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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조연들 권정달-허화평-허삼수

당시 쓰래기 군인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좋은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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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조연들 권정달-허화평-허삼수
그들의 득세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자유총연맹-장애인협의회 등 맡아 활개”…그밖의 인사들은...
2005-06-20 14:07 김현 (guist10@dailyseop.com)기자
“공식적으로는 한 번도 발포명령을 하신 적이 없다고 증언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자위권이 발포명령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광주에서는 발포를 한 사실은 있지요?”
“있겠...있었겠지요.”
“어느 부대가 언제 어디에서 발포를 했는지 말씀해 보십시오.”
“그와 같은 세부사항은 제가 파악할 수 없는 아주 말단의... 말단 부대의 사건입니다.”

지난 18일 밤 방송된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는 이해찬 국무총리의 앳띤 얼굴이 잠시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1988년 당시 37세의 초선의원이던 이 총리가 광주항쟁 진상조사 청문회에서 이희성 전 육군 참모총장을 추궁하는 모습이다.

드라마는 5월 21일 낮 1시 전남도청 앞에서 시민들을 향한 최초 사격이 이뤄지고 난 직후 이같은 청문회 장면으로 카메라를 옮겼다.

1988년 7월부터 5개월 동안 진행된 광주 청문회는 특별위원회 28명의 위원이 채택한 증인만도 18명에 이른다. 당시 청문회에서 공방을 주고 받던 이들은 17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엇갈린 정치 인생을 살았다.

신군부 세력을 옹호하는 데 앞장섰던 민정당 의원들과 5·18 진압을 이끈 신군부 세력들은 일선에서 물러났거나 여전히 현직에서 이런저런 명함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박희태 “최규하 전 대통령 꼭 소환해야 하나”

당시 청문회 의장을 맡았던 문동환 평민당 부총재는 민주당 상임고문과 1992년 민주당 선거대책본부 고문을 맡은 뒤 정계 일선에서 떠났다. 그는 현재 재외한민족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지난 15일에는 6 ·15 민족통일대축전 해외 준비위원회 공동위원장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청문회에서 민정당 의원들을 진두지휘했던 인물은 민정당 간사를 맡았던 이민섭 의원. 이 의원은 청문회 첫 회의부터 문동환 위원장을 향해 “위원장께서 광주사태가 군화에 짓밟힌 사태라고 미리 성격규정을 해버린 문제라든가 또 한쪽 편에 서서 당사자를 가해자와 피해자로 미리부터 단정하는 것은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 5·18 청문회 당시 초선의원으로 증인으로 나온 쿠데타 주역들을 몰아붙였던 이해찬 현국무총리. ⓒMBC  
그는 “광주사태의 성격규명이 이루어지기 전에 광주사태에 대해서 의거니 학살이니 하는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일방적이고 편향적인 시각과 주장”이라고 주장했다.

이 의원은 민자당과 신한국당 당무위원을 맡은 뒤 문화체육부 장관(1993년)을 지내고 자민련으로 적을 옮겼으며 지금은 수원대 석좌교수로 지내고 있다.

당시 여야는 핵심 증인인 최규하 전 대통령의 채택을 두고 간사 회의를 열 두 차례나 거듭하면서 진통을 겪었다. 민정당이 최 전 대통령의 증인 채택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반대 목소리를 가장 적극적으로 낸 인물은 김길홍 당시 민정당 의원. 속기록에 따르면 김 의원은 최 전 대통령의 증인 채택에 대해 “민정당의 기본 입장을 말씀드리겠다”며 나선 뒤 “당시의 계엄군 관계관들 또 광주시민 학생들로부터 증언을 청취한 연후에 최규하 전 대통령의 증언여부에 대해서 여야가 협의해도 시간이 늦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금 안 그래도 ‘올림픽’이 목전에 다가왔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하며 “우리가 그야말로 여야가 오손도손 해 가지고 진상조사활동에 들어가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특위가 (강제로) 통과시키고 그래가지고 여야 정국이 경색이 되고 우리 민정당이 불참한다든지 야당이 밀어붙인다든지 이렇게 되면 국민들이 보기도 이상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올림픽 유치를 위해 ‘오손도손’ 5·18 청문회를 진행하자고 주장한 김 의원은 김윤환 민자당 대표위원비서실장을 거친 뒤 1998년 자민련 경북 안동갑 지구당 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지금은 자유총연맹 이사를 맡고 있다.

박희태 국회 부의장은 당시 8월 12일 3차 회의에서부터 청문회 위원으로 참석했다. 박 부의장은 최규하 전 대통령의 증인 채택에 대해 “꼭 우리 국회가 전직대통령으로서 예우도 해줘야 할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이렇게 증인으로 채택하고 소환까지 결의를 해야 되느냐하는 문제는 재고를 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 그런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신경식 현 한나라당 상임운영위원은 민정당 의원으로서 “진상조사를 해가지고 거기서 누가 잘했다 못 했다 그것을 가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우리 국민들이 화합하는 장에 이르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나라당 사무총장과 2002년 대통령선거기획단장을 지냈다.

김대중 두 번 도운 이인제

실질적인 청문회가 이뤄진 것은 11월 18일 7차 회의부터 12월 6일까지 9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민정당은 그동안 활약이 부진했던 이병용 위원과 조영장 위원을 이 청문회부터 빼는 대신 심명보 의원과 정창화 의원으로 ‘선수교체’ 했다.

심명보 의원은 첫 번째 증인으로 나선 김대중 증인에 대한 첫 질문자로 나서서 “최근 김대중 증인이 전두환씨가 광주항쟁 당시 발포명령 최고책임자라는 증거가 떠오르고 있다고 주장한 근거를 제시하라”고 따졌다.

그는 또 “증인의 정치기반이었던 신민당과 결별을 선언하고 제도권 밖에서 재야인사들과 공동전선을 형성한 것에 대해 대권을 향한 노력으로 보았는데 잘못된 시각입니까?” 라고 묻자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는 “그렇습니다”라는 짤막한 대답으로 일축했다.

정창화 의원은 “증인께서는 내란음모사건의 판결이 조작에 의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그동안 왜 대법원에 재심청구를 하시지 않으셨느냐”며 “혹시 재심을 청구할 문제가 있는 이 건을 이 청문회에 나오셔서 스스로 답변하시겠다고 생각하신 것은 재판에 영향을 주고자 하시는 그러한 속셈은 없으셨을까요?”라고 물었다.

심명보 의원은 민자당 사무총장을 거친 뒤 1994년 현직 의원을 지내다 숙환으로 사망했으며 정창화 의원은 한나라당 사무총장과 원내총무 등의 요직을 거친 뒤 현재는 당 지도위원과 당무위원 등을 맡고 있다.

반면 이인제 의원은 당시 청문회에서 “소위 세칭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이것은 보안사령부에서 주도해서 사건을 만든 것은 틀림없지요?”라고 물으며 증인석의 김대중 총재를 감쌌다.

이 의원은 “계엄법 16조를 보면 내란에 관한 죄는 계엄군법회의에 재판관할권이 있지만 국가보안법은 재판관할권이 없다”며 김 전 총재도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당시 패기 넘치는 초선의원으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증인’ 김대중을 도운 이 의원은 이 청문회로부터 10년 뒤인 1997년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서 이번에는 ‘본의와 다르게’ 김대중 ‘후보’를 한 번 더 도와주고 말았다.

정웅-정상용, 이광로-정동호 5·18 관련자들 엇갈린 운명

당시 민주당측 청문회 위원 가운데는 광주항쟁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인물이 둘 있었다. 1980년 31사단장으로 신군부의 명령에 불응하고 잠적해버린 정웅 의원과 도청항쟁지도부로 끝까지 도청에 남아있다 체포된 정상용 의원이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은 민정당 위원들의 끈질긴 자격 시비 끝에 위원직에서 사임했다.

반면 민정당측 청문회 위원 중에도 광주항쟁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인물이 둘 있었다.

광주항쟁 진압이 끝나고 1주일 뒤에 국보위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한 이광로 의원과 청와대 경호실장으로서 최규하·전두환 두 대통령을 보좌한 정동호 의원이 그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별다른 문제없이 청문회 내내 위원직을 지켰다.

▲ 5·18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희성 전 육참총장 겸 계엄사령관. ⓒMBC  
정웅 전 의원은 1992년 신정당 가입 이후로 정계 활동을 마쳤으며 정상용 전 의원 역시 민주당 홍보위원장과 국민회의 당무위원 등을 거친 뒤 정계를 떠나 골프장 경영자와 한국문화진흥 사장 등 기업가로 변신했다.

당시 민정당 이광로 의원은 민자당 이북5도위원장과 국회 사무총장을 거쳐 현재는 황해도 행정자문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다.

정동호 전 의원은 청문회 이후 민자당 상무위원회 수석부의장을 지낸 뒤 1992년 국회의원에 당선돼 민자당, 무소속, 민주당 등으로 말을 갈아타다 현재는 민주당 경남 의령·함안 지구당 위원장을 지내고 있다.

한편 광주항쟁 당시 국방부 장관을 지낸 고 주영복씨는 청평통 수석부의장, 청문회 이후 민주평통 수석 부의장을 지낸 뒤 올해 3월 지병으로 별세했다. 주씨는 국보위 설치에 관한 제안을 권정달 당시 보안사 정보차장으로부터 받았다고 밝혀 관심을 모았다.

김대중과 권정달, 김영삼과 허삼수

권정달 씨를 팀장으로 보안사 내 전두환 집권 시나리오를 짰던 이학봉 대공처장, 허화평 비서실장, 허삼수 인사처장 등은 청문회 이후 엇갈린 운명을 맞았다.

권정달 씨는 산업은행 이사장과 한나라당 당무위원 등을 맡다 1998년 국민회의에 입당해 부총재와 경북도지부장을 지냈고 2000년에는 민주당 당적으로 총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권 씨는 영입 이후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지도위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는데 권 씨와 함께 임명된 지도위원은 김근태, 노무현, 한화갑 의원 등이 있었다. 그는 현재는 자유총연맹 총재를 맡고 있다.

허삼수 씨는 1983부터 출국 미국 하와이대 동서문화센터, 스탠퍼드대 객원교수 등을 지내다 한국문화연구원 원장을 지냈으며 1992년에는 제14대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민주당 간판으로 출마한 노무현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당시 허삼수 후보를 지지했던 민자당의 김영삼 총재는 “충직한 군인인 허삼수 씨를 뽑아주시면 내가 중히 쓰겠다”라며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시기 위해서라도 허삼수 씨를 국회의원으로 뽑아달라”고 연설했다.

그러나 허 씨는 1996년 김영삼 정권의 역사 바로세우기로 인해 내란 음모 및 군사반란 주요종사 혐의로 구속 기소돼 2년간 복역했고, 다시 15대 총선에서 옥중 출마해 재선을 기록했다. 현재는 사단법인 국제장애인협의회 이사장으로 있다.

허화평 씨는 1988년부터 3년 동안 현대사회연구소를 운영하다가 14대 국회의원을 지낸 뒤 1996년에 허삼수 씨와 함께 같은 혐의로 구속됐다. 그는 15·16·17대 국회의원에 연속 출마하며 정치적 재기에 노력했지만 모두 낙선한 뒤 현재는 현대사회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그는 또 99년 ‘한국의 헤리티지재단’을 표방한 ‘바이어기스 센터’라는 연구소를 출범시키기도 했는데 이 연구소 이름은 비전(vision)·아젠다(agenngusda)·이슈(issue)의 영문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이학봉 씨는 1992년 국회의원을 끝으로 정계를 떠났으며 최근 김형욱 사건과 관련, 10·26 사건 직후 김재규 전 중정부장을 조사한 합수부 수사국장 자격으로 언론에 등장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묘한 인연 정호용과 정몽준, 그리고 정승화

공수특전사령관으로 광주 진압에 앞장섰던 정호용 씨는 당시 청문회에서 “광주 싹쓸이 발언한 일 없다” “군이 이왕 나선 바엔 똑똑히 하자는 생각이었다” “집권욕이 있었다면 12·12때 결행 했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는 내무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 등을 거쳐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민자당 대구시지부 위원장을 지내다 내란중요임무종사등 혐의로 구속된 뒤 1997년 12월 특별 사면석방됐다.

정호용 씨는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정몽준 후보를 지지하는 TK인사로 거론되기도 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정몽준 의원 역시 1988년 당시 무소속 초선 의원으로 광주 청문회에 참여했다. 그는 6차 회의까지 위원으로 이름을 걸어두었으나 속기록 상에 그의 발언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그는 본격적인 증인 출석 청문회가 시작되기 하루 전인 11월 17일 사임했다. 후임으로는 박찬종 의원이 보임됐다.

2002년 정몽준 후보가 정호용 의원과 접촉할 당시 정 후보의 핵심 측근으로 활동한 인물은 강신옥 씨. 그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변호를 맡았던 인물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광주 청문회에는 김재규 전 부장과 깊은 연관을 맺은 또 한사람의 증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도 출석했다.

1979년 전두환이 이끄는 합수부에 의해 총격 납치된 정 전 참모총장은 1987년 11월 당시 민주당에 입당해 “12·12는 권력을 노린 일부 군인들의 반란이며 이를 막지 못해 국민이 지금까지 고통을 당하는 것을 생각할 때 유구무언”이라고 말해 정치권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그는 청문회 이후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 회장을 맡다가 2002년 6월 별세했다.

정 전 참모총장의 별세 이후 3개월 뒤에는 5·18 당시 호남지역 계엄사령관이었던 윤흥정 씨도 세상을 떠났다.

광주청문회에서 “부대원들에게 총을 빼앗기지도 말고 그렇다고 쏘지도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증언한 윤흥정 씨는 체신부 장관과 구미수출공단이사장, 성우회 사무총장을 거친 뒤 2002년 9월 별세했다.

끝나지 않은 청문회, 이해찬과 신군부 세력

광주 청문회에서 평민당 간사를 맡기도 했던 이해찬 총리는 특유의 날카로운 논리와 매서운 눈빛으로 신군부 군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청문회에서 1969년 흑산도 간첩 소탕 사진을 ‘광주시민 학살사진’이라고 들고 나와 망신을 사기도 했다. 어찌됐건 그는 정치 역정 17년 끝에 지금은 국무총리에 올라있다.

이 총리와 5·18 진압 군인들과의 악연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최근에는 신군부 5·18 진압군인에게 주어진 서훈 치탈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5·18 진압의 주역인 노태우 전 대통령은 태극무공훈장보다 한 단계 낮은 을지무공훈장을 받았으며 5공 정권의 산파역이었던 보안사 출신 허화평·허삼수·이학봉 준장(당시 예비역), 정호용 박준병 최세창씨 등은 을지훈장보다 한 단계 아래인 충무무공훈장을 받아온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여기에 이해찬 국무총리는 지난 7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5·18 진압군인에 대한 서훈치탈 논란과 관련 “서훈치탈을 위해서는 서훈 공적이 허위라는 것이 공증(확인)이 되어야 한다”며 “앞으로 추가적인 조사가 있은 후에 치탈 과정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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