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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디자인] 신체-기계간 잡종의 밑그림, 사이보골로지

신체-기계간 잡종의 밑그림, 사이보골로지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사이버공간, 사이보그, 사이버펑크 등의 용어는 90년대 한국 사회에서 디지털 문화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화두였다. 신문, 방송, 잡지 등에 등장했던 광고들은 곧잘 이 새로 운 '사이버'란 접사의 수식어를 애용하곤 한다. 사이버공간이 시/공간의 변화와, 사이버펑크 가 디지털문화와 인연이 있다면, 인간의 신체 변화를 염두에 둔 수사는 '사이보그'다. 사이버 네틱 유기체이자 자율적 인간-기계 잡종인 사이보그는 시대에 따라 그 성격이 크게 달라졌 다. 한 시대의 사이보그는 그 시대가 지닌 사회적이고 기술적인 모습을 상당 부분 반영한다. 의족이나 의수, 보청기, 안경, 인공 심장 등에서 보다 많은 기계의 부품들을 가지고 인간 신 체의 일부를 보완, 확대하거나 대체하는 보철물에 이르기까지, 신체에 감기는 부속 기계에의 의존은 지극히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신체-기계의 관계는 어떻게 진화했을까? 지금의 사이보그에 대한 시각에는 혹시 어떤 잘 못된 의도나 설계가 개입되어 있지는 않는가? 이 글은 신체-기계의 잡종화(hybridization)에 대해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과 이를 통해 그 현재적인 함의를 찾아보려는데 있다. 신체-기계 사이보그란 용어는 1960년 맨프레드 클라인(Manfred E. Clynes)이 쓴 '사이보그와 공간' 이란 논문에서 최초로 등장했다. 사이보그라 얘기할 수 있는 최초의 존재는 이보다 더 거슬 러 올라가는데, 1950년대 뉴욕의 로크랜드(Rockland) 주립병원 실험실의 흰쥐 한 마리가 그 공식적 출발이었다. 쥐의 심리적 반응을 보기위해 몸에 부착된 작은 펌프를 통해 화학물질 을 주입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장치가 최초의 신체-기계간의 결합이었다. 사이보그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은 어땠을까? 사이보그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복잡 한 기계장치를 지닌 '로봇'(robot)이다. 일반적으로 로봇은 인간보다 기계에 가깝다. 간단한 메모리 칩에서부터 다양한 프로그래밍을 입력하여 반응하는 로봇에까지 종류와 기술 수준이 다양하나, 로봇은 어디까지나 기계에 불과하다. 로봇의 좀 더 발전된 형태로 '안드로이 드'(android)를 꼽을 수 있다. 안드로이드는 기계공학의 정수다. 가장 인간에 가까운 로봇 인 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무실이나 전투용으로 개발되는 각종 인공지능 로봇 등이 이에 속한 다. 안드로이드를 로봇과 분리시키는 가장 큰 근거는 인간의 모습을 취한다는 점에 있다. 마 치 한 줌의 진흙으로 신이 인간을 빚어 생명력을 불어넣듯, 인간들은 자신의 외양을 흉내내 어 로봇 인간을 만들어냈다. 물론 안드로이드의 한계는 감정과 추억의 부재다. 감정이 없음 은 인간이 지닌 미묘한 오감의 느낌을 담아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함을 나타내며, 추억이 없음은 인간이 지닌 노쇠와 생식의 불가능성을 상징한다. 예컨대,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안 드로이드의 대표적 유형으로 들 수 있다.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이 만든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에 등장하는 '레플리컨 트'(replicant)는 이런 점에서 한 단계 발전한 신체-기계의 유형이다. 레플리컨트에는 생명공 학의 기술적 결과물들이 함유되어 있다. 레플리컨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되묻 는다는 점에서 보다 인간에 근접해 있다. 겉으로 보기에 너무나도 인간과 구분하기 힘들지 만, 복제된 각각의 추억이 진실이 아님을 인지한 후에 떨리는 망막은 레플리컨트의 존재론 적인 실체를 인간과 분리하는 단서가 된다. 그래서 이들의 사냥꾼인 블레이드 러너가 묻는 질문은 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과거의 향수와 기억에 관련된 것들이다. 사이보그의 궁극적 원형은 인간의 기억으로 끊임없이 회귀하는 '로보캅'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물론 70년대 텔레 비전 시리즈물 [6백만불의 사나이The Six-Million-Dollar Man] 또한 로보캅과 비슷한 사 이보그의 유형으로 들 수 있다. 어쨌든 로보캅은 불의의 사고로 사이보그로 새롭게 태어났 지만, 한 가장으로서의 인간, 사적이고 감정적인 기억들을 지닌 인간으로 되돌아가려는 로보 캅의 모습에서 진정한 사이보그의 전형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과 기계가 합치되었어도 로보캅은 인간이 지닌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신야 추카모토(Shinya Tsukamoto)의 [테추오2: 신체병기Tetsuo II: The Body Hammer]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모 습은 로보캅의 탄생과 비슷한 스토리를 지닌다. 가족의 사고와 분노, 뒤이은 주인공의 사이 보그화, 그리고 존재론적 방황 등등. 어쨌거나 로보캅과 테추오에 등장하는 현실은 참혹하 다. 기억의 성소는 가족에만 한정된다. 그 성소를 짓밟는 현실의 적을 제거하기 위해 기계의 몸이 필요하고, 신체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데 이용된다. 현실의 적에 대한 분노와 제거까 지를 합리화하는데 사이보그의 신체 기억을 전제한다는 점은 결국 이 영화들을 뻔한 권선징 악의 논리를 따르게 하지만, 사이보그를 보다 인간에 가깝게 다가서게 만들었다. 신체-기계-네트 이제까지의 사이보그들이 주로 객관화된 실체로서의 신체-기계의 발전이었다면, 새로운 사이보그의 현실은 네트에 의해 마련된다. 이제 사이보그는 네트에 접속된다. 사이보그 자체 가 네트라는 정보의 바다에 데이터 혹은 콘솔처럼 기능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컴퓨터 역 사를 보면 개인 피시 시대에서 이들을 연결한 인터넷 시대로 가는 것과 비슷하다. 이제까지 인간과 기계와의 잡종이 독립된 신체-기계만을 염두에 두었다면, 네트로 인해 사이보그는 서로 접속 가능한 신체-기계로 기능할 수 있게 된다. 마모루 오시이(Mamoru Oshii)의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chell]에서는 사이보그가 네트 에 접속하기 위해 목 뒤 포트 깊숙히 연결 단자를 삽입한다. 일반적으로 신체-기계가 네트 에 접속되는데는 신체 신경이 흐르는 맥(脈)을 포트로 활용했다. 워쇼스키(Wachowski) 형 제의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에서도 해커 혁명가들이 매트릭스에 들어가기 위해 목 뒤 의 포트를 이용한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David Cronnenberg) 감독의 [엑시스텐츠 eXistenZ]에서는 가상의 세계에 접속하기 위해 인간의 등 한가운데 뚫어놓은 바이오포트 (bioport)에 마치 유기체같은 포드(pod)란 콘솔을 연결시킨 인간을 지켜볼 수 있다. 목 뒤나 귀밑, 척수, 머리 정수 등은 특히 SF 픽션의 세계에서 주체의 '중력이탈'(escape velocity)로 이끄는 중요한 모뎀 포트로 활용된다. 픽션의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이버네틱스 연 구자인 케빈 워익(Kevin Warwick)은 신체 반응의 신호를 컴퓨터에 전송하는 칩을 자신의 팔의 신경망 안으로 이식함으로써, 사이보그의 미래를 보여주기도 했다. 전위예술가인 스텔 락(Stelarc) 또한 신체 확장 실험의 일환으로 로봇을 이용하거나, 더 나아가 자신의 팔 안에 이식된 칩을 이용하여 무선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팔을 원격으로 조정하는 실험을 장기적으 로 벌이고 있다. 특히 공각기동대의 가장 진일보한 측면은 네트를 통해 사이보그의 재생산과 생식의 가능 성을 타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인공 여전사는 끊임없이 자신의 근원이 어딘지에 대한 존 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이 점에서 사이보그는 매우 인간적으로 비춰진다. 또한 그녀는 몸체 없이 네트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는 디지털 덩어리와 합쳐지면서 새로운 사이보그로 다시 태 어난다. 이는 인간 자궁에 의한 생명의 탄생만큼이나 혁명적 인간-기계관이다. 비록 인간과 똑같은 기억과 추억을 지니고 있진 않았지만, 공각기동대의 여전사는 네트를 통해 다른 기 계와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자아를 가진 사이보그로 거듭난다. 이는 정보와 정보가 합쳐져 새로운 정보로 태어나는 네트의 속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사이보그 또한 정보의 원리 에 따라 새로운 주체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진일보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결국 신체-기계의 독립된 사이보그 모형이 현실을 적으로 보고 이를 부정할 수 있는 힘을 축적하기 위해 만들 어졌다면, 새로운 사이보그 주체는 힘의 근원을 신체적 연장에서 찾기보다 네트에 접속함으 로써 여기에서 흘러드는 무한한 능력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마치 어머니의 품안에 서처럼 네트를 통해 사이보그는 배양되고, 기계 확장을 통한 독립된 힘의 극대화보다는 네 트에 연결되어 성장하는 신체-기계로 초점이 옮겨간다. 사이보기즘에서 사이보골로지로 현실적으로 사이보그 이미지는 힘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현실이 제시하는 압도적인 힘 의 우위에 대해 가녀린 인간이 이를 벗어나려하는 상대적 힘에 대한 열망과도 같았다. 도구 를 사용하는 인간으로서의 호모 파베르라는 인간의 위상은 수천 수만년을 거쳐 진화하면서 신체내에 기계를 두고자하는 바람으로 발전했다. 신체 연장인 기계력에 의해 현실을 제압하 고자 하는 인간 욕망은 필연적이었다. 문제는 이같은 욕망의 언저리에 항상 '사이보기 즘'(cyborgism)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점이다. 욕망과 물신(fetishism)이 배다른 한 쌍으로 기 능하는 것처럼, 사이보그가 되고자하는 욕망에는 물신의 논리가 교묘히 기어든다. 힘에 대한 동경은 인간 신체에 대한 상대적 결핍을 미워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사이보그가 되기위한 상품 소비의 길로 내어몬다. 오감을 확장하기 위한 각종 가전제품의 소비는 사이보그 인간 의 필수품이다. 시각을 확장하기 위한 디지털 캠코더, 청각을 위한 디지털 오디오, 네트에 접속될 수 있는 최상급 버전의 노트북이나 몸에 차는 컴퓨터,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휴대 폰 등등 어디에서든 사이보기즘의 욕망을 관찰할 수 있다. 물론 이제는 신체-기계가 아닌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몸 곳곳은 이미 신체-기계 화되는 과정을 겪고 있다. 네트는 그 과정을 더욱 가속화시킨다. 24시간 내내 인간은 네트에 접속하여 살고 싶어한다. 신체-기계-네트의 새로운 사이보그 인간형이 도처에서 등장한다. 새로운 인간형이 지닌 긍정적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사이보기즘의 유혹이 도사린다. 사이보 그가 되는데 경제적 능력이 요구되거나, 좀 더 나은 브랜드 네임을 가진 부품을 구입해야 한다면 미래는 암울할 수 있다. 이러저러한 사이보그가 되라고 광고 등을 통해 누군가가 억 지로 강요한다면 그것도 큰 문제다. 항상 최상의 모델을 위해 끊임없이 소비하는 사이보그 주체,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 된다면 곤란하다는 얘기다. '사이보골로지'(cyborgology)는 사이보기즘을 극복하기 위한 중요한 대안이다. 애초 이 용 어는 사이보그를 연구하는 크리스 헤이블스 그레이(Chris Hables Gray)란 교수가 사용했다. 그는 이 용어를 사이보그를 다루는 모든 학문간의 경계를 넘자는 취지에서 제기했다. 그것 이 사이보골로지이던 사이보그학이던 용어의 태생적 의미에 개의치 않는다면, 인간이 도구 를 통해 진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계-네트의 결합을 통해 또 다른 신체의 진화를 도모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는 인간 신체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 의의를 지닌다. 단 인간의 사이보그 욕망과 상업적 논리가 교묘히 결합된 사이보기즘의 물신론을 넘어서서 인 간-기계-네트의 존재인 인간에 대한 현실론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이제까지 사이보그의 논의는 추상적이었고, 그나마 현실적 논의는 상업적 물신론이 개입된 사이보기즘이 지배적 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필자가 보는 사이보골로지의 궁극적 비전이다. (웹디자인 200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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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오픈소스운동, 인터넷지식은 '만인의것'

[매트릭스 라이프-인터넷 10년,이렇게 바뀌었다] <5>오픈소스운동, 인터넷지식은 '만인의것' [동아일보]2004-01-26 41판 18면 2533자 문화 기획,연재 최근 인터넷에는 ‘오픈콜라(Open Cola)’란 말이 떠돌았다. 콜라 음료의 제조법에 대해 서로 정보를 나누고 틀린 부분을 수정하고 새 지식을 더해나가다 보면 최상의 맛을 가진 콜라 제조법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네티즌들의 지식공유 움직임이 ‘오픈콜라’였다.지난해 말 문화개혁시민연대, 사이버문화연구소 등 6개 시민 사회단체는 ‘정보트러스트 운동’(http://www.infotrust.or.kr/)을 출범시켰다. 인터넷에서 사라져가는 우리의 디지털 역사와 정보를 복원하고 시민의 자산으로 공공화하자는 것이다. 소멸 위기에 처한 자연이나 명승지를 시민들이 사들여 국가에 위탁하는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의 사이버 버전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이 운동의 취지. 네티즌들의 자유로운 참여에 의해 인터넷연표를 정리하는가 하면, 우리나라에 웹이 처음 소개된 것은 1993년 ‘KRNET93’ 대회에서의 포항공대 이재용 교수의 강의라는 등 가치 있는 디지털 정보와 기록을 정리하는 것이 주요 활동이다. 이처럼 ‘공유의 철학’을 언론, 법, 디자인, 교육 등으로 확산해 사회적 자원의 기초로 삼으려는 네티즌들의 노력이 늘고 있다. ● ‘지식독점’ 버리고 ‘지식공유’ 촉구 과거에 지식 또는 정보는 개인 또는 소수의 배타적 작업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었다. 그들이 생산하는 ‘지식의 부가가치’는 돈을 받고 판매됐다. 그러나 이제 네티즌들은 소수가 ‘저작권’을 기초로 지식을 독점하고 그 지식이 창출하는 부를 독점하는 현실을 거부한다. 저작권 체제에 맞서 각자 지닌 것에 발을 달아 평등하게 서로(P2P) 나누고, 닫힌 소스 코드를 공개(오픈소스)해 이용자 공동의 자산으로 삼자는 것. ‘오픈소스’ 운동의 출발점이자 최대 성과인 오퍼레이팅 시스템(OS) 리눅스는 1991년 소스 코드를 무료로 공개한 이래 전 세계 500만명이 넘는 자발적인 프로그램 개발자 그룹을 확보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흔히 쓰는 OS인 MS사의 윈도 외에 리눅스와 매킨토시까지 지원하지 못하는 컴퓨터 환경은 사용자들의 외면을 받고 도태될지도 모른다. 지난해 한국의 곽동수 교수(한국사이버대 컴퓨터정보통신학부)는 ‘프리뱅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윈도뿐 아니라 리눅스와 매킨토시를 OS로 사용하는 모든 개인용 컴퓨터가 인터넷 뱅킹을 할 수 있도록 은행들이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요구다. 이 프로젝트는 인터넷뱅킹을 이용하는 20만명에 가까운 리눅스와 매킨토시 유저들을 주류 세계로 편입시켰다. ● 시장의 반격 이처럼 지적 자원을 공유하고 무수히 번성시키려는 사이버 ‘코뮌’의 철학이 크게 기를 펴는 듯 보이지만 시장의 역공 또한 만만치 않다. 저작권자의 인센티브를 고무하는 것이 목적인 각종 지적재산권은 역으로 정보 이용자들의 숨통을 막기 십상이다. 일례로 앞으로는 축구경기장에서 저작권료를 내지 않고 애국가를 틀기도 어려워질지 모른다. ‘애국가’도 저작권료 징수 대상이기 때문이다. 저작권 위반의 시비 대상에서 이젠 서비스업자뿐만 아니라 그 이용자들도 안전하지 않다. 지난해 12월 P2P 음악서비스인 ‘소리바다’의 이용자 50명이 한국음반산업협회에 의해 저작권 위반혐의로 고소당했다. 지난해 9월 미국에서 P2P 이용자 261명이 무작위로 고소당한 선례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고소 고발로 저작권을 배타적으로 수호하는 것보다는, 오픈소스 운동이 지닌 공유의 가치를 거세한 채 기존의 운동을 상업화하는 독점업체들의 논리가 아무래도 한 수 위다. 미국의 P2P 음악서비스 ‘냅스터’는 지난해 파산 후 11월 600만달러의 자본을 수혈받아 온라인 유료 음악서비스인 ‘냅스터 2.0’으로 탈바꿈했다. ‘소리바다’도 3월부터 유료로 전환한다고 한다. 영리한 자본의 생리야 그렇다 쳐도, 그로 인해 인터넷의 자유정신까지 화폐의 굴레를 온전히 뒤집어쓰는 현실은 문제다. 오픈소스 운동에 대해 각국 정부들이 ‘시민의 공공영역 확대’보다는 ‘경제적 비용 절감과 시장부양 효과’에만 열광하고, 지식정보 이용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새로운 공유문화를 오로지 상술로 가둔다면, 인터넷이 만들어온 ‘공유 철학’의 사회적 비전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웹진 ‘네트워커’ 편집위원 ▼용어설명 ▼ ●자원공유의 사회 모델 핀란드의 철학자 페카 하이마넨 박사(31)가 저서 ‘해커 윤리’(The Hacker Ethic·2001년)에서 제시한 개념. 그는 스페인의 사이버 이론가 마뉴엘 카스텔(저서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과 더불어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지는 공유와 나눔의 철학을 전 사회적인 복지모델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이마넨 박사는 이를 위해 필요한 인터넷 시대의 생활자세는 마치 어린 아이처럼 편견을 갖지 않고 사물을 대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P2P 일대일 파일공유(Peer-to-Peer file sharing)를 뜻한다. 기존 컴퓨터 정보교환이 ‘서버에서 클라이언트’로 중앙 집중적인 형태를 띠었다면 P2P는 개인 컴퓨터끼리 직접 연결하고 모든 참여자가 공급자인 동시에 수요자가 되는 평등형 정보교환 형태. 1999년 당시 고교생이었던 숀 패닝이 개발한 미국의 P2P 음악서비스 ‘냅스터’, 그의 한국형 모델이라 할 수 있는 ‘소리바다’ 등이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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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신문] 디지털혁명, 신화 그리고 현실

[디지털 혁명, 새로운 대안 찾기는 가능한가-(2)디지털혁명, 신화 그리고 현실] 비역사성에 기초한 디지털 신화, 대중의 탈정치화 불러올 뿐 중대신문 (1998년 11월) 디지털 혁명의 여파가 본격적으로 우리 생활에 파급되면서 디지털 혁명은 문화의 생산과 소비, 유통구조를 포함한 일상생활의 전반을 바꾸어 놓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디지털 혁명이 가져올 장미빛 미래에 대한 목소리들이 근거없는 낙관론이 아닌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지 고찰해 본다. <편집자주> 신화 혹은 이데올로기는 보통 현존하는 권력관계를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믿음과 재현의 체계로 언급된다. 지배력은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선전함으로써 정당화시키며, 그들의 신념을 당연시하고 보편화하도록 하여 지배력을 자명하고 형식상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그 과정은 무언의 체계적인 논리틀로 경쟁적인 사고 형식들을 배제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사회 현실을 축조함으로써 완성된다. 그 과정은 실제적인 모순의 상상적 해결로 이끈다. 이렇듯 지배력 혹은 지배 계급이 시대에 따라 그들의 고유한 신화를 유포해왔다고 본다면 현대의 지배적 신화는 디지털한 것(being digital)에서 출발한다. 일반적으로 신화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특수한 계급의 규범이 자연 질서의 자명한 법칙처럼 당연시된다는 데 있다. 디지털 혁명의 신화가 기정사실화 되는데도 '상식'이 가려있는 것이다. 상식은 상식을 말하는 계급의 자의적인 질서 위에서 멈춘 지식, 즉 상대적으로 고정된 국면이다. 하이테크 이론가인 아서 크로커는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주도하는 집단을 가상계급(virtual class)이라 칭한다 가상계급의 주구성인자는 20세기의 변종인 약탈적 자본가들과 신종 테크노 엘리트다. 디지털한 상식의 조건들은 이들 신종계급의 논리 자체를 보편화하고, 더 나아가 다른 목소리들을 이들의 정서로 함몰시켜 나가고 있다. 즉 가상계급의 신화가 21세기 인류 전체의 미래상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거창한 구호에 가려진 상업성 가상계급의 디지털 신화창출의 일차적 조건은 네트에서 정보초고속도로와 글로벌 정보하부구조(GII)로의 이동, 그리고 그 속에서의 신화 구성에서 이루어진다. 즉 가상계급에 의한 인터넷 죽이기. 가상계급에게 있어서 네트는 정보초고속도로의 안티테제이다. 그들은 자유의 인터넷을 격자화된 디지털의 고속도로로 만들고 싶어한다. 유연한 네트워크망을 보다 상업적인 조건에 맞추려는 기획이 정보초고속도로의 의도이다. 자유와 보편의 영역을 글로벌 미디어의 특수한 언어와 의미로 바꾸어내는 것. 디지털 시대의 거창한 슬로건, '대중에게 모든 권력을!'의 밑바닥에는 상품화 논리가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예컨데 정보초고속도로의 기획으로 잡혀있는, 최저 이용요금에서 이용당(pay-per)요금지불 체계로, 정보의 생산에서 소비로, 정보 추구보다는 오락과 쇼핑으로의 전환은 한마디로 인터넷의 상업화 모델을 지칭한다. 인터넷이 더 나은 것, 즉 정보초고속도로로 바뀔 수 있다는 가상계급들의 비전은 물활적으로 움직여 나가는 네트의 본성을 글로벌 기업의 이윤 동기하에 구획화하려는 음모에 가깝다. 네트의 자생을 가로막는 가상계급의 음습한 기도는 인터넷 모델을 역회전하여 새로운 자본 모델로 바꾸려는데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올 것은?' 소니사의 이 광고문구는 '그 이전에 있었던 것들(前史)'을 문제삼지 않는다. 디지털 신화는 이전의 역사를 제거하고 단절시킨다. 전사를 구성했던 모든 사물들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디지털 세계로 올 때, 그 진정한 가치란 부재하다. 역사의 규정적 성격, 즉 희소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 제거되고, '역사의 종말'과 함께 디지털 혁명의 한 세기가 도래하는 것이다. 역사의 종말론과 테크놀로지가 결합하면 초월주의적인 '테크노종말론(Techno-eschatology)'에 이르며, 연이어 정치, 사회, 문화 등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 '역사적 중력장을 극복하기 위한 속도전(escape velocity)'에 돌입한다. 인간의 역사와 운명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세속적 신학의 비전, 그리고 무제한적으로 팽창하는 자유시장과 기술에 대한 믿음이 뒤엉켜서 우리는 또 다른 세기를 꿈꾼다. 탈정치화 부르는 비역사적 신화 구역사의 초월과 청산 논리는 특히 가상계급의 이데올로기들, 예컨데 아톰에서 비트로의 이동을 주장한 네그로폰테, 마이크로코즘의 조지 길더, 지식으로의 권력이동을 주장한 토플러, 경영혁명의 드러커, 후기산업사회론을 주장한 벨 등의 미래학자들에 의해 공고히 되어 왔다. 이들 모두는 '비트뱅(Bit-bang)'혁명의 신화, 즉 제한된 물질과 집중된 권력으로부터 해방된 인간과 역사 초월의 기술적 서사를 통해, 과거의 구질구질한 역사성을 탈각하여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의 도래를 맞이할 것을 주장한다. 이들은 구역사를 청산함으로써 권력관계 안에서 파악된 총체적 인간관계인 정치적(politique) 논의를 중단시킨다. 역사적 맥락의 제거는 자연히 대중에게 역사 개입의 무력감을 동반한다. 디지털 산화의 비역사성이 대중의 비/탈정치화를 낳는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계급은 비/탈정치화의 실제적 담론을 '정치적' 신화의 역공세로 내친다. 예를 들어 전자민주주의와 가상공동체라는 정치적 신화를 통해 정치·사회적 영역의 비/탈정치화를 조성한다. 주로 이같은 신화는 디지털 상품을 소비하며 네트에 접속하는 개인들에게 이루어지는 무한한 '권능(empowerment)'의 유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즉 테크노기술의 가능성이 새로운 민주적 커뮤니케이션의 건설과 해방에 대한 언약으로 정치화하는 것이다. 인터넷의 대중화 초기였던 80년대의 신화는 구래의 보수적 정당구조에 디지털 기술을 결합시킨다면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이 지배적이었고, 아직도 그 믿음은 여전한 듯하다. 전자민주주의가 자율적 소수들이 제 목소리를 내고, 컴퓨터로 매개된 의사소통을 통해 다양한 주장들을 공론화하는 시스템을 지칭하는 반면, 정치 현실에선 버튼누르기식(push-button) 선거과정이 전자민주주의를 가름하는 용어인 양 사용되고 있다. 민주주의가 평등한 참여자들간의 의사소통 및 결정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결과를 지칭한다면, 구정당 구조내에서의 인터넷 활용이 민주주의를 담보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이버 정당' 정치라는 허울은 네트워크 기술을 업은 재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 정도를 디지털 카운터 장치로 환산하고자 하는 욕구일 뿐이다. 최근 정치인들이 홈페이지 등을 개설하여 네트를 대중적 선전장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폭주하는 것을 볼 때 애초의 민주적 가치가 깊이 없이 부유함을 다시 한번 확인케 해준다. 대중의 욕망에 충실한 가상공동체 또 다른 탈/비정치화의 정치적 신화는 온라인 혹은 가상공동체에 대한 믿음이다. 공동체론자들은 육체 이탈의 결과로 현실의 지리/사회/경제적 조건보다는 별명 등 개인사를 보여주는 이름, 프로필, 목소리 등 현실의 주문(mantra)을 벗어난 가상 정체성이 우위를 점한다고 본다. 그러기에 가상의 공동체는 네트워킹을 통해 소속 회원의 다양성과 참여성을 비배타적으로 그리고 평등하게 보장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바라보는 공동체의 정치적 수위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그들이 가상공동체라 말할 때 게시판, 채팅방, 동호회 등의 느슨한 그룹에서부터 토론그룹, 지역공동체, 글로벌 연합체 등의 보다 정치적인 모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포괄한다. 이같이 공동체에 대한 정확한 계급/정치적 입지점이 불분명함으로써 대개는 모이는 것 자체만을 중요하게 취급한다. 둘째, 현실공동체에 긴밀하게 의존하여 파생된 용어가 가상공동체라고 본다면, 인간적 접촉을 최소화하는 것은 사회적 치유 효과보다는 소외를 상승시킬 수 있다. 현실의 접촉없는 네트워킹은 현실의 목소리를 내는 거리를 차단하고, 비/탈정치화로 가는 지름길을 닦게 한다. 셋째, 공동체적 의도가 온라인 기업의 마케터들에게 놀아날 공산이 크다. 신흥 자본가들은 인터넷 서비스 가입이 곧장 글로벌 온라인 공동체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선전한다. 사적 소비 자체가 공동체의 본질인양 둔갑하는 것이다. 이같이 논의의 과도한 비약을 하이테크 자본가들이 차용하는데는 공동체에 대한 대중의 욕망을 적절히 간파하는 그들의 능력에 있다. 대중은 현대의 지시물없는 상실감에서 비롯된 치료제로서 전통적 공동체의 대체물인 가상공동체를 희구한다. 글로벌 사기업들은 명민하게도 이를 이용하여, 온라인 공동체를 인터넷의 물적배경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역할, 그리고 서비스 기술의 수용을 통한 대중의 의식적 통합과 친근성 확보, 최종적인 상품 소비를 원활하게 이루기 위한 촉진제로 활용한다. 결국 전자민주주의와 가상공동체의 신화는 더욱더 구역사의 초월과 정치적인 것의 실종이라는 기획을 확고하게 만든다. 동시에 가상계급은 스스로의 발생학적인 숙명을 은폐하는 효과도 갖는다. 정치/경제적 근원에서 구역사를 경향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옮겨놓고 있는 계급적 모순 말이다. 이로써 대중에 대한 디지털 신화의 1차 유혹인(誘惑因)은 마련된 셈이다. 이광석 <네트분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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