 맞춰 교과서를 다 떼고 나니, 이런, 이제 더 이상 배울 것도, 궁금한 것도 없구나, 그러면 남들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애인을 ‘수학의 정석’화시킨 전형적인 사례. 그런 당신에게 말해줄 수 있는 일화 하나. 예전 고등학교에 다닐 때, 동네에 노는 형님이 한 분 계셨다. 이 형님은 학교를 무슨 유엔안보리 이사회 참석하듯 띄엄띄엄 다니셨는데, 그래서 당연하게도 1년 더 ‘꿇게’ 되신, 학교 시스템의 이단아 같은 존재였다. 한데, 이 형님의 마지막 학교생활 1년은, 다른 해와는 다르게 아주 열심이었다. 체육대회에도 열심, 보충수업이나 ‘야자’에도 열심(안타깝게도 성적은 그리 좋아지지 않았다), 반 미팅에도 열심. 해서, 어느 토요일 하굣길이던가, 내가 슬쩍 물어본 적이 있었다. 형, 요새 왜 이렇게 학교생활에 열심이세요? 그러자, 동네 노는 형님은, 위로는 천문이요, 아래로는 지리를 꿰뚫은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정들어서. 당시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이 형님이 정말 병원에 입원해야 되는 건 아닐까, 고민했지만, 이젠 어렴풋이나마 그 뜻을 알게 되었다. 정든다는 것의 참말로 큰 의미 말이다. 둘째. 동네 노는 형님이 해준 말과도 연결되는 이야기이지만, 사랑에 빠져 죽을 거같이 좋은 시기가 3년 이상 지속되면 미안한 말이지만 그러단 정말 죽고 만다. 심장마비나 고혈압 같은 것이 올 확률이 높다. 내 경운 분명 그랬다. 살기 위해서라도 사랑은 좀 식을 필요가 있다. 사랑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차이는 좀 있겠지만, 우리가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지속시킬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6개월 남짓이 전부일 것이다. 그다음은 그저 리얼리즘의 시대일 뿐이다.(내가 알고 있는 한 선생님은, 이 리얼리즘의 시대가 수십년 이어지고 나면 휴머니즘의 시대가 온다고 했다.) 방귀도 트고, 트림도 트고, 쩝쩝 음식 먹는 소리도 갑자기 요란해지는 리얼리즘의 시대 말이다.(그 모든 것이 사실은 모두 살아보겠다고, 이러단 만성 속쓰림에 암까지 생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의 발로 때문에 튀어나온 본능들일 것이다.) 그 시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관계는 쫑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은 꼭 ‘좋아 죽을 것 같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 사랑은 영원할 것만 같아서 빛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도 사랑하는 게, 그게 바로 사랑의 위대한 점이라는 것, 그걸 좀 생각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사랑에는 당연히 유통기한이라는 게 있다. 하지만 그걸 빤히 알면서도 가는 게 핵심이다. 우리가 무슨 이마트나 홈플러스냐, 새삼 유통기한 따위에 놀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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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동안 내가 가져온 꿈-합주.
키보드에 대한 욕심은 아직도 가끔 생겨나지만
그게 없으면 미쳐버리기 전까진 사고 싶지는 않더라
예전부터 난 밴드 하는 게 꿈이야, 라고 했지만 막상 전업으로, 밴드를 하는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원하는 게아닌지도 모르겠어. 아마츄어로 즐기는 것, 하지만 막상 어떤어떤 밴드에서 건반멤버를 구해요, 그러면 아직 준비도 안 된 내가 마음이 가끔 흔들리기도 해.
악보를 그리려면 건반악기가 분명히 필요해. 귀로 음악을 듣자마자 바로 그릴 수 있는 천재는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멜로디혼을 하나 샀다.
친구가, 노래를 하나 듣더니 악보를 찾아서자기가 기타를 치고 내가 멜로디혼을 불자고 한다.
인터넷에서 무료로 찾을 수 있는 악보가 없었다. 그래서 그렸다. 너무 다행히도 코드가 쉬웠다.
그런데 둘만 하면 조금 썰렁하지 않을까?거기다가 오카리나랑 우쿨렐레를 할 줄 아는 두 친구가 있으니 가서 합주를 해 보면 참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근데 솔직히... 그 전에 키보드를 하나 사서 멜로디혼보다 키보드로 연주하면 훨씬 소리가 풍성해지긴 할 게다... 욕심나네..-.-;;
아직 음표의 길이까진 정확히 표시를 못 하지만, 음악을 귀로 듣고, 기준점이 되는 한 음을 찾고 거기에서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찾으면 악보는 금새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오래도록 가져온 꿈이었다.백수가 되고 피아노 학원을 다니면서 귀로 듣던 음악을 악보로 옮겨보기 시작했는데 몇 번의 시도끝에 그 음을 찾아서 그리게 되었던 게 불과 작년.
한 가지 한계가 있다면 키보드는 두 손을 동시에 치면서 코드를 찾아 따기가 쉽지만 멜로디혼은 그게 어렵다. 나름 저렴한 악기들로도 잘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을 느껴보고 싶다^^
난 오래전부터 합주하는 것을 꿈꾸었어. 나 혼자 연주는 재미없거든.
임계점에 다다르기 전에는
다다르지 못해 괴롭고
다다른 후에는 다다랐기 때문에 괴롭다
쉽게 말하면 농촌생활사, 여성생활사.. 이다.
예전에 있었다가 폐간된 디새집이라는 잡지를 아시는가?그 잡지에 실리는 글 정도의 수준으로 쓰고 싶었지만 ^^ 물론 텍도 없었지 ^^그러한 글을 쓰고 싶었다. 물론 지금도....
내가 쓴 것들을 한 번 모아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떡도 하고 술도 담그고 양잿물도 내리고
- 옹기시루 쓰던 이야기
한 때 왕성하게 쓰였을 옹기시루는 시대가 변하면서 양은시루를 쓰게 되다보니 이제는 쓰임새가 없어 집 한 구석에 보관되어 있다. 대부분 집을 개축하고 이사하면서, 혹은 골동품 수집업자에게 판매하면서 옹기시루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사라졌으나 몇몇 집에는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 중백암 김분순 씨(1934년생), 정송 최종애씨(1931년생), 동신 전영자 씨(1941년생)의 옹기시루에 담긴 옛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분순씨는 17살에 시집을 왔는데 시댁에는 4대째 물려내려오고 있는 시루가 있었다. 시루는 남원에서 사 온 것이었다고 한다. 전영자씨 집의 시루 또한 시집을 오기 전부터 시댁에서 사용하던 것이었다. 최종애씨가 시집와서 살고 있는 정송마을은 옛부터 옹기점이 융성하던 동네여서 시어머니는 동네 옹기점에서 시루 등 그릇을 장만했다.
시루는 큰 시루와 한 되 정도의 용량인 작은 시루를 사용했었는데 현재 김분순씨와 최종애씨 집에는 큰 시루만 남아있다. 보통 큰 시루는 고두밥을 찌거나, 찰밥을 찔 때 썼고, 작은 시루는 제사 때나 생일 때, 고사 때 올릴 떡을 찔 때 썼다고 한다. 김분순씨 댁 큰 시루는 일명 ‘동네시루’로 쓰여서 동네 행사, 이웃행사에 두루 사용하다보니 군데 군데 조금씩 깨어져 있다.
‘정월대보름에 찰밥 해 먹고 제사 때나 명절 때 고두밥 쪄서 술 담아먹고, 아들 여울 때, 환갑 치룰 때’ 등 중요한 행사를 치룰 때 빠지지 않는 음식이었다. 쌀도 부족하던 때라 떡을 쉽게 해 먹기 어려웠기에 생일, 회갑, 제사 등 집안에 큰 일이 있어야 먹을 수 있었다. 생명의 탄생에서부터 제사에 이르기까지 큰 일이 있을 때에는 떡이 함께 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이레가 지나면 떡을 장만하게 된다. 그리고 삼칠일이 지나면 떡을 해 집안 식구들끼리 나누어먹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를 낳고 첫 이레 때 떡을 하고, 삼칠일 때 시루떡해서 먹고, 마지막 이레 때 떡을 하는 등 일곱 이레를 챙겨 떡을 해 먹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생일에는 백설기, 시루떡 등을 장만했다. 돌때는 붉은 팥을 얹은 시루떡, 백일에는 백설기를 만들었다. 백일이나 돌에 떡을 해서 동네에 돌리면 떡 접시는 빈 그릇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돈 10원도 주고 실 한 타래 째깐한 것도 째깐씩 주고, 쌀도 적어 못 묵고 살아. 우리 딸네들 돌 때 그랬어. 돈도 없으믄 그 때는 닭을 키우쟎아 계란도 서너개씩 갖고 온 사람도 있고. 비누도 맨들어서 하나썩 갖고오고.” (김분순)
결혼을 하고 회갑잔치를 치르고 제사를 지낼 때에도 상에 떡은 빠지지 않았다. 떡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찹쌀을 도정해서 곱게 가루로 만들어야 했는데 방앗간이 생기기 전에는 집에서 절구로 일일이 빻아서 체에 쳐서 쌀가루를 내서 썼다. 떡을 하려면 시루 밑바닥에 있는 구멍을 먼저 막아야 했다. 구멍 위에 삼베나 무명천을 깔거나 무를 잘라서 막기도 했고, 짚을 엮어서 만든 ‘시루밑’으로 막았다. 그리고 시루를 물이 끓는 솥 위에 올려서 김이 올라와 떡이 쪄지는 것이다. 솥과 시루 사이가 틈이 있으면 김이 새기 때문에 ‘시루뻔’이라는 것을 붙여 틈새를 막아줬는데 시루뻔은 밀가루를 반죽해서 만들거나 몽근겨(註: 곡식의 겉겨가 벗겨진 다음에 나온 고운 겨로 속겨라고도 부름)를 이겨서 만들어서 붙였다. 그 다음 쌀가루를 시루에 얹고 팥고물을 얹고 또 쌀가루를 얹고 이렇게 켜켜이 얹고 고르게 한 다음 찐다.
가정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고, 수확에 감사할 때에도 떡을 올렸다. 최종애씨 말에 따르면 장광을 주관하는 가신을 ‘철륭’이라고 하는데 정월이면 떡과 제물을 차려 장광에 놓고 ‘시루떡 고사’를 지냈고 농사수확철에도 떡과 제물을 차리고 고사를 지내고 동네사람들과 떡을 함께 나누어 먹는 ‘도신’이라는 것을 지내 철륭신을 모셨다고 한다. 김분순씨는 딸이 홍역에 걸렸을 때 찬물로 목욕재계를 하고 날마다 떡을 해서 빨리 낫기를 빌었다. 지금은 홍역이어도 주사 한 번 맞으면 일어나지만 당시에는 진안에 있는 병원을 걸어가거나 버스를 타고 전주로 가야만 했다. 버스편도 자주 있지 않아서 아파도 병원에 자주 가지 못했다고 한다. 조순덕씨 말씀에 따르면 홍역과 비슷하게 몸에 이상한 것이 나는 ‘손님’이라는 병이 오면 손님떡을 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찰밥을 하거나, 술을 담기 위해서 고두밥을 찔 때도 시루를 썼다. 제사에 올릴 술을 담기도 하고, 잔치 때 쓸 술, 술멕이를 할 때 동네에 낼 술을 담기도 하였다. 어른들이 많은 집에서는 사흘들이로 술을 담그었었다 한다. 먹을 쌀도 부족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쌀로 술을 빚는 것을 단속했다. 세무서에서 조사를 나왔고 단속에 걸리면 벌금을 내야 했다. 몰래 숨겨도 샅샅이 뒤지면 들켰지만 그렇다해서 술을 담지 않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시루의 쓰임새는 또 있었다. 비누가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기 전까지는 양잿물로 빨래를 했는데 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떡시루와는 별도의 시루에 콩대나 깻대를 태워 그 재를 시루에 넣고 물을 부어 내려 받아서 썼다. 간혹 비누를 만들어서 쓰는 사람도 있었는데 만드는 방법은 양잿물을 끓여서 등겨를 섞어 굳혀서 칼로 썰어서 비누를 만들었다
시루를 쓰지 않게 된지는 대략 20~30여년이 되었다고 한다. 시대가 흘러오면서 옹기시루 대신 양은시루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60~70년대 들어서면서 평가에 평장떡방앗간, 원촌에 행운떡방앗간이 생기면서 집에서보다 방앗간에서 떡을 주로 하게 되었다. 현재 백운면에는 원촌떡방앗간과 행운떡방앗간 2곳이 남아 있다. 그리고 빨래비누가 널리 보급되면서 양잿물로 빨래하는 사람은 이제 없다. 술을 집에서 담그어먹는 사람도 거의 없다.
“아들 여울라믄 술 하고, 환갑 돌아오믄 술하고, 시방은 안혀. 그전에는 했어, 뭣만 돌아오믄. 지금은 안혀.” (전영자)
어머니들과 고생을 함께 해 온 옹기시루는 이렇게 쓰임새가 없어지면서 대부분 사라졌고 고물장수가 와서 팔 것을 권유하지만 팔지 않고 몇 몇 집에서는 보관하고 있어서 이를 통해 과거를 엿볼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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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빚을 갚는 차원에서 물을 조금이나마 덜 더럽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맹물로 머리를 감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한 번 시도했었지만, 머리가 너무 가려워서 참지 못하고 하루만에 그만두었었는데 이번엔 한 달 이상 시도해보리라 결심했습니다.
때때로 너무 가려울 때 한두 번은 샴푸를 썼음을 고백합니다만, 그래도 아직까지 맹물로 감고 있습니다. 걱정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머리가 개운하고, 비눗물, 샴푸물이 나오지 않아서 마음이 가볍습니다.
단지,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보통 이틀이나 삼일에 한 번씩 감던 것을 하루에 한 번씩 감는다는 것이지요. 흠....
그리고 한동안 이를 닦을 때에 죽염을 사용했었는데 일을 그만두고 부모님 집에 있으면서 치약을 사용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독립해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다시 습관을 바꿔보기 시작했습니다. 뭐 완벽하겠습니까? 가끔 습관적으로 치약에 손이 가는 경우가 있긴 종종 합니다만~
목욕을 할 때도 비누를 쓰지 않습니다. 그래도 몸은 개운합니다. 땀이 나지 않기 때문에 사실 비누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씻을 수 있습니다. 샤워기를 쓰던 습관을 바꿔서 대야에 물을 받아 써 보았습니다.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은 화장실 문제였습니다. 부모님 댁도, 지금 사는 집도 수세식 화장실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재래식 화장실이라고 해도 똥오줌을 퇴비로 활용하지 않는다면 수세식 화장실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결국 하수처리장으로 흘러들어가서 하수슬러지가 되어 바다에 투기 처리 되기 때문입니다. 습관을 바꾸어보고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결국은 친환경화장실을 지어서 퇴비를 만들어 쓰기 전에는 문제를 뿌리뽑을 수 없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당장 해결이 되지 않더군요. 하지만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 말통에 오줌을 모아 삭혀 나중에 농장에서 퇴비로 활용하려고 합니다. 대변을 발효시킬 수 있는 공간과 시설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어렵기에 마음 한 켠이 조금 불편합니다..흠.. 주변에 사람들이 안 살면 구덩이라도 파서 묻겠지만 하하핫.
화장실 문제와 관련해서는 강을 살리는 것과는 조금 다른 관점이겠지만, 땅을 살리는 뜻에서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화장지를 사용하지 않고 뒷물을 하게 됐습니다. 예전에 한 번씩 시도해본 것들이기 때문에 큰 거부감은 없었고, 뒤도 시원합니다. 무엇보다 마음이 가볍습니다. 화장실에 쌓여가던 화장지를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 무엇보다 가장 마음도 개운하고, 뒤도 개운한 일이죠^^
주변을 둘러보니 바꿔야 할 것이 몇 가지 더 있었습니다. 설거지를 할 때 저는 예전에 밀가루를 사용해서 설거지를 했었지만, 어머니의 핀잔으로 그만두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나마 가장 친환경적이라고 판단되는 친환경주방비누를 사서 사용하고 있는데 훨씬 거품도 적게 나고 헹굼물도 맑습니다. 광주에 있는 '강청'이라는 비누회사입니다. 예전에 일하던 단체 회원이셔서 한 번 만나뵌 적도 있는데, 믿을 수 있는 분입니다. 공장 옆에 수세미도 기르고 있는데 구매고객에게 서비스로 제공하시려고 심으셨답니다.
당시 저는 그 단체에서 소식지를 담당하던 시기여서 그 분을 만나뵙고 비누에 대한 이야기,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를 인터뷰해서 실은 적이 있거든요. 그러다보니 그 비누에 애정이 가는거죠 물론 품질도 좋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용으로 주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사실, 친환경비누보다는 밀가루가 나을 것 같아 밀가루설거지를 오랜만에 다시 시도해보았는데 강한 기름때는 잘 지지 않는 단점이 있어서 고민이 됩니다. 그래서 두 가지 방법을 경우에 따라 섞어서 쓰고 있습니다.
아직도 바꾸어야 할 것이 여러 가지 입니다. A4 용지를 사무실에서 줄여보려고 해도 잘 되지는 않네요. 그리고 재생지를 주문하려고 했지만 도매로만 판매한다고 합니다. 그 문제와 더불어 생활쓰레기를 줄이는 것, 그리고 전기를 안 쓰는 것 - 일찍 자기 때문에 집에선 전기를 별로 쓰진 않지만 컴퓨터를 쓰며 일하다보니 낮 시간에는 전기를 계속 쓰게 됩니다. - 앞으로 실험해보고 싶고 바꿔보고 싶은 것들입니다.
과연 어떻게 바꾸어갈 것인가 쉽고 즐거운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요즘의 새로운 궁리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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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이번에 해남에서 4대강 사진전을 해볼려고 하는데 구할 수 있는 사진들이 낙동강 쪽 사진들 뿐이야
동이한테 영산강쪽 사진을 구할 수 있는 곳을 물었더니 산길이 잘 알거라네
소개좀 시켜주어! ^^
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