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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02
    '여성'을 질문하다.(1)
    망이_
  2. 2007/12/28
    송년의밤행사에 다녀와서-(6)
    망이_

'여성'을 질문하다.

[92호]'여성'을 질문하다
(키라 / 한국성폭력상담소 , keeraa@sisters.or.kr)
 

차별금지법을 계기로 여성운동의 ‘여성’을 질문하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이하 상담소) 몇몇 활동가들은 지난 1, 2차 <차별금지법 대응 및 성소수자 혐오 및 차별 저지를 위한 긴급 공동행동>의 번개에 참여하였다. 조직 논의에서 상담소 활동가들이 소속되었던 팀은 국내인권단체연대팀이었고, 팀 안에서 논의했던 것은 성소수자들과 연대하기 위하여 어떤 단체들에게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상담소가 갖고 있는 네트워크가 주요한 자원으로 고려되었고 상담소는 다른 여성단체들에게 현재 동성애혐오세력의 가시화와 성소수자 탄압이라는 긴급 정세를 알려내고 연대를 제안하는 역할을 하기로 하였다. 그것은 상담소가 여느 성소수자 단체와 달리, ‘여성’운동에 기반한 고유한 의제 설정의 역사와 네트워크를 가진 ‘여성’단체로서 기대되는 연대였다. 대사회적인 여성 운동의 이슈를 만들어왔던 상담소의 역사를 살핀다면, 그것은 주로 ‘여성’ 정체성에 근거한 운동의 역사였다.

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갖게 되었다.
-다른 단체와 차별화되는 여성단체의 이슈는 무엇인가? 그 다름은 고정적인 것인가?
-여성 단체의 이슈는 그 이슈를 문제 삼는 개인들에 의해 어떻게 도전받고 변화하는가?
-여성 단체의 고유한 이슈와 함께 삭제된 7개 조항과 관련한 다른 사회 단체와의 연대를 약속하는 것이 상담소의 역할인가?
-여성단체로서 차별금지법에 반대한다는 것은 성소수자 단체와는 다른(특화된) 여성 단체의 입장을 내는 것인가?

성소수자 이슈를 제기할 때 상담소에서는 주로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이야기하게 된다. 이는 ‘성소수자(도) 존재한다.’는 설명이다. 이는 성소수자의 성폭력에 대해서도 (차별 없이)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차이가 있는/더 차별받는’ ‘여성’들을 소외시키는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고민으로 ‘차이에 대한 존중과 그를 통한 자기 성찰’이라는 여성운동의 미덕으로 받아들여진다. 성소수자 이슈뿐만 아니라 상담소에서 ‘차이’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일상적이다. 비혼 여성, 레즈비언, 성매매 여성, 이주 여성의 차이가 존중되어야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여성들 사이의 차이에 대한 언급이 인간을 이성애(규범, 제도)에 기능하는 성별 범주로 구분하는 것에 도전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레즈비언도, 성판매자도, 남성 피해자도 상담소의 성폭력 피해 내담자 범주의 확장이지 ‘성별 구획’을 교란시키는 불편한 존재로 남아있게 하지는 않는다. 성소수자 이슈가 이런 식으로 제기될 때 ‘여성운동의 여성은 누구인가?’에 대한 응답은 온갖 차이들이 교차하는 백가지, 천가지의 ‘여자’일 뿐이다.
이와 다른 차원에서 성소수자라는 이슈는 여성운동에서 도전해야할 범주로 이야기되는 ‘여성’에 대한 질문에 통찰을 제공한다. 이는 이성애주의의 성별 시스템 안으로 끝없이 소환되는 ‘여성운동’이 ‘여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여성’으로 소환되기를 거부하는 운동의 지향을 풍부히 할 수 있는 인식론적 자원을 제공한다. 이 경우 상담소 운동의 대상이 성소수자로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상담소 운동의 지향과 목적이 성별을 고착화하는 ‘성별 범주와 이성애주의를 재생산하는 운동’이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것이다.

성별은 여성 단체의 운동 대상과 운동의 지향, 운동의 내용, 후원 회원 모집 방식에 있어 많은 부분을 설명해준다. 성폭력을 상담하는 일지의 성별 기입란에 남/녀를 기입하는 것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성정체성이 남과 여 만이 존재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성차별을 종식시킨다’, ‘성평등을 지향한다’는 말이 ‘성별’과 연관될 때 성차별은 남성에 비해 여성을 차별한다는 식으로, 성평등은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다는 식으로 해석된다. 이는 역시 의도하지 않았지만 인간범주를 여성과 남성으로 구분하는 이성애주의적 해석을 반복하는 효과를 낳는다. 성별을 통한 개인에 대한 설명은 인간 범주에 대한 가치중립적 해석이라기보다, 이성애주의에 기능적인 ‘성별’ 범주를 생산하는 수행적 효과를 낳는다.
이성애주의에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을 갖고 여성 운동을 한다는 것은 성별에 대한 이분화된 구획에 대해 불편함을 갖는 감수성을 필요로 하며, 활동에 있어 그 감수성이 일상적으로 요구되지 않는다면, ‘여성’이라는 범주를 이성애주의 해석틀에 편안하게 안착시키지 않기 위한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 차이를 지속적으로 환기하지 않으면, 사실 여성은 성별이라는 언어의 수행적 효과 안에 쉽게 포섭된다. 여성 운동을 하고 있으나, 내가 사용하는 ‘여성’이라는 단어가 인간을 남녀로 이분화하는 고정적 범주를 지칭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밝혀야하고, 성평등을 이야기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성별 사이의 평등’이 아님을 환기해야한다. 내가 반대해야하는 효과를 낳는 여성 범주에 기대어 활동한다는 것은 늘 모순과 긴장을 생산한다. 바로 그 불편함이 여성운동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을까? 여성 운동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동시에 이성애주의에 반대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혹은 가능하기는 한가?

현재 국회 통과를 기다리고 있는 차별금지법안의 차별금지 대상에 성별은 포함되었으나, 7가지 항목이 차별금지대상에서 삭제되었다. 나는 이 상황을 통해 여성운동의 ‘여성’ 이라는 말이 동시에 성별 구획 안의 ‘여성’으로 갇히지 않기 위한 여성 운동가들의 딜레마를 바로 떠올린다. 여성이라는 말에 대해 질문하지 않으면서 여성 운동을 하는 것이 쉽게 여성을 성별질서에 기능적인 기표들로 만들어내는 효과를 낳는 이 상황은 성별이 포함되고, 다른 항목이 삭제된 상황과 매우 닮아있기 때문이다.
차별 금지법을 계기로 성소수자 혐오 집단과 그 집단의 정치성이 한국사회에서 가시화되면서 유례없는 성소수자 단체와 개인들이 집결되고 공동행동을 하고 있다. 성소수자 단체에서 생산하고자 하는 이슈가 성소수자들을 가시화시키는 것과 함께 성소수자의 정치를 풍부하게 하는 것일진데, 여성 운동은 바로 그 지점에서 이성애주의 질서를 폭로하고 그것에 반대할 전선을 만드는 이슈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성운동에서 여성이라는 이름을 여전한 화두로 제기하며 이 운동은 무엇을 지향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이 성소수자와 관련된 역사적 순간에 함께 폭발한다면 어떨까? 그리고 ‘여성’을 질문하며 여성운동의 지향을 급진화하는 활동이 무엇인지, 그 활동의 내용과 즐거움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면.

이 글은 차별금지법과 관련된 현안이 불거진 지금, 왜 ‘여성운동에서 여성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여성운동'에 대한 고민을 적은 것입니다. 2007년 한국여성학회 제23차 추계학술대회 특별세션 『7개 조항이 삭제된 차별금지법 원안복귀를 위한 긴급토론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이미지 출처(위에서부터)
- Justin Wood. 'nylon.celebrity'. 2002.
-'swing'

* 글을 퍼 가실 때에는 출처를 꼭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언니네 채널[넷](www.unninet.co.kr) 2008년 1월 특집 '차별할 권리를 허하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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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의밤행사에 다녀와서-

 

중도에서 빌려온 책을 다 읽는 바람에,

대학교에 가서 책을 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어제 오후.

 

이랜드, 기륭전자 등 장기투쟁하고 계시는 사업장에서 준비한 주점이 우리 학교에서 있다며 같이 가자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별 고민없이 '응,그래'라고 말하곤

이왕 학교간 김에 책도 빌리고 , 도서관에서 책좀읽다가 주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더랬다.

 

그 분들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함께 했던 적은 없었던 터라 (항상 생각만 있었더랬다. 생각만.)

주점에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터. 게다가 장소도 학교식당이라니 잘되었군. 뭐 이정도.

 

이것저것 추천받은 책들을 한권한권 빌리고나서 꽉 차오른 마음으로 친구를 기다려서 고를샘으로 향했다.

아이코, 주점인 줄 알았는데, 송년의 밤 행사였다.

 

들어서자마자 각 사업장들의 상황을 알려주는 영상이 식당을 채우고 있었고, 나는 왠지 숙연해진 기분이랄까.

평소에 그곳은 맨날 '피자먹을까, 스파게티먹을까' 고민했던 공간이었는데.

나에게는 약간 생소한 조합원분들의 구호가 적힌 옷과, 플랑들,그리고 영상이 나오는 것을 보니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뻘쭘함과 괜한 자책감에 휩싸여서 안주를 깨작거리다가,

문선패(맞나?) 공연이 시작되는 순간 완전 달아올라버렸다. 꺄아. 꺄아.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멋진 공연들로 왠지 들떠버렸다.

 

 

 문제는 행사가 끝나고 나서였다.

 

내가 앉아있던 쪽이 학생들이 있던 쪽이라서 조합원분들께서 예뻐라 하시면서 계속해서 '많이 먹으라'면서 음식을 챙겨주시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리고 서로에게 더 먹으라면서 풍요롭게 음식을 나누는 풍경 또한 마음이 쌀쌀한 요즘, 좋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너무 많은 음식들이 은박지접시 위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많은 마른안주들과, 김치와, 수육 등등등.

 

 

청소가 시작되었고,

은박지접시와 함께 그 음식들이 고스란히 쓰레기 봉투로 들어가버렸다.

음식물쓰레기와 은박지접시를 분리하지도 않았고, 척 보기에도 너무나도 깨끗한 마른안주들과 김치들 또한 뒤범벅이 되어 음식물쓰레기가 되었다.

 

처음부터, 테이블별로 자신들이 딱 먹을만큼만 가지고 가서 양을 조절했으면 더 좋았을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계속해서 음식을 가져다주고 싶고, 서로 더 많이 나누고 싶은 마음은 나도 알지만 그 누가 보기에도 테이블별로 배분된 음식은 '푸짐함'을 넘어서서 '과도한'양으로 보였다.

실제로 행사가 내내 진행되었기 때문에 음식을 먹을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너무 많은 음식들이 고스란히 남아버렸다.

 

그리고 (물론 일회용품 사용을 줄여야하겠지만) 크린랩같은 일회용봉투가 구비되어 있었다면, 마른안주 등의 음식들은 봉투에 담아서 가지고 갈 사람들이 가지고 갈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치나 마른안주같은 것이 통. 째. 로. 버려지는 것을 보면서 차라리 가지고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않을 수 없었다.

 

같이 갔던 친구 중에 자취를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버려지는 김치를 보면서 참 아쉬워했다지.

 

하지만 나도 주점이라고 알고 있었던 터라 미처 음식을 담을 봉투를 준비해가지고 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기에, 그저 아쉬워하면서 테이블을 닦는 일을 도울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내가 갔을 때, 준비된 음식들에 대한 일들을 맡아서 하시는 분들은 모두 여성조합원 분들이었다. 맞춰오신 음식을 나눠주고, 접시에 일일이 담아주면서 신경을 쓰시는 그런 노동은 역시 그곳에서도 여성조합원 분들의 전담이었다. 남성조합원분들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아쉬웠다.

그래도 마지막에 청소를 할 때는 여,남 조합원분들과 학생들 모두 같이 이쪽저쪽에서 청소를 하는 풍경이었다.

 

 

내가 이런 글을 쓰면,   어디 풋내기 따위가  일을 돕지도 않았으면서 괜히 사소한 것 가지고 시비야! 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 사실 행사에 한 번 다녀온 주제에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것일수도.. 그건 내가 풋내기이기때문에 가능한 것. 에이 몰라. 질러버릴테닷-)

나에게는 전혀 사소한 것이 아닌 것.

그래서 이렇게 끄적끄적여본다.

 

송년의 밤 문화제에 생각지도못하게 어리버리 참석하게 되었던 거지만,  직접 조합원분들께 이야기도 듣고, 행사를 통해서 많은 것 보고듣게 되어서 나 자신에게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사실 어제 그 행사에 참여하면서 완전 버닝하게 된 것이 있는데 그건 다음 포스팅 때 -

 

 

*지금은 어제 비맞고 돌아와서, 심한 감기몸살에 걸리는 바람에 골골대는 중.

주사도 맞고 약도 맞았는데 왜이렇게 머리가 깨질 것 같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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