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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5/23
    권정생의 유언장
    씨앗(산길)
  2. 2010/05/22
    콩알(1)
    씨앗(산길)
  3. 2010/05/22
    벌써 13년째
    씨앗(산길)
  4. 2010/05/22
    바보
    씨앗(산길)
  5. 2010/05/14
    합주(4)
    씨앗(산길)
  6. 2010/05/13
    마음은(2)
    씨앗(산길)
  7. 2010/05/05
    예전에 쓰던 글,하던작업
    씨앗(산길)
  8. 2010/04/14
    강을 흐르게 하라(1)
    씨앗(산길)
  9. 2010/04/07
    '생활습관을 바꾸어보자!'
    씨앗(산길)
  10. 2010/04/07
    [서평]청라 이모의 오손도손 벼농사 이야기(2)
    씨앗(산길)

권정생의 유언장

권정생 선생님처럼 살아가자.

작은 풀처럼, 그렇지만 진실하고, 소박하고, 아름답게.

 

유언장

내가 죽은 뒤에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

1 최완택. 목사. 민들레교회.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은 착한 사람이다.

2 정호경. 신부.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

3. 박연철. 변호사. 이 사람은 민주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는 보통사람이다. 우리 집에도 두어 번 왔지만 나는 대접 한번 하지 못했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는 어린이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된다. 맡겨놓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이다.
유언장이라는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것이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거리다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저기 뿌려주기 바란다.
유언장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끝이다.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 죽은 뒤 환생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2005.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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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알

콩알을 불려두었다

오늘 다이소에 갔더니 배양토랑 씨앗이 있길래

배양토가 탐이 나 한 개 사 왔다

그 양으론 텍도 없겠지만 시험삼아서...

콩 싹을 틔워볼 생각이다

 

며칠 전 농장에 가서 싹튼 콩을 보고 너무 행복했었다

내가 틔운 건 아니었지만

땅을 볼 때, 땅에 호미질을 할 때 왜 그리 마음이 좋은지...

이것이 행복이다..

그리고 집 마당에 심은 열무랑 아욱도 싹이 텄다

꽃도 싹이 났고, 상추는 먹을만큼 자랐다

내겐 이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말처럼

급하지 않게

한 번 틔워볼련다

사실 작두콩 싹을 한 번 틔우긴 했는데

또 콩 싹을 틔워 그것을 보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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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3년째

내 곁에 있어준 친구

아니, 그 친구는 그 친구의 삶을 잘 살아가고 가끔 만나면 힘이 되는 친구

어느 애인보다도 그 친구가 나는 참으로 고마울 따름이다.

 

우리 벌써 10대 때 만나 30대에접어들었고...

그 친구가 내게 먼저 다가와 친구가 되었고

 

거저 친구를 얻고

이렇게 내게 힘을 주고 있는 그 친구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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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온전히 사랑하고

그대를 사랑하고

혹은 그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할 수있기를...

브라보!

사랑이란 말은 아껴두는 말이야.

 

우리가 같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님 내가 너의 영역으로 가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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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온다고 거기에 흔들리면 그건 나의 문제인거야

나무가 흔들리는 건 바람 때문만은 아니니까

혼란스럽기만 하네. 

 

다시 그런 관계에 접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내가 성숙해지기 전까진...

규정짓지 말자고 했지만 규정지을 수가 없어

 

휘몰아쳐주지 말라구.너의 말처럼 넌 쿨한 거겠지

세상의 벽, 틀이란 걸 네 안에서 아직 발견하지 못했어

그게 너의 매력이지

어쩔 땐 한없이 편안하고부드럽고 어쩔 땐 다가가기 어려운 무표정함.

하지만 넌 닫혀 있지 않아서 좋아

 

언제나 내 스스로가 문제의 중심이고 열쇠임을

너는 내가 잊어버릴까봐 항상 지적해주고 있지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아

어쩌면, 내 스스로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할 수 없을 것 같아

글 쎄 잘 될 수 있을지..하지만 노력해볼게 친구로라도.. 내 친구여.

 

처음부터 알게 해 줘서 고마워 나의 한계를

멍청하게 환상만 키워가지 않게 해주고 있어서 고마워

 

처음부터 아는 게 좋아

나를 , 그리고 너를미워하지 않으려면...

 

좋아하는 감정에 매몰되는게 아니라

그러한 혼란을 사랑이라고 믿을 게 아니라

너라는 사람 자체에 집중해 너를 보고 좋아하게 될 때

그 때 사랑이라고 해야겠지

 

폭풍이 지나간 후의

그 고요함 처럼...지켜볼래

 

부모님께도 이야기드렸어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그랬더니 잘 만나보래

 어떤 사이가 앞으로 될지는 모르지만, 미리 이야기해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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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유통기한은 왜 3년일까?
[매거진 esc] 이기호의 독고다이 상담실
 
 
한겨레  
 
 
» 연애 유통기한은 왜 3년일까?
 
 




Q 왜 연애 유통기한은 3년일까요? 아무리 사랑에 빠져 죽을 것같이 좋다가도 3년이 되면 사랑이 식는 걸까요? 영원할 것 같은 사랑이 왜 3년이 되면 고비를 맞는 걸까요? 어떻게 하면 3년이라는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요?

 

A 영원하지 않을 걸 알면서 하는 게 바로 사랑의 위대한 점이로다

내가 미치거나 총 맞지 않고서야, 왜 이런 코너를 맡겠다고 홀라당 넘어갔는지 지금도 거 참,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주변에 총 갖고 다니는 사람은 없으니 분명 전자가 확실할 텐데, 그런 정신을 가지고 어떻게 남의 고민을 들어줄 수 있을지…. 새삼 온 정신으로 돌아와 걱정만 하고 있는데, 세 살짜리 아들놈이 등 뒤로 조용히 다가와 파워레인저 엔진포스 총을 쏘고 도망갔다. 아아, 그래서 걱정은 단번에 사라져버렸다. 그건 그냥 총 맞은 거였구나, 총 맞은 거였어! 그렇게 두 팔 벌려 환호작약한 다음,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총 맞고 난 뒤, 쓰는 원고라는 점, 유념해주길 바란다. 거 뭐, 무서운 건 하나도 없다. 자, 이제 시작해보자.

하나. 연애의 유통기한은 왜 3년일까요, 묻는 당신은, 안타깝지만 이 땅의 중등교육의 또다른 피해자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먼저 해본다. 3년이 지나면 왠지 졸업해야 할 거 같고, 그다음엔 다른 애인으로 진학해야 할 거 같고, 학용품도 새로 장만해야 할 거 같고, 뭐 그렇고 그런 모범생들 있지 않은가. 알게 모르게 주위엔 그런 모범생이 제법 많다. 50분 전화하고 10분 침묵하고, 50분 이야기하고 10분 섹스하고, 50분 술 마시고 10분 꺼이꺼이 울고. 연애를 학교 시스템에 맞춰, 똑같이 운용하는 사례들이 종종 있다는 소리다. 3년에 맞춰 교과서를 다 떼고 나니, 이런, 이제 더 이상 배울 것도, 궁금한 것도 없구나, 그러면 남들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애인을 ‘수학의 정석’화시킨 전형적인 사례. 그런 당신에게 말해줄 수 있는 일화 하나. 예전 고등학교에 다닐 때, 동네에 노는 형님이 한 분 계셨다. 이 형님은 학교를 무슨 유엔안보리 이사회 참석하듯 띄엄띄엄 다니셨는데, 그래서 당연하게도 1년 더 ‘꿇게’ 되신, 학교 시스템의 이단아 같은 존재였다. 한데, 이 형님의 마지막 학교생활 1년은, 다른 해와는 다르게 아주 열심이었다. 체육대회에도 열심, 보충수업이나 ‘야자’에도 열심(안타깝게도 성적은 그리 좋아지지 않았다), 반 미팅에도 열심. 해서, 어느 토요일 하굣길이던가, 내가 슬쩍 물어본 적이 있었다. 형, 요새 왜 이렇게 학교생활에 열심이세요? 그러자, 동네 노는 형님은, 위로는 천문이요, 아래로는 지리를 꿰뚫은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정들어서. 당시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이 형님이 정말 병원에 입원해야 되는 건 아닐까, 고민했지만, 이젠 어렴풋이나마 그 뜻을 알게 되었다. 정든다는 것의 참말로 큰 의미 말이다.

둘째. 동네 노는 형님이 해준 말과도 연결되는 이야기이지만, 사랑에 빠져 죽을 거같이 좋은 시기가 3년 이상 지속되면 미안한 말이지만 그러단 정말 죽고 만다. 심장마비나 고혈압 같은 것이 올 확률이 높다. 내 경운 분명 그랬다. 살기 위해서라도 사랑은 좀 식을 필요가 있다. 사랑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차이는 좀 있겠지만, 우리가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지속시킬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6개월 남짓이 전부일 것이다. 그다음은 그저 리얼리즘의 시대일 뿐이다.(내가 알고 있는 한 선생님은, 이 리얼리즘의 시대가 수십년 이어지고 나면 휴머니즘의 시대가 온다고 했다.) 방귀도 트고, 트림도 트고, 쩝쩝 음식 먹는 소리도 갑자기 요란해지는 리얼리즘의 시대 말이다.(그 모든 것이 사실은 모두 살아보겠다고, 이러단 만성 속쓰림에 암까지 생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의 발로 때문에 튀어나온 본능들일 것이다.) 그 시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관계는 쫑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은 꼭 ‘좋아 죽을 것 같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 사랑은 영원할 것만 같아서 빛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도 사랑하는 게, 그게 바로 사랑의 위대한 점이라는 것, 그걸 좀 생각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사랑에는 당연히 유통기한이라는 게 있다. 하지만 그걸 빤히 알면서도 가는 게 핵심이다. 우리가 무슨 이마트나 홈플러스냐, 새삼 유통기한 따위에 놀라게.


 
» 이기호의 독고다이
 
정리 차원에서 한마디만 더 하자. 그 옛날 프랑스에서 7월혁명이 일어났을 때, 시민들이 가장 처음 공격한 곳은 시내 곳곳에 세워져 있던 시계탑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그 당시 시민들은 시간에 대해, 그러니까 근대에 들어서부터 계량화되고 수치화된 시간에 대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것. 우리가 3년이라는 사랑의 유통기한에 대해서 말할 때, 이것 역시 그냥 넘어갈 순 없는 문제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 역시 사랑을 계량화하고 수치화하는 데 익숙해져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점 말이다. 예전 우리 할머니는 내가 할아버지에 대해서 물을 적마다 늘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그 양반하고 내가 오래 살긴 오래 살았지, 뭐. 따져 보니 그 세월이 40년이었다. 너무 날짜 따지고, 그러면서 다시 날짜 때문에 스트레스 받으면서 살지는 말자. 때론 한 달 만난 사랑이 평생을 가는 경우도 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우리 사랑이, 이마트나 홈플러스와는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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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주

오랜동안 내가 가져온 꿈-합주.

키보드에 대한 욕심은 아직도 가끔 생겨나지만

그게 없으면 미쳐버리기 전까진 사고 싶지는 않더라

 

예전부터 난 밴드 하는 게 꿈이야, 라고 했지만 막상 전업으로, 밴드를 하는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원하는 게아닌지도 모르겠어. 아마츄어로 즐기는 것, 하지만 막상 어떤어떤 밴드에서 건반멤버를 구해요, 그러면 아직 준비도 안 된 내가 마음이 가끔 흔들리기도 해.

 

악보를 그리려면 건반악기가 분명히 필요해. 귀로 음악을 듣자마자 바로 그릴 수 있는 천재는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멜로디혼을 하나 샀다.

친구가, 노래를 하나 듣더니 악보를 찾아서자기가 기타를 치고 내가 멜로디혼을 불자고 한다.

인터넷에서 무료로 찾을 수 있는 악보가 없었다. 그래서 그렸다. 너무 다행히도 코드가 쉬웠다. 

그런데 둘만 하면 조금 썰렁하지 않을까?거기다가 오카리나랑 우쿨렐레를 할 줄 아는 두 친구가 있으니 가서 합주를 해 보면 참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근데 솔직히... 그 전에 키보드를 하나 사서 멜로디혼보다 키보드로 연주하면 훨씬 소리가 풍성해지긴 할 게다... 욕심나네..-.-;;

 

아직 음표의 길이까진 정확히 표시를 못 하지만, 음악을 귀로 듣고, 기준점이 되는 한 음을 찾고 거기에서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찾으면 악보는 금새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오래도록 가져온 꿈이었다.백수가 되고 피아노 학원을 다니면서 귀로 듣던 음악을 악보로 옮겨보기 시작했는데 몇 번의 시도끝에 그 음을 찾아서 그리게 되었던 게 불과 작년.

 

한 가지 한계가 있다면 키보드는 두 손을 동시에 치면서 코드를 찾아 따기가 쉽지만 멜로디혼은 그게 어렵다. 나름 저렴한 악기들로도 잘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을 느껴보고 싶다^^

난 오래전부터 합주하는 것을 꿈꾸었어. 나 혼자 연주는 재미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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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임계점에 다다르기 전에는

다다르지 못해 괴롭고

다다른 후에는 다다랐기 때문에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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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쓰던 글,하던작업

쉽게 말하면 농촌생활사, 여성생활사.. 이다.

예전에 있었다가 폐간된 디새집이라는 잡지를 아시는가?그 잡지에 실리는 글 정도의 수준으로 쓰고 싶었지만 ^^ 물론 텍도 없었지 ^^그러한 글을 쓰고 싶었다. 물론 지금도....

내가 쓴 것들을 한 번 모아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떡도 하고 술도 담그고 양잿물도 내리고

- 옹기시루 쓰던 이야기


한 때 왕성하게 쓰였을 옹기시루는 시대가 변하면서 양은시루를 쓰게 되다보니 이제는 쓰임새가 없어 집 한 구석에 보관되어 있다. 대부분 집을 개축하고 이사하면서, 혹은 골동품 수집업자에게 판매하면서 옹기시루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사라졌으나 몇몇 집에는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 중백암 김분순 씨(1934년생), 정송 최종애씨(1931년생), 동신 전영자 씨(1941년생)의 옹기시루에 담긴 옛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분순씨는 17살에 시집을 왔는데 시댁에는 4대째 물려내려오고 있는 시루가 있었다. 시루는 남원에서 사 온 것이었다고 한다. 전영자씨 집의 시루 또한 시집을 오기 전부터 시댁에서 사용하던 것이었다. 최종애씨가 시집와서 살고 있는 정송마을은 옛부터 옹기점이 융성하던 동네여서 시어머니는 동네 옹기점에서 시루 등 그릇을 장만했다.


시루는 큰 시루와 한 되 정도의 용량인 작은 시루를 사용했었는데 현재 김분순씨와 최종애씨 집에는 큰 시루만 남아있다. 보통 큰 시루는 고두밥을 찌거나, 찰밥을 찔 때 썼고, 작은 시루는 제사 때나 생일 때, 고사 때 올릴 떡을 찔 때 썼다고 한다. 김분순씨 댁 큰 시루는 일명 ‘동네시루’로 쓰여서 동네 행사, 이웃행사에 두루 사용하다보니 군데 군데 조금씩 깨어져 있다. 


‘정월대보름에 찰밥 해 먹고 제사 때나 명절 때 고두밥 쪄서 술 담아먹고, 아들 여울 때, 환갑 치룰 때’ 등 중요한 행사를 치룰 때 빠지지 않는 음식이었다. 쌀도 부족하던 때라 떡을 쉽게 해 먹기 어려웠기에 생일, 회갑, 제사 등 집안에 큰 일이 있어야 먹을 수 있었다. 생명의 탄생에서부터 제사에 이르기까지 큰 일이 있을 때에는 떡이 함께 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이레가 지나면 떡을 장만하게 된다. 그리고 삼칠일이 지나면 떡을 해 집안 식구들끼리 나누어먹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를 낳고 첫 이레 때 떡을 하고, 삼칠일 때 시루떡해서 먹고, 마지막 이레 때 떡을 하는 등 일곱 이레를 챙겨 떡을 해 먹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생일에는 백설기, 시루떡 등을 장만했다. 돌때는 붉은 팥을 얹은 시루떡, 백일에는 백설기를 만들었다. 백일이나 돌에 떡을 해서 동네에 돌리면 떡 접시는 빈 그릇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돈 10원도 주고 실 한 타래 째깐한 것도 째깐씩 주고, 쌀도 적어 못 묵고 살아. 우리 딸네들 돌 때 그랬어. 돈도 없으믄 그 때는 닭을 키우쟎아 계란도 서너개씩 갖고 온 사람도 있고. 비누도 맨들어서 하나썩 갖고오고.” (김분순)


결혼을 하고 회갑잔치를 치르고 제사를 지낼 때에도 상에 떡은 빠지지 않았다. 떡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찹쌀을 도정해서 곱게 가루로 만들어야 했는데 방앗간이 생기기 전에는 집에서 절구로 일일이 빻아서 체에 쳐서 쌀가루를 내서 썼다. 떡을 하려면 시루 밑바닥에 있는 구멍을 먼저 막아야 했다. 구멍 위에 삼베나 무명천을 깔거나 무를 잘라서 막기도 했고, 짚을 엮어서 만든 ‘시루밑’으로 막았다. 그리고 시루를 물이 끓는 솥 위에 올려서 김이 올라와 떡이 쪄지는 것이다. 솥과 시루 사이가 틈이 있으면 김이 새기 때문에 ‘시루뻔’이라는 것을 붙여 틈새를 막아줬는데 시루뻔은 밀가루를 반죽해서 만들거나 몽근겨(註: 곡식의 겉겨가 벗겨진 다음에 나온 고운 겨로 속겨라고도 부름)를 이겨서 만들어서 붙였다. 그 다음 쌀가루를 시루에 얹고 팥고물을 얹고 또 쌀가루를 얹고 이렇게 켜켜이 얹고 고르게 한 다음 찐다.


가정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고, 수확에 감사할 때에도 떡을 올렸다. 최종애씨 말에 따르면 장광을 주관하는 가신을 ‘철륭’이라고 하는데 정월이면 떡과 제물을 차려 장광에 놓고 ‘시루떡 고사’를 지냈고 농사수확철에도 떡과 제물을 차리고 고사를 지내고 동네사람들과 떡을 함께 나누어 먹는 ‘도신’이라는 것을 지내 철륭신을 모셨다고 한다. 김분순씨는 딸이 홍역에 걸렸을 때 찬물로 목욕재계를 하고 날마다 떡을 해서 빨리 낫기를 빌었다. 지금은 홍역이어도 주사 한 번 맞으면 일어나지만 당시에는 진안에 있는 병원을 걸어가거나 버스를 타고 전주로 가야만 했다. 버스편도 자주 있지 않아서 아파도 병원에 자주 가지 못했다고 한다. 조순덕씨 말씀에 따르면 홍역과 비슷하게 몸에 이상한 것이 나는 ‘손님’이라는 병이 오면 손님떡을 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찰밥을 하거나, 술을 담기 위해서 고두밥을 찔 때도 시루를 썼다. 제사에 올릴 술을 담기도 하고, 잔치 때 쓸 술, 술멕이를 할 때 동네에 낼 술을 담기도 하였다. 어른들이 많은 집에서는 사흘들이로 술을 담그었었다 한다. 먹을 쌀도 부족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쌀로 술을 빚는 것을 단속했다. 세무서에서 조사를 나왔고 단속에 걸리면 벌금을 내야 했다. 몰래 숨겨도 샅샅이 뒤지면 들켰지만 그렇다해서 술을 담지 않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시루의 쓰임새는 또 있었다. 비누가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기 전까지는 양잿물로 빨래를 했는데 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떡시루와는 별도의 시루에 콩대나 깻대를 태워 그 재를 시루에 넣고 물을 부어 내려 받아서 썼다. 간혹 비누를 만들어서 쓰는 사람도 있었는데 만드는 방법은 양잿물을 끓여서 등겨를 섞어 굳혀서 칼로 썰어서 비누를 만들었다


시루를 쓰지 않게 된지는 대략 20~30여년이 되었다고 한다. 시대가 흘러오면서 옹기시루 대신 양은시루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60~70년대 들어서면서 평가에 평장떡방앗간, 원촌에 행운떡방앗간이 생기면서 집에서보다 방앗간에서 떡을 주로 하게 되었다. 현재 백운면에는 원촌떡방앗간과 행운떡방앗간 2곳이 남아 있다. 그리고 빨래비누가 널리 보급되면서 양잿물로 빨래하는 사람은 이제 없다. 술을 집에서 담그어먹는 사람도 거의 없다.


“아들 여울라믄 술 하고, 환갑 돌아오믄 술하고, 시방은 안혀. 그전에는 했어, 뭣만 돌아오믄. 지금은 안혀.” (전영자)


어머니들과 고생을 함께 해 온 옹기시루는 이렇게 쓰임새가 없어지면서 대부분 사라졌고 고물장수가 와서 팔 것을 권유하지만 팔지 않고 몇 몇 집에서는 보관하고 있어서 이를 통해 과거를 엿볼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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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흐르게 하라

아직은 그저 연습수준일 뿐인 나의 기록..그래도 기록자로 한발자국 한걸음을 걸어가는거지

현상을 기록하는 것 뿐 아니라 그 이면을 더 파헤치고 인터뷰도 잘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여기 있는 것들은 내가 인터뷰한 게 아니라 말씀하는 것을 녹취하여 기록한 것 뿐이므로...

 

"강을 흐르게 하라" 

남한강 생태 답사 및 수경스님과의 대화마당, '수륙대제' 열려
10.04.13 18:50 ㅣ최종 업데이트 10.04.13 18:52 김하나 (rjadmsdlv)

 
 
  
▲ 버드나무에 물이 오른 새순 버드나무는 뽑혔으나 새순은 아직 움트고 있었다.
ⓒ 김하나
버드나무

 

 

지난 10일 오전 10시경, 녹색연합, 제천간디학교, 환경운동연합, 강과 습지를 사랑하는 상주사람들 등 전국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이항진 집행위원장의 안내말로 오늘 여강 걷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야기하는 강 살리기의 내용은 지역경제를 살리고 고용을 창출하고 친수공간을 만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친수공간을 만들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한강 둔치처럼 들어가면 익사하는 강이 됩니다. 친수공간은 맞습니다. 누가 친해지느냐가 문제입니다. 인간이 친해질 것인지 시멘트가 친해질 것인지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오늘 걸으면서 나누셨으면 좋겠습니다."

 

 

 

여주환경운동연합 이항진 집행위원장은 두 개의 지도를 비교하며 설명을 이었습니다.

 

"이것은 최근 10년간 홍수가 일어난 곳을 표시한 지도이고 이것은 4대강에 보를 만드는 지역입니다. 단순하게 이 두 지도를 겹쳐보았더니 어떻게 이렇게 홍수 안 나는 지역만 보를 만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고민하셔야 되는 내용이 이런 거구요. 그 답을 현장에 가셔서 찾으셔야 되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답을 찾았다면 오시지 않았겠지요? 답을 고민해야 하겠지요.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시는 게 중요한 일입니다."

 

  
▲ 최근 10년간 수해밀도지역과 4대강 보 설치구간 비교지도 수해밀도지역과 보 설치구간 사이의 일치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홍수는 보를 건설하려는 본류보다는 작은 지류에서 더 많이 발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 김하나
홍수
여여주 지역은 한강 살리기 사업 1공구 구간에 속하는 곳입니다. 인근 팔당 유기농 단지의 경우에는 신부들이 매일 미사를 드리며 현장을 지키고 있으며, 지역을 지키려는 지역민의 의지 또한 확고하다고 하지만 여주 구간의 경우는 지역민들의 의견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보상으로 인해 찬성하는 입장인 땅 주인, 이장단협의회와 생태계 파괴를 막고 희귀종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업을 반대하는 측으로 나뉘어져 있는 상황입니다. 도로를 지나면서 공사를 찬성하는 단체에서 내걸은 현수막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강살리기 사업은 우리들의 숙원사업입니다." "여주 한강 살리기 사업에 타 지역 단체의 집회를 거부합니다."라는 내용입니다.

 

안내설명이 끝난 후 시작으로 여러 대의 차량을 이용하여 바위늪구비 습지로 이동하였습니다. 남한강의 아름다운 곳 중 알려져 있는 바위늪구비는 습지가 많고 따라서 갈대와 버드나무가 번성하던 지역입니다. 약 6개월 전까지만 해도 본래의 모습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버드나무와 갈대를 베어내는 중입니다. 이곳에는 희귀종 식물인 단양쑥부쟁이기 서식하고 있습니다. 원시 상태에 가까운 강에서만 볼 수 있는 풀로서 편안하고 안전한 땅이 아니라 척박하고 원시성이 보존되어 있는 땅에서 잘 자라는데, 그 이유는 편안한 땅에서는 일반적인 다른 식물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 고라니의 발자국 갈대밭을 가로질러 뛰어가던 고라니의 발자국입니다.
ⓒ 김하나
고라니

 

 

여주 지역의 환경시민단체에서는 현장을 모니터링하던 중 이 풀을 발견하여, 보존을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공사 진행처에서는 단양 쑥부쟁이 서식지를 표시하고, 안내 표지판을 설치해두었습니다. 이 단양쑥부쟁이의 발견으로 현재 공사를 진척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환경영향평가 시행서류에 따르면 단양쑥부쟁이를 이식하겠다고 하지만, 다른 환경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전문가들 또한 장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강유역환경청에서는 이식을 위한 채취를 허가하여 4월 9일,10일 이틀 사이에 단양 쑥부쟁이 18,000여 개가 채취된 상황입니다.

 

"추측해보면 예전에는 우리 나라 전역에 쑥부쟁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곳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전역은 강바닥을 다 뒤집어엎었다 이렇게 생각됩니다. 공사를 시행하는 측에서 단양 쑥부쟁이 개체수 전수조사를 했다고 하지만 위치가 틀립니다." 이항진 집행위원장의 말이다.

 

버드나무는 베어졌으나 아직 죽지 않고 새싹을 피워내고 있었으며 갈대 숲 사이로 고라니가 뛰어가는 모습을 두 차례 볼 수 있었고 발자국과 똥도 발견했습니다. 여주 지역 여강에는 총 3개의 보가 설치될 예정입니다. 이포보,여주보,강천보가 생긴다. 각각의 보 간격은 각각 10km이며,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곳 등을 조성하기 위해서 깊이 모래를 파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고라니와 물고기 또한 살 곳을 잃게 되어 어디론가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 됩니다. 앞으로의 공사 계획은 강변 한쪽을 5월말까지 준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위늪구비를 지나 여울이 있는 강가에 도착하였습니다. 아래쪽으로는 하중도를 파내고 있는 공사현장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최병성 목사의 진행으로 어떤 물고기가 살고 있는지 과찰해보려 했으나 물고기는 없었습니다.

 

  
▲ 강의 여울 여울은 물을 정화하는 기능을 하고 물고기의 삶터가 되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강 바닥을 파내고 보를 설치하면 여울은 없어지고 생태계는 엄청난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
ⓒ 김하나
여울

 

 

"물 속에서는 공기 중보다 소리가 더 잘 전달됩니다. 공사 소음 때문에 물고기들이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한 것 같습니다. 여울이 있어서 강이 산소를 공급받아 정화가 되는데, 보를 만들게 되면 그럴 수가 없게 되고, 여강에서만 볼 수 있는 어종이 사라지고 결국 붕어,잉어, 베스, 블루길만 남을 것입니다."

 

최병성 목사의 말씀입니다.

 

"우리나라 물고기는 대부분 얕은 물에 살고 우리나라에만 있는 희귀한 돌상어 같은 물고기는 여울이 있는 곳에서 삽니다. 그리고 물고기는 알을 자갈 밑에 낳습니다. 따라서 여울이 있어야 물고기가 삽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 사업으로 수영하기 좋은 물을 만들겠다 라고 하는데 한강 평균 수심 3m, 낙동강은 8.5m로 팝니다. 수영을 하시겠습니까? 할 수 있겠습니까? "

 

여울을 지나 점심을 먹고 여주 신륵사에 당도하였습니다. 여주 신륵사 강변에 여강선원을 개원하고 4대강 사업 반대 운동을 펼치고 있는 수경스님은 4대강 사업을 보는 자신의 관점과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 수경 스님의 말씀 신륵사 내에 여강선원을 개원하고,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을 알리는 활동을 펼치고 있는 수경 스님을 뵈었습니다.
ⓒ 김하나
수경

 

 

"예수님 부처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자신의 이야기로 내 자신의 삶을 표현한다고 하는 것이 자신이 없고 다만 현상적인 이야기보다는 생명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보다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자신의 삶을 한 번 뒤돌아보면서 삶의 의미를 내밀하게 성찰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오늘 하루 자기가 살아온 생활, 아침에 일어나서 눈 뜨고 세수하고 밥 먹고 여기까지 오셔서 말씀 하시고 들으시고 점심 먹고 오셨는데 앞으로 전개되는 이런 저런 일을 느끼고 보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하루의 삶인데 이런 하루의 삶을 정말 내밀하게 살펴볼 줄 알아야 그래야 삶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욕망이라든지, 분노라든지, 어리석음의 내용이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전 생각하거든요. 한 두 사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문제라고는 안 봐요. 다만 이명박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책임져서 이런 여러 상황을 올바르게 문제를 진단하고, 조정하고 통합하고 풀어가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분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지 드러나는 현상은 이명박 대통령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 사회, 한반도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내용이 이렇게 표출되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삶을 내밀하게 진단하고 성찰하지 않는 한 풀리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루하루의 삶을 내밀히 살펴볼 줄 알아야 삶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삶의 문제에 대해 진지해져야 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으면 밖의 현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4대강 사업을 통해 우리가 살아온 삶의 모습을 점검해봅시다. 그것이 4대강 사업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풀어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입은 이 옷이 죄수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중 노릇을 제대로 하면 이 옷이 복전의가 되어 서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는 옷이어야 하는데 죄수복이라는 느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은혜를 갚으며 살아가는 것인지 몸부림치고 방황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 땅과 물의 뭇생명을 위로하는 수륙대제 뭍과 육지에서 헤매는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수륙대제를 지냈습니다.
ⓒ 김하나
수륙대제

 

이후 여강선원 바로 아래 공터에서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수륙대제를 지냈습니다. 바로 옆을 흐르는 강의 위쪽에서는 공사가 현재 진행중입니다. 스님의 바라춤과 승무에 이어 발원문을 낭독하며 제사를 갈무리하고  남한강 근처에 살고 있는 시인 홍일선의 시 낭송('첫시를 쓰던 첫마음으로 돌아가야 하리')과 제천 간디학교 학생들의 참여 소감을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행사 진행팀의 일원인 이선화씨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도시에서만 살아서 아무 생태 감수성이 없던 제가 여기 2주간 있으면서 단양쑥부쟁이를 눈여겨 봤더니 정이 들어서, 이식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속이 상하더라구요. 경쟁력이 떨어지는 식물이라서 다른 식물들과 같이 살면 못 살아남아요. 그래서 척박한 곳에 터전을 잡아요. 이식을 하는 것은 그 식물이 거기 살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면서 새로운 경쟁으로 다시 내모는 거지요.

 

그게 비단 단양 쑥부쟁이만의 일일까요? 여기 오신 분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까봐 걱정이 돼요. 故 김대중 대통령이 하신 말씀 중에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양심이 아니다. 하다 못해 벽보고 욕이라도 해라'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되게 인상깊더라구요. 글로 쓸 수 있는 분은 글로 쓰시고 밥 먹는 시간에 계속 주변 사람들에게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4대강 사업이 이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계속해서 많이 말해주면 좋겠어요.

 

그리고 많이 여기를 오셨으면 좋겠어요. 아무 생태 감수성이 없던 제가 2주 머물면서 정이 들었는데, 여러분도 하루라도 오면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다른 분들 안내해주셔서 이쪽으로 오시면 제가 여기 와서 매일 모니터링하고, 안내하거든요. 얼마든지 안내해드리고 모든 최선과 열정을 다해서 안내하고 소개해드릴테니까 주변 사람들 알려주셔서 오게 해 주세요.여기 있는 분들 다음에 또 뵙고 다른 분들과 같이 또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행사를 마친 후 참석자들은 예도 통천의 풍물을 따라 강을 따라 걸으면서 하루의 여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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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습관을 바꾸어보자!'

내 마음의 빚을 갚는 차원에서 물을 조금이나마 덜 더럽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맹물로 머리를 감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한 번 시도했었지만, 머리가 너무 가려워서 참지 못하고 하루만에 그만두었었는데 이번엔 한 달 이상 시도해보리라 결심했습니다.

때때로 너무 가려울 때 한두 번은 샴푸를 썼음을 고백합니다만, 그래도 아직까지 맹물로 감고 있습니다. 걱정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머리가 개운하고, 비눗물, 샴푸물이 나오지 않아서 마음이 가볍습니다.

단지,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보통 이틀이나 삼일에 한 번씩 감던 것을 하루에 한 번씩 감는다는 것이지요. 흠....

 

그리고 한동안 이를 닦을 때에 죽염을 사용했었는데 일을 그만두고 부모님 집에 있으면서 치약을 사용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독립해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다시 습관을 바꿔보기 시작했습니다. 뭐 완벽하겠습니까? 가끔 습관적으로 치약에 손이 가는 경우가 있긴 종종 합니다만~

 

목욕을 할 때도 비누를 쓰지 않습니다. 그래도 몸은 개운합니다. 땀이 나지 않기 때문에 사실 비누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씻을 수 있습니다. 샤워기를 쓰던 습관을 바꿔서 대야에 물을 받아 써 보았습니다.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은 화장실 문제였습니다. 부모님 댁도, 지금 사는 집도 수세식 화장실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재래식 화장실이라고 해도 똥오줌을 퇴비로 활용하지 않는다면 수세식 화장실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결국 하수처리장으로 흘러들어가서 하수슬러지가 되어 바다에 투기 처리 되기 때문입니다. 습관을 바꾸어보고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결국은 친환경화장실을 지어서 퇴비를 만들어 쓰기 전에는 문제를 뿌리뽑을 수 없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당장 해결이 되지 않더군요. 하지만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 말통에 오줌을 모아 삭혀 나중에 농장에서 퇴비로 활용하려고 합니다. 대변을 발효시킬 수 있는 공간과 시설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어렵기에 마음 한 켠이 조금 불편합니다..흠.. 주변에 사람들이 안 살면 구덩이라도 파서 묻겠지만 하하핫.

 

화장실 문제와 관련해서는 강을 살리는 것과는 조금 다른 관점이겠지만, 땅을 살리는 뜻에서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화장지를 사용하지 않고 뒷물을 하게 됐습니다. 예전에 한 번씩 시도해본 것들이기 때문에 큰 거부감은 없었고, 뒤도 시원합니다. 무엇보다 마음이 가볍습니다. 화장실에 쌓여가던 화장지를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 무엇보다 가장 마음도 개운하고, 뒤도 개운한 일이죠^^

 

주변을 둘러보니 바꿔야 할 것이 몇 가지 더 있었습니다. 설거지를 할 때 저는 예전에 밀가루를 사용해서 설거지를 했었지만, 어머니의 핀잔으로 그만두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나마 가장 친환경적이라고 판단되는 친환경주방비누를 사서 사용하고 있는데 훨씬 거품도 적게 나고 헹굼물도 맑습니다. 광주에 있는 '강청'이라는 비누회사입니다. 예전에 일하던 단체 회원이셔서 한 번 만나뵌 적도 있는데, 믿을 수 있는 분입니다. 공장 옆에 수세미도 기르고 있는데 구매고객에게 서비스로 제공하시려고 심으셨답니다.

당시 저는 그 단체에서 소식지를 담당하던 시기여서 그 분을 만나뵙고 비누에 대한 이야기,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를 인터뷰해서 실은 적이 있거든요. 그러다보니 그 비누에 애정이 가는거죠 물론 품질도 좋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용으로 주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사실, 친환경비누보다는 밀가루가 나을 것 같아 밀가루설거지를 오랜만에 다시 시도해보았는데 강한 기름때는 잘 지지 않는 단점이 있어서 고민이 됩니다. 그래서 두 가지 방법을 경우에 따라 섞어서 쓰고 있습니다.

 

아직도 바꾸어야 할 것이 여러 가지 입니다. A4 용지를 사무실에서 줄여보려고 해도 잘 되지는 않네요. 그리고 재생지를 주문하려고 했지만 도매로만 판매한다고 합니다. 그 문제와 더불어 생활쓰레기를 줄이는 것, 그리고 전기를 안 쓰는 것 - 일찍 자기 때문에 집에선 전기를 별로 쓰진 않지만 컴퓨터를 쓰며 일하다보니 낮 시간에는 전기를 계속 쓰게 됩니다. - 앞으로 실험해보고 싶고 바꿔보고 싶은 것들입니다.

 

과연 어떻게 바꾸어갈 것인가 쉽고 즐거운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요즘의 새로운 궁리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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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청라 이모의 오손도손 벼농사 이야기

[서평] 청라 이모의 오손도손 벼농사 이야기
 
  김하나 (rjadmsdlv)
 
 
 
 

이 책은 지은이 정청라 씨가 첫 벼농사를 지었던 경험담과 화가 김중석 씨의 그림이 어우

러진 동화책입니다. 정청라 씨는 29세 되던 해 시골로 내려갑니다. 전부터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엇던 그녀는 뜻을 함께 하는 친구와 함께, 출판사 근무 시절 알게 된 시인의 소개로 그가 살고 있는 동네로 귀농을 하게 되었습니다. 빈 집을 수리하고, 아기자기하게 농사도 짓고 살림을 하며 시골에서의 생활을 만들어가던 그녀는 지금도 그 곳에서 건강한 살림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가 시골에 내려와 첫 벼농사를 지었던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습니다.

 

  
▲ <청라 이모의 오손도손 이야기> 그림책 표지 청라 이모의 오손도손 이야기 그림책 표지입니다. 김중석 작가의 그림입니다.
ⓒ 김하나
벼농사

 

 

책을 읽다보면 그녀가 경험한 시행착오와 재미있는 에피소드에 웃고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과 어린 아이의 놀라운 통찰력에 감동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씨앗을 준비하기 시작한 4월 15일부터 수확한 햅쌀로 처음 밥을 해 먹었던 11월 21일까지 자신의 경험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 이야기를 세세하고 재미나게 기록하였기 때문에 책을 읽는 사람 또한 함께 농사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고나 할까요?

 

그녀가 농사를 짓게 된 땅은 초승달처럼 생긴 조그만 논이었기 때문에 '초승달배미'라고 이름을 붙여주었지요. 그리고 초승달이 보름달로 부풀어오르는 것처럼 농부가 되고 싶은 꿈도 그 논 안에서 둥실둥실 부풀어올랐으면 좋겠다고 소망합니다. 마을에는 자연을 닮은 맑은 아이 구름이네 가족, 홀로 총각, 시인 아저씨, 설매실 아주머니, 여성 둘이 귀농한 구들과 마루 언니네 등 여러 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정청라씨는 실수도 하면서 어르신들로부터 농사에 대한 여러가지를 많이 배우게 되지요. 논에 물을 대는  방법도, 논둑에 두름을 치는 방법도 어르신들 덕분에 알게 되지요.

 

그리고 정청라 씨처럼 기계를 쓰지 않고 농사를 지으려고 했던 홀로 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둘은 벼를 수확할 때가 되자 낫으로 벼를 베고 홀테로 훑는 품앗이를 합니다. 그러다가, 벼를 베던 총각이 논바닥에 볏짚으로 "나랑 가치(같이) 살자"라고 쓰고 나락 다발을 들고 프로포즈를 했다는군요. 초승달배미 논에서 그녀는 40킬로그램 쌀 포대로 한 포대 반을 수확합니다. 쌀을 보며 무엇을 해 먹을까 즐거운 상상을 하던 중 총각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씻나락으로 쓸 건 따로 남겨 둔 거죠?"

"씻나락이요? 먹고 남으면 그걸로 하죠 뭐"

"뭐라고요? 남는 걸로 씨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가장 튼튼하고 잘 여문 걸로 씨부터 챙겨 놓고, 그런 다음 남는 걸 먹어야죠"

 

그래서 그녀는 또 한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결국 둘은 2009년 4월 동네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을 하고 12월에는 아들도 낳았습니다. 

 

책을 읽다보니 몇 년 전 어떤 한 모임을 통해서 이 책의 지은이인 정청라 씨를 알게 되었던 때가 생각납니다. 당시 그녀는 대안학교의 교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모임을 하던 어느 날 뜻을 같이 하는 친구와 함께 시골로 내려가겠다는 선언을 했는데 그 때 참 신선하고도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시골에서의 삶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젊은이입니다. 건강한 노동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고, 땅과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는 친구이기도 합니다. 저는 건강한 노동을 하며 살고 있지 못하지만, 친구를 생각하면서 앞으로 제가 살아갈 삶에 대한 용기를 얻게 됩니다. 

 

벼농사는 청라 씨 뿐 아니라 자연과 동네 사람들이 함께 지은 것이었습니다.그리고 청라 씨는 벼농사를 통해 쌀만 얻은 것이 아니라, 한 끼 밥의 소중함과 마을 사람들의 소중함,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겠지요.

 

수확한 쌀로 처음 밥을 해 먹을 때 일곱 살 구름이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모, 밥은 정말 고마운 것 같아요. 우리한테 밥이 돼 줘서 우리를 살 수 있게 해 주쟎아요. 우리들도 이 밥을 먹으면 밥처럼 착해지겠죠?"

 

정말 밥만 먹어도 밥처럼 착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논농사를 마치고 겨울의 문턱에서 청라씨는 이렇게 생각했답니다.

 

"찬바람이 매서워지는 겨울 문턱에서 나는 자꾸 봄을 떠올리게 돼. 아무것도 모르면서 농사를 짓겠다고 결심했을 때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지. 만약 그 때 두려움을 못 이겨서 논농사를 안 지으려고 했다면 논이 준 수많은 추억과 선물을 놓치고 말았을거야. 논아, 정말 고마워. 널 만나서 난 행복해"

 

이 책을 읽고 나서 저 또한 이웃들과 함께 논농사를 지어보겠다는 마음이 더 확고해졌습니다. 그래서 논농사두레에 참여하기로 했답니다.올해 가을에는 저도 함께 농사지은 쌀 한 톨, 밥 한 그릇을 꼭 먹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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