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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동 “나는 아직도 독재의 망령들을 본다”

한 사람의 히스토리를 잘 정리... 머리 벗겨진 것도 중정 끌려가서 머리에 대형 호치키스 같은걸로 찍혀서 그랬다던데...

 

 

 

박계동 “나는 아직도 독재의 망령들을 본다”
2005-05-12 10:08 김세옥 (okokida@dailyseop.com)기자
긴급조치 9호 공포 30주년을 맞아 박정희 유신독재정권 시절 학생운동을 했던 이른바 '긴조세대' 70명이 당시의 시대상과 회환을 담은 문집 '30년만에 부르는 노래-유신독재를 넘어 민주로'를 펴냈다.

1편의 논문과 70편의 감상문으로 구성된 이 문집에는 민주화 운동을 하며 불효자식이 될 수밖에 없었던 긴조세대들의 눈물과 아픔이 스며들어 있다. 오는 13일 긴급조치 9호 발효 30주년을 맞아 출간될 이 문집의 글을 사전 입수, 몇 편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내 삶을 바꿔 놓은 감옥 안의 햇살
- 박계동(당시고려대 학생)

1975년 5월 13일, 나는 혜화동에 사는 보성고등학교와 고대를 함께 다녔던 불문과 친구 김진환의 집에서 온 종일 골방 가득 담배 연기로 채우며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렴풋하지만 아마 대학 생활에 대해서, 미래의 희망에 대해, 미팅 경험과 이상적인 배우자상 등의 이야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작 당시에 격랑처럼 내 마음을 흔들고 있던 고민은 감춘 채, 부질없는 이야기로 겉돌다가 헤어진 것은 오후 너덧 시 될 것이다. 혜화동 로타리를 지나는데 한 귀퉁이의 조그마한 전파사 앞에 10여명의 사람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나운서의 단호한 목소리가 먼 발치에서도 큰 소리로 들려왔다.

“앞으로 일체의 유신헌법에 대한 비방이 금지됩니다.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면 엄중히 처벌됩니다. 또한 위반 내용을 방송에 보도해서도 안됩니다. 향후 5명 이상이 모이는 집회는 반드시 당국의 집회 허가를 받아야 하며.... 위반자는 최고 무기징역까지 처해지고,,,,”

사람들의 얼굴들은 두려움을 넘어 질려있었다. 유신 헌법에 대한 부정적 논의를 금지한, 74년 1월의 긴급조치 1호에 이은 국민들의 일체의 집회 결사의 자유와 언론 출판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박탈하는 조치였다.

이 날 따라 하늘도 꽉 뒤덮힌 먹구름으로 음산한 분위기를 더했다. 나는 혜화동 로타리를 돌아 창경궁(당시 창경원) 돌담길을 걷고 있었다. 세월의 엄중함과 스스로의 비겁함과, 막연한 두려움이 나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생각해 보면 74년 10월 10일, 고대 총학생회가 주도한 데모 때에도, 75년 4월 6일의 긴급조치 7호로 후배들과 친구들이 구속되거나 제적당했을 때에도 나는 참가하지 않았었다. 긴급조치 9호는 나를 비웃고 있었다. 이 비겁한 놈아! 이런데도 너만 알량하게 눈막고 귀막고 혼자 잘 살아보겠다고.

기실 내가 도망 다닌 것은 어려운 삶에도 대학을 보내며 자식하나 잘되기를 기대하며 살아온 부모님에 대한 마음의 부담때문이었다. 그리고 자기성장 욕구의 포기였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고문과 감옥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내가 걸어다니는 것 자체가 변명이고 거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나는 이제 더 이상은 본질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비원을 돌아 광화문으로 향했다. 청와대를 등 뒤로 하고 시청 앞을 걷고 있었다.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고 유신에 항거하며 할복한 고등학교 3년 선배인, 김상진 선배의 치열했던 순간의 심정과 모습이 어떠했을지 불현듯 머리를 스쳐갔다. 고대 본관 불어 원강 강의를 듣던 천정 위에서 가만히 책을 베고 드러누워 자살한 채, 15년 만에 발견된 4.19 때 선배의 모습도 스쳐갔다.

아마 세상도 보기 싫지만 비겁한 자신도 마음에 들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학교에 묻히는 기분으로 조용히 천정 위에서 자살한 것은 아닐까?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비겁함으로 내가 살아본들 내가 만들어 낸 삶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청 옥상이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계속 걷다 덕수궁 돌담길을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그 유혹을 끊어내고 안도할 수 있었다.

75년 6월 28일, 마침내 나는 가톨릭 전국학생연맹사건으로 구속되었다. 나를 태운 안기부 짚차가 당시 서대문에 있었던 서울구치소 앞에 멈춰섰다. 육중한 문이 서서히 열리는 모습을 공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차가 구치소 안을 향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는 온 힘을 다해 발로 바닥을 밀어냈다. 하지만 엄혹한 유신독재 앞에 무력감만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시커먼 그 어두운 죽음의 동굴 속에 새로운 희망이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너는 선배 잘못 만나 부화뇌동한 죄 밖에 없으니까 반성문만 쓰고 재판만 고분고분 잘 받으면 집행유예로 내어 줄 것이라는 검사의 말을 비웃으면서 재판을 거부하고, 유신 재판을 두 번 받는 것 자체를 치욕으로 느끼고 나는 항소도 포기하고 징역 3년을 받았다. 그건 정말 잘 한 일이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이 때의 선택만큼 자신감을 주었던 기억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날로부터 나는 서울구치소에서 스마일맨이 되었다. 한 교도관이 물었다. “8118번, 교도소가 그렇게 좋아. 매일 싱글벙글 웃고 다니게?”

생각해보면 첫 사랑만큼이나 좋았다. 육체적 고통이야 어쩔 수 없었다 쳐도 정신적으로는 제일 맑고 앙금이 없는 느낌이었다.

“너희들은 이제 나를 더 이상 괴롭힐 수 없을뿐더러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권력이 나한테 가하는 물리적인 고통은 이제 두렵지 않다”

철창 안으로 파고들어 마루에 떨구어진 햇살은 유난히도 반짝였다.

80년대에도 민주화를 위한 활동은 계속되었다.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나는 다시 한 번 수배자의 신세가 되었다. 2년간의 수배 기간이 너무 길고 고통스러워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한 일이 있었다. 일본에서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가서 망명해 거기서 우리나라의 인권 탄압 진상을 알리는 민주화 투쟁을 계속하기로 마음을 먹고 감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밀항은 실패로 돌아갔고, 82년 체포되어 1년동안 2차 수감생활을 했다. 하지만 밀항을 준비하는 와중에 나는 평생의 동반자인 아내를 만났다. 살벌한 수배생활에 쫒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나를 믿고 함께 해주었고 결혼에 기꺼이 동의해 주었다. 수감 생활동안 어머님이 나로 인해 희망을 잃고 돌아가셨던 일은 평생의 원한으로 남아 있다.

1983년도에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만들어졌고, 분위기는 유화기로 접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걸리면 바로 감옥에 들어가야 하는 초긴장 상태에서 공개 운동이 전개되었다. 1986년에는 민통련 조직국장을 맡아 활동을 했는데, 그해는 4.13호헌론이 나오던 해였다. 국민들에게 호헌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군부독재의 횡포였고, 그때부터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기 위한 치열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1987년 결국 직선제 개헌을 이루었으나,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하면서 새로운 군사정권을 탄생시켰다. 1986년은 직선제 개헌을 이루어야 한다는 국민적 열망이 불같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1986년의 5.3 인천 집회는 직선제 개헌을 이루기 위한 격렬한 투쟁의 장이었지만, 전두환 정권은 우리를 좌경화된 폭도로 몰았고, 인천집회장을 과도하게 진압하면서 폭력집회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5.3 인천사태 주모자로 지목되어 나는 다시 수배자가 되었다.

2 년 반 동안을 전국을 떠도는 수배생활 끝에 1988년 다시 1년간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홍길동이라는 별명을 얻어가며 한 도피 생활은 힘들기는 했지만 언제나 역사는 결국 올바른 길로 갈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렵지 않았다.

1989년 12월 감옥에서 나온 시기는 노태우 정권 후반기였다. 군사정권에 대한 학생들과 재야의 저항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수 많은 민주 인사들이 투옥되고 있었다. 명실공히 최대의 전국적 조직과 전선적 구침체가 된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이 이때 결성되었다.

하지만 재야 단체의 정치 세력화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던 시점이라 정치적 입장에 따른 평민당과 민중당으로의 입당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이철, 장기욱, 노무현, 김정길, 이부영, 제정구, 원혜영, 장영달 등은 꼬마민주당의 핵심 멤버로 당을 이끌었고, DJ와 민주당과의 야권 대통합을 이루어내는 가교 역할을 해 결국 야권대통합의 상징인 민주당이 만들어졌다.

1992년 민주당 후보로 서울 강서갑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현실 정치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1995년 10월에는 노태우 대통령의 숨겨진 비자금을 밝혀내 사람들이 말하는 일약 스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비자금 조성 과정은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는 성역처럼 제대로 드러나질 않았고, 비자금 조성 경위를 밝히고 노태우 정권의 비리 전모가 드러나길 바랬지만 정작 수사는 이 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하고 마무리하기에 급급했다.

비자금 수사가 문제가 있음을 국민들에게 직접 알리고 호소하기 위해 ‘시국강연회’를 열어 나갔다. 당시 상황에서 시국강연회는 비자금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유일한 방법으로 비자금 사건이 일회성 폭로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 국민들의 뜻대로 매듭짓도록 촉구하는 장이 되었다.

몇 개월 뒤면 15대 총선이라 지역구에서 선거 준비를 하지 못했지만, 시국 강연회에서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하는 것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거에는 선거의 논리가 있었다. 나는 자금력과 조직력에서 모두 열세였다. 당시 지역주의 극복과 개혁을 기치로 내세웠던 민주당 내의 개혁그룹으로서는 갑작스런 국민회의의 분당으로 인해 엄청난 혼란을 겪었다.

전국은 지역당 구도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였고, “지역당 극복과 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통합 야당이 된 민주당은 하루 아침에 소수당으로 바뀌었다. 개혁세력 내부에서도 의견 통합이 어려웠는데 작고한 제정구 의원은 “부끄러운 재선이 되기보다는 명예로운 초선으로 장렬하게 전사하겠다”는 소위 전사론을 폈고, 나 역시 신념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선거기간 내내 노태우 비자금을 폭로하면서 돈을 챙겼다는 등의 비방, 흑색선전에 시달렸고, 상대 후보는 이런 유언비어를 바탕으로 선거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정작 당사자인 나는 선거자금 마련에도 어려움을 겪어야 할 정도로 가진 것이 없었다. 결국 흑색선전과 지역구 관리의 소홀함으로 낙선하고 말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흑색선전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으니 후회는 없다.

국민의 지지가 없는 국회의원은 있을 수 없다. 국회의원의 힘은 국민의 지지를 통해 나오는 것인데 낙선을 하고 나니 힘이 빠졌고, 재충전의 기회로도 삼을 겸 미국 미주리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비행기가 한반도를 벗어날 때는 아스라이 보이는 땅끝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1년의 시간이 흐르고 귀국을 하자 1995년의 시국강연회를 문제삼아 선거법 위반의 죄목으로 벌금 600만원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받았다. 그것으로 16대 총선에서의 피선거권이 박탈되었다. 비자금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국민을 향한 시국강연회가 유죄라니... 나름대로 국민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한 결단들이 결과적으로 낙선이요, 선거법 위반이요, 사면복권에서 제외된 정치적 퇴출이라니... 2000년 16대 총선이 목전에 와 있는 상황에 5.6공화국 비리의 주범들은 모두 사면 복권이 되어도 여전히 묶여 있는 상황은 나에게 견디기 힘든 괴로운 시간이었다.

무언가 돌파구 마련이 필요했다. 정치가 시민들과 괴리된 채 귀족화하고 그래서 국민의 마음을 알지 못함으로써 그들의 비판을 듣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개혁해야 할 것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차라리 이 시간을 국민들 속에서 부딪쳐 보자, 국민들과 직접 만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는 생각에 택시 운전대를 잡을 결심을 하게 되었다. 서민 대중과 접하면서 그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는 것은 추후 정치활동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잠실교통회관에서 택시기사 자격시험을 치르고 3일간 교육과 적응시험을 치른 뒤 자격증을 받았다. 당시 살고 있던 화곡동 집에서 가장 가까운 금구상운에 취업을 했다. 주간조와 야간조를 돌아가면서 하는데 야간조를 뛸 때는 오후 3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운전을 했다. 하루에 대략 200여km를 뛰는데 서울의 활발한 움직임이 실시간으로 다가왔다.

서울의 밤은 포장마차의 등장으로 시작되고 서울의 낮은 미화원들이 연다. 미화원들은 1시간30분이면 그 많은 오물을 말끔히 치우고 그 뒤에 서울은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새로운 서울 거리 위로 새벽시장 보러가는 사람과 우유배달원, 신문배달원들이 내닫는다. 뒤이어 이른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서울은 다시 활기를 찾는다.

내가 다니던 택시회사에는 전직이 수출업체 사장인 사람이 있었다. 부도가 나 생계를 걱정하고 있던 차에 ‘박계동 전의원이 택시운전사가 됐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곧장 우리 회사로 와서 취업을 한 사람이다. 택시 운전을 하면서 매일 매일 서민들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10개월의 짧다면 짧은 시간일 수도 있지만 정치인으로 계속 남아 있었더라면 도저히 알지 못했을 서민들의 삶과 만날 수 있는 무엇보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택시 운전을 하면서 회사 택시를 운전하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열악한지도 알게 되었고, 그 경험은 17대 국회에 들어오자 마자 택시 LPG 가스에 부과되는 특별 소비세 면제를 위한 법안 제출로 이어졌다. 택시 운전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법안 제출은 생각지도 못했을 거고, 기사들의 열악한 삶은 수치를 통해서만 다가올 뿐 가슴으로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택시 기사들의 보수 교육이 있거나 모임이 있을 때 나는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내가 그들의 삶의 열악함과 고통을 알기에 개선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고, 정부가 무관심하다면 국민이 준 권한으로 개선책 마련에 직접 앞장설 것이다. 지금 겪고 있는 제도가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따져물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정책과 제도는 변하는 것이다. 나에게 다가올 불편 때문에 침묵하는 것은 남 뿐 만 아니라, 나에게도 불편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17대 총선을 앞둔 2003년 이부영 선배를 비롯한 몇몇 의원들이 한나라당을 탈당했고, 열린우리당 신당 창당에 합류했다. 그리고 대통령 탄핵이라는 소용돌이가 정치권을 휘감았다. 국민들의 정서도 요동쳤다. 한나라당에 남아 있던 과거 민주당 인사들은 당신들은 왜 한나라당에 남아 있느냐는 집요한 질문에 시달려야 했고, 선거기간에도 또 다른 흑색선전 거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개정된 선거법은 과거처럼 만만하지 않았다. 흑색선전은 전면적인 처벌의 대상이 되었고, 함부로 돈선거를 하다간 바로 당선 무효 판정을 받기 십상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국민의 심판을 받았고, 국민으로부터 더 많은 일을 해달라는 선택을 받았다. 17대 국회는 나의 또 한 번의 정치 실험대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꿈을 이루기 위해 20대의 소중한 시간을 보냈고, 20대에 맞았던 긴급조치와 그에 대항하면서 시작된 수감생활은 그후 삶에 오히려 큰 힘이 되었다. 삶의 안일함을 택하지 않고 끝까지 싸움을 결정했던 그 날의 결단은 노태우 비자금을 밝히는 과정에서 숱한 협박에도 자신있게 견디게 해주었고, 정의감이 있는 한 인생의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에도 나를 외롭지 않게 해주었다. 컴컴한 감옥 안에서 발견한 한 줄기 햇살이 어떤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나를 만들어 준 셈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바꾸어 나가야 할 불합리한 제도와 독재의 잔재들이 남아 있다. 어떤 선진국 못지 않은 나라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해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20대의 정의감과 30대의 추진력, 그리고 40대의 재충전의 시간들이 원동력이 되어 50대의 나를 이끌어 갈 것이다. 긴조 시절의 긴장된 마음으로 우리 사회 변화를 위해 아낌없이 노력해 나갈 것을 긴조 30주년 맞이하면서 새롭게 다짐해 본다.

박계동 약력

고려대 정외과 72학번
제14대 국회의원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제1회 대한민국 국민상 수상
택시기사
제17대 국회의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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