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이 나쁠 자격

2008/04/14 13:11
 
성격이 나쁠 자격

▣ 권김현영 동덕여대 강사

 

신동일 감독의 <방문자>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반성을 많이 했다. 매사에 불만투성이의 영화평론가이자 대학 시간강사 호준(김재록)과 내가 지독하게 닮아 있어서였다. 나도 꼭 호준처럼 밤늦게 택시를 타고 갈 때, 왜 여자가 이렇게 늦게 다니냐는 훈계를 듣고 열받아서 택시기사와 싸운 적도 있고, 영화관에서 앞자리에 불쑥 올라온 머리를 피해 다른 자리에 앉았다가 제자리에 앉아달라는 지적에 불쾌해서 싫은 소리를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사실 앞으로도 그런 일이 있으면 미소 지으면서 상황을 현명하게 해결하는 식이 되지는 않을 거 같다. 나는 무엇을 반성한 것인가. 호준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여자를 사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경우 주먹다짐도 마다 않는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호준보다 착해서가 아니라, 호준처럼 못하기 때문이다. 호준처럼 성질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호준처럼 보이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했던 반성은 사실 타인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계산하는 데 불과했다.

이 바른생활 미청년이 착해진 이유


△ (일러스트레이션 / 이강훈)

 

 

한편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계상(강지환)의 바른생활 미소년 몸짱 청년 이미지는 불편했다. 계상의 이해타산적이지 않은 헌신성을 보면서 그가 그렇게 착한 청년으로 나오는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불평쟁이 시간강사 이혼남 호준은 철저하게 권력도 매력도 없는 존재다. 그리고 바른생활 미소청년 몸짱 계상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만 빼면 성격, 학벌(과외를 할 정도면 학벌도 된다는 소리), 몸, 젊음 등 자원들이 꽤나 많다. 품성 훌륭하고 매력 만점인 계상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면, 뭔가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성격 나쁘고 매력 빵점인 호준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면, 편견의 골은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게 차별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외모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편견의 대상이 된 집단에 더욱 높은 도덕적 요구를 하는 것 말이다. 사실 편견의 대상이 된 집단일수록 성격이 나빠지거나 아니면 아주 비굴해질 확률이 높다. 하지만 나쁜 성격이 그 자체로 권력의 상징이 되고 권력의 효과로서 인정받으려면, <환상의 커플>의 안나 조처럼 어마어마하게 돈이 많거나, 혹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메릴 스트립처럼 유능해서 보통 이상으로 성공해야 한다. 안나 조가 기억상실에 걸려서 돈을 모두 잃는 순간, 그의 괴팍한 성격은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광자처럼 미쳤기 때문이라고 취급된다.

성격이 좋아지는 길은 관계가 열릴 때 가능하다. 편견에 찬 시선들 속에서 자신을 용기 있게 열어 보일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모두 서로에게 잘 보이고 싶어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상대에게 잘 보일 이유가 없다. 일방적으로 상대가 자신에게 맞춰주기를 요구한다. 호준이 추했던 것은 그가 아무런 권력이 없는 주제에 상대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계상의 선함은 자신에 대한 사회적 폭력에 생존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폭력에 그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 흠을 제외하고는 흠잡을 데 없는 인간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차이를 불평으로 치환시켜버리는 폭력

 

그러나 사회적 약자가 자신에게 요구되는 더 높은 도덕적 요구를 충족시키면서 편견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편견은 권력자가 사람들 간의 차이를 없애버리고 동질화된 집단으로 재현하는 습관이다. 도덕적인 희생이라는 방법을 통해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바로 그 시선을 받게 되는 타자성 안에 있는 차이들의 분출들을 모두 불평불만분자로 치환시켜버리는 폭력에 다름 아닌 것이다.

착함이 상대에 대한 배려나 친절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진짜 착한 마음은 상대를 타자로 만들지 않고, 자신도 상대의 타자로 비굴해지지 않는 데 있다. 사랑받으면서 착하게 살고 싶은 욕망과 사회 구성원의 한 명으로 동등해지고 싶은 욕망이 서로 대치된다면 운동도 저항도 희망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한겨레21_2006년12월07일

(권김현영님의 약간은 모호하고 유쾌하면서 줄기를 짚어준, 그러나 구체적인 대안은

내게 맡겨준 강연을 듣고 나서 올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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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이렇다.

2008/04/13 09:04

 

 

"분노는 사람을 강하게 만들고 외로움은 사람을 섬세하고 사려 깊게 만들고 사랑은 사람을 넓고 따뜻하게 만들어주지요. " 

 

 

 ............... ' 연부네 집'  이라는 진보넷 블로그에서 '잘난체'  라는 분이 남기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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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영화제&페미니스트

2008/04/11 04:27

 

 

 

 

 

 

여성영화제를 6년전보다, 3년전보다, 2년전보다  올해 더 보러가고 싶어지는 것은

 

내가 페미니스트가 되었기 때문일까?

 

 

여성학 수업을 몇년전보다 훨씬 재미있게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듣고 있다고 해서

 

내가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할 발판을 깐 것처럼 느끼게 되는 건가?

 

 

 

 

예전에 어떤 글에서 언뜻 본 대로,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에 지나친 자기검열을

 

할 필요없이 여성으로서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바로 페미니스트라고 해야할까?

 

 

(여기서 여성이란 무엇인가? 일단 넘어가고....)

 

 

 

n개의 페미니즘이 있고 나 또한 그중 하나의 종류의 페미니스트이니, 다른 종류의 페미

 

니즘과 같거나 비슷하거나 동질감을 느끼지 못해도 전혀 상관없는걸까?

 

 

여성으로서 자신이 처해지는 위치에 대해서 첫 문제의식을 느끼기 시작하면 페미니스트

 

라고 해야될까? 그럼 난 아주 옛날부터 페미니스트인데....

 

 

나는 페미니스트인가 그럼?

 

근데 왜 남들앞에서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한적은 한번도 없는가?

 

그런 얘기해서 남들앞에서 고정된 이미지로 찍히는 것이 손해라고 생각한걸까?

 

아니면 일관되게 내 입장을 유지해 나갈 자신이 없어서 그런것일까?

 

 

.

 

.....마지막 문장이 가장 내 마음속의 이유에 가까운것 같다.

 

 

 

그렇다면 그 일관된 (혹은 더 발전하는) 입장을 유지해야한다는 압박감이, 나자신이 주는

 

압박감인지 아니면 주변의 시선이 주는 허구적인 압박감인지 좀더 고민해봐야겠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자신을 공언할 수 있을것 같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마음속에서 시동이 걸어졌을때 공언하고 싶다.

 

 

이건 굳이 페미니스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좌파입니다.  사회주의자입니다.

 

라고 공언하는 것에도 해당되는 문제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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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1 02:11

오늘 오랜만에

 

 

 

마음 편안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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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노동과 shut up하기

2008/04/10 15:09

 

 

 

 

 

내일 발표수업이 있는데,  그 영문자료가 문맥적 해석은 될 지언정

 

 

 

 

 도대체 무슨 쟁점인지 모르겠는 것이다.

 

 

그래서 담당교수에게 전화를 걸어서 질문을 했다.

 

 

이 교수로 말할것 같으면 자상하고 로맨틱한  가운데,  소수만이  느낄 수 있는(?)  냉정함이

 

도사리고있는 사람이다.  고결하고, 마초와는 거리가 있는 상냥함 가운데에 느껴지는 차가움

 

이랄까.  소위 수재로 학문에 파묻혀 살아온 사람들이 범인(?) 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에서 나오는 냉기인 것 같기도 하다.

 

 

역시나 이 ㅅ 교수는 내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해주었는데, 그 가운데 왠지 냉기가 느껴졌다.

 

' 혼자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라는 말을 나에게 했는데,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바는 아니었지만 왠지 차갑게 느껴졌다고나 할까.

 

 

밥을 먹으면서 생각해보았는데,  많은 남성들이 감정노동이라는 것을 잘 할줄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ㅅ교수에 대한 생각과 더불어서 들었다.

 

 

이 감정노동이라는 것은 마음속에 진실함& 선량함이 있고 없고 하고와는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내가 이 글에서 정의하는 감정노동이란 다소 외적인 측면을 부각시켜서

 

얘기하는 것이다.

 

 

즉 친절함 이라든지,  상냥함이라든지, 싹싹함 같은 그런 태도들을 여성들이 요구받는것만

 

큼 많이 요구 받지 않기 때문에  간단히 기술적인 답변만 하더라도 자신의 몫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주로 남자선배들이나 후배들 혹은 남자친구들을 보았을때,  나에 대해서 호의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약간 놀랄때가 많이 있었다.  특히나 나처럼 남자들과 일상적으로

 

생활을 함께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말은 저렇게 퉁명스럽고 쌀쌀맞게 해서 나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거나 한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좋게생각하고 있다' 이래서 의외였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물론 과거의 그런 상황속에서는 부정의 상황이 긍정의 상황으로 바뀌면서 상대의 이미지

 

가 업그레이드 되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한편으로는 남성들이

 

'친절함의 부재'  나 ' 무뚝뚝함'  과 같은 자신들의 특성들을 별로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 고수한다는 생각이 든다.  ' 내가 원래 좀 무뚝뚝해'  하면서. 그것을 상대방이

 

당연히 용인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이성에게 무척이나 무뚝뚝한 사람인데, 나같은 경우는 그런 성격에 대한 사소한 태

 

클을 매우 자주 받아왔다.  ' 말투가 딱딱하다'   ' 여자같지 않다'   하면서 약간 이상한 염세주의

 

자로 오인받는 일까지 있었는데  그런것에 대해서 나 역시 자유로울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싹싹하고 친절하게 하려고 조금은 노력도 해보고,  '~ 합니다' 라는 말투가 훨씬 편한데도

 

'~  해요' 라는 말투로 바꿔 문자를 보내거나, '~ 씨' 라는 호칭이 훨씬 적합하다고 생각하는데도

 

관계의 거리에 비하여 과한 호칭인  듯한 ' 오빠' 라는 명칭을 썼던 어리석은 기억도 있다.

 

나의 학적과 더불어 ' 과하게 따지는 딱딱한 여자' 로 이미지 찍히는 것이 한편 골치아프게

 

여겨졌던 것도 그렇게 했던 이유중에 하나였다.  같은 무뚝둑함이라도,  여자인 나에게는

 

부족함이나 정상성의 결여로 여겨졌지만, 남성에게는 하나의 일반적인 특성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내가 더 부담을 느꼈다고 생각하면 과도한 것일까?

 

 

 

그러나  앞으로는 나의 태도를 바꿔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서 든다.

 

왜냐면  말투를어떻게 하느냐,  관계에서 얼마나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를 보이느냐 하는 것은

 

 단순히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상대에게 감정노동을 베풀어야 하는 위치에

 

있느냐를 확인시키는 수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들이 처음보는 관계에서나 공적인 관계에서 ' 매너' 는 좋을 지언정

 

그 후 시간이 지나  상하관계의 정립이 이루어졌을때쯤이면 '위에서 아래로 하사하는 배려'

 

는 있을지언정 ' 감정노동을 통한 배려' 는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감정노동이라는 것은결국 상대의 생각을 이해하고자하고,  듣고 싶지 않은 얘기도 때로는

귀기울여 들어야 하며,  상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에

신경을 쓰는일련의 노력들을 총칭하여 일컫는 말이다.  띡~ 정보전달 만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여성들을  보면 남자친구들이 단답형으로 대답하거나,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지 않고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서 답답하다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  친구가  오래 사귀어 왔던 남자

 

가 언제나 자신의 말을 귀기울여 듣지 않고 불편한 태도를 바꾸지 않아서 계속 질질 끌고

 

문제삼아오다가, 마침내 헤어지자고 했는데,

 

그 남자가 마지막으로 보인태도가 ' 노코멘트' 란다. '네가 헤어지자고 하든, 말든, 나는

 

그대로 변하지 않고 같은 자리에 있는다. 라고 했다나.  듣자하니 참 기가 막힌것이,

 

상대방이 자신의 잘못된 태도에 지쳐서 헤어지자고 하면 ' 그래 그러자' 하고 수긍을 하던지,

 

아니면 자신이 태도를 고치던지, 아직 좋아하고 있으니 서로 타협을 하고 이해해보자고 터놓

 

고 대화를 하든지 할것이지 끝까지 고압적인 태도를 굽히지 않는 것이 정말 듣기만 해도

 

답답했다.  나 역시 비슷한 상황을 여러번 겪었는데, 그게 지금 생각해보니 개인의 특성이나

 

상황의 특성만으로 국한 시킬 수 없는 문제인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즉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기 위하여 설명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자신의 위치에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고 그런것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상하 관계를 흐뜨러 뜨리고 자신이

 

나의 자리로 내려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열심히 해명을 하거나, 답변을 요구하거나, 또는 나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하여상대의 언어로 설명을 해야 되는 것은 이쪽이 상대의 승인 내지는 청취가 꼭 필요한

위치일때이다.   요즘도 여전히 학생회장단을 요리조리 피해다니며 '  입장에 대한 해명' 을 할 것을

 

피하는학교당국을 볼때에 '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해명을 피할 수 있는'  위치가 나타나는 권력관계의

 

구도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즉 감정노동&해명에 대한 노력을 하지 않고 shut  up 할 수 있는 위치 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허락

 

되는 것은 아니다.   고객 상담센터에서 자잘한것까지 끝까지 알아듣게끔 목아프게 설명

해주어야 하는 상황은 소비자를 놓치면 안되는 기업의 책임을 노동자가 전담하고 있기

때문이듯이구구절절한 부연얘기 없이 단답형으로 얘기해도 자신에게 손해가 가지 않는

위치일때는 상대로하여금 그런 자신의 태도를 이해하고, 재질문하고, 용인해야 할 감정의

노동을 전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나는 나보다 지위가 높거나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상대에게 쓸데없는

 

해명과 부연설명 그리고 질문들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말 안하고 단답형으로 띡 얘기하거나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나 역시 ' 그래 알았다'   하고 상황을 종료 시켜야하겠다는 말이다.

 

 

 

( 애인과 같은 경우에는 그래 알았다.  하고 다른 얘기 없이 조용히 연락을 끊는것도 포함된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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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의 사상적 전향 &....

2008/04/10 09:57

1.  집에 며칠만에 전화해보았더니,  큰 일이 생겼다.

 

     큰 일이란 다름아닌, 좋은(?) 일.   모친께서 이번 총선에서 지역구는 민노당, 비례대표는 진보

 

     신당을 찍기로 선언하고, 실행 하셨다고.

 

     

     우리 어머니 ( ! ' 어머니' 란 호칭이란 참.... 숙연한....)  로 말할것 같으면, 사실 그렇게까지 심하게

 

     보수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보수적이 아니라는 말의 의미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여성관으로 자식을 억압해오지 않았고, (여자도 결혼보다 능력이 훨씬 중요하다,  예쁘게 꾸미는데

 

  치중할 필요없다 라는 식의 생각을 갖고 있음)

 

   어느 집단에서 주류적으로 인식되는 관행이나 악습 같은 것보다

 

  '실질적' (?)  이고 현실적인 필요성을 더 중시한다는 의미이지,  한나라당을 지지해왔다는 것은 여느

 

  유신세대의 부모님들과 똑같다.  그것도 부창부수 식으로.( 김영삼이 삼촌같고,  이명박이 형님과

 

 같은 존재였던 우리 아버지.--;;)

 

 

 이런 모친의 새로운 전향 선언의 밑바탕에는,  세가지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1. 사상적 뿌리(?) 였던 남편의 죽음,  그리고 과부로서 느끼는 사회적 소외감

 

 2. 최근 얼마없는 돈을 넣어둔 펀드가 마구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기존 보수세력이

 

     주장하는 '사회의 안정' 이 개인의 운신을 보장해줄것이라는 믿음이 약화됨.

 

 3.  비정규직 시간강사 자리가 확보된 딸 하나,  역시 비정규직인 사위,   그나마 좀 잘되지

 

     않을까 당신이 순진하게 기대를 가지셨던 또다른 딸년 하나마저 미래가 몹시 불투명한 채로 

 

   구직을 위한 준비(?) 에 몇년씩 몸을 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자신 역시,   안전망이

 

   없는 사회의 피해자가 되는 것에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막연하게 알아가고 있음.

 

 

 

 

   물론 총선에서 어떤 당을 지지하느냐가 개인의 정치적 입지를 드러내는 것에 있어서 대단히

 

  핵심적인 부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모친의 이 사상적 전향 선언(?) 은 반가워 해야

 

  할 일인것 같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자식들이 부모와 사상적인 문제로 갈리는 집 안에서, 대부분은 소통을 포기하고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살게 된다.   우리집 역시 부모님이 자식들의 성향을 크게 공격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그럭저럭 존중해주는 편이었기 때문에 서로 별 충돌은 없었고, 진지한 대화도 별로

 

  없었다.   니들 밥그릇이나 잘 챙기고 산다면,  좌파든 우파든 운동권이든 부모가 뭐라겠느냐

 

  라는 식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신자유주의적 변화가 가속화되는 사회에서는, 정말 사회의 5~10% 안에

 

 드는 upper class가 아니고서야 부모들 역시 자식과 자신들의 노후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할것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정말 꼴보수에 흔들리지 않는 기득권층인 부모가 아니라면, 시대

 

 가 지남에 따라서 자식이 지향하는 삶에 대하여 조금씩 변화된 태도를 보일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비정규직인 자식들,  육아땜에 죽사리 치여서 제대로 일도 못하는 딸들,  초등학교때부터

 

 입시에 대한 무한경쟁과  휩쓸리는 손주들,  월급의 반을 지출해도 충분한 사교육을 받기에 넉넉

 

 치 않은 상황들,  나이 50에 물러나서 죽는 날까지 뭘해서 먹고사나 막막한 자신들의 처지들을

 

 생각해보면 ..

 

 

  물론 그런 막막한 상황에서 이미 '철 다 지난'   노동력 착취를 통한 박정희식 자본축적형 경제개발

 

방식에 기울게 될

 

수도있지만,  또 자식들이 이런 때 일수록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의 정당성을 삶을 통해서 계속

 

실천하고 보여줘야만 그 틈새를 공략하는 설득력이 있을까 싶다는 말이다.

 

 

 자식들이 현실적 삶에서는 부모들의 많은 희생을 당연시 여기고 (특히 어머니들의) 그러면서

 

 부모가 마련해 준 물질적 기반 위에서 배운 지식들 가지고 부모를 우월감을 가진 시선으로

 

 내려다보면서 지적하는 말들이 뭐 그리 부모의 마음에 와닿겠느냐 하는 말이다. 

 

 (물론, 이건 주로 학생들에게 주로 해당되는 말이다. )

 

 또한 남성들 같은 경우,  (많은 경우 여성에게도 해당되지만) 가사노동의

 

 1/5 만이라도 ' 도와주는 것'  이 아니라 ' 내 일로 정해놓고' 담당하는 것이 엄마에게 차라리

 

 더 설득력 있는 일이다. 

 

 

  엄마가 뭐 물어보면 ' 됬어요, 피곤해요,  귀찮아요.'   이런 식으로 너무나

 

 당연하게 대화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것 부터가 밖에서 행동하는 것과 이율배반적인 일이다.

 

 

 (이거... 내 얘긴가? -_-;;)

 

 

 써놓고 보니 너무 당연하고 교조적 느낌이 나는 글이라 왜 썼나 싶다.... 아무튼...

 

 의지가 있으면 그렇게 행동하면 되고, 만사 그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부모와 별 문제 없으면

 

 그냥 각자의 성향 대로 살면 된다... 신경쓰기 피곤하면.... ㅎㅎ

 

 

 

그런 점에서 나도 5년, 10년이 지났을 때 우리 부모가 내가 하는 일의 사회적 필요성을 깨닫고

 

자랑스러워 하고 지지해 주었으면 좋겠는데....(뭐 안해줘도 그만이긴 하지만-) 문제는 그 일을

 

향해서 내가 지금 잘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잘 가고 있는거라고 믿고 싶다.

 

 

p.s.  딴 것도 아니고 7막 7장 따위에게 지다니....

 

         진보신당이 정치철학적 기반과  동시에 현실정치에서의 구체적으로 노동자들을 위한 구체적

 

       대안+ 노련함을 갖추려면,  내가 성장할것을 기다리는 것 만큼이나 오랜시간이 지나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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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아야 할것.

2008/04/06 22:40

예전에 본 영화중에 '냉정과 열정사이' 라는 것이 있다.

 

사랑의 가슴시린 뒷감정을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내가 그 영화에 몰두하지 못한 이유는

 

그 영화의 남자주인공의 캐릭터가 맘에 안들었기 때문이다.

 

 

그 영화에서 보면,  진혜림과 헤어진 남자주인공 (남자 이름 모름) 은 유학간 이탈리아에서 자신을

 

좋아하는 철없는 어학연수생과 엮이게 된다.  물론 남자주인공은 진혜림을 잊지 못하기 때문에

 

어학연수생을 사랑하지 않지만, 같이 잠도 자고 같이 살기도 하고 ( 물론 연수생이 억지를 부리며

 

따라붙어서 그런것이기도 하지만)  퉁명스럽고 무관심하게 대하지만, 뿌리치지는 않고 몇년씩

 

지지분진한 관계를 유지한다.

 

 

물론 저 영화에서 연수생과 남자주인공과의 관계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아주 부수적인 부분이다.

 

 

아무튼 그러고 나서 수년이 지나고 나서 남자주인공은 연수생에게

 

' 아오이를 진정사랑하고 잊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를 사랑하려고 노력해보았지만 불가능

 

했다' 

 

라고 얘기하고 떠난다.

 

그리고 나중에 연수생은 제 3자를 통하여서 ' 그가 그런 태도로 나오게 되니, 이제서야 포기가

 

된다'   라고 얘기한다.

 

 

 

이 영화를 보고서  왜 남자주인공은 연수생을 진작에 떠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영화에서 보면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주인공에게 연수생이 달려들어 애무를 하고, 남자주인

 

공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몸을 맡기고 있는 장면이 있다.  상당히, 누가 보아도 전혀

 

남자가 여자에게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정도 되면 사실 남자가 여자에게

 

가지고 있는 마음은 글쎄..... 감정이 없음을 떠나서 약간의 지겨움이나 경멸의 감정정도까지

 

있다고 보여진다.

 

 

 

그 남자가 연수생을 사랑하려고 노력하였다기 보다는, 사실  연수생을 차갑게 완전히 떼놓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는 일종의 상실내지는 에너지 소비가 되기 때문에 옆에 둔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옆에 두는 것 자체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 노력했다'  라고 자신을 인식시킨 것일게다.

 

 

아마 바보가 아니라면 그정도의 태도로 대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진작 사랑할 수 없는 여자임을

 

알았을것이다. 굳이 마음속에 사랑하는 옛 연인이 아닐지라도.

 

 

아마 그래도 외로운 유학생활중에, 집에 와서 반겨주고 자신을 사랑해주고 자신의 말에는

 

무엇이나 귀기울여 주는 사람이 그녀 말고는 별로 없는데다가,  떠돌이처럼 술집에 가서 어렵게

 

원나잇 상대를 구하는 것보다는그렇게 정성스럽게 애무를 해주는 편하고 정기적인 섹스상대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그녀를 옆에 둔 이유중에 하나라는 것이 이 영화에서 생략된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부분 일 것이다. 

 

 

사실 그런 이유는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이유이다.  현실에서도 그렇고, 누구나 그 어떤

 

행위를 할때 어떤 동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의식적으로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어떤 행동

 

을 무의식적으로 용인하는, (혹은 그 행동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는) 행위에는  반드시 이유가

 

존재한다.   물론 현실에서는 ' 그냥' 이라고 사람들이 표현하기는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어떤 사람들은 이 이유에 대해서 상당히 정교하고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 그런 이유로 사람을 내 옆에 둘 수 없다'    라고 하거나 과감하게 그 관계를 정리하거나

 

혹은  꼭 그렇지 않더라도 그 이유자체를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에 의식하면서 괴로워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사실 그렇지 않게 되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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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아냐

2008/04/04 10:25
아직은 준비가 안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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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et & Romeo

2008/04/03 14:41

지금 글을 끄적거리는 내가 듣고 있는 노래는 클래지콰이의 로미오와 줄리엣 이라는 노래이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촛불이라도 하나 켜놓고 손을 마주잡고 분위기 잡고 있을때 들으면 적당

 

할듯한 가사의 이 음악을 들고 있지만,  

 

 

 

사실 나는 지금 꽤 중대한 생각을 하고 있다.

 

 

 

 흠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사람들이 나보고 " 이대에 다니니까 그래" 라는 말을 많이 해왔다.

 

 아니면 굳이 그 말을 하지 않아도

 

나의 어떤 행동과 학적과 연결시켜서 나의 이미지를 형성하거나,

 

혹은 나의 발언의 정당성을 학적이라는 근원으로 인하여 무마시키는 인식을 보이지 않게

 

가지는 것을 정말 수도 없이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뭐 굳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사실 나 정도면 짬밥이 한솥밥으로 한 마을을 먹이고도 남을 정도 아닌가 ㅎㅎ

 

 

 

 

 

(진보넷에서, 혹은 다른 온라인상에 뭔가를 쓸때  자신의 학적에 대해서 밝힌다는 것은 나 스스로도

 

금해왔다.

 

소소한 일상에 대해서 말하다보면 어쩔수 없이 밝혀지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런 얘기도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고 (ex:  오늘 채플을 갔다는 둥)

 

학력에 대해서 밝히는 것이 암암리에 그 사람의 발언에 대해서 힘을 실어주거나 혹은

 

폄하하게되는 기준이 되거나 혹은 사회적으로 비슷하게 평가되는 학적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서 어떤 형태의 소외를 만들어내는 권력이 형성된다면 비록 그것이 다른 긍정적인 흐름을

 

생성한다고 해도 스스로 점점해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소한의

 

방도로, 굳이 필요한 상황 아니면 학적을 드러내는 글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상황에서든지 필자/ 화자 에 대해서 학력에 대해서 묻지 않고,  궁금해하지도

 

말아야겠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 오늘 써야 할 얘기는 굳이 학적을 밝히지 않고

 

쓸 수 없기 때문에 그 굳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예외에 집어넣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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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나

2008/04/03 14:29

중학교때 친구를 식당에서 만나서 반갑게 얘기하다가 식사도 한번 같이했는데,  이 친구와 얘기하다가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알고보니 0000교 신자였습니다. 그 종교자체는 과거에 금전문제로 사회적 물의를 빚은적이 있는것으로 아는데 요즘은 좀 그 문제가 정리됬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굳이 그 친구를 편견으로 바라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그 종교에 폭 빠진것 같은데, 그 친구가 삶의 모든것을 귀신과 조상의 업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유물론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중시하는 저로서는 잘 맞지않게 느껴졌습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삶의 어려움과 상처를 해결하는 방식이 정말 제각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사람은 종교에 귀이하여, 어떤이는 쇼핑을 하며 자기 구매력에 만족을 느끼고, 어떤사람은 연애로, 어떤 사람은 일의 성취로 인정을 받으며, 어떤사람은 학문적으로 그 어려움의 본질과 원인에 대해서 밝혀내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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