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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프라이즈 펌 : 진중권 대담 전문,"우리 논쟁은 청동기 수준"

글이 짤렸다. 왜일까? 모르겠다. 전문은 아래 링크

http://www.joongprise.com/bbs/view.php?id=best_1&no=2660

 

뭐 그런 익히 주지하는 내용이다. 우리에게는 형식만 있을 뿐 내용이 없다. 단지 민주주의의 형식뿐

 

원문에서 최근 독일 사형제 폐지 논쟁을 죽이는 예로 들었다. 독일에서 누군가 “누가 다른 인간에게 다른 이의 목숨을 뺏을 권리를 줬는가” 하면, “그럼 누가 다른 인간에게 인신을 구속할 권리를 줬는가” 하는 반론이 나온다.

우리 코리아의 경우. 사형제 폐지하자고 하면, “XX야, 니 딸이 그런 일을 당해도 그런 말 할래” 한다. 그 뒤에 봉건적인 처형 방법이 뒤따른다. 능지처참을 해야 한다, 육시를 해야 한다는 등등. 차이가 있다.

좋지 않은 일에는 ‘원인’을 찾기보다는 ‘범인’을 찾고, 좋은 일에는 ‘원인’ 대신 ‘은인’을 찾는다. 이러한 의인법 접근은 청동기시대 대표적 코드이다.

 

 

 

제목 : 진중권 대담 전문,"우리 논쟁은 청동기 수준"
한겨레   2006-08-13 15:10:11, 조회:13, 추천:1
내려받기 진중권_1.jpg ( 46.2 KB ), 받기횟수 : 0

“공적인 글쓰기 더 이상 않겠다”고 선언한 시사평론가 진중권씨 … 군중독재에 환멸, 인터넷을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일에 집중할 것

▣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2005년 여름부터 1년 동안 를 진행했던 시사평론가 진중권(43·중앙대 및 카이스트 겸임교수)씨가 최근 “공적인 글쓰기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8월3일 서울 홍익대 근처의 한 출판사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손석희처럼 하지는 못하겠더라


“나는 썩어가고 있다. 이제 내 자신을 배려해야 한다.” 최근 저서에서 자신의 상태를 이렇게 말했는데 지금도 여전한가. 공적인 글쓰기를 당분간 그만하겠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 지금도 디프레션 상태다. 자기의 감정이나 정서를 그동안 잘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10년 동안 글과 말을 통해 내 얘기를 했는데 지칠 때도 됐다. 방송일 하면서는 하루 4시간 정도밖에 못 잤다.

대한민국에서 논객을 한다는 게 그렇게 피곤한 일인가."


= 논객은 특정 사안에 대해 팩트를 점검한 뒤에 견해를 세워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팩트를 취합하는 과정부터가 쉽지 않다. 보도된 기사를 못 믿는 경우가 많다. 기사를 믿고 논평을 했다가 ‘물먹은’ 적이 종종 있었다. 아침에 특종하고 점심 지나면 오보로 된다. 비스마르크가 “어떤 견해든지 다른 견해와 부딪치기 전까지는 믿지 말라”고 했는데, “어떤 기사이든 논조가 다른 신문을 볼 때까지 그 기사를 믿지 말라”고 해야 할 판이다.

기사의 신뢰성 문제뿐만 아니라 사실(팩트)과 견해를 섞어 쓰는 보도 태도가 일반화한 점도 논점을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줄 것 같은데.

= 그렇다. 사실 기자들이 아무리 팩트만 전달한다고 해도 그 안에는 이미 주관적 견해가 들어가 있다. 그런데 거기에다 견해까지 섞어 쓰는 건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기자들은 상당히 정치적이다. 사람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싶어한다. 기자는 원래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지 간에 판단을 내릴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필수정보를 전달해야 하는데 이런 부분도 빠질 때가 있다.

방송사가 논객을 사회자로 쓴 이유는 논객의 정체성이 도드라져 보였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을 텐데 방송사의 의도를 충족시켜줬다고 보는가.

= 처음 시작할 때와 끝낼 때 내가 준비한 말들을 했다. 그러니까 오히려 인터뷰는 너무 무난하게 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도 나왔다. 그런데 손석희씨처럼 하지는 못하겠더라. 질문할 때 보면 좀 무섭지 않나. (웃음) 꼭 검사가 취조하듯이 하지 않나. 나는 성격상으로도 그렇게 못하겠더라. 그보다는 1년 365일 내내 하루에 하나 이상의 견해를 세운다는 게 정말 힘들었다.

한국에서 논객을 하는 것과 다른 사회에서 논객을 하는 것이 큰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나.

= 독일을 비롯해 유럽에서 살아보면서 그들은 다른 자본주의에서 살고 있다고 느꼈다. 훨씬 더 정의로우면서도 자유롭고 효율적이었다. 북유럽은 또 다르다. 그에 비하면 한국은 여전히 ‘섬’이다. 스스로를 남과 비교할 기회가 적은 편이다. 가끔 해외여행 가는 것은 비교의 기회라고 하기 힘들다. 한국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보편적인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정말 특수한 것도 있다. 우리는 특정한 부정적인 면도 ‘세상이 다 그럴 거야’라고 치부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삶을 다른 방식으로 조직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다. 늘 살아왔던 대로 살아가게 된다. 한국 사회가 보수적이라면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외국과 접촉이 적었다는 데 있다. 최근 세사만 봐도 외국과의 접촉이 불행한 결과만을 가져왔다. 마음속의 쇄국주의는 여전하다. 내가 이런 얘기하면 또 “당신이 외국물 얼마나 먹어서 그런 얘기 하느냐”거나 “선진국 잘사는 것 누가 모르냐”고 한다.


‘노빠+박빠=황빠’에 나치를 떠올려


지금까지 대중을 설득해온 당신의 스타일은 성공적이었나.

= 내 글에 대한 반응은 항상 비슷했다. 속 시원해서 좋다거나, 격렬하게 항의하거나. 나는 글을 써도 구술성을 늘 염두에 둔다. 말하듯이 쓰는 것이다. 텍스트 문화가 가지는 비판성과 합리성에 더해 구술적 요소와 놀이 요소를 결합하려고 노력했다.

황우석 사태 때 황우석 지지자들로부터 고초를 당하지 않았나. 지방 강연회에 갔다가 감금까지 당했는데.

= 강연회 때는 이미 논문이 조작됐고, 줄기세포는 없는 것으로 확인된 뒤였기 때문에 오히려 괜찮았다. 상황을 즐길 수 있었다. 이런 일도 다 당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VIP가 되어서 전경들 호위를 받는 호사도 누렸다. 그런데 한창 사건이 진행될 때는 팩트가 없어서 힘들었다. 열린우리당을 비판하면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가만히 있고, 한나라당을 비판하면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은 좋아하는 게 정석인데 이 사건에서는 그야말로 ‘노빠’와 ‘박빠’가 ‘황빠’로 뭉쳐서 한목소리를 냈다. 90%의 압도적 다수였다. 파쇼적, 나치즘적 상황이었다. 군중의 독재를 느꼈다. 정권이 바뀐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느낌이 드니까, 말하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군중 독재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나.

= 성찰이 없어서다. 민주주의라는 형식은 있는데 성찰이라는 내용이 없다. 인터넷은 민주주의를 확장시킬 수도 있지만, 군중독재의 도구로 쓰일 수도 있다. 인터넷을 통한 토론과 논쟁이 처음 선보일 때, 그러니까 안티조선 운동이나 노사모 운동 초기에 인터넷 논쟁은 수준이 높았다. 예의를 지켰고, 당파적 입장을 가능한 한 인정했다. 그런데 지금은 ‘담론’은 없고 ‘세론’만 있다. 세론에는 민중의 정서가 정직하게 녹아 있는 반면 정제돼 있지 않다. 그런데 ‘먹물’들은 세론의 영역에 안 들어온다. 대접도 못 받고 함부로 다뤄지니까. 나야 낯짝이 두꺼우니까 잘 견뎠지만, 섬세한 사람들은 못 견딘다. 담론은 사라지고 세론만이 남은 이유다. 그러니까 수준 낮은 얘기가 난무한다. 곰이 왜 나무에 올라갔을까, 노무현 때문에. (웃음) 그런 식이다. 노무현이 뭘 잘못했느냐 하는 식의 진지한 논쟁이 없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거는 없고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이야기들이 대량 유포된다. 대표적인 게 의인법이다. 좋지 않은 일에는 ‘원인’을 찾기보다는 ‘범인’을 찾고, 좋은 일에는 ‘원인’ 대신 ‘은인’을 찾는다. 청동기시대 코드다.

수준 높은 논쟁은 사회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데 한국 사회에는 생산적인 논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 구술문화의 영향도 상당히 크다고 본다. 서구는 구텐베르크 혁명 이후 합리론, 경험론 등 문자문화 코드의 전통이 오래됐지만, 우리는 이제 50년이 넘었다. 감정을 억제하고 합리적 토론을 통해 생산적 결론을 내는 문화가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인터넷이 전면적으로 들어왔다. 인터넷은 문자문화에 비해 감정적이고 정서적이며 친교적이다. 그래서 토론 양태도 다르다. 최근 독일에서 이뤄진 사형제 폐지 논쟁을 봤다. 누군가 “누가 다른 인간에게 다른 이의 목숨을 뺏을 권리를 줬는가” 하면, “그럼 누가 다른 인간에게 인신을 구속할 권리를 줬는가” 하는 반론이 나온다. 우리 경우를 보자. 사형제 폐지하자고 하면, “XX야, 니 딸이 그런 일을 당해도 그런 말 할래” 한다. 그 뒤에 봉건적인 처형 방법이 뒤따른다. 능지처참을 해야 한다, 육시를 해야 한다는 등등. 차이가 있다.


개똥녀, 조지 오웰을 뛰어넘었다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가 건강하게 양립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이라고 보나.

= 서로가 합의할 수 있는 공공성의 영역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소통할 수 있고 효율성도 얻을 수 있다. 지금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공공성의 영역을 당파성이 장악하고 있다. 진보 역시 패러다임의 변화를 읽어야 한다. 낡은 담론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미래를 위한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마련하는 데 힘써야 한다. 여전히 농경사회 언어나 산업혁명 시대의 언어를 써서는 정의로우면서도 경쟁력 있는 사회를 꿈꿀 수 없다.

미디어 미학에 전념하겠다고 했는데.

= 3세대 미디어인 인터넷 등의 변화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가 필요하다. 진보의 위기와도 맞닿아 있다. 진보사관이라는 게 텍스트 문화다. 피억압자의 기억을 조직해 더 나은 세계를 후손에 물려주자, 그러기 위해 현재를 희생하자는 논리가 진보사관이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에게 시간은 가역적이다. 텔레비전 시간 놓쳐서 못 봤더라도 인터넷 클릭하면 볼 수 있다. 현재중심적이다. 이순신, 주몽 같은 신화적이고 판타지적인 세계가 펼쳐진다. 문자문화보다 더 나아갈 수도 있지만, 후퇴할 수도 있다. ‘개똥녀 사건’을 보라. 조지 오웰 버전을 뛰어넘었다. 빅 브러더가 모두를 감시하는 게 아니라 스몰 브러더가 서로를 감시하는 체제를 보여줬다. 다른 곳에서는 안 일어나는 일이다. 이론적으로 해명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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