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놈에...

2007/12/12 21:00

인터넷상에 읽을 글들이 없다...

 

죄다 바빠서 글 업뎃을 안하는지 원. 쩝......

 

그래서인가 왠지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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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담배 상대 탄생

2007/12/11 11:26

 

 

탄생한지 이미 두달가까이 되가는 조카이다.

 

사실 난 한번밖에 보지 못했다.

 

글쎄....  사실 조카이기는 하나, 남의 아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제 부모가 키울테고,  어차피 제 가족위주로 돌아가는 세상에...

 

촌수가 삼촌이 된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진을 한번 보니 음,,,,신기함이 증폭했다.

 

이것은 살갖을 부비고 싶은 생명체가 필요한건지, 제 분신을 가져보고 싶은 마음인지

 

아무튼 ....^^;;

 

 

 

( 제 엄마는 혁명가의 이름을 따서 '김산' 이라고 지으려다가 소녀로 태어나서 계획을 할 수 없이

 

철회함. )

 

 

내가 대답하기 곤란한 허를 찌르는 질문 ( 근데 이모는 말로만 그러고 왜 그렇게 살아? 혹은

 

부자는 왜 돈을 나눠주지 않고 혼자 갖고 살아?-_- 같은) 도 가끔 해주기 바란다.

 

이 험한 세상에서 자신이 어떤처지에 있건 긍지있게 살아가는

 

긍정적 자세와 비판적 이성과 뜨거운 감성을 지닌

 

당당한 여성이 되어

 

나중에  맞담배 한대같이 피우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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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말은 진짜 많다.

2007/12/01 17:27

할말은 진짜 많다 아주 많다

 

정리된 말도 정리되지 않은 말도

 

머릿속에 가득차서 출렁넘치고 있다.

 

그러나 다음에 써야겠다.

 

 내가 깨닫고 느끼는 바를,  입을 열어서 하고 싶은 말을

 

오래 묵고 썩고 골아버리고 자극적인 양념을 쳐대고 하여

 

정체를 알 수 없는 맛이기는 하나 그래도 해롭다고는 할 수 없는 발효된 음식같은 나의 깨달음들을

 

시간에 쫓겨가며 어설프디 어설픈 몇문장으로

 

아무렇게나 내뱉어 버리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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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2007/11/26 22:24

' 아름다움' 이 뭔지......

 

점점 가깝게 알고 있는 것 같다.

 

참으로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이먹음이 좋다.

 

많은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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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신문& 코스타 가브라스&금연?

2007/11/21 11:59

1.

 

대학원신문을  유용하게 보고 있다.

 

학교내부의 '읽을거리'   에 대해 관심이 많고,  매체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일지라도 빈약해보이는 학내 언론매체조차도 그것이 끼치는 힘은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나에게는 '객관적 중립성' 에 목매달면서 동시에 기사 수준도 낮은 학보는

 

 이제 전혀 '언론' 이라기보다는 '정보지' 에 불과한 의미

 

밖에는 없다.    고로 자연스럽게 대학원신문을 보게되었는데, 의외로 괜찮았다. 

 

 

아무래도 학부생들보다는 좀더 깊이가 있는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만들다보니 기사들도 '사실진술'

 

내지는 ' 교과서에서 봄직한'  논점과 어투보다 훨씬 진보하여 있고,  대학원학생회내에 대학원신문

 

편집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학원 내부의 학문적인 환경을 조성하고 방향성을 고민하는데에

 

잘 맞닿아서 고민하는 느낌이었다. 

 

 

(글쎄, 그렇다고 꼭 내가 고민하는 입장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

 

 아뭏든간에,  참으로 나에게 즐거움을 주었던

 

매체인데 학교에서 대학원신문에 대한 교비지원을 끊겠다고 했단다.  이유는 소속이 불분명한

 

매체이고 뭐 어쩌구 여러가지를 댔다.    아무래도 학부나 대학원이나 학생회의

 

힘은 전반적으로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학교에 문제제기할 부분은 예전보다 더욱

 

많아졌으니 노골적으로 자치활동 탄압을 하기에 더욱 적절한 시점이라서 그런것이 아닐까 싶다.

 

대학원신문에서 지적하는 문제들은 학생회에서 요구하는 문제들과도 직접 맞닿아 있으니

 

'머리굵은 아이들' 의  ' 뜨끔한 비판'  의 경로를 이제서야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그냥

 

두고보고 놔두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지국에서는 타블로이드 판으로 개정하면서 까지 한학기 2회 발간을

 

유지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하는것이 나로서는 반가운 얘기였다. 

 

그래도 학교에 아직 애쓰고 있는 소수의 매체가 있고,  그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  훌륭하

 

다고 생각되어 정말로 존경스럽기도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상황이 어려운 만큼 내용도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었기 때문에, 심심할때 읽을거리의 위안하나

 

없이 ' 대학내일' 만 커피보면서 마셔야 한다고 하면 상당히 우울할거라고 생각되어서...

 

 

2.

 

코스타 가브라스의 영화가 볼만한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

 

내게 금연은 힘든 일이다.

 

 

'노장은 죽지 않고 단지 사라질 뿐' 이라면,  나에게 있어서 담배는 단지 '끊지 않고 쉬고 있을 뿐'

 

 

이라는 말로 대구를 이룰 수 있겠다,

 

그래서 차라리 금연은 꿈도 꾸지 말고,  담배를 하나사서 역시 담배를 끊지못하는 친구에게 맡

 

겼다.

 

그리고 그 친구를 하루에 한 두번 만나면,  그때만 피우는 것이다.

 

밥먹고 나서 한번씩.

 

이러고 나니까 그나마 조금 몸이 낫다.

 

내게 있어서 결국 문제는 복잡한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 흡연--> 건강훼손

 

---> 생활 패턴 망가짐-----> 스트레스-----> 다시 흡연    의 연속적인 굴레에서 빚어진

 

신경 날카로움에 있을 뿐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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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위에 내려앉아야

2007/11/18 23:13

1. 오늘 세븐데이즈 라는 영화를 봤다.

 

 왠만하면 돈주고 영화관에서 한국 스릴러 보고 싶진 않았지만, 오늘은 왠지 칙

 

칙한 비디오 방에 가기 싫었던 것이다. 

 

 '음... 김윤진 연기 잘하는 군. 생각보다 더 많이 자연스러워 졌어. '   하고 느끼면서 감상한 영화는

 

  박진감있지만 왠지 결론이 바람빠지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돈이 아깝지는 않았다.

 

  엠비씨 아침 프로그램에서 내일 방송한다는 프로그램 인터뷰도 했다. 물론 가차없이 잘려서 5초

 

  정도 나오거나 안나오거나 하겠지만, 나름 ' 색계' 에 대한 나의 감상에 대해서 얘기했다. 

 

  (인터뷰 끝나고 나서보니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는데 잘 못한것 같다. 쩝) 

 

 

  그 짧은 인터뷰를 하면서 생각해보니,  나에게 잡지사에서 일한다든지 방송국에서 하는 직업도

 

 잘 어울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기본적으로 움직이면서 사람을 대면하며 대화나누는

 

것을 좋아하고, 기본적 으로 나를 몰입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 사람' 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인물 대담같은것 하면서 다니면 즐겁게 일 할수 있을텐데.

 

 그러나 궁극적으로 어떠한 상황에 직면했을때, 옳고 그름의 가치를 면밀히 고민하는 사람들

 

 과 함께 일하고 싶었다. 다른 단점이 많을지라도,  그런 성향이 있어야 내가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중의 일부라도)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존중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지금 내가 준비하는 것은 그것을 위해서 필요한 일종의 자격증 이라고 해야겠다.

 

 여하튼 그래서 난 지금 내 안의  다른 가능성들을 죽여가며 생판 다른 것을

 

 준비하고 있는데, 죽도 밥도 안되고 있는 실정이다.

 

 어쩌겠어.  싶으면서 이제 슬슬 나이가 들어가기 시작하니 부모한테도 심히 미안하다.  그래도

 

 난 염치라는 것은 심하게 아는 인간이라서 그런지.

 

  아무튼, 난 나중에 누군가의 전기를 써보고 싶다.

 

 그 대상은 누가 될지 모르겠다. 내가 아직까지는(?) 존경하여 마지 않는 ' 김산' 같은 열혈

 

 인물이 될지, 아니면 그저 평범하지만 재기 발랄하고 소신있는 인물이 될지.  내 주변 사람

 

 중의 하나가 될지,

 

 아무튼 내가 좋아하여 몰입할수 있는 대상으로, 죽기전에 그의 일생을 섬세하게

 

그려보고 싶다. 

 

 2. 

 

  아무래도 조울증 인것 같다.

 

  뭐 요즘 세상에 조울증 아는 사람이 어딨겠냐 싶어서 특별할건 없지만,  아무튼 내 증세를

 

 요즘 정직하게 평가해보면 그렇다.  

 

 오늘은 괜찮아~ 싶게 발랄하고 담담해 졌다가 갑자기

 

 몸이 안좋거나 어떤 생각이 나거나 하면 우울하여 배를 감싸쥐고 괴로워한다.

 

 너그러움과 성남의 감정의 폭도 너무 심한것 같다. 

 

 오늘 영화를 보면서는 살인마에게 감정이입이 될것 같은 나에게 움찔하며 두려움을 느꼈는데,

 

 또 지금은 웹서핑을 좀하고 생각을 가라앉히고 나니 훈장 선생처럼 의젓한 원칙주의자로

 

 돌아왔다.  지금은 지킬박사의 모드이다.

 

계속 이런식의 반복인데, 이게 정상인지 모르겠다. 

 

정상이라면 좋겠다.  왜냐, 어떻게 고칠길이  현재로서는 없기 때문이다.

 

아니면 정상/ 비정상 의 이분법을 타파할만큼 내가 좀더 질겨졌으면 좋겠다.

 

3. 

 

  객관적으로 본다는 건 참 힘든 일이다.

 

  내게 닥친일, 내가 겪어야 할 일들을 너무 크게 보는 것도, 얕보는 것도

 

  사람에 관한것도 너무 두렵게 생각하는 것도 얕보는 것도

 

  사람이란것이 그렇게 비범하고 훌륭하리란 생각도 그지같고 저열하다는 생각도

 

 다 너무 경도된 생각들인것 같다.

 

 내 마음이 극단을 치미는 상황이라서 그리 보일뿐, 무엇하나 극단적으로 생각할만한 것은

 

 없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몇몇의  예외적인 상황을 빼고는, 다 거기서 거기라고 보는 것이 맞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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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한숨만

2007/11/16 18:01

1.

 

장재은 강건택 기자 =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가 2008학년도 정시 일반전형에서 학생부 교과 1∼4등급에 점수 차를 좁혀 `사실상' 동점을 주기로 해 `내신 무력화' 논란이 계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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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신문인지 모르겠다. (안써도 되겠지)

 

 이렇게 할거면 내신으로 선발하겠다는 것이 무슨의미가 있는지.

 

 물론 내신 역시 철저한 사교육으로 뒷받침 된 이들이 유리한건 별반차이 없으므로

 

 내신으로만 선발하겠다는 정책을 전면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얘 대학들에서는 ' 평준화, 누구나 한가지만 잘하면 대학갈 수 있다' 라는 선심성

 

 교육정책을 아얘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아얘 ' 학습능력이 보장된' 학생들을 선발하여 경쟁

 

 력을 갖추겠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입시정책이 더욱 노골적으로 계급의 재생산에 대물림에 적극 이바지 하고 있고....

 

 이제 학교에서는 서울 주거 학생들 중에서는 강남, 목동, 송파, 외국어고등학교 등 중산층

 

 위주 아파트 촌이 밀집된 지역과 입시형 사립고 출신이 아닌 학생들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몇해전부터, 신입생들에게 출신 고교를 물어보면 서울출신 학생들은 70% 이상이 그곳 출신이다.

 

 ( 신뢰도가 낮은 나만의 대면질의 표본에 따르면ㅋ. 그러나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갑자기 2년전쯤에 영어 과외를 하던 고3학생이 생각난다.

 

 어머니는 100만원남짓을 받는 전화상담원이셨고, 나와는 죽집알바로 알게 되었다.

 

 다소 싼 가격이기는 했지만,  과외라는 것이 원래 육체노동에 비해

 

 학생이 할 수 있는  '감지덕지한 시급' 의 노동이기에

 

 그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하여 과외를 했었고,  나름 빡세게 시켜보려 애써서

 

 성적은 조금 올랐지만 사교육 한번 제대로

 

 받은 적 없는 그 친구에게 영어라는 과목을 가르치기가 참 힘들었던 생각이 난다.

 

 

 그 친구는 대학은 잘 갔을까.

 

 대학을 잘가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껄끄러웠지만

 

 그 집안에서 그 친구의 대학입학의 여부가 집안의 희망과도 크게 관계되었기 때문에

 

 은근히 '' 대학을 잘가야 음악도 잘 할수 있고 많은 것을 배울수 있다"  라고 사실인지 과장

 

 인지 모를 의식을 주입했던 생각이 난다.

 

 기왕이면 그 친구가 대학을 잘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늘 들었지만,  왠지 아니면 어떡하나

 

 싶어서 관심이 있으면서도 수능 끝난후에도 확인전화 한번 해보지 못했다.

 

 그 친구 생각하면서도 참 뭐랄까 씁쓸했다. 수능 좀 잘보는게 뭐 별거라고.

 

 정말 대단치 않을거다.  그게 무슨 객관적인 실력의 검증인가.

 

 

 소위 ' 명문대' 라는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을 보면서, 부모님으로부터 제공되는 문화적, 경제적

 

 자본에 힘입어 입시 경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기득권에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채 겉멋이나 부리고 끼리끼리 어울려 한껏 대학생활 즐겁게 보내다가 손쉽게

 

 (손쉽게.... 라는 말은 상대적인 의미이다 물론.) 유수 전망있는 대기업에 취업하여 아무런 문

 

 제의식없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참 허망하고 그런모

 

 습들이 싫었다.  그래도  자기 삶에 대한 불평불만은 많고 설익은 비판들은 많이 하면서

 

 대학생활을 보내기는 하지만.

 

 그들의 머릿속에 들은것에 비하여 졸업후의 그들의 정치적 행보는 참 형편없다는 생각이 든다.

 

 돈이 지식을 만들고 지식이 자기 언행을 정당화하는데에만 열심히 쓰이는.

 

 난 여기에서 얼마나 정직할까.  또 앞으로 얼마나 정직해질까.

 

 요즘은 그 대상이 누구이든지, 배제하고 비난하는데에 마음의 에너지를 쏟기는 싫다. 

 

 또 나를 누구로부터 분리하여 특화시켜 생각하기도 싫다.

 

 그냥 말없이, 말없이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많이 잘하려고 하지 말고,

 

 오래, 꾸준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그러나 일정한 행태들을 여전히 혐오하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 총학생회 선거운동한다고 한 선본 운동원이 정책에 대한 제안을 해달라고 했다.

 

 학내 운동에 참으로 기여한것이 없는 나이지만, 그래도 나름 열심히 얘기를 했다.

 

 열심히 받아적는 운동원을 보면서 그녀의 모습이 5년후 10년후에도 저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처럼 호기심에찬 까만눈동자, 귀기울이는 자세, 열의에 찬 모습

 

 

 그녀가 학생회에서  1년 죽도록 일하고 지쳐 나가떨어져서 내가 그동안 무얼했나, 하고 회의하며

 

 돌아서는 모습은 보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건 나에게서도 보기 싫은 모습이다.

 

 그러지 않으려면 많은 도움과 지지가 필요하다.

 

 누구보다 산뜻한 모습으로 오늘 나와 마주한 그 운동원에게도, 나에게도.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소 추상적인 이야기이지만, 

 

 일단은 서로를 배척하고 불신하지 말고 믿어야 할것이다.

 

 서로의 역할을 잘 할 것이고, 각자의 진지한 판단에 의해서 행동할 것으로.

 

 이게 내가 요즘 가장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이다.

 

 (또 삼천포로 빠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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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2007/11/14 19:48

 

 

난 아직 그대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그대 마음에 이르는 그 길을 찾고 있어

 

 

 

그대의 슬픈 마음을 환히 비춰줄 수 있는 변하지 않을 사랑이 되는 길을 찾고 있어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대 마음에 다다르는 길 찾을 수 있을까 언제나 멀리 있는 그대 음

 

기다려줘 기다려줘 내가 그대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줘 기다려줘 내가 그대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

 

 

이 노래 가사를 그냥 썼다면, 감각이 뛰어난 작사가라고 해야겠지.

 

하지만 이 노래의 후렴구는 그냥 쓴 가사가 아닌것 같다.

 

경험에서 나온것이 아니라면 굳이

 

 ' 기다려줘 이해할 수 있을때까지'  라는 내용을

 

넣을 필요가 있었을까? 

 

 다른 절실한 느낌이 드는  미사여구가 얼마나 많은데.

 

 

 

그렇지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때에, 더 이상 이해하고 싶지 않아지면 어쩌지?

 

모든 상황에서 흔히 있는 일...

 

어떤 것을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을 즈음에는....

 

더 이상 그것을 잘하는 것이 그다지 나에게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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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의 시대

2007/11/09 19:49

항상 '왜?'   ' 왜 공부해야되는데?'  라는 생각을 스스로 놓지못하는 나로서는

 

공부를 하는 이유, 지식을 축적해야하는 이유, 지식이 어떤 필요로 쓰일것인가, 왜 열심히

 

공부하고 배워야 하는 가에 대한 회의나 의문이 인생전체의 질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자는 공부하기 싫은 변명하니냐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나같은 경우는 동기부여를

 

했을때와 아닐때 정말 확연한 학습효과의 차이 가 날정도로 '공부를 해야하는 이유' 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수많은 식자와 현학적 연행을 볼때마다 염증이 날때도 많지만,  권력관계에서 결국

 

당파적 입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 결국 내가 믿는 것과 상대가 믿는 것과의 투쟁- 이라는 생각에

 

우걱우걱 지식을 우겨넣는 나에게 조금더 깨끗한 마음을 견지해주도록 도와주는 글이 아닐까

 

싶어 퍼왔다.

 

 

 

펌글로밖에 자신의 정신상태를 돌아볼 수밖에 없는 나 역시 이 글에 나온대로 ' 주체의 삶과 무관하게

 

지식만 쌓는'  행동의 일환 일지 모르겠지만,  그 역시 나의 실존에 충실하여 지는 바탕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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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즘 님)

 

 

 

 

대학원에 몸 담고 여기저기 공부로 사람들과 얽히다 보면, 종종 같이 공부했던 이들이 자신이 쓴 책이나 번역한 책 혹은 논문 등을 선물로 건넬 때가 있다. 속표지에 몇 마디 말이 적혀있는 이 소중한 선물을 받아서 시간 날 때 한장 한장 넘겨보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인데, 그건 내가 예전부터 쓸데없이 책 욕심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서 내 옆의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살짝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왠지 책을 사이에 두고 그 사람과 내가 직접 대화하는 기분이랄까? 사실 많이 친하거나 혹은 관심 분야가 딱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같은 연구실에 있는 사람조차 무슨 공부를 하면서 사는지 자세히 알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논문 제출 기간이 끝난 후 한동안 뜸하다가 며칠 전에 한꺼번에 두 권의 책을 받게 됐다. 둘 다 선배들이 쓴 책으로, 하나는 뉴욕 미술관 탐방기 정도 되는 여행 서적이고, 다른 한 권은 몇 년 전부터 꽤 많이 나오는 것 같은 고등학생이나 대학 신입생 정도를 대상으로 한 <공산당 선언> 해설서다. 미술책을 건넨 선배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미술에 특별한 관심이 없고 게다가 뉴욕엔 양키스나 닉스 경기 외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는 나이기에, 좀 더 친근한 후자에 먼저 눈이 간 건 당연한 일이다. 

 

내가 참 좋아하는 선배인 책의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압축적인 <공산당 선언>의 내용을 최대한 손쉽게 풀어써주는데 많은 정성을 기울인 것 같다. 그러면서도 단순 정보 전달에만 그치지 않겠다는 포부도 드러난다. 아무튼 저자는 "공산주의 선언의 정신이 아직 소멸하지 않았으며, 선언의 문제의식은 현재적임"을 반복해 강조하면서 현재적 쟁점들과 <선언>을 계속 연결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평소 진지한 맑스주의자인 선배답다. 하지만 꽤나 충실한 내용과 선배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왠지 이런 책을 마주할 때면 항상 느끼는 씁쓸한 뒷맛은 여전히 남는다. 아마도 책을 둘러싼 이쁜 포장줄에 박혀있는 (선배의 진지함과 묘하게 대조되는) "이 시대 청소년의 교양을 위한" 이라는 광고 문구 때문이었으리라. (기우로 덧붙이자면, 밑의 내용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지식이 유통되는 풍토에 대한 소회일 뿐, 선배나 그 선배가 지은 책의 내용을 비판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

 

오늘날 인문사회학계는 "교양"이라는 말이 넘쳐나는 이른바 "교양의 시대"라고 할 만 하다. .(대체 그 교양이란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저기서 대중의 교양의 부족을 한탄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TV 프로그램이 대중의 교양을 높여주겠다고 팔 벗고 나서기도 한다. 인문학계에 몸담은 지식인들이 "인문학의 위기"와 이의 원인이 되는 대중의 교양 부족을 질타하는 목소리는 이제 너무나 반복되어 지겨울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이 교양이라는 단어의 영향력을 제대로 실감한 건 오늘 선배의 책을 보고 나서야였다. 책 표지에 나란히 병렬되어 있는 "공산당 선언"과 "교양"이란 단어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아찔한 간극을 애초에 없었던 것인양 에둘러치고 있는 "교양"이란 단어를 보니, 오늘날 "교양"이란 단어가 가진 포식적-식인귀적 특성이 몸으로 느껴졌다고나 할까. 대체 혁명을 선동하는 선언문을 교양으로 읽으라니, 이건 왠 후기자본주의의 냉소주의와 속물주의가 뒤범벅된 그로테스크한 명령인가? 

 

 

어디에선가 지젝이 맑스주의와 정신분석적 앎의 특징으로 분파주의를 꼽은 적이 있다. 두 앎의 형태 모두  분파주의적 갈등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인데, 아마도 이러한 특징은 맑스주의와 정신분석적 앎에 공통적인 당파성과 진리 간의 특수한 단락 때문일 것이다. 맑스주의적 앎 속에선(혹은 정신분석적 앎 속에선) 여타의 다른 과학에 대한 논변들과는 달리 객관적인 앎의 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맑스주의적 앎의 핵심은, 적대가 가로지르는 사회 속에서 피지배계급의 입장이라는 당파적인 입장에 섰을 때에만 그 사회의 진리를 알 수 있다는 것에 있다. 맑스주의적 진리는 당파성을 제거함으로써 드러나는게 아니라 당파성에 충실할 때에만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정신분석적 진리는 실재를 부인하는 객관적 위치로 후퇴하는 게 아니라 실재의 부름에 충실할 때에만 드러날 수 있다.

 

따라서 맑스주의적 앎/정신분석적 앎은 그 자체로 "이런 입장을 취하라"라는 수행문이기도 하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쓰자면, 맑스주의적 앎은 그 자체로 프롤레타리아 "되기"의 요청이고, 정신분석적 앎은 윤리적 주체 "되기"의 요청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되기"를 행한 이후에야 맑스주의적 "앎"을 얻을 수 있다.(따라서 맑스를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회자되어 온 신화, 즉 "노동자들에게는 자본론이 쉽다더라"는 신화는, 말 그대로 신화일 뿐이지만, 한 편으로는 맑스주의적 앎이 가진 특징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맑스주의적 담론 속에서 노동자들은, (흔히 오해되듯이) 단순히 지식인들에 의해 계몽되어야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지식인들보다 이미-항상 많이 알고 있는 존재이다....)

맑스주의자들의 이야기 속에서 주체의 지반을 완전히 뒤흔드는 "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듯한" 앎의 순간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정신분석에서 앎 자체가 증상의 치유와 연결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맑스주의적 앎/정신분석적 앎의 특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맑스주의적 앎/정신분석적 앎은, (그 앎에 충실하다는 전제 하에서) 주체로 하여금 현재와는 더 이상 동일하게 사고하고 동일하게 생활할 수 없게 만드는, 혹은 그러할 때에만 획득될 수 있는 그런 앎이다.(여담이지만 따라서 맑스주의적 논쟁에서 발화자의 입장이 가진 쁘띠부르주아적/개량적/타협적 성격에 대한 비난은, 흔히 이야기되듯이 단순한 인신공격의 오류나 분파주의의 폐해만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맑스주의 내에서 분파주의는 맑스주의적 앎에 충실할 것, 즉 당파성에 충실할 것에 대한 윤리적 요청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맑스주의적 앎의 특성에 대한 이러한 장황한 설명이, 오늘날 "교양"이라는 개념이 행하는 역할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힌트가 될 수 있을까? 여기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맑스주의 서적이 예전처럼 골방에서 분파주의적 실천들을 통해서만 읽혀야한다는 것도, 예전에는 은밀히 읽혀졌던 서적들이 공공연하게 홍보될 때 (예전에 특권을 누렸던 이들이) 느끼는 약간의 배신감과 약간의 질시가 섞인 투정도 아니다. 문제는 오늘날 "교양"이라는 단어의 범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징후, 즉 오늘날 지식의 유통에 있어서 앎과 그것의 수행적 효과 간의 단락은 이미 끊어졌다는 것 그리고 이제 그 끊어진 고리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라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교양이라는 단어는, 주체를 변화시키는 수행적 힘을 가졌던 위반적 지식들을 다양한 지식들의 연쇄고리에 평면적으로 흡수하기 위한 담론 전략의 일부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교양"이란 이름 하에서 소비되는 지식들과 그러한 방식의 지식의 흡수 속에서 지식의 수행적 힘에 대한 고민은 은폐되거나 이제는 낡은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상한 "교양"이란 단어의 범람 속에서 후기자본주의의 뿌리깊은 냉소주의와 평면성 그리고 자기-과시와 관련된 일종의 나르시즘적 속물주의를 읽어낼 수 있는 건 우연일가?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현대자본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무한히 파편화된 대상들의 지극히 평면적인 전시이다. 그리고 이 평면적 전시는 어떠한 총체성도 어떠한 진리도 거부하는 냉소주의와 직결된다. 서점의 인문과학 서가에 "교양을 위한 다이제스트...." 내지는 "하룻밤에 마스터하는..."라는 시리즈 제목을 달고 결코 함께 다루어질 수 없는 학자들의 책이 뭉뚱그려져 있는 걸 보면서, 언젠가 난민 학살에 대한 기사와 연예인의 가쉽성 스캔들이 나란히 실려있는 포털 사이트 메인화면을 보며 느꼈던 어떤 대책없는 허탈감이 겹쳐지는 것은 왜일까?

 

이는 (지식인들의 또다른 상투적 비판의 하나인) "교양서"들의 "가벼움"을 개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러한 대중적 지식들이 "교양"이라는 이름 하에 유통되는 현실은 무엇을 반영하는가를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오늘날 "전문가 지식인들"의 말처럼 교양의 결핍이 인문학의 위기를 발생시켰다고 생각지 않는다.(이러한 전문가주의는 우리의 경계해야 할 또 하나의 함정일 것이다), 오히려 오늘날 인문학의 위기가 존재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교양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교양의 "과잉" 때문일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지식의 유통이 적고 많음 혹은 피상적 지식의 범람과 전문적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앎과 주체의 변화를 가져오는 수행적 힘 간의 연결고리다. 이 연결고리가 끊어질 때, 앎은 일종의 쇼핑 대상이자 "축적 가능한" 어떤 것이 되어 버린다. 아마도 오늘날 이러한 현상을 고상하게 포장하는 게 '교양'이란 말이고, 바로 '교양을 쌓는다'라는 표현일 것이다. 이와 같이 앎이 주체의 삶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주체의 실제 삶과 무관하게 "쌓을 수 있는" 어떤 것이 되었을 때, 지식인과 대중의 괴리는 당연히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교양"이라는 이름 하에 소비되는 지식들이 앎의 대중화를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대중을 앎에 있어 더더욱 예속적인 위치에 묶어두게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이를 앞서 맑스주의적 앎에서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사고와 비교해 보라.)

 

오늘날과 같은 "교양의 시대"가 미심쩍은 것은,  또 교양의 부재와 인문학의 위기를 등치시키고, 대중의 교양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지식인들의 설레발이 의심스러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고민이 앎과 수행적 힘의 관계를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혹은 공통의 위반적 지식을 어떻게 새로이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교양에 대한 강조는 단지 앎을 삶과 분리시켜 객관화된 재화의 형태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이와 같은 객관화된 지식의 양에 기반해 지식인과 대중의 간극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대중의 교양 결핍을 우려하는 표면적 제스처와는 정반대인) 지식인의 은밀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공산당 선언>을 읽는 것이 단지 조금 더 많은 교양과 조금 더 적은 교양을 구분해줄 뿐인 이 "교양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라리 "교양"에 대한 反-교양적 비판이 아닐까란 생각이 드는 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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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니 유용할것 같아

2007/11/06 16:57

무한한 연습님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 또는 함께 살아간다는 것: 나의 어떤 관계를 생각함.] 에 관련된 글.

 

이에 대한 나의 감상은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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