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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디지털세상] 08. 02 표준은 기술의 진화 과정과 무관

2008년 2월호

블루레이와 HD디브이디 간 포맷전쟁  


뉴미디어평론가 이광석  


하나의 기술이 표준에 이르는 과정에 자연 질서에 흔한 적자생존의 법칙이나 보다 발전된 단계로의 기술 진화의 법칙이 딱히 들어맞지 않는다. 보다 나은 기술이 부족한 기술을 대체하고 여러 기술의 경합에서 최고의 기술이 선택된다면야 이는 상당히 합리적 과정이요, 민주적 선택이라 말할 수 있다. 허나 현실은 다르다.
부족한 기술이 최종 경합에서 이겨, 훨씬 우월한 기술이 사라질 운명에 놓이기도 한다. 합리적이고 똑똑한 것으로만 평가받지 못하는 것이 인간사이듯, 그 진리는 기술 표준에서도 매일반이다.


영 상과 음향을 담는 저장 그릇의 발전사를 봐도 그렇다. 80년대, 일본 소니가 밀었던 베타맥스 버전의 비디오테이프가 미국의 VHS에 밀려 사장된 것은 기술보단 시장과 힘의 논리 때문이었다. 물론 70년대엔 8-트랙 테이프를 대체해 카세트테이프가, 90년대엔 디지털 오디오 테이프를 컴팩트 디스크가 대신함으로써 음향 저장기술의 발전을 독려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체로 경합하는 기술이 있을 때, 기술의 표준화 과정은 시장에서 힘을 가진 집단들 내부의 힘겨루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상례다. 베타맥스의 사멸이 그렇게 이뤄졌고, 2000년대에 접어들어선 또 다른 진흙탕 싸움으로 번질 태세다. 
차세대 동영상 매체의 포맷 전쟁이, 블루레이와 HD디브이디를 놓고 벌이는 기싸움으로 번지고 있다. 베타맥스의 설움을 설욕하고자 소니와 필립스가 블루레이를 밀고, 그 상대편 HD디브이디에는 도시바와 마이크로소프트가 후원자로 버티고 있다. 이제까지 일반 소비자는 9기가바이트(GB)의 디브이디 포맷에 익숙했지만, HD디브이디의 경우 30GB까지, 블루레이는 이중 레이어인 경우 50GB까지 집적이 가능하다. 확실히 차세대 포맷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블루레이가 HD디브이디보다 그 집적량이 많고 두 포맷 간 화질의 차이가 없다면 왜 블루레이로 낙점되지 못할까? 그것이 기술 표준이 갖는 딜레마다.

HD디브이디는 기존의 공정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장점으로, 제조 원가를 낮춰 출고 비용을 현저히 낮춘다. 게다가 HD디브이디 플레이어 또한 가격 부담이 적다. 블루레이는 저장용량이 훨씬 크지만 새로운 제조 공정을 추가해야 하는 부담이 있고 아직까지 비용 부담이 크다. 기술이 좋지만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면 시장에서의 반응은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두 포맷 기술을 둘러싸고 당사자들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복잡다단해지는 것도 문제다. 예컨대, 지원 소프트웨어와 관련해 선 마이크로시스템스의 자바가 마이크로소프트에, 컴퓨터와 전자업계에선 소니, 필립스, 에이서, 델, 애플 등이 도시바, 후지쯔, 레노보에, 영화 업계에선 월트 디즈니, 라이온게이트, 워너 브라더스 등이 파라마운트 스튜디오와 유니버셜에 맞서서, 서로 블루레이와 HD디브디이를 옹립하려 애쓴다. 이도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경계를 넘는 얌체족도 있다. 지금의 형국은 불투명이요, 그 해결은 한쪽이 기싸움에 월등히 이길 때만 주어진다.

표준은 한 번 정해지면 관계된 이해집단에 내리 이익을 안겨줄 수 있기에 당사자 간에 첨예한 대립을 만든다. 자신의 포맷을 관철시키기 위해 제조업체가 영화 업계에 자금을 대는 경우도 있다한다. 그러고 보면 인류의 진전을 가져온다는 기술의 발전사에 표준만큼 왈패도 없거니와 그 과정은 가히 목불인견이라 심히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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