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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스럽고 '성'스러운 섹스 리포트

그까이꺼 대충 하기에는 대략 난감하다

 

 

'상'스럽고 '성'스러운 섹스 리포트
가상의 인물 10인 <킨제이 보고서>를 말하다
  김남준(wahnism0) 기자
영화 <킨제이 보고서>를 봤으니 킨제이 박사 흉내를 내봐야겠다. 킨제이 박사가 한 일이 무엇이었던가. 형형색색 수많은 섹스의 사례를 모아 당대의 거대한 성화(性畵)를 그리려는 시도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필자는 지금 무슨 꿍꿍이를 꾸미려 하는가. <킨제이 보고서>를 본 관객들의 반응과 생각을 모아 이 영화에 대한 자그마한 모자이크를 짜맞춰 볼까 한다. 킨제이 박사가 했듯이 설문지를 돌려 답을 수거해 보면, 좀더 다각도에서 입체적으로 이 영화를 조명해 볼 수 있지 않을까?

ⓒ2005 미디어라인코리아
물론 말 그대로 어설픈 흉내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킨제이(1894~1956) 박사는 무려 15년 동안 1만2000여명의 성생활을 조사해 발표했다. 하지만 필자는 지면 관계상 겨우 10명의 사례 밖에 싣지 못한다. 또한 킨제이 박사의 연구는 자신의 전 생애를 건 진지하고 치열한 싸움이었지만, 필자의 작업은 애석하게도 약간의 장난기와 적당한 치기가 뒤섞인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질문의 전문성과 성실성 여부는 말할 나위도 없다. 킨제이 박사는 양성애, 동성애, 항문성교, 구강성교, 섹스체위, 성감대, 성적 환상, 전희, 혼외정사, 자위행위, 오르가슴 등 19개 항목에 대해 직접 면접 인터뷰를 했다.

하지만 필자는 단 두 가지 '①영화 <킨제이 보고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②그 이유는?'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한 것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그 무엇보다 킨제이 박사와 필자 사이에 좁힐 수 없는 커다란 갭은, 킨제이 박사의 보고서는 엄밀한 논픽션이지만 필자의 글은 멋대로(?) 지어낸 픽션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누가 또 알겠는가? 이 가상인물들의 말속에 영화 자체나 성에 대한 이해를 조금은 더 넓히게 해 줄 단초가 들어 있을지. 애초 말했던 모자이크의 완성은 어림도 없겠지만, 한 조각 한 조각 모으다 보면 밑그림 틀은 대충 그려지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좀더 면밀히 관찰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지금부터 이들이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지 경청해 보자.

ⓒ2005 미디어라인코리아
1.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A씨

①성 연구자가 된 킨제이 박사(리암 니슨 분)와 소년 킨제이를 교차편집해 보여주는 도입부. 킨제이가 피면접자로 나서 연구원들에게 인터뷰 방법을 가르치는 모습과 어린 시절 보수적이고 엄격한 목사 아버지(존 리스고우 분)의 설교를 경직된 채 듣는 장면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②영화 처음부터 아득한 과거와 현재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킨제이가 성 연구에 몰두하게 된 계기가 성을 죄악시하는 아버지 아래서 자랐다는 것과 관계 있으리라는 암시를 줌으로써 극 전개 방향에 대한 호기심까지 불러일으켰다.

다큐멘터리와 드라마 형식을 접합시킨 이 긴장된 도입부는 흥미로웠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이완되며 늘어진다. 신출내기 감독의 한계인가. 이 영화가 연출 데뷔작인 빌 콘돈은 꾸준하고 힘 있는 극 장악력은 보여주지 못했다.

2. 사춘기 소년 B군

ⓛ순진한 소년 킨제이가 친구에게 몽정을 막는 요령이라며 책에서 읽어주는 내용. "배변을 원활히 하고 성경을 읽을 것, 고환을 찬 물에 담그고 앉을 것, 그리고 모성애를 되새길 것."

②웃기지도 않는다. 아무리 90여년 전이라도 그렇지 문명국 미국에서 우째 이런 일이….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딸이 "엄마, 섹스가 뭐야?" 묻자 거룩하신 여왕마마 왈 "눈을 감고 영국을 생각하거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몽정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더 가관이다. 정액 1g을 잃는 게 혈액 40g을 잃는 것과 같은 치명적 피해를 준다나 어쩐다나. 하긴 우리 또래 중에 아직 그렇게 순진한 녀석들도 많기는 하다. 내가 조숙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황당했다. 당시에 그렇게도 성의학 발달이 미비해 미신이 과학의 이름을 덮어쓰고 사람들을 홀렸다니.

ⓒ2005 미디어라인코리아
3. 생물학자 C씨

①생물학 박사 킨제이가 진득한 끈기와 열정으로 20여년간 100만 마리의 혹벌을 표본으로 채집해내는 대목.

②이런 강철 같은 의지와 추진력이 있었기에 성 표본 연구도 해낼 수 있었을 것. 킨제이 박사가 성 연구를 시작할 때도 결국 이 혹벌 연구에서 힌트를 얻지 않았는가. 즉, 100만 마리의 혹벌 개체들이 전부 다르게 생겼듯이 인간의 성도 그 숫자만큼이나 다양하리라는 것. 얼핏 보면 너무 당연하고 뻔한 말 같지만, 바로 이 단순한 사실에 심오한 과학적 진리가 숨어 있다.

에드워드 윌슨을 위시한 사회생물학자들은 생명체의 성이 무성생식에서 유성생식으로 진화한 이유를 '다양성의 창조'에서 찾지 않았던가.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 멸종하지 않고 대를 이어 번식하려면 여러 유형의 유전인자를 퍼뜨려야 보다 유리해진다. 같은 종 안에서도 다양성이 확보되면 한 종 전체가 자연도태로 전멸할 위험 없이 적자생존하는 일부 개체들로 생명의 끈이 면면히 이어질 수 있다.

그렇기에 고등생물일수록 간단하고 획일적인 무성생식 대신 복잡하고 까다로운 유성생식으로 진화해 왔다. 유성생식이 훨씬 다채로운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결국 가장 고등동물인 인간은 생물학적 본성으로 성의 다양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4. 에로 비디오 제작자 D씨

①'전 세계인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그것', '당당하고 솔직한 섹스 스캔들'이라는 카피가 씌어진 포스터 말고 인상적인 장면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②포스터 문구에 혹해서 봤더니 완전히 속았다. 소재가 '섹스'라서 말초적 흥미를 끄는 장면들도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도 뭔가(?) 있는 것처럼 포장해 시선을 끄는 탁월한 홍보능력에 경의를 표한다. 대놓고 속인 것도 아니면서 절묘한 문구로 '허리하학적'인 관심을 불끈거리게 하는 섹스어필한 '구라'. 우리 같은 업자들이 본받아야 할 광고 전략이다.

ⓒ2005 미디어라인코리아
5. 개그맨 E씨

①킨제이 박사가 저녁식탁에서 딸들과 거침없이 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발언 수위가 끝 모르고 올라간다. 두 딸의 엄마도 자연스럽고 능청스럽게 거든다. 그의 아들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버지, 그만 좀 하시죠. 우리 가족은 왜 남들처럼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없는 거죠?"라고 말한다.

②하이 코미디다. 위트와 유머가 넘친다고 선전하길래 봤는데 좀 썰렁한 장면들도 있었지만 이 부분만은 배꼽 잡고 웃었다. 밥상머리에서 섹스 이야기. 그것도 부모와 자식간의 노골적 대화. 게다가 통념과는 달리 딸들은 즐기고 아들이 화끈거려 내뱉는 일성.

웃음을 유발하는 상쾌한 전복이 겹으로 포개져 있다. 웃겨야 한다는 강박성 오버액션 없이 잔잔히 일렁이는 산뜻한 유머들. 분명 이 점잖은 영화를 조금은 더 편안하게 풀어주는 미덕이라 할 수 있다. 고지식한 인상의 킨제이 박사가 즐겨 매는 나비 넥타이의 상큼한 액센트처럼 말이다.

ⓒ2005 미디어라인코리아
6. 양성애자 F씨

①킨제이 박사가 제자 연구원인 마틴(피터 사스가드 분)과 동성애 성향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가 결국은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는 장면.

②인간의 성적 자아는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로 명확하고 배타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킨제이 박사의 견해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수평좌표를 연상해 보자. 완전 이성애자가 0, 완전 동성애자가 6이라면 사람들은 0과 6 사이의 좌표들에 연이어 분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 같은 양성애자는 그 중간치인 3정도의 위치값을 갖고 있을 것이며 그것도 고정불변의 정체성은 아니리라.

킨제이 자신도 1이나 2 정도에 있었는데 점차 3쪽으로 옮겨온 듯하다고 고백하지 않는가. 좋은 놈, 나쁜 놈을 일도양단할 수 없듯이 성적 정체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흑 아니면 백만을 강요하는 이 어리석은 획일화의 폭력이 성적 소수자들을 얼마나 억압해 왔는가. "섹스에 있어 정상, 비정상의 구분은 있을 수 없다"고 천명한 킨제이 보고서가 나오자마자 그간 억눌려 왔던 성적 소수자들의 인권운동이 봇물 터진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

7. 에로 영화광 G씨

①킨제이 박사와 함께 있던 마틴이 샤워하려고 옷을 홀딱 벗어 성기가 적나라하게 보이는 장면.

②남성 등장인물의 성기까지 직접 보여주고, 슬라이드나 실험 동영상 장면을 통해 여성 성기나 성교장면도 여과 없이 노출시킨다. 그런데도 에로틱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떨떠름하기만 하다.

감독이 시종일관 끈적하기는커녕 건조하기만 한 시선으로 성을 다루고 있는 탓이다. 따라서 관객도 감정을 개입시킬 틈도 없이 그저 연구대상으로서의 성을 관찰하게 된다. 뜨거워지려고 왔더니 냉철해지기만 하니 이를 어찌할꼬.

8. 철학도 H씨

①킨제이 박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성생활을 털어놓은 한 여성이 "제가 정상인가요?(Am I normal?)"라고 묻는 장면.

②보라, 인간은 얼마나 '정상'에서 벗어나기를 두려워 하는가. 보이지 않는 은밀한 삶의 층위에서조차도 고립이 두려워 예속되고 싶어 한다. 다수에 속해 있다는 아늑한 쾌감이 홀로 선 자유의 불안한 쾌감보다 큰 것이다. 인간은 진정 자유를 원하기는 원하는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칠 자격이나 있는가. 자유를 감당한다는 것, 결코 녹록치 않다.

ⓒ2005 미디어라인코리아
9. 주부 I씨

①킨제이 박사가 동성애 경험을 털어놓자 아내 맥밀란(로라 리니 분)이 오열하는 장면.

②"자신의 성본능을 감추고 억압하는 것은 가여운 위선"이라는 킨제이 박사의 주장도 일견 공감이 간다. 그러나 "사람들이 왜 참느냐.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것 아니냐"는 아내의 호소가 더 묵직한 설득력으로 가슴을 누른다.

이는 내 가족 안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고 모든 가족단위들과 맞물려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온갖 불합리성과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가족제도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보라. 성의 해방만이 능사는 아닌 것이다. 아, 너무 어려운 문제이다.

10. 시인 J씨

①연구원 마틴이 팀장 킨제이에게 항변하는 장면. 킨제이 박사는 얼음 같이 차가운 이성으로 팀원들간의 스와핑까지 조율해가며 섹스를 오로지 실험 대상으로 물화(物化) 시켜버렸다. 얽히고 설킨 성적 관계망으로 팀내 불화가 생기자 마틴은 "섹스는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신중해져야 하는 두려운 그 무엇이 있는 것"이라며 힐난한다.

②킨제이 보고서가 지닌 본질적인 한계에 대한 지적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성을 동물의 생식행위처럼 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사물화 시키는 것엔 크나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의 성에는 때로 인간 전 존재가 걸린 신비한 영적 비밀이 숨어 있다.

이같이 시적이고 신적인 영육복합적 심연은 통계화, 수치화를 통한 과학의 등불로 환히 비춰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계량할 수 없는 내밀한 주관적 체험을 저울에 올리려는 무리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근수를 재는 고깃덩이처럼 존엄성이 발가벗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조르쥬 바타이유는 "킨제이 보고서는 인간을 모욕했다"며 신랄한 비판을 가했던 것이다.

ⓒ2005 미디어라인코리아
2005/05/11 오후 6:41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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