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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넷] 신종 학교 괴담

신종 학교 괴담 미국의 학교 당국자들은 요즘 학생들을 때려잡기에 여념이 없다. 미시간의 한 학교에서는 경찰까지 동원해 20여명의 남녀 학생들의 속옷까지 벗기고 잃어버린 돈을 찾는 해프닝이 벌 어졌다. 그러나, 돈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혐의를 받았던 학생들은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미시건주의 이 지역 교육청은 미 수정헌법이 보장한 비상식적인 조사에 응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침해한 근거로 곧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에 의해 기소되었다. 올해 들어 지방 교육청이 학생들의 강제 정학을 명령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고딩 시 절 학교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다가, 혹은 운동권 대학생 형의 이상한 책을 학교에 갖고와서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읽다가 정학을 먹기도 하던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 무슨 그게 대수냐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학의 근거라는 것이 자신의 컴퓨터를 집에서 가지고 논 죄밖에 없다면 어떨까? 워싱턴주의 한 공립학교의 학생은 자신이 다니는 학교의 교감을 패 러디한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다, 강제 정학을 당했다. 이것이 신종 정학의 근거다. 같은 주의 다른 학군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이 학생은 자신이 다니는 학교의 비공 식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학생들이 학교 생활하면서 벌어지는 여러 논의들을 수렴하는 장으 로 활용했다. 이 사이트를 운영하는 닉 엠멧이란 학생의 불행은, 한 친구가 재미로 자신의 가짜 사망 기사를 써보자고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학생들의 연이은 가짜 부고들이 게시판 에 올라오면서, 이 사이트는 인기가 절정에 올랐다. 곧바로 이 사이트가 '히트 리스트'에 올 랐다는 한 텔레비전의 뉴스 오보로, 그 파장을 염려한 엠멧과 친구들은 서둘러 사이트를 폐 쇄해버렸다. 그러나, 이 지역 학교 당국은 학생들에게 5일 정학을 명령했고, 이들의 부모들 이 연방법원에 정학 명령 정지를 요청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법원은 다행히도 엠멧의 사건에 대해 학생들의 편에 섰다. 법원 판결문에서는, 이처럼 학 생들이 학교 밖에서 자신의 시간대에 집에서 컴퓨터를 사용하는 행위는 명백히 학교 당국의 권한이나 통제 밖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이 패러디 부고들이 누군가를 위협하거나 명백히 폭력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고 덧붙였다. 당연히 그에게 내린 정학은 거 둬졌다. 대체로 이런 부류의 사건들은 공립학교의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자신의 제작물을 만들거나 배포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선에서 마무리되고 있다. 다시 엠멧은 학교를 다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법원의 판결이 나기 전까지 학교 당국으로부터 입은 정신적이고 시간적 피해를 누가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학생들에게 권위는 학교다. 학교측에 대한 학생들의 승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이같은 권위에 대한 패러디 사이트들의 운영이 사실상 심리적으로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 법정 투쟁을 감내하면 서 패러디 사이트를 운영하기에는 이들은 너무 여리기에 마음의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있을 판례에도 이 사건들이 긍정적 영향을 주겠지만, 본질적으로 학교 당 국에 대한 학생들의 불신의 골은 깊어질 것이다. (진보넷 200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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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디연합회보] 언론의 '열린자원' 운동을 위하여

언론의 '열린자원' 운동을 위하여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피디연합회보: 2002년 1월 넷째주) 인터넷은 사회 자원의 이용 방식을 뒤바꿔놓았다. 저작, 권위, 기밀, 전문, 보안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 정보에는 의례 이중삼중의 철통같은 가로막이 놓여있기 십상이다. 이렇듯 위계화된 정보도 잠금 장치가 한번 풀리면 무한히 복제돼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네티즌들간의 교류는 협업의 가치도 배양한다. 하나의 정보를 가지고 수백, 수천이 모여 지속적으로 갈고 닦아 쓸만한 형태로 발전시키기도 한다. 이것이 네트에서 벌어지는 '열린자원 (오픈소스)' 운동의 새로운 가치다.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컴퓨터 소스 공개와 협업 과정을 통해 성장한 컴퓨터 운영 소프트 웨어 '리눅스'가 초국적 독점체인 마이크로소프트에 위기감을 불러왔다면, 뉴스룸의 직업적, 전문가적 영역으로 남아있는 언론의 보도 관행에 경종을 울리는 시도들이 네트를 통해 이뤄 졌다. 일명 '언론의 열린자원운동'(open source journalism)이 그것이다. 이 개념은 99년말경 미국내 컴퓨터 전문가들의 한 공동체 사이트에서 알려지기 시작됐다. 한 저널의 편집인이 10만여명에 가까운 회원으로 조직된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 자문을 얻 기 위해 자신의 기사 초고를 올려놓은 것이 발단이 됐다. 곧장 300여명의 네티즌들이 그 기 사의 오류에 수많은 답글을 붙였고, 그 편집인은 기사를 다시 수정해 내보냈다. 그 일화가 알려지면서 언론인들 사이에 작은 논쟁이 일었다. 일부 언론인들은 편집인의 행동이 네티즌 대중에 의한 사전 검열을 불러들일 수 있는 징후라고 쏘아붙였고, 그 편집인은 기사의 사실 확인을 위한 자문 과정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여론은 저널 편집인의 행동에 손을 들었고, 사태는 한발 더 나가 언론계 직업윤리의 혁신에 대한 요구로 기울어졌다. 기사의 오류를 최 소화하는 장치로 '열린자원'이라는 인터넷 정보공유의 정신을 저널리즘에 적극 도입해야한다 는 주장이 제기됐다. 기성 언론의 문제점은 알려진대로 심각하다. 사주에 목매는 비정상적인 운영 체제, 광고주 에 휘둘리는 편집권, 비공개 정보원 중심의 기사들, 게재 여부에 관여하는 정치적 편견들, 사실 확인없이 찍어내는 수많은 오보들 등 고질적인 병폐들이 언론의 뒤꼭지를 당기는 걸림 돌이었다. 게다가 조선 등 족벌 언론들의 정치 국면에 따른 보신성 논조 변화도 이에 한몫 거들었다. 이런 모든 관성화된 언론 체계에 도전하는 징후들이 네트를 먹고 자라난 새로운 '열린' 언론들에서 발견되고 있다. 얼마전 창간 2돌을 맞은 '오마이뉴스'나 인터넷상의 안티조선 사이트 '우리모두'는 이런 열린 언론의 국내 사례로 꼽을만하다. 1만 7천여명에 이르는 시민기자들이 '게릴라'식으로 기사를 자체 생산하여 여과 게재하는 뉴스 생산체계는 기성 언론의 상식과 바탕에서는 도저히 내오기가 힘든 민주적 과정이다. 한편, '우리모두'와 같은 커뮤니티는 언론의 2차 여과지 구실을 한다. 이곳에선 누구나 자발적으로 따서 옮긴 주요 기사들을 등록해 새로운 뉴스터를 만들어낸다. 한번 누군가에 의해 내던져진 글은 덧붙이고 수정하고 논쟁하는 난리굿을 치른 다. 그러면서 글들에 생명력이 붙는 것이다. 모든 자원들은 완벽히 열려있고, 그 자원들은 아래위 없이 수많은 네티즌들에 의해 철저히 검증되는 협업 과정을 밟는다. 하지만 아직은 '열린자원운동'을 활용한 언론의 궁극적 틀은 없는 듯하다. 이제까지 다양 한 실험사례들을 고려해보면, 보다 체계화되고 장기적 안목을 갖춘 뉴스 체계의 구축도 가 능하리라 보인다. 기계가 찾아주는 자동 검색 방식을 거부하고 2만여명의 네티즌들이 일일 이 직접 손으로 구축했다던 한 사이트의 '열린검색운동'과 비슷한 모델이 등장할 법하다. 상 업적 검색엔진이 찾아주는 검색 순위와 분류 결과를 마주해서나, 편견과 오류로 가득찬 뉴 스를 대할 때 무너지는 심정은 거의 비슷하리라. 자발적 협업을 통해 뒤틀린 기사들을 일일 이 골라 사실을 재확인하고 재가공된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축적·관리한다면 중요한 '열린' 뉴스원이 될 만하다. 게다가 기성 언론의 무사안일한 보도 관행을 감시하는 효과도 적지않 게 얻을 것이다. 우선 그 협업의 시작은 각 시민언론단체들이 고생해서 만들어 철지나면 묵 혀두는 정례 모니터링 보고서들의 디지털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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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예총] 열린채널도 "찢어라"

열린채널도 "찢어라"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우리 일상에 기생하는 "찢고" "찢겨져야" 할 악습, 권위, 폭압 등이 어디 한둘이랴.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 국민 통제의 상징인 주민등록증이 아직까지 버젓이 힘쓰는 현실 또한 당연 "찢겨야할" 것들 중 하나다. 이번 KBS 열린채널의 편성에서 사라진 이마리오씨의 영상 보 고서, <주민등록증을 찢어라>는 바로 "찢겨야할" 구시대 악습을 "찢자"는 의도를 지닌다. 그런데, 당연 우리 사회의 "찢어야할" 것들에 대한 고민을 영상에 담아내야할 열린채널의 시청자프로그램운영협의회(운영협의회)가 오히려 "찢어라"라는 문구를 겁내해 문제삼고, 내 친 김에 자의적 검열의 칼까지 휘둘렀다. 시민단체들이 수년간 각고의 노력으로 어렵사리 방송법에 명문화하여 이룬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들이 방송된지 이제 겨우 한 해가 지났건만, 벌써부터 편성 심의 권한과 관련해 운 영협의회의 실체가 의심을 받게 됐다. 이 협의체가 왜 시청자의 직접적인 방송 접근권을 고 무하기보다 이를 막는 사전 검열의 기구가 되었을까? 이 문제는 근원적으로 우리 공익 방송 의 현주소와 한계로부터 따질 문제로 보인다. 우리 공중파 방송의 비정상적 수준을 이해하면 사실 "~을 찢어라"는 그리 겁나는 문구가 아니다. 어느 채널에서든 더 겁나는 말도 겁나지않게 마냥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실 상 업화와 비정치화가 화면을 지배하는 우리의 영상 문화에선 "찢기는" 대상이 겁나는 문제다. 예컨대, 광고에서 청바지 "찢는" 것을 무슨 젊은이들이 만든 하위문화의 분출인냥 표현해도 별 문제없이 전파를 타지만, 주민등록증 따위를 "찢으면" 탈이 생긴다는 얘기다. 이것이 우 리 방송 문화의 정치적 한계치다. 따져보면 방송 불가 판정도 결국 "찢어라"를 문제삼기보 다 "찢는" 대상으로 주민등록증이 거론되는 것을 불경죄로 몰아 벌어진 결과다. 주민등록증 =준법정신의 고취(방송심의규정)라면, 이를 "찢어라"는 무시무시한 탈법이자 정치적 선동에 해당한다. 따라서, 박정희 생가 장면 삭제 등에 이어 제목의 순화까지 요구하며 편성 결정을 지루하게 미루다가 일방적으로 불가를 결정한 행위는 애초에 공중파를 통해 내보낼 의사가 없었다는 정황으로 읽힌다. 열린채널은 그야말로 방송사와 운영협의회의 저급한 정치 수준 만큼만 빼꼼히 '열린' 상태였던 셈이다. 어렵사리 상업화된 언론의 틈새를 뚫고 만들어 시민들이 꾸리는 공공 시간대를 정치 영역 이 거세된 불구화된 영상만으로 채우게 놔둘 수 없다. 우리는 옴부즈맨 프로그램이나 시청 자 비디오 등으로 공중파 방송이 어떻게 자신의 민주적 성격을 과대 포장해왔는지 잘 배워 왔다. 이번 기회로 시청자들이 직접 참여해 제작하는 KBS의 열린채널 또한 방송사들의 현 실 포용 능력을 내세우는 선전 수단이 될 위험성이 짙다는 점 또한 쉽게 파악됐다. 운영협 의회가 독립 기구로 운영되는 듯 했지만, 정작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가 돌출되자 기존 방 송사들의 편성권자들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다. 물론 열린채널에 대한 체념은 궁극적 해결이 못된다. 체념은 사태의 진실을 정확히 보는 데 쓰이는 것으로 족하다. 문제는 관련 시민단체들의 요구처럼 당장 <주민등록증을 찢어라 >의 편성 불가 철회와 함께, 민주적이고 개방적으로 시민참여를 보장할 수 있도록 열린채널 운영협의회의 권한과 위상에 대한 재점검이 뒤따라야 한다. 쓰레기더미에서도 억세게 커가 는 생명을 키우려고 힘들게 마련했던 소통로가 아니었던가. (일일문화정책동향, 2002. 5. 1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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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대학원신문]네트의 기생수, 날강도, 그리고 반칙왕을 조심하라.

네트의 기생수, 날강도, 그리고 반칙왕을 조심하라. 중앙대 대학원신문 2000. 7. 미국의 좌파 지리학자인 데이빗 하비는 몇 년전 한 알튀세리앙의 잡지에 실은 그의 글에 서, 현대 자본주의의 미래상을 점검하면서 자본주의를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달리는 브레 이크 없는 기차"와 같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는 인간 삶과 의식의 미시적인 결 하나 하 나에까지 자본의 거대한 기차가 무참하게 휩쓸고 지나감을 의미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브레 이크 없이 휘몰아가는 현대 자본주의의 의식적 체제 '동원'(mobilization)의 속도전을 연상시킨다. 이는 물질과 의식 모든 영역에서 질곡을 만들어가는 자본주의 미래의 우울한 비전이 다. 미래에 대한 암울한 비전은 희망의 가능성을 절대적으로 부정하고 출발하지는 않는다. 항상 그 둘의 긴장 관계를 놓치지 않는다. 예컨대, 인터넷이란 새로운 매개체를 통해 우리는 억압과 희망의 꿈을 동시에 꾼다. 마찬가지로 이 꿈은 분명 미래에 대한 전혀 근거없는 상 상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즉 현실에 근거한 꿈이고 그래야만 한다. 미래의 감지는 그 래서 냉혹하다. 1. 산소같은 기생수(寄生獸) 현재 남한 국민 3명 중 1명이 인터넷을 이용한다고 한다. 이 추세대로 가면 내년 상반기 에 인터넷 인구가 2500만명이라는 진단도 나온다. 이 작은 나라에서 인터넷은 우리의 미래 의 사활이다. 광고, 쇼, 퀴즈, 뉴스 할 것 없이 인터넷에 광분하고 있다. 코스닥이 생기고, 수많은 벤처에 젊은이들이 몰려든다. N세대가 격상되고, 젊은 벤처사장이 잡지의 표지 모델을 장식한다. '정보사회'론도 이제 한물간 논의가 되어버렸다. 요즘은 노골적으로 '신경제'라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앞세워, 경제 논리를 그 중심에 세워버렸다. 미국 다음의 인터넷 강국이란 수식어도 나온다. 이제 386세대의 귀하신 몸들은 운동의 전망을 벤처에서 구상한다. '정보', '신(新)', '지식' 등의 수사는 대학의 학과 명칭, 학제 등 온갖 곳에 달라붙는다. 이 수사 없이는 우리는 미래에 숨도 쉴 수 없는 상황에 이를 것이다. 마치 MIT 컴퓨터사이언스 랩의 마이클 더투조스가 미래 컴퓨터가 사물 속에 이동하고 감춰지는 미래를 예측하며 내놓은 '산소 프로젝트'처럼, 이 정보의 수사들은 우리 인간의 '산소' 역할을 자임한다. 그 기술적 미래의 판단을 유보하더라도, 앞서 열거한 남한 현실의 '산소 프로젝트'들은 '동원'의 체제 논리이다. 어디서든 발견하고 유포되는 '산소'라고 주장하는 것들. 정보의 수사는 산소와 같이 육신의 영위를 조율하는 자원이 아니다. 마치 이와아키 히토시가 그린 '기생수'에 가깝다. 현재의 과도한 수사들은 외계생물로 인간의 몸에 기생하여 인간을 장악하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괴물과 같은 '기생수'다. 그들에 의해 자율 신경이 장악당한 인간처럼, 정보의 수사는 그렇게 유포된다. 인터넷을 둘러싼 논의는 계속적으로 기생수들의 장악 과정에 처할 것이다. 사방팔방 매체들을 점거한 기생수들의 프로파겐더는 그들이 단지 인간들에게 산소같은 존재임을 설득하는 장미빛 메시지로 가득찰 것이다. 2. 코드를 휘두르는 날강도 이제 인터넷에서 장사하던 닷컴들의 사망 신고가 줄줄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슈퍼닷 컴'들만이 살아남는 시대가 도래한다는 얘기다. 현실 자본의 규모 논리가 닷컴에도 예외가 아니라는 소리다. 인터넷이 희망과 경쟁의 프런티어인 시대가 진정 몇 년이던가. 자본주의의 산업혁명 시기 이후 자본의 역사를 상기만 해봐도 이렇게 독점의 구도가 철저하고 빠르게 엮어지진 않았다. 아이러니 한 것은 오히려 이 새로운 디지털 경제의 시대에 독점을 뒤엎는 기회가 더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근거는 기술적 '코드'에 있다. "삼성의 기술이 만들면 '표준'이 됩니다"라는 광고의 사기성 발언은 사실 이에 근거한다. 독점이 기술적 코드를 장악하면, 이를 뒤집는 작업은 극히 힘들어진다. 이런걸 가지고 신경제 이론하는 자들은 '록 인'(lock-in)이라 부른다. 안에서 걸어 잠근다는 얘기다. 최근 신경제와 관련한 재밌는 글을 서술한 하버드대학의 로렌스 레씩 또한 '코드'의 논리 가 신경제 논리의 핵심임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자본 독점체가 장악한 기술적 코드는 표 준이 된다. 주먹과 힘의 현실 논리가 닷컴들에 누적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삼성이 '국내'에서 표준을 호언장담하는 카피 문구는 공식 협박이기도 하다. 날고 기어봐야 사실상 삼성의 손바닥에 있다는 얘기다. 로베르토 디 코스모의 표현을 빌린다면, 이는 '날'로 먹는 '강도'의 논리다. 공정한 게임의 룰을 더욱 찾기 힘들어진 자본주의의 미래는 이렇게 또 다 시 기술적 코드로 힘을 배가한 디지털 '날강도'들의 자본 증식과정의 연장일 수 있다. 3. 포크를 휘젓는 반칙왕 인생살이의 쓴맛처럼, 외연상 인간에게 미래의 억압과 희망의 가능성, 즉 '양날의 칼'로 보이던 것들이 억압의 식칼로 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버팅기는 다수의 자율적 힘에도 불구하고, 삶의 모순이 착착 쌓여 고스란히 네트에 실려 우리의 등짝을 억누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링 위에서 페어플레이를 순진하게 요구하다 '반칙왕'의 흉기에 무참히 마빡이 깨지듯, 장미빛 가능성을 포함한 미래 예측의 순진한 구도는 링 안과 밖에서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자본의 반칙을 충분히 전제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야 각자의 마빡이 터지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칙왕'이 휘젓는 포크를 조심해야, 이 괴 물을 때려눕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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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넷] 네트의 삐끼들

네트의 삐끼들 물리적 공간에서 특정 목적지에 이르는 길까지 꼬시는 이들을 점잖지 않은 말로 '삐끼'라 부른다. 한마디로 호객하는 이를 지칭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삐끼들은 사람에서부터 추상 적인 형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발전한다. 호객은 음침할수록 소구 효과가 크다. 즉 삐끼 가 추상화되고 비가시적일수록 받아들이는 사람의 거부감을 제거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삐 끼는 소비의 덕목과 공생한다. 호객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소비를 유발시키는 과정이라면, 삐 끼는 소비와 함께 살고 죽는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 광고는 소비자를 상품 구매의 최종 목 적지까지 유인하는 추상적 형태의 삐끼다. 광고주와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별의별 기법들을 동원해 왔다. 텔레비전은 매체 특성상 시청자의 시선과 밀접하다. 그 시선을 지속적으로 잡아둘 수 있는 힘이 시청률이자 미디어 기업의 수익원이었다. 그래서 텔레비전은 끊임없이 광고와 프로그램의 시각적 연쇄를 통해 시청자의 눈을 잡아두려 한다. 하지만, 텔레비전은 시청자의 의지에 의해 리모콘으로 영상의 흐름을 중단하기가 수월한 편이다. 물론 그 중단까지의 과정이 어렵다 하더라도, 보여주는 이미지들이 내키지 않는다면 그저 이를 무시하고 꺼버리면 그만이다. 사실 텔레비전은 시청자들에게 보길 강요하는 가장 강력한 밑천이라곤 시각 영상 이외에는 없다. 형식상 강제로 시청자의 머리를 자신의 모니 터 속으로 쑤셔넣지는 않는다. 이에 반해 자유의 공간이라고 칭송되는 네트는 어떠한가? 아이러니하게도 네트는 텔레비전보다 훨씬 강력하지만 눈에 쉽게 띄지않는 삐끼들이 잘 자랄 수 있는 토양을 갖춰가고 있다. 특히 네트 기술의 상업적 전용은 사용자의 자율 의지 를 기술적 수단을 통해 가로막으면서도 동시에 교묘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해롭다. 대체 로 네티즌을 골탕 먹이는 네트의 삐끼들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부류들이 있다. 우선, 초보 적 수준의 삐끼는 인터넷 사용자가 다른 사이트로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전(back) 버 튼이 아예 작동하지 못하게 한다. 주로 자바스크립트(Javascript)로 그러한 루프(loop)를 꾸 미는데, 윈도우창을 하염없이 닫아도 계속해서 또 다른 창들이 뜨게 만드는 것도 이와 비슷 한 기법이다. 이를 벗어나는 길은 모든 창을 닫고, 삐끼에게서 도망치는 길밖엔 없다. 두번째는 좀 더 점잖은 부류이다. 이들은 주로 메타태그(metatag)를 활용한다. 메타태그에 는 인터넷 문서의 기본 확장자(html) 코드내에서 그 페이지가 담는 정보가 위치한다. 예컨 대, 문서 제작자와 갱신일 등과 해당 페이지를 검색할 수 있는 주요 검색어들이 자리한다. 검색엔진에 주로 오르는 단어들, 예를 들어 '섹스' '야사', '공짜', 'mp3' 등의 검색어를 이 메타태그에 넣는다면, 이러한 사이트들의 검색률은 당연히 증가할 것이다. 메타태그의 삐끼란 경쟁자의 키워드를 자신의 메타태그에 심거나, 확률 높은 검색어를 자신의 메타태그에 끼워 넣어 네트 사용자를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이런 삐끼들에게 걸리면, 사용자는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곳에서 길을 잃고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세 번째 부류로 위장된 상업 광고들을 연결시켜주는 삐끼가 있다. 이것은 주로 포르노 사 이트들에서 볼 수 있는데, 아이콘이나 텍스트 자체의 상징성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트릭을 주로 사용한다. 네트에서 보여주는 아이콘은 기본적으로 소비자와의 인터페이스를 고려하여 제작되기 마련이다. 즉 어떤 아이콘이나 텍스트를 누르면 그 것에 연결된 페이지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대충은 이용자가 알게끔 고려한다. 그런데, 일부 사이트들은 그 연결 페이지의 추측을 무위화한다. 수많은 상업용 웹페이지들은 광고를 전혀 광고라고 눈치챌 수 없는 도 상과 텍스트로 위장하여, 다시 한번 덫을 친다. 마지막으로 한번 온 손님을 기억하는 삐끼들이다. 특정 방문객의 정보를 기억하는 쿠키 (cookies)란 기술은 소비자를 맞춤화하는데 제격이다. 이 기억력 좋은 삐끼들은 이용자에게 형식상 초대받은 손님이란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데, 결국은 최종 소비까지의 클릭을 단숨 에 유발하기 위한 덫으로 돌변한다. 이처럼 네트의 삐끼들은 사용자가 가는 길을 막거나, 엉뚱한 수렁으로 빠뜨리기도 한다. 재수없으면 못빠져나가게 이들에게 억지로 잡히는 수도 있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용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정해진 길을 잡아주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다면, 어쨌거나 네트 의 삐끼들은 인간이 고안한 어떠한 기술보다 사용자와 '인터렉티브'한 듯 하다. 지루한 정보 의 바다를 항해하는데 이만큼 스릴넘치고 완벽한 키잡이가 어디 있겠는가. 정 자신의 자율 신경이 떨어지는 자들은 삐끼들의 뒷꽁무니를 부지런히 쫓을 법하다. (진보넷 2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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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대학주보] 미국의 정보 패권과 음울한 미래

미국의 정보 패권과 음울한 미래 최근에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공동으로 펴낸 {제국}이란 역작을 보면, 제국의 3대 통제력으로 폭탄, 화폐, 정보(ether)를 들고 있다. 역사적으로 폭탄을 통한 힘의 독점이 나 화폐의 규제가 부분적으로만 그 힘을 행사해왔다면, 현재 정보의 영향력은 범지구적이다. 이는 모든 대안적 경로를 억압하고 자본의 힘 아래 전 지구사회를 복속시키는 가공할 힘이 다. 어쨌거나 미국은 이미 이러한 제국의 세 가지 요건을 두루 갖춘 국가다. 저자들의 재미 있는 지적처럼, 미국은 워싱턴(폭탄), 뉴욕(화폐), 로스엔젤레스(정보) 모두를 지니고 있다. 지구화가 미국화와 등치되는 이유에 대한 적절한 지적임에 틀림없다. 제국의 기획은 바깥이 없는 지구 영토의 구상이다. 외부가 없는 공간의 아이디어는 21세 기 정보 패권을 노리는 미국의 아이디어와 일치한다. 미국의 글로벌 정보 초고속도로의 기 획은 이와 맞닿아 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미국은 일찌감치 '서비스경제모델'을 도입하여, 경제의 정보화를 적극적으로 수행한 나라다. 1930년대에 안토니오 그람시가 {옥중수고}를 정리하면서 예견했던 '미국주의'의 상이 현재 미국이 갖고있는 정보 패권의 힘인지도 모른다. 그람시가 보았던 미국의 모습은, 유럽에 비해 청산할 과거의 기생적 유산들이 적어 자본 축적의 고도화를 빠르게 수행하고, 내부적으로 경제적 '구조'가 상부구조를 더욱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단순 합리화된 거대 부르주아 국가였다. 미국이 신경제 이론과 현실을 전세계에 강요하기까지 과거 공장시대의 본원적 축적이 현재에 이르는 바탕이 되었다는 얘기다. 작년 미국 상무부 보고에 따르면 정보기술 분야의 국가간 경쟁력에서 단연 1위는 미국이 었다. 미국의 대외 경제정책 중 전자상거래는 대통령의 필수 과업이었다. 미국에게 정보와 정보망은 전세계의 주권과 국경을 빛으로 무너뜨려 세계시장을 구성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이 지닌 패권의 유지와 확대는 거대 자본에 의한 기술의 독점에서 비롯된다. 지난 수 년 동안 사상 최대의 기록을 세우고 있는 미국내 인수합병은 특히 정보산업에서 크게 두 드러진다. 이처럼 미국은 내부적으로는 고전적인 타자본 흡수를 통해 독점력을 배가하고, 국 제적으로 지적 재산권 등의 국제적인 공인을 외교나 협상 채널 등을 통해 강제화하면서 성 장했다. 물론 미국이 지닌 글로벌 하이테크 독점은 개발국가들에게 미국식 모델을 따르고 따를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글로벌 동원의 기제를 필요로 한다. 일례로 한국과 같은 정보입국의 꿈 을 꾸는 나라에 심어진 벤처기업의 신화는 신경제론을 강화하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미 국식 자유주의 정신과 시장주의를 적절히 뒤섞어 정보경제를 자본주의의 미래로 추켜세우는 미국의 전략은 개발국들에게 쉽게 먹혀들고 있다. 즉 개발국들에게 이루어지는 새로운 정보 모델의 이식은 미국이 지닌 정보 독점력을 확장하는데 기여한다. 정보의 독점은 코드의 독점이다. 기술적 코드의 독점은 기업간, 국가간 불균등을 영속화한 다. 일단 한 기업에 의한 코드의 독점이 이루어지면 또 다른 관련 코드들도 독점적 기술로 편입되고, 이를 깨기가 힘들어진다. 산업 시대의 자본 독점의 폐해에 비해 정보 독점이 더 심각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미국은 이러한 코드의 독점력을 움켜쥐고 전세계를 새로운 미 국식 자본주의의 비전인 정보경제로 끌어들인다. 이것이 과거 제국주의의 위상과 비교해 새 롭게 달라진 미국이 가진 위험천만한 모습이다.// (경희대 대학주보 11/0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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