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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넷] '딴지일보'에 딴지걸고 넘기

'딴지일보'에 딴지걸고 넘기 진보넷 2000.6. 지금으로부터 30여년전, 독일의 한 인문학자, 엔ㅤㅉㅔㄴ스베르거(Hans Magnus Enzensberger) 란 사람이 뉴미디어 시대의 새로운 실천적 전략을 구상한, 아직까지도 미디어 활동가들에게 지침이 되는 유명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글 속에서 전자 미디어의 새로운 가능 성을 점치고 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꼭 현재 진행하는 인터넷의 기술적 태동을 이미 알고 이에 대비했던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의 글이 아직까지 살아 숨쉰다는 점이다. 그가 내논 대안 미디어의 실천 명제들이 이제 다시 보더라도 가장 핵심적인 사안을 건드리고 있다. 그 가 보는 뉴미디어의 장점은 탈중심성, 수평성, 상호작용성이고, 이를 통해 뉴미디어의 '해방 적 이용'을 꾀하자고 주장한다. 즉, 그는 뉴미디어의 기술적 혁명성을 통해 이를 대중 동원, 정치적 학습과정, 집합적 생산, 사회의 자율적 통제 등의 도구로 활용하자고 외친다. 요즘 지겹도록 듣는 인터넷의 기술적 장점들이 30년전 그의 글에서 똑같이 예견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뒤에 열거한 뉴미디어의 해방적 이용 방식에 관한 것이다. 기술 적용의 과정을 고려한다면, 어떤 기술의 장점이란 기술 이용의 주체와 무관할 수 없다. 그래서 새로운 기술의 새로운 이용 방식에 대한 대안이 더욱 필요하다. 바로 엔ㅤㅉㅔㄴ 스베르거가 얘기한 뉴미디어의 해방적 이용은 이러한 대안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다. 그의 문제의식은 개인의 고립, 탈정치화, 전문가 생산주의, 재벌 혹은 관료통제에 맞서기 위한 뉴 미디어 전략이었다. 조회수 수천만을 훨씬 넘는 초유의 인터넷 패러디 신문 <딴지일보>는 엔ㅤㅉㅔㄴ스베르거의 명 제를 감안할 때 이같은 미디어 운동의 새로운 대안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서 있는가? <딴지 일보>의 위상을 그저 '건강한' B급 패러디로 보자면, 실천 운동으로서의 기대 심리가 웃긴 발상이겠으나, <딴지일보> 자체가 이미 'B'급에서 '특'급으로 격상한 상황에서는 뭔가 '딴지'를 걸어보며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한 듯 하다. 패러디는 보통 현실, 특히 우리에게는 정치'쇼'에 대한 냉소에서 비롯한다. 거대 권력들, 특히 정부, 언론 등에 대한 패러디는 관객에게 권력에 대한 말로 이루어진 배설과 독설의 헛웃음을 선사한다. 패러디의 치명적 약점은 소재는 다양한데 소구 방식(언어의 B급화)은 동일하다는데 있다. 소구 방식의 동일성은 '관객'을 지치게 만든다. 도저히 '동 원'(mobilization)할 수 없는 '관객'과 함께, 비생산적 패러디의 반복되는 지루함은 의도했건 아니건 정치적 학습을 방해할 수 있다. 실지 <딴지일보>에서 보여주는 패러디의 효과란 다름아닌 언어 형식의 냉소적 비틀림인데, 이를 거세하면 '관객'은 뿔뿔이 사라진다. 어쨌거나 <딴지일보>는 인터넷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름없는 소수가 자신의 미디어 수단을 만들고 자신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관심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기고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집합적 생산의 힘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언론 재벌의 막강한 유통망을 비집고 힘없는 소수가 자신의 디지털 매체를 통해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소수 매체적 영향력이 <딴지일보>의 역량 그 자체보다도 그 패러디 소재들에서 근원한다면 문제 가 크다. 거대 권력의 노는 꼴이 정치쇼라면, <딴지일보>가 이 정치쇼 덕분에 스타가 되었 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삶에 지쳐 그 답답함을 풀기 위해 대포집에 거하게 취해 열변을 토 하는 아저씨들이나 손님 올라타자마자 정치 얘기 꺼내는 택시 기사 아저씨들의 풍경이 이 시대 서민의 억압에 대한 상보적인 배설 습관이라면, <딴지일보>에서도 비슷한 동기가 충 분히 감지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맹목의 배설이 되지 않으려면 상호작용하고 이슈화하고 동원하여, 그 힘으로 사회적 통제 를 가능하게 만드는 자율적 상호 '연결'의 힘들이 중요하다. 현실의 실천적 힘이 충원되지 못할 때, 그 매체는 이미 공허하다. <딴지일보>의 운명은 권력의 쇼가 진행되는 한 영원하 다. 우리의 3류 날나리 정치권력 하에서는 제2, 제3의 정치 패러디 사이트가 생길 수 있으 며, 짭짤한 조회수를 계속해서 기록할 수 있다. 그 속에서 패러디의 소위 '건강성'은 다른 집단과 연결하고 관계맺고, 이를 공론화된 힘으로 바꿔내는 노력이 없을 때는 쉬 노쇠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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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종합예술대학원 신문] 0과 1로 본 디지털 문화의 변증법

0과 1로 본 디지털 문화의 변증법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CyberMarx.org) 無와 1 수학자인 브라이언 로트먼(Brian Rotman)은 1987년에 쓴 {무의 의미작용: 0의 기호학}에 서 13세기부터 시작된 서구문화를 바라보며 현실에 대해 맺고있는 인간의 관계가 급격히 변 하게되는 세가지 발명을 들고 있다. 그는 '무의 기호'인 0의 사용, 경제적 등가교환을 위해 고안된 '가상' 지폐의 출현, 원근 재현에 있어 소멸점의 이용을 지적한다. 로트먼이 얘기한 이러한 '무'(nothing)의 지표들은 인간에 의해 구성될 상대적이고 인공적인 세계관의 출현을 예고한다. 하이데거는 '무'란 부정과 없음보다는 '존재'(being)의 근원을 설명하는 열린 자원이라고 본다. "무가 존재를 배회한다"는 샤르트르의 유명한 문구 또한 '무'의 생성적 가능태를 보고 있다. 물론 샤르트르는 한발 더 나아가 '무'는 존재를 배회할 뿐만 아니라 존재의 자유로움 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자유로움이 곧 '무'를 규정하는 힘이라 여긴다. 무는 말끔히 삭제된 상태를 뜻한다기 보다는 존재를 위해 무한히 열려있는 가능태에 가깝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로트먼이 제기한 인간이 고안한 무의 세가지 추상적 지표들은 인공적이고 상대적인 존재를 위해 무한하고 자유로운 가능성으로 '배회하는' 것들이다. 인간에 의해 비실제적인 것을 현 실화하는 조건인 셈이다. 현대에 이르러 다시 한번 무의 새롭고 강력한 지표가 등장했다. 0이란 무의 숫자에 1을 덧붙임으로써 만들어진 추상의 디지털 조합은 샤르트르가 얘기했던 존재를 위한 배회에 더 해, 자유로운 존재를 위한 혁명적 토대로 등장한다. 디지털은 가상의 존재를 통해 '무'의 자 유로움을 구체화한다. 이제까지 0의 발명이 현실 세계와 인간에 의한 추상적이고 가상적인 고안물 사이의 근본적 분리를 재촉했다면, 0과 1의 결합은 그 분리와 차이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현실과 인간에 의해 투사된 가상간의 경계 자체를 흐리 고 있다. 디지털 무로부터 존재론적 배양이 무수히 일어나고, 현실의 모사물들이 끊임없이 복제되고, 의식의 새로운 상상물들이 현실로 자리잡는다. 0 혹은 1 디지털 시대의 문화는 바로 0이란 가능태 더하기 1의 존재 형식을 가장 자유롭게 드러낼 때 빛을 발한다. 모든 디지털 인공물의 회귀적 단위인 0과 1을 가지고 은유적으로 놀아보면, 0은 디지털의 가능성을 담고 있고, 1은 0을 규정하는 현실적 권력으로 표현할 수 있다. 1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가능태로서의 0은 항상 1에 의해 조건화된다. 1을 배제한 채 디지털 0을 극한으로 밀고 올라가면, 디지털 현실은 이지러진다. 마찬가지 로 1의 논리로 0의 상상력을 억압하면 디지털의 가능성은 출구를 잃는다. 후자는 0의 무한 한 가능성을 외면하거나 용납하지 못하면 발생한다. 현실의 권력을 반영한 1을 극대화하면, 디지털 정보의 가능성을 과거의 잣대로 억압하는 경향이 발생한다. 거대 복제기계인 네트에 서 피어오르는 자생적이고 자율적인 정보공유의 흐름을 지적 재산권 등의 수단을 동원해 통 제하려는 자본의 욕구는 0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시도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0 과 1의 디지털 인공물은 김빠진 맥주처럼 생동감을 잃는다. 예술적 표현에 있어서도, 인간의 오감이 시대에 따라 변하면 그것을 담을 새 그릇도 같이 준비하기 마련이다. 디지털 매체의 다양한 표현 양식이 1의 오만과 권위로 천박함의 딱지를 달고 변방만을 전전한다면 그것 또 한 0의 압살에 해당한다. 디지털 예술의 정착도 시장주의에 입각한 주류와 비주류 구분에 놀아나도 똑같은 결과를 얻기는 마찬가지다. 1의 시장 논리에 위장된 가짜 0이 판치기 시작 하는 것이다. 한편, 1을 배제한 0의 무한은 '엽기'로 판명되거나 결국에는 1을 위협하기까지 한다. 소위 디지털 행위 예술가들의 몇몇 작업에서 그 극한적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호주 출신의 행 위예술가인 스텔락(Stelarc)은 이미 80년대부터 디지털과 합일되는 신체의 '소멸'을 위한 기 획으로 신체확장 실험을 꾸준히 지속해 왔다. 그의 실험의 최종 목표는 신체에 이식된 기계 가 신체의 명령에 종속되는 단계를 넘어서 기계가 신체의 리듬을 지배하고 하나되는 단계 다. 디지털 0으로만 채워진 극단의 모습은, 신세기 밀레니엄 여성으로 추앙받는 프랑스의 '카날 아트'(carnal art)의 대가 올랑(Orlan)에게서도 관찰된다. 수십차례의 성형 수술을 통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그녀의 신체 모델은, 비록 대상화된 외모의 가치를 부정하면서 다중적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한 작업의 의의를 갖지만 그 궁극적 목표는 스텔락과 마찬가지로 목적없는 신체 소멸관에 귀결한다. 0만을 위한 가능성의 집착은 역으로 그 가능성의 해체만을 부른다. 이들에게 존재하지 않 는 1의 현실적 측면은 정치적 기획의 상실이다. 디지털 기술을 코드화하는, 패권화하는, 그 리고 상품화하는 1의 권력 실체에 대한 의문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들에게 0의 천국은 물리적 신체의 디지털화를 위해서만 유용하다. 그래서, 1에 의해 조건화된 0의 사회적 구조 를 극단적 0의 실험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이들의 퍼포먼스에 충격을 먹은 관객들이 구토와 실신을 거듭하는 것은 그 카니발적 면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1이 빠진 0의 과다 주 입에서 생기는 현기증 때문이다. 0+1, 그리고 α 새로운 '무'의 현대적 지표인 0과 1이 초기 디지털 문화로 정착하는데는 이처럼 시장잡배 와 디지털 광신도들이 설치기 마련이다. 새로움과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디지털 '무'의 존재 는 문화계의 일부 광신도를 낳고, 이를 현실의 이윤과 권력에 종속시키려는 자본 건달들을 키운다. 그러나, 서서히 디지털 코드의 0과 1은 동전의 양면처럼 조화롭게 공생해야 한다는 관점이 늘고 있다. 사람들은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억눌리면 문제가 생긴다는 점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0의 새로움과 1의 현실성이 제대로 결합된 디지털 '존재'일수록 완성도가 높다는 당연한 상식을 조금씩 인정하는 것이다. 디지털 문화의 형성과 적용에 주체적으로 개입하는 움직임이 관찰된다. 크리티칼 아트 앙 상블(Critical Art Ensemble)의 기획도 그 중 대표적 사례로 들 수 있다. 앙상블은 1986년 여섯 명이 모여 결성한 미디어 예술 창작집단이다. 그룹 내에서 각각은 자신이 지닌 독특한 능력들, 퍼포먼스, 북 아트, 그래픽 디자인, 컴퓨터 아트, 필름/비디오, 텍스트 아트, 사진, 그리고 저술 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앙상블은 예술적 수단을 청중의 성향과 그 특수한 상황 에 맞춰 선택하고 창작 작업에 들어간다. 창작물을 만드는 매체 수단에 중심을 두기보다, 특 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맥락을 중시한다. 매체는 말하고자 의도한 토픽과 상황/맥락을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유용하다. 장소에 있어서도 화랑, 박물관, 라디오, 텔레비전, 페스티발, 클 럽, 술집, 인터넷, 길거리 등 예술적 표현이 극대화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리지 않는다. 이들은 단지 예술가들의 모임이라기보다는 폭넓은 학제간 연구의 실험 집단과 같다. CAE 는 예술, 테크놀러지, 비판이론, 정치적 행동주의가 서로 삼투하는 접점을 찾고자 한다. 예술을 정해진 경계안에 가두는 행위는 폭넓은 지식 체계의 접근권을 스스로 막는 행위라 본다.이러한 운동을 수행하는 근거는 기본적으로 서구문화에 깊게 가로놓인 권위주의적 토대들을 드러내고 이에 도전하려는데 있다. 특히 앙상블은 저항 정신을 중심에 놓고 사고한다. 하지만 과거에 있었던 혁명처럼 일시에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환상도 거부한다. 현대 권력은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총체화된 힘이라고 본다. 이들에게 혁명은 죽은 아이디어다. 설사 혁명이 일어나더라도 일상화된 문화에 각인된 권력의 흔적들은 제거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앙상블이 취하는 저항은 영구적이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다양한 층위와 형태 들을 계속해서 뒤집고 조롱하고 비판하는 작업을 끝없이 벌여나갈 수밖에 없다. 차츰 권력 으로부터 벗어난 자율의 영역을 개척해서 세워나가는 것이 그들의 예술적 목표이다. 앙상블이 '무' 혹은 디지털 0의 가능성을 취하는 방식은 이렇듯 디지털 1의 조건을 고려하 면서 이루어진다. 예술적 시연에 있어서 거의 모든 매체들을 이용하는 것과 학제간 영역을 넘나드는 것은 0의 생성적 가능성이다. 매체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창작의 각종 장소들 또한 원하는 결과를 얻기위해 고려되는 선택 범주다. 다시 이들에게 0은 1로 현실적 의미를 얻는 다. 인터넷 시대의 저항 전술에 대한 그들의 기획 저술들과 실천의 고민을 통해 새롭게 변 화된 전자적 저항의 다양한 층위를 구체화하고 있다. 0의 극단을 타면서도 1의 현실감을 결 합하는 앙상블의 집단 창작 속에서 디지털 문화의 변증값, 알파가 엿보인다. 이제까지 디지 털 문화에서 0과 1의 관계는 서로 서먹서먹하거나 각기 평행선을 달렸다면, 이를 가로지르 는 방법을 앙상블과 같은 디지털 시대의 아방가르드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국예술종합학교 200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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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거대언론 후원의 FCC

거대언론 후원의 FCC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다음달 2일 표결 결과에 따라 미 연방통신위원회(FCC)의 각종 언론 독점 규제안들이 일 거에 풀려나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것도 부시 행정부와 FCC의 공화당계열 위원들이 사 려깊은 논의없이 표결을 속전속결로 밀어부칠 태세여서 여론의 비난이 더욱 가중되고 있다. 이제까지 공식 공청회라곤 단 한번 열렸고, 9건의 임시 공청회마저 FCC 위원장 마이클 파 월이 불참한 반쪽으로 치뤄졌던 터였다. 자연히 이번 표결에 대한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가 거세다. 언론 관련 연구단체들이 FCC 에 보낸 18,000여건의 의견서들 중 거의 대부분인 97% 정도가 기업 집중을 막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여러 시민단체들과 3백여 학계 인사들, 그리고 가수들까지 언론 독점을 가속화할 이번 표결에 분노해 서명 작업에 나섰다. 1백여명의 국회 하원의원들은 예정된 표결을 한달 뒤로 미뤄 신중하게 언론 규제안을 검토할 것을 촉구했다. 시장 집중에 대한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역시 파월이 꿈꾸는 약육강식의 시장 신념은 끄떡없다. 지난 2월에 '언론발전기획'(Project for Excellence in Journalism)에서 내논 보고서가 5년간 기업군별로 뉴스를 비교 분석, 언론 독점의 해악을 구체적으로 밝혀 여론의 큰 지지를 이끌었지만(<미디어오늘> 2003년 3월 6일자.), 여전히 파월의 독점 옹호론을 흔들기엔 역부족이다. 예상대로 2일 표결은 파월의 의도대로 갈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파월에 다시 악재가 생겼다. 그를 비롯해 FCC의 도덕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됐 다. 최근 '공공성 보전 연구소'(The Center for Public Integrity)라는 미디어 연구단체는 3년간에 걸쳐 FCC 핵심 직원들의 외유 자금 조사 과정을 수행한 보고서 (www.openairwaves.org)를 펴냈다. 보고서는 FCC 직원들이 지난 8년간(1995. 5월부터 2003 월 2월까지) 각종 행사 명목으로 받은 외유성 자금 지원이 200만 달러 정도의 국가 지원금 을 빼면 도합 280만 달러며, 그 출처가 대개 정보통신기업과 언론 기업들의 주머니로부터 나왔다고 적고 있다. 여러 차례 언론 시민단체들에 의해 FCC와 대기업들의 밀월 관계가 지 적됐지만, 이번 보고서는 외유 경비, 행선지, 방문 횟수, 수뢰자 명단, 후원 단체나 지원 자 금 액수 등 그 규모가 대단히 구체적이고 최신 것이라 그 신빙성을 더 높이고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직원들은 지난 8년간 총 2,500건의 외유를 다녀왔고, 가장 즐겨찾는 행 선지로 330회를 기록한 라스베가스, 그리고 뉴올리언스, 뉴욕, 런던 순으로 나타났다. 44회의 외유를 기록한 파월은 기업들로부터 역대 위원장 중 가장 큰 접대를 받은 것으로 기록된다. 한편 '전국방송협회'는 206명의 FCC 직원들에게 191,472 달러의 여행 경비를 조달해 가장 큰 자금줄로 드러났다. 재밌게도 이 단체는 지난 수개월간 현행 소유권 제한 규정을 풀려고 무던히도 애쓰던 중이었다. FCC의 핵심 직원들이 이렇듯 기업들과 '푸근하고 돈독한' 관계를 맺으면 정책이 올바를 리 없다. 기업의 돈을 덥석 물어 쉽게 흥청거리는 국가 공무원들의 도덕 불감증도 문제지만, 이로 인해 이들이 각종 향응성 외유를 통해 기업가들과 주로 만남으로써 눈과 귀가 쉽게 멀 어 다른 재야 의견들이 비집고 들어설 틈이 없다면 문제는 더 근본적이다. 그러다보니 FCC 가 기업들이 만들어낸 언론 독점 홍보용 자료나 보고서 등을 그대로 비판없이 정책용 자료 로 차용하는 우를 쉽게 범해왔다. 이번 표결에서 "FCC가 공정하고 독립적인 판단을 하리라고 본다면 개가 웃을 일이다". 이번 보고서를 만든 연구소의 찰스 루이스(Charles Lewis) 소장이 내뱉은 독설이다. FCC와 독점 언론간의 내연 관계가 폭로됐음에도 파월은 또 한번 외부 비판에 의연하다. 하지만, 독 점 강화에 대한 각계각층의 비판과 연대에 그토록 보수적인 전국총기협회까지 가세한 분위 기를 따져 보면, 이제까지 힘을 쓰던 파월의 독단도 그리 쉽게 가거나 오래갈 것 같진 않아 보인다. (미디어오늘 2003.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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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폭스 효과'와 미 언론의 보수 우익화

'폭스 효과'와 미 언론의 보수 우익화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미 언론에 보수 우익의 칼바람이 분다. 이라크 방송에 출연한 까닭으로 NBC에서 쫓겨난 피터 아넷이야 그의 유명세 덕으로 언론의 주목을 끈 경우다. 얼마전 <샌프란시스코 크로니 클> 일간지는 이라크 침략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는 명목으로 소속 칼럼리스트를 가차없이 잘라냈다. 미 정부의 외교 정책을 나치 독일에 비유했다는 이유로 CBS 방송사는 소속 피디 를 길거리로 내쫓았다. 멋모르고 반전 기사를 썼던 지방지 기자들의 해고 행렬도 여기저기 줄을 잇는다. 이들의 정확한 해고 사유는 애국에 취한 독자와 시청자의 흥분 유발죄다. 미 전역의 거의 모든 라디오 상업 방송을 틀어쥔 언론 재벌 클리어(Clear) 채널은 이라크 침략과 동시에 반전 무드를 조장하는 음악 모두를 자진 일소됐다. 한 유명 컨츄리 여성 3인 조는 겁없이 부시를 비판해 클리어의 모든 방송에서 자신들의 음악이 사라지는 수모를 겪어 야 했다. 참다못해 영국 BBC 방송의 그렉 다이크 사장은 어떻게 이처럼 미 주류 언론들이 애국주의의 "성조기 속에 꼭꼭 싸일" 수 있는 지 경악했다고 밝혔다. "언론의 이데올로기적 다양성 면에서 보자면, 지금보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절이 훨씬 낫 다"라는 냉소가 터져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라디오와 방송은 완전 보수화의 진지가 됐고, 신 문은 거대 언론사들 중심으로 상당 수준까지 오염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무엇이 이렇듯 미 언론의 보수화를 급격하게 가져오고 그나마 존재하던 자유주의적 시각을 후미진 곳으로 밀 어내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루퍼드 머독이 이끄는 거대 보수 언론의 공이 크다는 지적이 일 리 있다. 91년 이라크 침략 때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케이블 방송 <폭스 뉴스채널>은 9-11 동시다 발테러 이후 급격하게 시청률을 늘리며 이번 2차 침략에서 뉴스 경쟁사 CNN과 MSNBC를 한참 따돌렸다. 머독은 케이블 뉴스의 선두 장악과 함께 자신의 일간지 <뉴욕포스트>와 주 간지 <위클리 스탠다드> 등 골수 우익 매체를 한목소리로 이끌며 이번 침략 전쟁의 당위성 을 진두 지휘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AOL 타임워너의 부회장 테드 터너가 "머독은 전 쟁 미치광이"란 쓴소리까지 한 정황이 십분 이해가 간다. 더 큰 문제는 폭스가 안팎으로 우익 이데올로기를 세포 분열하는데 있다. 이것이 이른바 새롭게 우려할만한 미 언론의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는 '폭스 효과'다. 전쟁의 놀자리를 마련 해준 미 매파의 공조가 후광이 되고, 폭스는 애국주의로 자신의 매체를 적극 선전 도구화하 고, 다시 여러 경쟁 매체들은 폭스를 따라잡고 배우려는 모방 심리에 이끌림으로써 폭스는 보수 논리를 확대 재생산하는 숙주로 자리잡는다. 일례로, 전쟁내내 MSNBC는 폭스의 애국 주의에 의한 상업적 성공에 감격해 폭스를 모방하는 폭스 효과에 철저히 감염된 모습을 보 였다. 폭스 효과는 보도의 윤리도 퇴색시킨다. 잣대는 공정과 객관이 아니라 국익과 애국이다. '우리', '해방'등의 수식어를 남발하고, 성조기를 늘상 텔레비전 화면에 드리우고, 때아닌 늘씬한 외모의 통신원들이 피로 얼룩진 사막에서 미군의 승전보를 전하고, 정말 찾기도 힘든 골수 우익 정객들을 한자리에 불러들여 스튜디오를 이들의 성토장으로 만들던 폭스의 보도 태도가 타 언론사들에 오염되고 학습된다. 미디어 평론가 에릭 앨터만(Eric Alterman)은 그의 새 책 <리버럴 미디어라고?>(What Liberal Media?)에서 보수 극단의 길에 들어선 우익 언론과 논객들에 신랄한 비판을 해 언 론계 내부의 보수-혁신간 이념 논쟁을 이끌고 있다. 앨터만은 골수 우익들이 미 언론의 자 유주의 분위기를 경계하고 비난하지만, 실상 공화당계 극우 보수들이 거대 자본력을 이용해 거의 모든 미국의 주요 매체들을 장악함으로써 좌파는 고사하고 자유주의자들이 마땅히 설 땅조차 사라졌다고 본다. 그의 판단에 의거하면 필자가 보기에 미 언론은 순도 99.9% 보수다. 더구나 폭스 효과의 자가 증식 능력에다 또 다른 침략을 준비중인 매파의 차기 행보를 따져보면 그마저 남은 0.1%의 리버럴한 희석 성분마저 극우 매체들의 위세에 눌릴 처지다. 온통 천지가 폭스들이 다. (미디어오늘 2003.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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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임베드'? 동행취재 혹은 동거취재

'임베드'? 동행취재 혹은 동거취재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명분을 쌓는데 거대 언론사들의 노고가 지나칠 정도다. 이라크 침 략이 시작되자 거의 모든 매체가 전쟁반대의 목소리를 지면과 화면에서 일제히 제거했다. 신문에선 단 몇 줄의 개별 기사나 일부 외부 기고문에만 반전의 목소리가 겨우 유지되는 형 편이다. 미친 극우 매파의 희생양들이 곳곳에서 피흘리며 비명을 지르건만 텔레비전 화면을 채우는 건 첨단 살인 병기들의 시뮬레이션과 황량한 사막에서 분주한 미국 군인들 모습뿐이 다. 이라크쪽에 붙잡힌 미군 포로들에 '제네바협정'을 들먹이며 인권을 부르짖던 언론들이 이라크의 민간 방송사 건물을 한번에 날려버린 미군의 '전쟁 범죄' 행위는 애써 눈감는다. 미 국방부가 마련한 종군기자들의 동행취재 프로그램 '임베드'(embed)는 전쟁의 실상을 알리는데 더욱 무심하다. 임베드는 기자들을 스포츠 중개 아나운서 수준으로 만들었다. 민간 인들의 살상 등 전쟁의 잔악함을 알리는 임무는 온데간데 없고, 마치 큰 스포츠 행사를 취 재나와 경기를 마친 선수들을 인터뷰하듯 군인들의 시시콜콜한 감상문 받기에 분주하다. "사상 최초 연합군 부대 동행 취재"라며 으스대는 우리 선택받은 몇몇 언론들의 취재 행태 는 미 언론들이 국방부와 맺은 '동거' 수준을 넘어 한술 더 뜬다. 그러다보니 임베드가 선의 의 미 국방부 동행취재 프로그램으로 보이기 보단 사실상 민간인 참상으로보터 전세계 언론 을 멀리 떼어놓으려는 꼼수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이미 이라크 침략 전에도 언론과 미 정부의 동거 수준은 심각했다. 언론기사 전문 검색 회사인 '넥시스'(Nexis)가 올 연초부터 3월 중순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동안 공중파 3 사 ABC, CBS, NBC의 뉴스 프로그램들은 미국 공격이 몰고올 민간인 참상과 피해를 심각 하게 보도하지 않았다. 그보단 첨단 살상무기들의 '정확성'을 신뢰하는 기사들이 줄을 잇는 다. 전시에 앞서 공중파 뉴스들이 "정부의 확성기" 노릇을 했다는 한 언론 시민단체의 평가 가 그리 낯설지 않다. 전쟁 전의 확성기가 이제 국방부의 부름을 받아 전시 동거 취재의 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침략의 명분이 너무나도 궁해서일까? 91년에 이어 이번 걸프전 작전명이 "이라크 자유"란 다. 한 아랍권 언론의 사설은 "미국과 영국은 살육으로 이라크를 해방"한다고 한탄한다. 칼 로 도려내듯 자로 오차없이 재어 터뜨린다는 첨단의 폭탄이 눈이 멀어 같은 편을 죽이고 이 라크 양민들의 저자 거리와 마을을 피로 물들인다. 뇌가 날아가 머리가 빈껍질처럼 우그러 진 한 이라크 아이의 처참한 몰골은 임베드 내부에선 죽었다 깨나도 기사화되긴 힘들다. 이번 전시 언론처럼 철저하게 피의 현장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던 적이 없었노라는 일부 양 심있는 언론인들의 개탄이 점점 늘고 있다. 이같은 언론의 무책임한 방관에 임베드가 크게 일조하고 있는 셈이다. 전쟁 게임에 부지런히 임하는 초정예 아군들의 꽁무니만 연일 쫓아 다니느라 힘이 부치도록 만들어놨으니 어찌 소소한 양민 학살의 현장까지 둘러볼 여력이 있 겠는가. (미디어오늘 2003.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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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중소 지역 언론의 신장론이 득세

중소 지역 언론의 신장론이 득세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NBC, CNN, 폭스 등 미국의 주요 거대 매체들은 부시 대통령의 연두교서가 있었던 시점 에 즈음하여 모든 이라크 반전 광고를 전면 중단했다. 한참 몰아쳐도 부족할 판에 애국전을 흐리는 시민단체들의 광고들은 안팔아도 그만이라는 강짜를 놓는다. 말하기 싫은 것은 끝까 지 침묵하는 것도 거대 매체들의 속성이다. 미 연방통신위원회(FCC)가 독점 언론들의 살을 더욱 늘려줄 태세를 취하자 이해 당사자인 언론들은 정확한 사실을 알리는데 침묵한다. 대 중이 몰라야 그들에겐 득이다. 원치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자며 미국내 반한 감정을 주도했던 <뉴욕타임스>의 보 수 평론가 윌리엄 새파이어조차 요사이 언론들의 독점의 폐해를 강도높게 비난할 정도니, 그 상태가 정말 심각하긴 한 모양이다. 일례로, 1200여개의 방송국을 소유한 클리어채널 (Clear Channel)과 같은 언론 괴물이 내보내는 방송의 질을 따져보자. 지역 사정과는 전혀 무관한 중앙의 프로그램들이 비용 절감을 핑계로 계열사에 무더기로 복제되어 분산된다. 저 질 상업화를 부추키는 바이러스가 따로 없었다. 지난 달 언론 독점의 해악을 밝히는 대규모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언론발전기획'(Project for Excellence in Journalism)이라는 이름을 건 이 연구 단체는 98년부터 시작해 5년간 전 미 방송 시장의 25%을 대상으로 자본 규모에 따라 기업군을 넷으로 나눠 33000개 이상의 뉴스를 정밀 비교 분석했다. 애초에 시청자들의 뉴스 프로그램 선호도 등을 보려했던 이 기획은 근래 FCC의 지나칠 정도의 언론 독점에 대한 옹호가 미워 연구 방향을 전격 선회했다고 밝히고 있다. 뭐든 클수록 낫고 다양성이 증가한다는 FCC 위원장 마이클 파월의 감언 이 정말 근거가 있는지 따져보자는 심사였다. 20여 페이지로 정리된 이 언론 보고서를 읽고나면 파월의 독점 옹호론이 정말 새빨간 거 짓말 같다. 보고서 결과는 중소 규모의 지역 방송국이 독점 언론보다 그 지역에 양질의 뉴 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결국 자본 규모에 따라 지역 방송 뉴스의 내용이나 공익적 관심을 드러내는데 차이가 있더라는 설명이다. 전체 연구 결과에서 신문이 방송을 소유하는 등 교 차소유의 효과를 긍정하는 결과가 일부 나오기는 했지만, 소유의 집중이 지역 뉴스의 질을 갉아먹는 해악임이 충분히 입증됐다. 이들 보고서에 중소 규모의 언론 신장론과 시장 독과 점에 대한 규제론의 이중 메시지가 잘 담겨 있는 것이다. 언론계에 종사하는 현직 기자들이 언론계를 진단하며 쓴 책 <뉴스의 뉴스: 위기의 미 언 론>에서 보면 '나쁜 언론'의 세 가지 특징으로 알려야 할 사실을 알리지 않거나 일부러 잘 못 알리거나 피상적으로 알리는 태도를 꼽고 있다. 가만 보면 이 셋을 두루 겸비한 위험하 고 나쁜 언론은 상업적 이윤에 눈먼 독점업체들이다. 이렇듯 사방에서 독점 언론의 폐해에 대한 반대 증거와 여론이 늘고 있는데도 이를 관장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FCC는 아랑곳없 다. 이번 보고서가 시민단체들의 언론 독과점 반대의 유용한 증거가 되겠지만, 거대 언론들 과 이미 한통속이 된 FCC 관료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자극이 될 진 미지수다. (미디어오늘 2002.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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