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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 주범' 그린스펀, 때늦은 반성

 

 

'금융위기 주범' 그린스펀, 때늦은 반성
  "내 경제이론에 허점, 파생상품 규제완화는 잘못"
 
  2008-10-24 오전 9:32:50
 
   
 
 
  현재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글로벌 금융위기는 월스트리트 금융업체들의 탐욕스러운 영업행태와 규제완화의 복합적 산물로 지적되고 있다.
  
  특히 금융업체들이 주택담보대출과 연계해 판매한 파생상품을 제대로 규제하지 않은 정책적 실패는 '세계의 경제대통령'이라고 불리는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을 무려 20년 가까이 역임(1987~2006)한 앨런 그린스펀의 책임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그동안 이런 비판에 대해 당사자인 그린스펀은 결코 수긍하지 않았다. 지난 9일 <뉴욕타임스>가 장문의 기사를 통해 그린스펀에 대해 칼날을 들이대었을 때도 그는 "파생상품 자체가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는 사람들의 탐욕이 문제였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잘못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관련 기사:그린스펀은 '물신(物神)의 사제'인가)
  
▲ 그린스펀 전 의장이 23일(현지시간) 미 하원 청문회에서 금융위기에 대한 추궁을 받자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그린스펀 "부분적으로 잘못했다"
  
  하지만 23일(현지시간) 그린스펀은 하원 청문회에서 자신의 시장경제 이론에 허점이 있었다고 시인했다. 그는 "허점을 발견했다"면서 "40년 이상 경제이론이 아주 매우 잘 들어맞고 있다는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또 파생상품 규제에 반대했던 것에 대해서도 "금융기관들이 내가 기대했던 바와 같이 주주들과 투자자들을 보호하지 못했다"면서 "부분적으로 잘못됐다"고 인정했다.
  
  이런 답변은 헨리 왁스먼 정부개혁위원회 위원장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를 초래한 무책임한 대출관행을 제지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그렇게 해야 한다는 조언을 받았을 것"이라면서 "지금 우리 전체 경제는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그린스펀을 비판하면서 나왔다.
  
  물론 그는 최근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신용 쓰나미(credit tsunami)'"라며 정책결정자가 예상하기 어려운 극히 예외적 사태였다는 점을 강변했다.
  
  이와 함께 그린스펀 전 의장은 이날 미리 배포한 청문회 자료에서 "현재까지 금융시장의 손실을 고려할 때 일시적 해고와 실업률의 현저한 상승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실업률 상승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이번 금융위기를 끝낼 수 있는 필요조건은 주택가격 안정이지만 앞으로 여러 달 동안 주택가격이 안정될 것 같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린스펀 전 의장은 주택가격이 안정되면 그때부터 시장 경색이 상당히 풀리고 겁에 질린 투자자들도 다시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에 나서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또한 그는 주택가격이 안정될 때까지 정부가 공세적으로 금융시장을 지원하는 조치는 올바른 일이라면서 700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 계획은 이같은 필요에 상응하는 적절한 조치이며 이번 조치의 효과가 벌써 시장에서 느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린스펀은 "(이번 금융위기는) 내가 상상했던 어떤 것보다 더 광범위하게 나타났다"면서 "신용평가 기관이 비현실적으로 높게 평가한 서브프라임 증권에 대한 국제적인 수요가 은행과 헤지펀드, 연기금에 의해 급증한 것이 이번 문제의 핵심"이라고 덧붙였다.
  
  전지전능하지 못했던 탓일 뿐?
  
  그린스펀이 이번 청문회에서 예전보다는 한 발 물러선 모습을 보였지만 "규제감독 당국이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며 완벽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면서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만 절대적인 확신이나 전지전능함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끝까지 자신을 옹호했다.
  
  한마디로 마지못해 자신이 잘못을 인정한다고 했지만,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지는 것까지 막을 정도까지 자신의 경제이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시인했을 뿐이다. 그나마 파생상품 규제를 제대로 못했다는 점에 대해 '조금' 잘못을 인정한 것이 이번 청문회가 얻어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재임 기간 중 보여준 언행을 되짚어오면 그가 어떤 신념에 충실한 나머지 의도적으로 규제 완화를 회피했다는 정황이 역력하다. 만일 그가 '경제이론'에 대한 확신으로 그랬다면, 금융업체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이론'으로 포장했을 뿐이라는 의혹이다.
  
  는 "그린스펀은 금융시장에 참여하는 개인들도 책임있게 행동할 것이라는 굳은 신념을 보여주었다"면서 "그린스펀이 금융규제와 파생상품에 대해 지난 20여년에 걸쳐 어떠한 언행을 해왔는지 조사한 결과, 그가 그런 신념을 위해 조국의 경제를 볼모로 잡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이 신문은 "오랜 기간에 걸쳐 그린스펀은 시장을 움직이는 힘이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내버려두는 야심찬 미국적 실험이 가능하도록 지원했으며, 이제 미국은 그 결과에 직면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을 지낸 아서 레빈 주니어도 "그린스펀은 정부를 근본적으로 경멸하기 때문에 파생상품 규제를 반대한다"면서 그린스펀의 '위험한 사상'을 증언했다.
  
  <뉴욕타임스>는 "그린스펀이 재임 중 다른 식으로 대처했다면, 현재의 위기는 피하거나 제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많은 경제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그린스펀은 지난 10여년에 걸쳐 파생상품에 대한 규제를 철저하게 반대해 왔다. 그는 지난 2003년 상원 금융위원회 청문회에서 "파생상품은 위험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그 위험을 기꺼이 부담하려는 자에게 넘길 수 있는 놀라운 수단"이라면서 "파생상품 규제를 강화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린스펀 재임 중 FRB 부의장을 역임하고 현재 프린스턴대 교수로 있는 앨런 블라인더는 "조금이라도 규제하려는 제안이 있으면, 그린스펀과 재무부의 많은 관료들이 싹을 잘랐다"면서 "그린스펀은 꿋꿋하게 파생상품의 치어리더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1994년 미국 회계감사원(GAO)이 2년의 조사 끝에 내놓은 "파생상품의 규제감독에 상당한 허점이 있다"는 보고서도 묵살했다.
  
  당시 GAO 원장 찰스 보셔는 하원 청문회에서 "파생상품을 취급하는 미국의 대형 금융기관이 갑자기 파산하는 사태가 일어나면 시장에 유동성 위기가 닥칠 수 있으며, 연방정부가 보증하는 은행을 포함해 금융시스템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면서 "사태의 심각할 경우 정부가 개입해 납세자가 부담하는 구제금융이 불가피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미 14년전에 파생상품 규제를 적절히 하지 못할 경우 현재 전세계가 목도하는 미국의 금융위기 사태가 일어날 것을 정확하게 경고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그린스펀은 "파생상품 시장을 포함해 금융시장의 리스크라는 것은 민간 영역에서 자율 통제되고 있다"면서 "시장 자율규제보다 연방 정부의 규제가 우월하다는 증거는 없다"고 장담했다.
  
  더욱 심각한 사례가 있다. 그린스펀은 옵션과 선물거래를 규제하는 연방기관 선물계약거래위원회(CFTC)가 파생상품 규제를 하려들자 아예 그 권한을 박탈하는 일에 앞장섰다.
  
  당시 CFTC 위원장 브룩슬리 본은 "통제받지 않고, 불투명한 거래는 연방기관도 모르는 사이에 시장뿐 아니라 경제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면서 "거래에 대한 보다 투명한 절차와 손실에 대비한 더 많은 충당금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월가의 현인'이라는 워렌 버핏이 이미 2003년에 파생상품을 '금융 대량살상무기'라면서 경고했어도, 그린스펀은 파생상품이 대량살상무기로 변할 가능성이 극히 적다는 이유로 어떠한 규제도 막았다는 것은 '경제이론의 허점'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승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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