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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옥 감독 그는 누구... 장르·스타일 넘나든 흥행의 대가

서극, 오우삼 등 홍콩 느와르의 진정한 원조

 

 

고인이 된 신상옥 감독과 <빨간마후라>의 추억
텍스트만보기   신명철(smc6404) 기자   
신세대 영화팬들은 11일 유명을 달리한 신상옥 감독을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합니다. 저는 전쟁영화의 재미를 알려준 감독으로 기억합니다.

강원도 신철원군 갈말면 지포리에 있는 신철원국민(초등)학교를 다닐 때 본 신 감독의 <빨간 마후라>는 그 전에 본 <돌아오지 않는 해병> <5인의 해병> 등 전쟁 영화와는 다른 정말 재미있고 신나는 영화였습니다.

▲ 적진에 비상낙하한 최무룡을 구출하기 위해 수송기를 이용한 작전이 펼쳐지고 있다.
2, 3년 전 EBS에서 우연히 <빨간 마후라>를 다시 봤는데 40여 년 전에 본 영화의 몇 장면이 기억이 났습니다. 특히 다리를 폭격하는 장면은 그때 그 느낌 그대로였습니다.

언제 그 영화를 처음 봤는지 궁금해 제작연도를 확인해 보니 1964년 작품이더군요. 그때 어느 관공서 강당에 광목으로 된 스크린을 걸어 놓고 덜덜거리는 영사기로 영화를 본 기억이 납니다.

EBS에서 본 <빨간 마후라>에는 40여 년 전에 볼 때는 그냥 지나친 장면도 꽤 있었습니다. 특히 남궁원, 최무룡 두 배우가 시차를 두고 극 중 황해도 사리원 출신 처녀 최은희의 입술을 빼앗고(최무룡은 선배 장교인 남궁원이 전사한 뒤 그의 부인을 사랑하게 됩니다), 역시 공군 장교인 신영균은 윤인자와 격정적인 키스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외에 이대엽, 박암, 김희갑 등의 얼굴도 보였습니다.

이미 고인이 된 분도 계시지만 그 영화에 나온 모든 분들은 한국영화 발전에 든든한 받침돌을 놓은 분들입니다.

그 시절 영화니 과장된 억양의 대사가 웃음 짓게 하고, 신세대들에게는 낯선 '괴뢰군'이라는 용어도 나오지만 최무룡이 자신의 고향(함경남도 안변)을 폭격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는 장면에서는 북한 출신인 신 감독의 의식세계가 언뜻 비치기도 합니다.

▲ 영화속 전투기 조종사들이 즐겨 찾던 '바'의 여인들.
또 당시로는 획기적인 F-86 등 제트기의 공중전 장면, 미니어처를 이용한 다리 폭격 장면 등은 신 감독의 영화 재능을 보여줍니다. 적진에 비상낙하한 최무룡을 수송기로 구출해 내는 장면은 극적입니다.

신영균은 이 영화로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이 영화는 세계 여러 나라로 수출되기도 했습니다. 신 감독은 이 영화를 찍으면서 당시 일반적으로 소요되는 3∼4만 자[尺]가 아닌 10만 자의 필름을 썼다고 합니다. 영화를 찍는 동안 필름이 떨어져 암시장에서 사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서울 명보극장에서만 20여만 관객을 동원했는데 당시 서울특별시 인구가 250여 만 명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전국 200여 개 극장에 동시에 거는 방식이라면 수백만 명은 쉽게 동원했을 것입니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신파조'의 대사를 부드럽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투기를 최신형으로 바꾸고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해 공중전을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등 개작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 출격에 앞서 작전내용과 정신훈화를 듣고 있는 조종사들. 자료사진은 흑백입니다만 '빨간 마후라'는 컬러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지 못한 신세대 독자들은 <빨간 마후라>라는 영화 제목이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알려진 대로 '빨간 마후라'는 전투기 조종사의 상징이고 이 영화에서는 사랑, 충성, 우정을 아우르는 상징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빨간 마후라>의 주제곡은 지금처럼 축구국가대표팀을 위한 특별한 응원가가 없던 1960, 70년대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올림픽, 월드컵 지역예선 같은 큰 경기에서 응원가로도 불렸습니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구름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
아가씨야 내마음 믿지 말아라, 번개처럼 지나갈 청춘이란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석양을 등에 지고 하늘 끝까지,폭음이 흐른다 나도 흐른다
그까짓 부귀영화 무엇에 쓰랴, 사나이 일생을 하늘에 건다


저는 초등학교 때, 그리고 나이가 꽤 들어서도 재미있게 본 <빨간 마후라>로 신 감독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겁니다. <만추>의 이만희 감독을 기억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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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만보기   조은미(cool) 기자   
▲ 신상옥 감독이 1961년 만든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그와 결혼한 최은희와 김진규가 출연했다.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84년 영화계의 최대 이슈는 최은희·신상옥 부부의 납치사건이었다. 중앙정보부가 이 사실을 발표하면서 영화계는 발칵 뒤집혔고, 4월 4일 1500여 명의 영화인이 참여해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영화인대회가 열렸다."

장석용(인하대 강사)씨는 <영화평론> 2002년 제14호에서 '한국 영화의 혁명적 이야기꾼, 신상옥'이라는 제목으로 그때 일을 회고했다.

지난 11일(화) 밤 80세로 타계한 신상옥 감독은 1960년대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끈 감독이자 제작자였다. 또 전설적인 뉴스 메이커였다. 1978년 납북됐다 1987년 탈출했는데 북한에서도 영화를 만들었다. 분단 이후, 남과 북에서 최초로 영화 연출을 한 감독이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가 전설적인 감독인 건 아니었다. 2001년 6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시대의 욕망을 연출한 한국영화의 거인'이란 이름으로 신상옥 감독 회고전을 열었다. 신상옥 감독을 부르는 말은 많았다. 장르의 대가, 60년대의 징후, 다중적 정체성의 작가. 실제로 신상옥 감독은 장르를 넘나들었다. 멜로, 드라마, 사극, 코미디까지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을 넘나들었고 당시 흥행 감독이었다.

장석용씨는 <영화평론>에서 신상옥 감독이 "나운규 이후, 한국영화 미학의 핵심을 형성하고 다중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다양한 영화를 통해 "전통성에 저항하면서 사회제도에 얽매인 비인간성을 폭로하다가 급격한 사회변화에 저항해서 역설적으로 전통성을 미화시키고 승화"시켰다고 표현했다.

1926년 출생한 신상옥 감독은 일본에서 도쿄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52년 <악야>로 데뷔했다. 장석용씨에 따르면 "이색작가 김광주 원작의 양공주를 다룬 <악야>로 '현실은 추악하다'는 것을 고발한다. 데뷔작의 문제제기는 이후 그의 작품에서도 계속 제기되는 문제점과 상통된다. 그는 늘 깨어있으면서 시대의 타락, 예술성의 상실, 핍박 받는 국민들을 안타까워했다.

시대의 타락 안타까워했으나 작가주의 감독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관객이 외면하는 영화에 집착하는 작가주의 감독은 아니었다. 그가 1961년 제작하고 개봉한 영화 <성춘향>은 그때 74일간 38만명을 동원했다. 그 당시로선 놀라운 흥행이었다. 지금의 <왕의 남자>에 버금가는 흥행이었달까. 이 영화는 한국영화에서 처음으로 시도되었던 컬러 시네마스코프였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연산군>(1961), <빨간 마후라>(1964)까지 그는 승승장구했다.

영화의 성공을 등에 업고 그는 한국 최대 영화사 '신필름'을 설립했다. 1966년이었다. 신필름을 설립해서 한국 영화 중흥기를 이끌었다. 장석용씨는 <영화평론>에서 그 당시를 이렇게 밝혔다.

"당시 영세하던 영화시장을 기업화하는 계기가 된 1966년의 신필름 설립은 기업화, 한국영화의 소재개발과 다양한 영화 창출의 본거지가 된 점에서 의의가 있었고, 이형표, 이장호, 박철수 같은 영화감독들이 감독으로 세공되었다는 점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신상옥은 신필름에서 3백여 편의 영화를 제작했으며 연 평균 2편 이상의 영화를 연출했다. 김승호, 최은희, 김진규, 신성일, 엄앵란 등 당대의 스타들을 제조했고, 제작 감독 촬영 각본 등 그의 활약은 종횡무진이었다. 그의 스타 스튜디오 시스템은 멜리에스의 그것에 다를 바 없었다."

더구나 신상옥 감독은 1953년 당시 최고 스타이던 최은희와 결혼했다. 결혼 뒤에도 최은희를 여주인공으로 숱한 영화를 찍었다. 그의 대표적인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에서 어머니가 바로 최은희였다.

하지만 그가 만든 신필름이 승승장구하는데도 다 이유가 있었다.

"60년대 초 영화들이 다양한 장르에 걸쳐 4·19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시키는데 반해, 신감독은 <쌀>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표명했다. 같은 해 9월, 일정 요건(제작편수가 15편 이상)을 갖춘 이에게만 제작사 등록을 허가한다는 내용의 문교부의 고시가 떨어졌다. 군사정권은 소수의 제작사에만 외화수입과 제작권을 내줬다. 난립하던 65개의 영화사는 16개로 축소, 통합됐다. 신필림은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영화 15편을 앞세워, 단일 제작사로서는 유일하게 등록을 마친다."

박정희 정권과의 갈등.. 이어 벌어진 부부 납북 사건

하지만 그의 영화계 생활도 영욕의 세월이었다. "정권과 소원해진 뒤 1975년 11월28일 <장미와 들개>(홍콩합작) 예고편의 검열 미필 장면(키스신) 삽입으로 영화사는 정부로부터 영화사 등록 말소 명령을 받고 폐쇄되었다."

그리고 신상옥 감독 부부 납북 사건이 일어났다. 신상옥 감독은 탈북 후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귀국하지 않고 미국으로 갔다. <마유미>(1990), <증발>(1994), <벙어리 삼룡>(1994)을 만들었다. 할리우드에서 영화작업에도 참여했다. <닌자 키드>의 속편인 <돌아온 닌자키드3>(1994)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살아생전 신상옥 감독은 항상 스카프를 두르고 선글라스를 꼈다. 그는 항상 그 스타일을 고수했고,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여러모로 그는 당시 멋쟁이였다.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등 영화와 상관없던 박철수 감독은 우연히 신상옥 감독을 만나서 그 멋에 반해 영화계에 입문하게 됐다는 일화도 있다.

신상옥 감독은 수상경력도 화려하다. 1962년 베를린영화제 특별상을 비롯,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벙어리 삼룡이> 등으로 대종상은 4회나 수상했다. 또 제11회 아시아 영화제 감독상, 카르로비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까지 다양하다.

"죽을 때까지 현역으로 남을 생각이다"고 말하던 신상옥 감독은 갔지만, 그가 남긴 말은 남았다. 신상옥 감독은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오락성이 없거나 여성이 주인공이 아니라면 영화로 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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