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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에총/월간말] '김자지'씨의 수난과 희망

'김자지'씨의 수난과 희망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김자지(金自知)'란 실명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한번은 그가 한 포탈 사이트에서 정보를 얻 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등록하려다 번번이 실패했다. 원인은 그 사이트에 소위 유해 정보 차단을 목적으로 설치된 검열 프로그램이 남성 성기를 지칭하는 비속어인 '자지'란 단어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몇 차례 업자에게 진정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던 그는 내친 김에 이 름을 아예 '남근'으로 바꿔 등록해버렸다. '자지(自知)'를 '남근(男根)'의 눈으로 단번에 재려는 족속들에 대한 그의 통렬한 냉소적 표현이었다. 실제 이 일화는 미국에서 있었던 사건을 우리식 이름으로 바꾼 것이지만, 국내 여건도 이 에 못지 않다. 자퇴생 사이트 아이노스쿨 폐쇄, 누드사진을 올린 한 시골 교사의 홈페이지 폐쇄, 동성애자 카페들의 잇따른 폐쇄 등은 김자지씨의 어처구니없는 수난과 맥을 같이 한 다. 엄밀히 보면 이름값을 톡톡히 치른 김자지씨의 경우가 기술적 장치에 의한 사전검열의 피해자라면, 올들어 진행된 사이트들의 각종 폐쇄 조처들은 법적 근거를 내민 사후검열의 피해자들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검열의 주관적인 잣대를 예사로 들이대긴 다같이 동속이 다. 이처럼 내용에 등급을 매겨 차단하는 검열의 빗장은 물리적이고 기술적인 장치 모두에 걸쳐 있다. 정보 선진국의 예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정보통신윤리위원회란 준사법기구가 전면에 나서 고 일명 '통신질서확립법'이 발효됨으로써, 인터넷공간에는 '유해'한 디지털 정보를 사그리 불태우려는 분서갱유의 분위기가 감지된다. 인터넷 정보에 대한 강력한 규제 장치들이 사회 적 여과없이 '질서확립'의 끈을 두르고 수많은 선량한 '김자지'씨들을 남근의 몽둥이로 후려 치려 하고 있다. 악법은 대개 모호할수록 효력을 발한다. 모호함은 자의적이고 주관적 해석을 돕고, 적용 대상과 범위의 한계를 비웃는다. 이번 '통신질서확립법'도 '내 맘대로'와 '누구나'를 특기로 삼는다. '윤리위'에서 만든 내용등급의 '질서'를 '내 맘대로' 강제 '확립'하고, 이를 어기는 모든 정보제공자는 '누구나' 그 처벌의 굴레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내 맘대로'에 걸리면 정치적 표현물 등 청소년의 '유해'와 무관한 정보도 위협받기 쉽다. 또한 '누구나'란 대상에 끼지 않기 위해서 사업자건 개인이건 자나깨나 자기검열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 어쨌거나 말많은 악법은 이미 발효되었다. 이제부터는 이 악법에 대한 지속적 감시가 필 요하다. 규제 범위를 넘어선 표현 자유의 심각한 침해건들에 신속히 대응하기 위해서는 관 련 정보운동단체들의 연대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 법률자문을 받을 수 있는 상시적인 통로 가 마련되어야 한다. 또한 강제적인 법 집행이 자연스레 개별 정보들에 들러붙는 프로그램 '코드'의 검열로 옮겨가는데 대한 대비도 시급하다. 각종 정보차단 프로그램들의 효과 분석 과 문제점 진단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악법에 저항한 진보 넷 등 국내 정보운동단체들의 활동이 국제적 연대의 가능성을 한층 밝게 했다. 해외 관련 시민단체들과 사안별로 공유할 수 있는 전술적 고려도 필요하다. 인터넷은 더 이상 완벽한 자유를 보장하는 디지털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현실의 권력은 네트에 터를 잡고 각종 정보에 검열의 자의적 가위질을 시도하려 한다. 물론 그 방식은 폭력적이기보다는 점점 정교해지고 은밀해진다. 부지불식간에 인터넷의 자동 차 단된 검색 목록에 자신의 페이지가 올라올 수도 있다. '김자지'씨처럼 타고난 이름이 '외설' 로 취급되면 자동으로 정보 접근에 막히는 억울한 경우도 일어난다. 하지만, 인터넷은 완벽 히 통제가 가능한 공간도 아니다. '김자지'씨가 '남근'이란 가명으로 바꿔 천편일률적인 검열의 날을 피해 오히려 이를 조롱하듯, 인터넷에는 통제에 대비한 우회로가 항시 열려 있다. 이것이 수많은 건전 명랑한 '김자지'씨들에게 검열의 속박을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주는 근 거다. 민예총,『일일문화정책동향』. 2001. 7. [월간 말] 2001 년 9 월 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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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경실련] 글로벌 시대의 사이버 '제국'과 '다중'

글로벌 시대의 사이버 '제국'과 '다중'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축소되는 지구는 현대 기술의 축복 덕이다". 이런 류의 주장은 기술의 패권적 쓰임새를 가리고, 소위 강대국들의 독단적 의사 결정을 쉽게 범지구화와 등치시킨다. 물론 범지구화를 방해하는 모든 것은 시류를 거스르는 반역에 해당한다. 미 뉴욕타임스에서 통뼈가 굵은 토마스 프리드먼은 지난 달 제노바의 주요 8개국 정상 모임에 항거했던 이들을 바로 이런 논리로 나무란다. 한마디로 기술의 진보성도 모르고 범지구화에 역행하는 '반(反)글로벌주의자'로 못박는다. 시위자들은 졸지에 하나되는 세계의 진보를 거역하는 과거 회귀론자들로 낙인찍힌다. 하지만 제노바의 시위 현장에서 '축소되는 세계'의 청사진은 오히려 지옥에 가까웠다. 미 로스엔젤레스 경찰국에서 파견된 교관들의 특별 훈련을 받고 첨단 기술로 무장한 제노바 경찰들이 전세계 시위대들을 향해 휘두르는 무력 진압과 유혈의 얼룩들은 글로벌화의 정체를 여지없이 폭로했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공동으로 펴낸 제국(Empire)을 보면, '제국'의 3대 통제력으로 폭탄, 화폐, 정보/기술(ether)을 든다. 역사적으로 폭탄을 통한 힘의 독점이나 화폐의 규제가 부분적으로만 그 힘을 행사해왔다면, 정보 기술의 영향력은 범지구적이다. 이는 모든 대안적 경로를 억압하고 자본의 힘 아래 전 지구사회를 복속시키는 가공할 힘이다. 어쨌거나 미국은 이미 이러한 제국의 세 가지 요건을 두루 갖춘 국가다. 두 저자의 재미있는 지적처럼, 미국은 워싱턴(폭탄), 뉴욕(화폐), 로스엔젤레스(정보 기술) 모두를 지니고 있다. 지구화가 미국화와 등치되는 이유에 대한 적절한 지적임에 틀림없다. 제국의 기획은 바깥이 없는 지구 영토의 구상이다. 외부가 없는 공간의 아이디어는 21세기 정보 패권을 노리는 미국의 아이디어와 일치한다. 미국의 글로벌 정보 초고속도로의 기획은 이와 맞닿아 있다. 익히 알려진대로 미국은 일찌감치 '서비스경제모델'을 도입하여, 경제의 정보화를 적극적으로 수행한 나라다. 1930년대에 안토니오 그람시가 옥중수고를 정리하면서 예견했던 '미국주의'의 상이 현재 미국이 갖고있는 정보 패권의 힘인지도 모른다. 그람시가 보았던 미국의 모습은, 유럽에 비해 청산할 과거의 기생적 유산들이 적어 자본 축적의 고도화를 빠르게 수행하고, 내부적으로 경제적 '구조'가 상부구조를 더욱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단순 합리화된 거대 부르주아 국가였다. 미국이 신경제론과 현실을 전세계에 강요하기까지 과거 공장시대의 본원적 축적이 현재에 이르는 바탕이 되었다는 얘기다. 작년 미국 상무부 보고에 따르면 정보기술 분야의 국가간 경쟁력에서 단연 1위는 미국이었다. 미국의 대외 경제정책 중 전자상거래는 대통령의 필수 과업이었다. 미국에게 정보와 정보망은 전세계의 주권과 국경을 빛으로 무너뜨려 세계시장을 도모하는 거대한 힘이다. 특히 미국이 지닌 정보 패권의 유지와 확대는 거대 자본에 의한 기술의 독점에서 비롯된다. 지난 수년간 사상 최대의 기록을 세우며 벌어지고 있는 정보통신기업들의 합종연횡과 정부의 탈규제 정책은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은 내부적으로는 고전적인 타자본 흡수를 통해 독점력을 배가하고, 국제적으로 지적 재산권 등의 국제적인 공인을 글로벌 외교나 협상 채널 등을 통해 강제하면서 성장했다. 이것이 미국이 앞장서 벌이는 글로벌화의 진면목이다. 물론 미국이 지닌 글로벌 하이테크 독점은 개발국가들에게 미국식 모델을 따르고 따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글로벌 동원의 합의 기제를 필요로 한다. 한국과 같이 '정보입국'의 꿈을 꾸는 나라들에 심어진 벤처기업의 신화는 신경제론을 강화하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미국식 자유주의 정신과 시장주의를 적절히 뒤섞어 정보경제를 자본주의의 미래로 추켜세우는 미국의 전략은 개발국들에게 쉽게 먹혀들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들 국가로의 새로운 정보모델 이식은 미국이 지닌 정보 독점력을 확장하는데 기여한다. 제국의 독점은 쉽게 '코드'의 독점으로 넘어간다. 기술적 코드의 독점은 기업간, 국가간 불균등을 영속화하는 수단이다. 일단 한 기업에 의한 코드의 독점이 이루어지면 또 다른 관련 코드들도 독점적 기술로 편입되고 깨기가 힘들어진다. 산업 시대의 자본 독점의 폐해에 비해 정보 독점이 더 심각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미국은 이러한 코드의 독점력을 움켜쥐고 전세계를 새로운 미국식 자본주의의 비전인 '신경제'로 끌어들인다. 이것이 과거 제국주의의 위상과 비교해 새롭게 달라진 제국이 가진 위험천만한 모습이다. 하지만 제국의 구상은 간단하지 않다. 제노바 시위대의 모습에서처럼 글로벌 제국에 대한 글로벌 '다중'(multitute)의 저항은 새로운 시대의 정치적 가능성을 열고 있다. 다종다양한 정치적 실천 집단들이 네트로 연결되어 '가상 연좌시위'(virtual sit-in)를 벌이고, 이를 현실의 오프라인 공간에서 분출시키는 범지구적 저항의 새로운 모습이 등장한다. 이들이 문제삼는 것은 범지구화 과정의 투명성과 민주화이다. '축소되는 세계'에서 더불어 같이 사는, 그리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삶의 조건을 요구한다. 인터넷, 위성, 이동통신 커뮤니케이션에 기반한 범지구적 가상공간은 제국의 기획에 쉽게 말려들기도 하지만, 전세계의 시민 단체들에게는 제약없는 연대와 활동의 힘을 가져다준다. 기술 세례의 명목으로 더욱 가속화되는 글로벌 불평등의 구조를 깨기 위한 국제적 연대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이다. 이제 저항의 국제적 연대는 물리적 공간과 가상의 온라인 공간에 걸쳐 펼쳐지는 제국의 탐욕에 대한 강력한 보루로 등장한다. 그럴수록 전세계에서 공동의 이슈를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글로벌 민주화의 강력한 요구가 그리 우울하지않은 미래에 대한 희망의 징후로 비친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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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디자인] 가상 현실의 진정한 꿈

가상 현실의 진정한 꿈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누구나 가상현실이라는 새로운 기술에 호기심을 갖고 대한 적이 있을 것이다. 80년대 중반 이후로 미래 SF영화들의 소재에는 끊임없이 가상현실의 현대적 기법들이 시도되었고, 그것 자체가 영화의 중요한 소재로 등장했다. 비록 현대의 첨단 기술 과 함께 본격화되었지만, 인간에게 가상현실에 대한 욕망은 이미 태고적부터 존재했다. 우리 는 로마의 자연주의자 플리니(Pliny)의 이야기 속에서 거의 2천여년전 사람들이 가진 가상 현실의 비전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로부터의 신화이지만, 현대 가상현실의 모 습에 가장 근접해 있다. 여기 고대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두 가상현실 프로그래머간의 일화 를 인용해 본다. "파르하시우스(Parrhassius)는 제우시스(Zeuxis)의 동년배이자 경쟁자였다. 기록에 따르면, 한번은 이들이 그림을 그려 경쟁하였다. 제우시스는 너무도 솜씨좋게 포도 그림을 그려서 새들이 날아올라 그 가상의 포도를 쪼기 시작했다. 곧이어 파르하시우스는 너무도 실물과 똑같은 커튼 그림을 그렸다. 새들의 행동에 의기양양한 제우시스는, 파르하시우스에게 당장 그 커튼을 걷고 그림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였다. 제우시스는 그 자신의 말이 실수였다는 것을 한참 후에서야 깨달았다. 제우시스는 포도 그림을 통해 단지 새를 속였다면, 예술가인 그 자신을 깜빡 속인 파르하시우스에게 겸손한 존경을 표했다. 그리고선 경쟁에 졌음을 시인했다." 이 인용문의 내면에는 인간이 바라는 근원적 소망이 깔려있다. 그것은 태고적 인간이 지진 사물의 완전복제(essential copy)의 소망이다. 완전복제의 추구는 현대 가상현실 기술의 바 탕이다. 인간의 지각을 속이는 수단을 개발하는 것이 가상현실의 목적이다. 인간의 감각을 철저히 착각하게 만들어 진짜인 것처럼 기만을 유도하는 디스플레이를 개발하는 것이 인간 이 가진 또 하나의 욕망이자 꿈으로 자리잡았다. 가상현실의 꿈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그 꿈은 어떻게 진화되었으며, 그것의 진정한 목표는 무얼까? 이제부터 그 꿈을 따라가 본다. 1. 가상현실의 흐릿한 꿈들 가상현실의 꿈은 최초 완전 복제에 대한 소망으로 표출된다. 화가의 경우, 자신의 캔버스 를 통해 가상세계로 가는 거울 혹은 마술창이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마치 세계를 창문 을 통해 보는 것처럼 리얼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생각은, 대표적으로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알베르티(Leone Battista Alberti)의 작품세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알베르티는 투시도법 기 술을 통해 너무나도 완벽한 그림을 제작함으로써 마치 창을 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보여주 었다. 사진 기술의 도래와 함께 완전복제의 꿈은 더 한층 강화되었다. 1857년 홈즈(Oliver Wendall Holmes)는 그 당시 최초로 입체경을 만들어 착용함으로써, 가상현실의 미래를 보 여주었다. 홈즈는 입체경을 통해 마치 3차원처럼 나타나는 사물을 바라봄으로써, 새로운 매 체 혁명의 도래를 예견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나오면서, 완전복제의 꿈이 보다 선명해진 다. 특히 1930년대 초에 이탈리아의 미래파(Futurist)와 같은 예술가 그룹은 텔레비전과 라 디오의 기술력에 열광하면서, 가상현실의 도래를 광신적으로 선전했다. 미래파는 원격재현 (telepresence)의 비전에 덧붙여, 근육노동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인간 정신을 무한히 자유 롭게 만드는 미래의 기계를 예감했다. 완전복제와 가상세계에 대한 소망은 컴퓨터혁명의 시작으로 보다 구체화된다. 2차 대전 이 거의 끝날 무렵 나온 배니버 부시(Vannevar Bush)가 내논 미멕스(Memex)의 청사진([ 웹디자인] 12월호 참고.)은, 이후 고등연구기획국(ARPA), 제록스 파크(XEROX Park)의 스 탠포드 리서치 연구소(SRI), 그리고 그 외 수많은 연구소의 핵심 엔지니어들에게 심대한 영 향을 끼쳤다. 홈즈의 3차원 입체 사진에 매료된 것을 반영하듯, 부시는 입체기술의 향상이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다고 역설했다. 부시의 미멕스(Memex)와 더불어 완전복제의 개념에 중요한 진전이 이루어진다. 그가 언급한 장치인 미멕스를 통해, 완전복제의 개념은 모든 정 보의 가상환경으로 발전한다. 그의 미멕스는 정신이 생동하며 활동하는 환경이다. 부시는 현 대적인 형태의 가상현실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다. 부시의 현대적 비전은 모튼 헤이리그 (Morton Heilig)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감각 경험과 일치한다. 헤이리그는 1950년대초 입체영 화인 시네라마(Cinerama) 등에 호기심을 느끼게 되었다.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느낀 시네라 마의 경험은, 그의 인생에 중대한 충격을 주었고, 가상현실을 향한 태고적 비전을 이어받게 만들었다. 1955년에 출간된 그의 책 {에스파시오스(Espacios)}에서, 우리는 감각적 현실의 완전복제 기술에 대한 태고적 소망이 현대에 이르러 다시 되풀이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 다. 후에 가상현실 엔지니어들은 1962년 특허권을 획득한 헤이리그의 다중감각 시뮬레이터, 센소라마(Sensorama)의 '체험극장'(experience theater)에 대한 비전을 구체화한다. 헤이리그의 이 탑승 여행기계는, 결국에 다중감각의 체험 매체를 만들기 위한 가상현실 계획의 일부가 된다. 2. 가상현실의 보다 선명한 꿈들 가상현실을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궁극의 매체'(ultimate media)로 바라보는 현실적 시각 은, 컴퓨터 그래픽과 가상현실 분야에서 선구자였던 이반 서덜랜드(Ivan Sutherland)의 작업 을 통해 나왔다. 1960년대 서덜랜드는 가상현실 기술의 기초를 세운다. 그는 디지털 컴퓨터 에 연결된 디스플레이를 통해서 물질세계의 현실화할 수 없는 개념들에 대한 친근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고 보았다. 이 매체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안경이자 컴퓨터에 의 해 존재하는 물질을 통제하는 방과 같다고 보았다. 현대의 가상현실 체험의 비전과 유사한 서덜랜드의 생각은 수많은 과학자들에 의해 설득력을 얻었다. 서덜랜드의 꿈은 가상현실의 실현을 이끄는 논의들 중 하나였다. 가상현실이란 용어가 대중적으로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쟈론 래니어(Jaron Lanier)의 덕 이다. 음악가이기도 한 그는, 가상악기인 '에어기타'(Air Guitar)를 선보일 정도로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1989년에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시뮬레이션에 몰입할 수 있는 머리에 쓰는 디 스플레이(HMD)와 데이터 장갑(data-glove)을 고안해낸다. 그는 92년 VPL이라는 자신의 회 사를 통해 이 새로운 가상현실 장비들을 소개했다. 래니어는 가상환경, 가상세계, 가상공간, 인공현실 등의 단어들을 지금의 '가상현실'이란 용어로 통합하였다. 그는 가상현실이 인간과 기계간 상호작용의 궁극적 형식이자, 인간의 정신을 확장하는 최초의 매체로 보았다. 래니어 의 이러한 가상현실 개념과 실험은 언론에 의해 빠르게 전파되었고, 대중에게 그 상호작용 기술에 대한 유혹을 불러일으켰다. 가상 기술의 군사적 응용이 지배적이었던 상황에서, 래니 어의 가상현실은 대중화로 이끄는 첫걸음이었다. 한편 가상현실 체험을 문화적 극단에서 표현한 대표적 인물은, 히피들의 우상이었던 티 모시 리어리(Timothy Leary)다. 리어리는 체험을 조절하는 마약, 특히 환각제의 일종인 LSD와 가상현실 기술간의 관련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졌다. 그에게 마약은 지각을 변 화시키는 전통적이고 저기술(low-tech)의 통제하기 어려운 수단이라면, 가상현실은 실리콘 의 정교한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정신 몰입의 장치였다. 일부 과학자들이 가상현실 체험의 일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마약에 대한 은유를 이용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리어리의 생각과 괘를 같이 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과학자들은 래니어나 리어리와 같이 대중적 센세이션을 추구하는 이들을 기피했고, 특히 마약과 가상현실간의 관련성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꺼려했 다. 3. 가상 현실의 진짜배기 꿈 이제까지 가상현실의 계보를 통해서 두 가지 공통점을 끌어낸다면, 하나는 가성성 혹은 의식 확장의 욕망, 다른 하나는 이로부터 생기는 인간 오감의 경이감 혹은 몽환 (hallucination)의 느낌이다. 전자가 목적에 해당한다면, 후자는 그 부산물이다. 전자가 기술의 영역이라면, 후자는 문화의 영역이다. 인류가 꿈꿔왔던 가상현실은 이 두 가지의 상호 과정이었다. 후자가 없었다면 전자의 과정은 지루했을 것이다. 반면 전자가 없으면 후자는 한낱 꿈으로 끝났을 것이다. 가상성과 의식 확장의 욕망은 새로운 정보 현실을 만들었다. 이제는 3차원 공간, 음향, 촉 감, 냄새, 그리고 움직임의 물질 세계를 거닐 수 있도록 기술이 진전되었다. 정보를 가상 현 실화하는 것은 정보에 보다 감각적인 특성을 부여하며, 궁극적으로 사이버공간의 거대한 바 다를 보다 수월하게 항해하게 만들 것이다. 가상현실 기술의 3차원 인터페이스는 사이버공 간의 광대한 데이터의 바다에서 정보를 조직하고, 여행하고, 찾아내는데 손쉬운 도구 역할을 한다. 맥루한(Marshal McLuhan)은 이미 신체가 근본적인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이고 물 질 세계가 그 신체의 내용임을 분명히 했다. 맥루한이 지적한 것처럼, 모든 미디어는 '감각 의 확장' 혹은 감각을 전하는 통로이다. 가상현실은 인터페이스 설계에 있어서 신체 감각의 확장에 초점이 맞춰진다. 가상현실 인터페이스의 목표는 인간의 감각을 전하는 통로들의 완 전 몰입을 통해 컴퓨터로부터 생생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상적인 가상현실 시스템에서 신체는 커뮤니케이션으로 감싸지고 정보로 맥박친다. 이제까지 미디어는 항상 외부 환경이 었다. 다시 말해서 라디오와 텔레비전이란 매체는 그것이 이용되는 방과 이를 보고 듣는 사 람들을 지배한다. 그러나 가상현실의 환경은 인간의 감각들을 철저히 에워싼다. 물리적 현실 로부터 생기는 감각의 투입을 막아야만 가상현실 체험은 완벽해진다. 감각은 가상세계에 몰 입되어야 한다. 신체는 가상현실의 리얼리티 엔진에 맡겨진다. 두 눈은 머리에 쓰는 HMD로 덮인다. 실제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두 귀는 헤드폰으로 감춰진다. 현실을 둘러싼 음 향은 사라진다. 양손은 데이터 장갑을 낀다. 이로써 가상현실에 들어갈 수 있다. 이처럼 가 상현실 인터페이스의 논의는 항상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인 신체와 그 신체의 감각을 전하는 통로가 확장되는 방식에 대한 문제로 돌아간다. 가상적인 감각 확장으로부터 체험자는 몽환과 경이감을 겪는다. 실제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정보의 범위와 포용 능력을 넘어서면, 신비스런 감각 체험을 불러온다. 몽환은 가상 현 실 기술을 이끄는 힘이었다. 마치 리어리의 LSD에 의한 몽환 실험처럼, 가상현실이 인간을 끊임없이 사로잡은 매력은 이를 통해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들을 '꿈꾸는' 것이 가능했기 때 문이다. 그래서, 래니어는 가상현실을 '전자 LSD'로 표현하기도 한다. 현실적으로 보면, 우 리는 가상현실을 통해 추상화된 코드와 상징을 보다 분명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주택' 이란 단어와 같이 어떤 빈약한 상징을 주고받는 대신에 우리는 3차원 환경의 주택을 거닐며 '주택'을 음미할 수 있다. 이를 래니어는 '탈상징적 커뮤니케이션' 시대에 진입했다고 표현한다. 그것은 사물 그 자체 안에서 거주하는 시대이다. 그에 따르면, 상징은 인간이 교환하는 단어보다는 상징화된 사물에 가까운 어떤 것, 사물 그 자체(thing-in-itself)로 대체된다. 언어적 상징에 의해 감지할 수 없었던 내용이 가상 현실이 주는 체험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감각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주택의 3차원 모델이 "주택"이란 단어보다 더욱 많은 정보가 전달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주택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리란 보장은 없다. 가상현실은 진짜 사물 혹은 진짜 경험을 전달하기 보다, 어느 누군가의 생각에서 만들어진 관념으로부터 다른 누군가에게 그것을 전달하는 것일 뿐이다. 가상현실 안에서 3차원 주택은 단지 프로그래머가 느끼는 주택의 경험에 대한 정신 모델을 시뮬레이션한 것이다. 이것은 정보를 훨씬 나은 방식으로 코딩하는 것이다. 가상(virtual)이란 말이 너무나 진짜같은 가짜의 현실을 지칭한다는 점은 이와 관계한다. 가상현실의 위험성은 인간의 의식을 확장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프로그래머들이 만든 가상현실의 세계에 감각을 몰입하여야 한다는 점에 있다. 이 세계는 진짜의 세계가 아니라 허구의 세계다. 이 진짜같은 가짜 세계는 인간의 감각을 현실로부터 낚아챌 수도 있다. 세계 의 디지털 라이브러리에 보다 생생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상현실 인터페이스의 역할이 인간의 오감을 영원히 현실로부터 닫게 만들고 인간을 현실과 대치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신체를 버리고 가상현실에 영원히 머물고 싶어하는 SF영화속의 캐릭터들은 존재하는 현실보다 경이감과 몽환을 불러오는 가상의 세계를 진짜로 여긴다. 결국 가상현실의 인터페 이스는 존재하는 현실의 거부가 아니라 확장으로만 기능해야 한다. 물론 가상현실 기술의 전제는 인간 의식의 그 모든 역동성과 뉘앙스를 담아낼 수 있는 인터페이스여야 함은 물론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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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대학원신문] 디지털 노마디즘의 모순적 지위

디지털 노마디즘의 모순적 지위 자유로움은 인간 신체의 해방적 느낌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느낌에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는 이제까지 크게 두 번이다. 우선 19세기초 자본주의는 봉건 권력의 토지에 예속되었던 인간 신체의 자유로움을 약속했다. 인간은 자유 계약을 통해 자신의 신체를 거 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형식적인 신체의 자유는 궁극적으로 통제와 구속의 거 울임이 드러났다. 자유 계약은 자본주의의 생산 관계에 들어가면서 신체 구속의 증명이 되 었다. 대표적으로 테일러 할아버지가 계시한 공장의 과학적 경영은 신체의 자유를 갈기갈기 찢어 시분할 관리하는 생산 미학의 절정이었다. 이제 20세기말 인간 신체의 자유는 디지털 혁명으로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게 되었다. 디 지털의 자유로움은 인간을 끊임없이 부유하게 만들고 있다. 디지털이 선사한 자유로움은 끊 임없는 유목과 이동의 전제가 되었다. 디지털은 공장과 사무실로부터 노동자들을 해방시키 고, 한 장소와 지역의 구심력에 구멍을 내고 있다. 이는 진정한 인간 해방의 징후인가? 아니 면, 디지털 기술이 마련한 노마디즘의 새로운 가능성이 고작해야 19세기에 자본주의가 제시 했던 자유 계약의 새로운 업데이트 버전일 뿐일까? 이 글은 신체 자유의 필요 조건인 노마디즘을 양가적 차원에서 본다. 권력의 노마디즘과 저항의 노마디즘. 전자는 후자를 필연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새로운 디지털을 이 용하여 노마디즘을 기획한다는 점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이다. 이에 반해 후자는 권력의 통제 에 대항한 힘의 생성을 포착한다. 디지털 노마디즘의 긍정적 가치는 물론 후자의 관찰을 통 해 얻을 수 있다. 권력의 노마디즘 새로운 권력의 특성은 디지털 네트워크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 디지털 노마디즘의 생성 조건은 애초에 권력의 아이디어에 가깝다. 과거에는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기 마련이었다. 볼셰비키 들이 쨔르 체제를 뒤집기 위해 크렘린 궁전으로 진격했던 것처럼, 권력에 대항하 는 혁명 그룹들은 대상화된 권력의 실체에 대한 '장악'의 개념을 사용했다. 장악과 진격은 멈춰진 대상을 필요로 한다. 멈춰있는 상태의 권력, 이는 '정주 권력'(sedentary power)이다. 새로운 권력은 자유롭게 이동한다. 네트워크망을 타고 전세계를 누빈다. 권력이 분산되고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쉽게 옮겨 다닌다. 네트워크망을 통해 권력의 공간 확장과 이동이 이루 어진다.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란 책에서 마누엘 카스텔은 새로운 공간의 변화를 '장소'(place)에 서 '흐름'(flow)의 전환으로 파악한다. 그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모이고 흩어지 는 동태적인 권력의 '흐름'을 읽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디지털 네 트워크다. 그래서, 새로운 권력의 호칭은 '노마드 권력'이다. 이 새로운 권력이 요구하는 디 지털 노마디즘은 우선 효율성(efficiency)에 근거한다. 자본의 순환을 빛의 속도로 만들고, 적재적소에 자본을 분배하려는 욕구는 기본적으로 효율성의 원칙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어 떤 기업이든 원활한 정보 이동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자본간 경쟁에서 사멸할 수밖에 없다. 둘째는 연장(extension)이다. 다른 말로 연장은 통제력이다. 연장은 쉽게 생각하면 몸통에 달려있는 길게 연결된 보철물과 같다. [매트릭스] 영화에 나오는 신체의 구멍에 연결된 포 트 단자들을 상기하라. 연장은 관리와 통제를 행하는 중심을 갖는다. 그것이 연장인 이유다. 연장은 통제력의 확장/대 욕구에서 생긴다. 디지털 노마드 권력의 새로운 능력은 실시간 통 제력에 있다. 디지털 접속은 전세계를 단일로 묶고, 디지털 연장을 통해 권력을 확장한다. 마지막으로 공간의 소멸(disappearance of space)이다. 디지털 이데올로그들은 공간 압축 능력을 단지 디지털 기술의 가공할 능력을 설명하는데 이용한다. 하지만, 물리적 공간의 탈 출은 있을 수 없는 얘기다. 현실의 공간은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굴레다. 오히려 공간의 소 멸은 단일화된 권력의 장을 시사한다. 오늘날 공항에서 노트북을 챙기고, 셀룰러 폰을 목에 걸고, 개인 디지털 보조장치(PDA)를 손에 들고, 디지털 시계로 전자 메일을 확인하는 사람 들을 쉽게 목도할 수 있다. 현대의 이러한 일상 풍경이 주는 공통점은 접속된 인간의 모습 이다. 자유로운 신체 이동 능력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오히려 끝없이 권력에 접속되고 연결된다. 지구촌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일하는 지구촌 노동자의 미래상은 사이버펑크들만 의 지나친 공상이 아니다. 공간의 소멸은 물리적 공간의 소멸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이 행사 되었던 가시적 거리감의 소멸이다. 공간의 소멸은 권력의 새로운 디지털 장을 전제하고 있 는 것이다. 사이비 노마디즘 이 세 가지 전제들은 권력이 디지털 노마디즘에 집착하는 직접적 이유다. 효율성은 권력 의 생산에, 연장은 권력의 확대에, 공간의 소멸은 권력의 관리에 기여한다. 디지털 노마디즘 이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드러난다면, 이 세 가지는 현실 노마디즘의 본질과 목적을 드러낸 다. 권력의 노마디즘에는 정처없이 떠도는 정보의 흐름은 없다. 권력의 노마디즘은 일정한 방향을 갖고 움직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정형으로 보이지만 이것의 흐름에는 규칙성이 발 견된다. 그 규칙성은 권력의 위계적인 명령에 의해 부과된 것이다. 예컨대, 전세계 노드를 타고 흐르는 정보들 중 고급 정보들의 집적과 관리는 거대 기업본부(HQ)의 중앙 컴퓨터에 서 이루어진다. 평등하고 물활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던 디지털 정보들이 권력의 파장 에 걸리면 위계적이고 불균등하게 갈린다. 노마디즘의 자유로움이 권력에 의해 다시 한번 산산히 조각난다. 역설적으로 권력의 생산, 확대, 관리의 목적된 노마디즘은 진짜 노마디즘이 아니다. 이는 '사이비 노마디즘'(pseudo-nomadism)이다. 디지털의 진정한 가치와 거기서 생성되는 노마디 즘을 철저히 악용하는 구자본주의 생산의 논리다. 권력으로 지칭되는 주원천이 무엇보다 자 본력에 있다고 본다면, 권력이 이용하는 노마디즘의 정체는 쉽게 폭로된다. 부유하는 유목 자체의 자유로운 신체적 가능성보다 유목에 의해 유지되는 체계적 약탈의 역사에 디지털 시 대의 권력은 열광한다. 새로운 권력에게 유목은 자유로운 자본의 이동이다. 물론 고대의 노 마디즘과 다른 점은 디지털이란 수사어다. 비가시적이고 기동력있는 약탈의 노마디즘이 현 대의 권력이 주력하는 바다. 결국 디지털 노마디즘의 수사는 권력의 것이다. 각자의 목 뒷덜미에 포트가 뚫려 망망한 네트의 바다로 사라지는 비운의 미래 인간들처럼, [동물의 왕국]에서 꼬리표나 추적 장치가 붙어 초원으로 사라지는 야생 동물들처럼, 권력이 의도하는 노마디즘은 끊임없이 탈주하려 고 하고 탈주했다고 느끼지만 종국에는 권력의 파장에서 한발자국도 못벗어나는 사이비 노 마딕 현실을 기획하는 일이다. 저항의 노마디즘 진정한 노마드는 모든 권력화된 디지털 영토를 저항의 기폭제로 삼는다. 최근에 이탈리아 자율주의자인 안토니오 네그리와 듀크대학의 영문학 교수인 마이클 하트가 같이 쓴 {제국 Empire}(2000)이란 저술에서 얘기되었던 것처럼, 권력의 외부 혹은 바깥으로 보이는 장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곳에서 저항해야 한다. 그들은 저항의 편재성을 일 컬어 복수자들의 '저항되기'(being-against)로 표현한다. '저항되기'는 일상화된 저항의 표현 이다. 저항되기는 노마디즘을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권력이 노마디즘을 재생산의 수 단으로 이용하는데 반해, 새로운 디지털 야만인의 무리들은 이를 저항의 방식으로 이해한다. 이른바 저항의 노마디즘은 권력이 악용하는 디지털의 노마드적 가치를 재전유한다. 유목적 약탈보다는 자유로운 신체를 전제한 유목적 가치에서 저항은 힘을 얻는다. 디지털 노마디즘은 제도, 관습, 경계, 명령 등으로부터 철저히 멀어지려 한다. 권력의 사이 비 노마디즘은 저항의 다층적 연결과 동시다발적인 진지전에 의해 발작을 일으킨다. '저항되 기'가 일상적이고 미시적 실천과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듯이, 유목민적 삶을 살아가는 현대 의 야만인들은 권력이 쳐놓은 그물 하나하나에서 그 저항과 반대의 고리들을 발견한다. '저항되기'는 체념과 희망의 변증법이다. 체념은 권력의 파장으로부터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는 현실 인식에서 생긴다. 그러나 희망은 체념을 물구나무 세울 때 얻어지는 부정의 결 과다. 체념은 현실을 버리거나 외면하기 보다 희망의 씨앗을 가꾸기 위해 필요하다. 이런 점 에서 21세기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사이비 노마디즘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오히 려 철저히 권력이 지향하는 디지털 노마디즘의 가치를 주목하고, 현실 체념의 극한까지 밀 고갈 필요가 있다. 체념에서 멈추면 오직 나락만이 있을 뿐이다. 연이어 부정의 과정을 수행 해야 한다. '저항되기'는 체념을 극복하는 부정의 능동적 과정이다. 디지털 노마디즘을 가치 화하는 노력은 희망을 실은 '저항되기'에 있다. 현실의 '저항되기'는 희망을 가꾸는 방법이자 사이비 노마디즘을 무력화하는 힘이다. // (연세대 대학원신문 2000.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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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디자인]사이버스페이스는 인간에게 무엇인가?

사이버스페이스는 인간에게 무엇인가? 과연 사이버공간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사이버공간은 기술을 통한 사회적•문화적 변형에 관한 우리의 열정과 불안 이 둘 모두를 상징화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에게 사이버공간은 상상력의 전망 속으로 들어가는 대모험의 첫 단계이다. 사이버공간은 일종의 물리적 현실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도 약속한다. 다른 어떤 사람들은 사이버공간의 이 일반적인 이상에 관해 보다 냉소적이고 불쾌해 한다. 그들은 사이버공간이라는 용어가 모순어법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nonspace)은 불가능한 것을 약속하는 신기루가 아닌가? 등등. 이 글은 사이버공간의 존재론에 대한 물음이다. 인간이 사이버공간과 맺고있는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차분히 성찰해보자는 의도를 갖고 있다. 포퍼의 제 3세계와 사이버공간 칼 포퍼(Karl Popper)란 과학철학자는 세계를 세 가지 연관된 층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가 보는 '제 1세계'는 에너지, 무게, 운동을 지닌 순수한 물질의 세계다. '제 2세계'는 의식의 주관적 세계다. 느끼고, 계산하고, 생각하고, 꿈꾸고, 기억하는 개인 정신의 세계다. 마지막으로 그가 언급하는 '제 3세계'는 살아있는 유기체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객관적인 현실의 세계다. 새들이 만든 나무 위의 집, 벌이 만든 벌집, 개미굴 등은 모두 이에 속한다. 물론 인간이 만들어낸 언어, 수학, 종교, 철학, 예술, 과학 등이 제 3세계의 기초를 이룬다. 성전, 시장, 법정, 도서관, 극장, 책, 영화, 신문, 디브이디 등은 제 3세계에 존재하는 물질적 표현들이다. 이들은 모두 아이디어, 이미지, 사운드, 데이터 등을 담는 그릇이다. 제 3세계는 스스로 진화하고, 제 1, 2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설명하는 안내자다. 포퍼의 제 3세계는 항상 성장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그의 제 3세계는 인간에게 있어서 문명과 같다. 포퍼는 3세계의 요건으로, 특히 사회 조직 형식 혹은 상호 소통의 양식을 보여주는 차원을 염두에 두고 있다. 사이버공간은 바로 이같은 제 3세계가 진화하여 구성된 가장 최신 형태다. 3세계는 추상적으로 보면 정보의 공간이다. 사이버공간은 정보로 가득찬 공간이다. 3세계에서 기획할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이상적인 표현물이 사이버공간이다. 물론 3세계는 1세계와 2세계의 안내자이지만 역으로 그것의 규정을 받는다. 그렇지만 제 3세계는 항상 제 1, 2세계와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 사이버공간은 현실의 물질적 공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이버공간의 자연적 느낌들 1세계의 물질적 그릇은 보통 물리적 자연으로 통칭된다. 이 1세계는 3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2세계인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특히 사이버공간의 출현으로 인간의 공간 개념에 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마이클 하임(Michael Heim)이란 디지털 철학자는 인간이 더불어 사는 1세계인 자연에 비추어 3세계에 속한 새로운 전자공간의 출현이 인간 의식에 미치는 느낌을 몇 가지로 잘 요약하고 있다. 첫째가 무한성(infinite)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광대하고 무한한 느낌을 준다. 바다, 강, 산, 숲을 거닐다보면 우리의 감각은 마치 새처럼 자유롭다는 것을 느낀다. 인터넷에 접속하면 우리는 끝없는 항해에 도취된다. 우리는 정보의 세계를 끝없이 흘러다니면서 전자 네트워크의 광활함을 만끽한다. 마모루 오시이가 감독한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에서 새로이 태어난 사이보그가 떠나면서 남기는 마지막 문구를 기억하는가? "네트는 넓고 광활해". 인터넷 접속의 첫 느낌은 태초에 인간이 자연에 버려질 때 그 느낌이리라. 그래서, 사이버공간의 무한함은 자연의 무한함에 비견한다. 두 번째는 근접하기 어려운(inaccessible) 어떤 느낌이다. 자연은 뭔가를 숨긴다. 모든 것이 공개되어있고 발견할 것이 없다면, 인간이 자연에 대한 모험을 감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언가의 발견에 대한 기쁨은 근접하기 어려운데서 만들어진다. 컴퓨터 네트워크도 동일한 속성을 갖고 있다. 중심이 없이 수많은 노드로 연결된 광대한 인터넷에서 항해를 한다는 것은 극히 일부분의 관찰일 것이다. 어제 간 길을 잃을 정도로 무한히 열려진 전자 공간에서 우리는 항상 발견의 기쁨을 얻는다. 세 번째는 압도하는(overwhelming) 느낌이다. 산 정상에서 광대하게 펼쳐진 자연은 나약한 인간에게 너무나 큰 존재이다. 자연의 강력하고 압도하는 힘에 대한 느낌은 네트워크에 접속할 때 네트의 바다에 맞닥뜨린 컴퓨터 초보자의 느낌과 동일하다. 적어도 처음으로 동영상, 사진, 애니메이션, 하이퍼텍스트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이런 느낌은 일반적이다. 네 번째는 두려운(fearsome) 느낌이다. 자연은 위압과 미적 숭고의 면모를 동시에 지닌다. 숭고미는 자연에 두려움을 자아낸다. 인간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밤하늘의 별이 가진 무한함을 해명하지 못한다. 신비한 자연에 대한 두려움은 종종 나약한 인간에게 현기증을 유발한다. 인터넷은 너무나 거대해, 이용자는 결코 그 전체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살아서 움직이고 유기체처럼 끝없이 성장하는 인터넷의 광대함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일 수 있다. 다섯 번째는 야생의(wild) 느낌이다. 야생적이고 거칠다는 것은 이차적인 공정을 거치지 않은 날 것 그대로를 의미한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自然) 야생성에 다름 아니다. 이는 콜럼버스가 최초 신대륙을 보고 느낀 감정과 비슷하다. 사이버공간을 혹자는 새로운 개척지라고 얘기한다. 다른 사람들은 신세계라고도 지칭한다. 이 모두는 때묻지않은 미지의 공간을 전제한다. 마지막으로 근원의(primal) 느낌이다. 하이테크놀로지는 자연처럼 인간에게 낮은 투명성을 갖고 있다.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기에 인간의 시야와 보폭은 협소하다. 인간들은 구체적 기술의 원리를 모른 채 기술을 이용한다. 비록 인간이 만들었지만, 자율적으로 진화하는 거대한 전자공간은 인간에게 파악하기 어려운 대상으로 남아있다. 네트워크의 미시 세계에서 작용하는 비트 스위칭, 전자, 마이크로칩 등에 대한 이해를 얻기는 힘들다. 자연처럼 사이버공간은 인간의 완전한 접근과 이해를 막는다. 이 여섯 가지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전자 공간에 대한 경외다. 이는 현대 기술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모델로 다가온다. 그러나, 인간의 기술에 대한 경외감은 단지 그 겉을 흐르는 기술적 이미지일 뿐이다. 이 새로운 전자 공간에 대한 경외감은 더 깊은 인간의 욕구에서 비롯된다. 사이버공간은 어머니이자 자궁이다. 사이버펑크 작가로 유명한 윌리엄 깁슨은 1984년 뉴로맨서Neuromancer란 그의 소설에서 컴퓨터 네트워크들의 광범위한 상호접속망으로 매개되는 인간과 기계간의 근본적인 변형을 묘사하기 위해 '사이버공간'이란 개념을 처음 사용하고 있다. 뉴로맨서에 등장하는 '매트릭스'라는 전자공간은 에로스 발생의 근거, 즉 '어머니'란 뜻의 라틴어에서 생겼다.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매트릭스 공간은 왜 매트릭스가 어머니에서 기원하는지에 대한 그 의미 생성의 맥락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매트릭스는 인간을 양육하는 기계 자궁이다. 인간들은 자궁안에 기계탯줄이 연결된 채 성장하고 살아간다. 죽은 인간은 따로 분리되어 으깨져 새로운 생명을 위한 양수로 쓰여진다. 매트릭스는 마치 어머니처럼 인간들을 수많은 탯줄로 연결하여 부양하는 인공지능 기계다. 대체로 네트워크나, 깁슨이 명명한 '매트릭스'로 빨려들어가는 사용자는 남성적이다. 매트릭스 그 자체는 여성적 대상이다. 동시에 매트릭스는 어머니이며 자궁이다. 접속 혹은 자궁에 들어가는 행위는 인간이 탯줄을 힘차게 끊고 세계를 향해 나온 정반대의 상황을 지칭한다. 자궁은 모든 인간에게 안전한 보호막이다. 아기들처럼 일단 자궁에 들어가면 자양분도 탯줄을 통해 공급받는 나약한 존재로 떨어진다. 인간이 근원적으로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곳은 자궁이다. 무섭고 지저분한 현실의 모든 상념을 잊고 가장 편안한 인간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고(苦)를 잊는다는 점에서 그 곳은 낙원이다. 그래서, 자궁은 인간을 너무 약하게 만든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를 벗어난 인간들은 매트릭스를 그리워한다. 꿀꿀이 죽을 먹느니 차라리 매트릭스 안의 가상식당 안에서 가짜 음식을 즐기겠다는 한 인간의 독백은 기계자궁에 종속된 약해진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매트릭스에 접속함으로써 잃는 것은 인간 신체와 현실 감각이다. 현실의 신체는 가면 갈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인터넷 이용자들이 새로운 가상 정체성과 결합되어 느끼는 쾌감과 열망은 이와 비슷하다. 인터넷에서 부여받은 정체성이 현실을 대체하지 못하면서도, 이용자들은 끊임없이 네트를 배회한다. 동시에 잃는 것은 현실 감각이다. 아이디로 부여받은 정체성이 현실에서 동일하게 인정받지 못함으로써, 이용자들은 가끔 자괴감이나 우울증에 빠진다. 어머니/자궁으로서 매트릭스는 인간이 그리워하는 근원이기도 하지만, 깁슨이 그리는 미래 사회는 그리 밝지 않다. 현실의 모순이 고스란히 옮겨진 공간이다. 깁슨의 매트릭스는 바로 이런 암울한 사회에서 인간을 관리하는 통합적 기계다. 인간이 끊임없이 동경하고 그려왔던 공간이 실은 인간 삶을 관리하는 기계란 사실은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동일하다. 매트릭스의 기계 탯줄을 끊은 인간만이 제대로 현실 삶을 살아가는 인간으로 비춰진다. 그 탯줄을 끊기까지의 과정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 비록 현실이 위험으로 가득차고 불안하지만, 자궁의 탯줄을 끊은 자들만이 1세계의 물리적 공간을 몸으로 느낀다. 동시에 얻는 것은 현실 감각이다. 이것이 인간이 동경하는 사이버공간의 모순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전자적 3세계에 몸담기를 동경하지만, 1세계를 버리면 영원히 기계자궁 밖을 보지 못하고 살 수도 있다. 사이버공간은 초월의 욕망이다. 물리적 세계의 한계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것, 즉 물질을 초월(physical transcendence)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태고적부터의 소망이다. 물질 초월은 바로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정신을 자유롭게 하려는 욕망이다. 자궁에 귀의하려는 욕망의 밑바닥에는 초월의 욕망이 자리한다. 현실의 무질서와 부족함은 인간에게 새로운 대안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사이버공간은 현실 공간이 주는 한계들과 부족함들에 대한 기술적 반응물이다. 현실은 인간을 짓누르는 짐이었다. 인간이 딛고있는 현실의 실존을 부정하고픈 욕망은 인간들 스스로에게 항상 새로운 유토피아의 전망을 구상하게끔 만들었다. 우선 인간은 어떤 현실적 위협없이 새로운 환경을 경험하길 원한다. 그리고 육체에 갇힌 인간의 행동 반경이 삶의 근거지가 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것 또한 현실의 짐이었다. 무거운 살덩이를 훨훨 털어버리고 자유롭게 이동하고자 하는데는 인간 육체 초월에 대한 열망이 자리한다. 육체 초월의 시도는 동력 기술을 통한 기동성에서 일차적으로 구현되었다. 인간은 동력 장치가 달린 기차, 배, 자동차, 비행기 등을 개발하여 지리적 경계를 넘고자 하였다. 이러한 운송장치를 이용한 기동성은 아직까지도 신체의 속박을 전제한다. 이같은 동적 운동성은 인간에게 어느 선을 넘으면 신체에 무리가 오는 신호로써 멀미와 구토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정보 네트워크의 접속은 인간 이동의 또 다른 차원을 제시했다. 사이버공간은 마치 인간이 신체를 벗어나 다른 대상세계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물리적 운송장치에 비해 그 기동성 또한 빛의 속도를 선사했다. 정보가 거대한 도관을 통해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것처럼, 가만히 앉은 자리에서 지구촌을 구석구석을 넘나드는 것이 가능해졌다. 일종의 '정적인 운동'이 이제 새로운 신체적 조건이 되었다. 이는 마치 신체를 버리고 네트에 이끌려 들어가는 인간의 모습과 유사하다. 만약 공간적 느낌을 주는 가상현실 시스템이 적절히 결합한다면, 보다 더 현실적인 신체이탈의 감각을 느낄 것이다. 한편 인간 주위에 널려있는 대상의 위험함, 더러움, 슬픔, 불평등, 악취 등등에서 벗어나는 것은 인간에게 본질적인 문제였다. 사회와 역사 등이 개인에게 짊어지도록 강요하는 현실의 쇳덩이를 벗어나고픈 욕구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신체는 바로 현실과의 연결 고리이다. 육체 초월과 물질초월의 욕망은 바로 현실과 등을 지는 행위다. 플라톤이 구상한 이데아의 세계처럼 가장 이상적인 정보세계에 안주하려는 욕망은 기계 자궁에 대한 귀의만큼이나 본질적이다. 자신의 신체가 주는 속박, 그리고 현실 세계가 주는 한계들 모두가 물질 세계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배태했다. 인간에게 사이버공간은 이러한 속박과 한계를 벗어난 새로운 신세계와 같다. 사이버공간의 패러독스 이제까지 본대로 사이버공간은 인간이 푸근하게 안기고픈 어머니이자 자궁이지만, 그 곳에 귀의하는데는 현실의 물질적 조건을 버리는 길을 택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물질과 육체 초월의 공간이지만 신체뿐만 아니라 현실의 부정과 모순 등을 모두 외면해야 한다. 그러나, 사이버공간의 존재적 지위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현실의 연장인 것이다. 포퍼가 지적했듯이 3세계는 1세계를 전제한다. 1세계 없이는 3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 사이버공간은 물리적 현실을 전제한다. 사이버공간은 재생산의 장소다. 무엇을 재생산하는가? 우리 현실의 재생산이다. 현실에서 생활하고 꾸려지는 모든 것들은 사이버공간 안에 그대로 거울처럼 반사된다. 그 곳에도 현실처럼 슬픔과 분노가 존재한다. 앞서 보았던 것처럼, 인간에게 사이버공간의 자연적 느낌들이 생기는 이유는 현실 감각 때문이다. 바로 현실을 빼닮은 곳이 인간이 만들어낸 가상공간이다. 결국 사이버공간은 생각처럼 인간 태초의 자궁이 될 수도 육체를 벗어나 접속할 수도 없는 은유의 곳이다. 인간의 욕망은 이같은 사이버공간의 현실성을 직시해야 한다. 사이버공간 안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고, 새로운 평등한 인간관계가 만들어지고, 상업적 논리가 지배할 수 없다는 근거는 무모하다. 사이버공간을 보기 위해서는 항상 현실의 거울을 통해 들여다봐야 한다. 그럴 때 진정 인간이 욕망하는 사이버공간의 미래상이 분명해질 것이다. (월간 웹디자인 200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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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디자인] 배니버 부시의 하이퍼텍스트 이후

배니버 부시의 하이퍼텍스트 이후 하이퍼텍스트의 역사적 가치 하이퍼텍스트의 기획은 어떻게 나왔을까? 좀 지루한 연보를 끄집어내보자. 1945년에 미국 과학연구개발국 국장인 배니버 부시(Vannaevar Bush)는 미멕스(memex)란 기계 장치에 대 한 유명한 논문을 썼다. 그의 문제 의식은 엄청나게 증가하는 정보에 대한 통제력의 부재로 부터 비롯되었다. 부시가 보기에 인간의 경험은 놀랄만치 확장되고 있는 반면에, 현실에서 중요한 정보들은 쉽게 유실될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는 미멕스를 통해 정보를 서핑 하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정보 압축, 새로운 감각 인터페이스, 하이퍼미디어 시스템 등의 다 양한 해결책을 제안했다. 물론 실현되지 못한 이 장치의 핵심은 인간 정신을 확장하는 도서 관 혹은 링크의 기능이었다. 부시의 청사진은 68년에 이르러 더글러스 잉겔바트(Douglas Engelbart)에 의해 만들어진 확장(AUGMENT)이란 시스템으로 현실화한다. 동시에 그의 '확장' 개념은 인간의 모션을 컴퓨터에 연결시키는 가상현실(VR)의 기초를 이룬다. 특히, 60 년대 '하이퍼텍스트'란 용어를 최초로 고안한 테오도르 H. 넬슨(Theodor H. Nelson)은 자신 의 재너두(Xanadu)란 시스템의 기획을 통해서 앞서 두 사람의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발 전시켰다. 어쨌거나 부시의 미멕스는 이른바 개인의 정신적 도서관이지만, 이는 현대의 다양한 정보 형태, 즉 텍스트, 이미지, 오디오 클립 등의 사이버공간이 가지고 있는 멀티미디어 요소와 결합하여 확장된 디지털 문서고를 지칭한다. 이미 하이퍼텍스트는 단지 문서들간의 상호 링 크뿐만 아니라 보다 폭넓은 하이퍼미디어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터넷이란 거대한 사고의 도관(conduit)을 통해 이미 이러한 의식 확장에 대한 과학자들의 염원을 일상적으로 쉽게 체험하며 살고 있다. 프로그래머들에 의해 혹은 개별 네티즌에 의해 구성된 웹상의 하이퍼텍스트 구조는 이용자들의 새로운 의식적 체험을 불러 왔다. 하이퍼텍스트는 이전과 다른 분명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설계물이다. 이는 타인의 의 식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그리고 무한히 열려있는 텍스트들의 연결 구조를 지칭한다. 하이 퍼텍스트의 특성은 고도로 상호작용적이며,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복잡한 공간적 이동의 자 유로운 능력을 토대로 한다. 이 글은 45년 배니버 부시가 인간의식의 확장으로서 바라보았 던 하이퍼텍스트의 가치를 현재의 인터넷 구조 속에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으며, 그 의미들 이 현재에 이르러 어떤 식으로 위협받을 수 있는지를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종합적 사고, 그러나 공허한 링크, 링크.... 우리는 이미 컴퓨터를 사용하여 문서를 작성하면서 사고와 글쓰기의 변화를 겪고 있다. 스크린상의 따붙이기와 즉각적인 수정 등을 통해 반사적인 글쓰기에 쉽게 길들여진다는 지 적도 나온다. 마찬가지로 하이퍼텍스트를 사용하면서 우리는 먼저 사고의 변화를 겪는다. 특 히 사물을 모아서 보는, 종합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 길러진다. 프로그래머는 전체의 얼개를 고려하고 프레임을 따진다. 각각의 프레임은 연결 문서들을 고려하고, 그것이 아이콘이든 텍 스트 형식이든 전체 화면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연결 고리를 항상 만들어 놓는다. 인터페이스는 하이퍼텍스트와 하나가 된다.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불분명하면, 하이퍼텍스 트의 기능은 무한한 정보의 바다에서 쉽게 웹서퍼(web-surfers)를 미아로 만든다. 인터페이 스가 분명해질수록 하이퍼텍스트는 그 기능을 적절히 수행한다. 다시 말해 인덱스 얼개와 하위 페이지의 구조 전체가 하이퍼텍스트의 기능 안에서 하나의 종합적인 순환 구조가 된 다. 웹서퍼가 미아가 되지 않도록 고려하면서, 프로그래머나 웹마스터는 사이트의 얼개를 짠 다. 그들이 원하는 사고나 의식의 완결된 구조가 하이퍼텍스트의 기능을 통해 총괄된다. 하 이퍼텍스트는 이처럼 사물을 보는 종합적이고 전체적인 사고를 기른다. 분석적 사고가 사물 을 떼어놓고 보는 반면, 종합적 사고는 사물을 모아 관찰한다. 이제 우리는 멀티미디어, 하 이퍼텍스트를 통해 상호 링크와 결합의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의식을 표현하고 강화한다. 한편 하나의 사이트 안에 존재하는 하이퍼링크들과 문서들은 항상 자신 내부의 연결 페이 지들만을 지칭하거나 연결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하이퍼링크는 웹마스 터에게 상세한 참조와 설명을 위해 혹은 이용자의 또 다른 서핑을 위해 외부의 링크 페이지 를 요구한다. 물론 부시가 바라보았던 하이퍼텍스트의 진정 열려진 구조는 궁극적으로 이에 기반한다. 자신의 사이트를 벗어나 새로운 외부의 링크 페이지를 연결하는 것은 인간 의식 의 새로운 확장으로 볼 수 있다. 인터넷 이용자의 폭발적 증가와 연결된 노드수의 증가는 인간 의식의 확장을 극도로 향상시켰다. 링크에 의한 정보 탐색과 끊임없는 링크의 연쇄는 하이퍼텍스트의 궁극적 모델로 평가받을만하다. 그런데, 웹마스터와 달리 웹서퍼는 종합적인 사고보다는 분열적인 사고 과정을 겪는다. 끊 임없는 참조와 상호 링크는 자신이 찾아 헤매는 정보들의 질(qualities)에 의문을 제기하게 끔 만든다. 하나의 단어나 문장은 다른 하나의 단어나 문장으로 표현되고, 이 단어나 문장은 또 다른 의미를 찾아 떠돈다. 어떤 때는 중간에 지나쳤던 정박지에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열려진 하이퍼텍스트의 끝없는 상호 참조의 구조로 말미암아, 사용자가 찾고자하는 의미는 지속해서 다른 페이지나 링크로 미끄러진다(incessant sliding of meaning). 무엇이 진정 참 다운 정보인지 혹은 진정 확신할 수 있는 정보인지에 대한 분별력이 흐트러진다. 수많은 링 크와 참조는 결국 네트의 항해자들에게 현기증과 멀미를 선사한다. 일면 인터넷이 마련한 하이퍼텍스트적 구조가 사고의 확장을 위한 틀로 기능할 것이란 예측과 달리, 그 안에는 궁 극적 지식없는 단지 끊임없는 정보의 연결된 흐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터넷 정보의 풍 요와 더불어 하이퍼텍스트의 현기증과 궁극적 의미의 부재가 더욱 강화될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다. 정보의 풍요가 찾고자하는 지식을 거저 주는 것은 절대 아니며, 이런 상황에서 사이버링크들의 확대/장은 웹서퍼에게 멀미만을 안겨줄 수 있다. 열린 하이퍼텍스트와 그 적들 칼 포퍼란 사회학자가 열려있고 개방되어 있는 사회를 가로막는 적들에 대해 침튀기며 비 판했던 것처럼, 비슷하게도 개방적 하이퍼텍스트 구조를 가로막는 의도적이거나 비의도적인 기법들이 존재한다. 이는 앞서 본 것처럼 하이퍼텍스트가 성장하면서 본질적으로 가질 수밖 에 없는 상호 링크의 의미 상실의 증상과 함께, 새롭게 하이퍼텍스트의 열린 가능성을 막는 징후들이다. 1. 자동 이동과 팝업 자동 이동과 팝업(popup) 메뉴는 웹서퍼의 의지와 무관하게 다음의 페이지로 연결시켜주 거나 새로운 창을 띄우는 간단한 기법이다. 하이퍼텍스트는 웹서퍼 자신의 의도된 검색의 경로를 가정하지만, 자동 이동과 팝업은 말 그대로 페이지 관리자의 강제적 권한에 속한다. 원하지 않던 원하든간에 새로운 페이지를 보거나 다른 창들과 대면해야 한다. 특히 연속적 인 팝업은 하이퍼링크를 향한 이용자의 열망을 무력화시킨다. 또 다른 연결된 링크를 찾아 헤매는 과정을 아예 한 곳에 매어놓는 부비트랩과 같은 팝업된 창들도 존재한다. 시스템의 속도를 저하시키고, 결국엔 창을 닫아버릴 수밖에 없는 과정을 통해, 하이퍼텍스트의 열려진 구조를 향한 서핑 자체가 중도에서 쉽사리 포기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동이동과 팝업들 이 동시에 진행될 경우, 그 심각함은 배가된다. 의도하지 않은 곳으로의 링크와 그 곳에서 맞닥뜨리는 끊임없는 창들의 쇄도는 디지털 텍스트가 지닌 개방성에 역행한다. 2. 위장된 링크들 웹에서 하이퍼텍스트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화면에서 마우스 커서의 표시가 화살표에서 손 가락으로 바뀜을 뜻한다. 웹서퍼가 원하는 정보에 대한 링크 페이지는 보통 텍스트, 아이콘, 그림 등의 기호적 인터페이스로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를 클릭하여 원하는 정보를 캐어 들어간다. 그러나, 이러한 하이퍼 기능의 상식을 교묘히 위장한 지뢰들이 산재하고 있 다. 하이퍼링크를 교묘히 위장하여 다른 계열의 링크와 헷갈리게 한 후에, 서퍼가 원하는 정 보로 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쓰이는 방법이다. 주로 상업적 동기 에 의해 출발하는 위장된 링크들은 서퍼가 원하는 링크의 방향을 철저히 막고 엉뚱한 곳으 로 유도한다. 최근 웹서퍼들은 링크를 세심히 두드려보고 누르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 위 장된 지뢰를 밟지않기 위해 마우스 오른쪽 버튼으로 주소를 탐색하는 노력도 벌어진다. 이 들 위장 링크는 하이퍼텍스트의 개방성을 심각히 훼손한다. 곳곳마다 쳐진 함정들이 열려진 하이퍼텍스트의 자유로운 서핑을 지속적으로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한번 이러한 함정들에 걸리면, 자동이동과 팝업이 동시에 합세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하이퍼텍스트의 개방성 에 도전하는 위험한 적이다. 3. 모핑의 해체 문화 모핑(morphing)은 새로운 디지털 문화 현상이다. 모핑 안에서 변화하는 이미지들의 연쇄 는 하나의 일관된 흐름 속에 이어진다. 주로 모핑의 기법은 광고나 뮤직비디오에서 흔히 관 찰할 수 있다. 일례로, 얼굴형이란 공통의 일관된 흐름 속에서 우리는 백인의 얼굴이 흑인이 되고, 남자가 여자로 변하고, 동물 면상이 인간 얼굴이 되는 등의 모핑의 과정을 바라본다. 서로 전혀 닮을 것 같지 않은 낯선 얼굴들의 이미지 흐름이 이상하게도 하나의 틀 안에서 동일하고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반면 하이퍼텍스트는 사고의 연관성과 아이콘의 연상 작용 을 중시한다. 하나의 개념에 다른 참조된 개념이 링크되거나 추상적 아이콘에 그에 연상되 는 내용이 링크되는 경우가 그렇다. 모핑은 이런 하이퍼텍스트의 원리를 이용한다. 그러나, 연결된 이미지의 흐름인 모핑 과정은 서로 상관없는 것들도 연결시켜 닮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디지털의 이미지 조작 능력은 무관한 화면들을 링크하는 모핑 과정 에서 극대화된다. 다시 말해 모핑의 과정 안에 놓여있는 각 이미지들간의 하이퍼링크 기능 은 상호 연관이 없는 개념이나 텍스트, 이미지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묶는다. 이는 하이퍼텍 스트가 마련한 끊임없는 링크들의 공허함만큼이나, 자의적인 링크 과정들에 의한 놀이이다. 대개 모핑하는 이미지들간의 하이퍼링크는 궁극적인 인과관계나 설명관계에 의해 구성되지 않는다. 디렉터가 원하면 무엇이든 모핑의 연관된 이미지의 관계로 편입된다. 예컨대, 인간 의 얼굴과 돼지 머리가 연결될 수 있다. 모핑은 이를 용납한다. 마치 이는 사람 얼굴의 아이 콘을 클릭했는데, 돼지 엉덩이가 화면에 뜨는 것과 유사한 관계이다. 그만큼 자의적인 관계 를 상정한다. 물론 모핑은 하이퍼텍스트 구조를 발전시키는 새로운 시각적 상상력의 기법이 다. 그러나, 인간 얼굴과 돼지 면상간의 링크를 무리없이 성립시키는 모핑의 착시 원리는 상 식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지식의 탐구 과정과 무관하다. 무엇이나 모핑 과정에 연결될 수 있고 무엇이나 상호 연관의 지위를 갖는다면 객관적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모핑의 하이퍼 링크적 상상력이 문제시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4. 플래쉬가 막는 것 하이퍼텍스트의 종합적 사고는 플래쉬(Flash) 프로그램에 와서 극대화한다. 무엇보다도 플 래쉬는 한 사이트 전체를 완결된 구조로 본다. 다른 배열에 비해 사이트 내용 중 일부를 첨 가하거나 빼려할 때 구조 전체를 들쑤셔야 하는 경우가 많다. 데이터베이스의 지속적 업데 이트를 필요로 하는 페이지의 경우는 플래쉬가 적합하지 않다. 물론 방문자에게 플래쉬가 주는 세련된 페이지의 구성력은 로딩 시간의 괴로움도 감내하게끔 한다. 그러나, 페이지 내 에서 완결된 구조는 외부와 연결된 개방성을 떨어뜨린다. 플래쉬는 사이트 내부 페이지들간 의 독립적인 구조를 완벽하게 재현하거나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새로운 디자인 설계를 풍부 하게 만드는 반면에, 외부와의 하이퍼 연결 고리는 상대적이고 부차적인 지위에 머무르게 했다. 웹서퍼들이 대개 플래쉬로 만든 사이트에 들어가면 그 자체의 내부 프레임의 서핑에 만 몰두하는 경향은 이를 적절히 설명한다. 이는 하이퍼텍스트가 지향했던 의식의 확장이라 는 개방 지향성과 거리가 먼 사이트 구성의 논리다. 열려있는 하이퍼텍스트를 위하여 이 글의 기본 시각은 부시가 본 인간 의식의 확장으로서의 하이퍼텍스트 개념에 기대어 이 루어졌다. 크게 그 방향은 첫째, 하이퍼텍스트가 가진 필연적 부산물이기도 하지만, 인터넷 시대에 그 자신의 개방성에 불구하고 링크된 텍스트들 상호간 의미의 빈곤이 점차 강화되고 있다는 점, 둘째, 무엇보다도 최근의 하이퍼텍스트 테크닉의 일부로서, 그 자체의 개방성을 가로막는 요인들이 등장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에 하이퍼텍스트의 기능은 인간 의식의 확장보다는 의식을 쓰레기더 미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 속에서 기업은 상업적 가치를 앞세워 하이퍼텍스트의 개방적 가치를 악용하여 웹서퍼들을 덫에 걸려들게 만들기도 한다. 게다가 디지털 디자인이나 사이 버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표현되는 모핑의 과정과 플래쉬조차 논리적으로 무관한 것들 의 하이퍼링크를 강화하고, 무의식적으로 하이퍼텍스트의 개방적 넘나듦을 가로막는데 일조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링크와 하이퍼 기능을 통해 막힘없이 네트를 흘러다니면 서도, 거대한 인간 의식의 확장으로서 네트라는 도관을 통해 궁극적인 지식이나 정보를 발 견하고 참조할 수 있는 부시의 미멕스 프로젝트는 제고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웹디자인, 200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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