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이곳저곳 기고했던 글들

[한진해운사보] N세대의 문화 양식과 서바이벌 게임

N세대의 문화 양식과 서바이벌 게임 X, Y, Z 그리고 N 세대 X, Y, Z, N이 뭐냐고? 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신세대 명명법이다. 대문자 알파벳도 모자라 1318과 386세대처럼 숫자로 그 세대를 가리키는 방식도 등장한다. 여기에선 386을 제외하곤 나머지 모두는 서로 친화력을 지닌 세대들이다. 우 리에게 'X세대'는 '서태지 신드롬'의 촉매로 93,4년에 풍미했던 10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연령층이다. 기성세대 입장에서 보면 X파일처럼 명확히 정의되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세대가 X세대였다. 서열상 X의 동생은 Y다. 작년부터 종종 지상에서 접하곤 하는 'Y세대'는 13∼20살까지 분포해 있다. 평균 나이로 봐선 X보다 Y가 더 어리다. X와 Y의 정서적 공통점은 '새로움', '기성권위에 대한 도전', '반항', '자유', '개성', '감각주의' 등이다. 이들은 컴퓨터와 정보화에 강하고, 패션과 소비에 적극적이며, 개인적 가치를 최고의 자리에 놓는다. 이들 형제간의 차이라면, X가 소수의 아웃사이더 특징을 부각한 반면 Y는 다수의 세대 흐름을 강조하고 있다. 2천년(Y2K)에 주역이 된다는 의미에서 강조된 Y세대는 시기상으로 X세대 논의 이후에 등장한 다수의 신세대이다. 'Z세대'는 1318세대이다. 연령대로는 X와 Y세대에 비해 가장 어리다. 알파벳의 가장 끝자리를 택한 것도 그 이유에서 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N인가? 'N세대'는 네트워크 세대이다. X, Y, Z 삼형제의 가장 특징적인 속성이 N에서 수렴되기 때문이다. 미국식으로 따지면, N세대는 70년대말 이후 태어난 2∼22세까지의 전후 '베이비붐 세대'의 2세들이다. 이 들은 X, Y, Z 삼형제의 공통된 감성과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며, 특히 이들에게 컴퓨터와 인터넷은 삶의 필수 조건이다. 이것과 더불어 사고하고, 길들여지고, 생활하는 세대가 N세대이다. N이 3형제와 다른 차별성은 디지털 기술과 영상을 즐기는 세대임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들에겐 이미 요람에서부터 즐겨온 영상, 인터넷, 게임 등이 삶의 필수 요소들이다. N세대는 네트를 통해 독식, 독점, 권위, 논리, 이성보다는 공유, 자유, 개방, 감성을 터득해 나간다. N세대의 '진짜' 무서운 아이들 얼 마전만 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 새로운 현상이 이 새로운 세대들에게서 목격된다. 송파 여중생들이 8미리 캠코더로 찍은 '너희가 중딩을 아느냐'란 다큐 영화가 연일 화제에 오르고, <밥>이란 순수하게 청소년들이 만든 무가지와 웹진 <채널 10>이 또래들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누리는 등 과거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할 특징적 N세대 문화들이 만개하고 있다. 영상과 인터넷에 친숙한 새로운 세대들은 이같은 소수 문화 형성의 가장 전위에 서있다. 문화 향유와 메시지 생산의 주인으로 이제 나이 어린 청소년이나 신세대가 적극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앞에서 끝으로 이어지는 맥락은 별로다. 그래서 장황하고 지리한 전후 맥락은 좀을 쑤시게 한다. 그림 하나 없는 두툼한 이론서는 그들에게 지옥이나 다름없다. 만화책을 보라. 그들이 만화를 볼 때면 수십권의 책을 쌓아놓고 순식간에 눈을 굴린다. 연배가 적을수록 책읽는 속도는 빨라진다. 이미 그들에겐 영상과 도상(Icons)이 습관화되고, 훨씬 편하다. 고정되어 있는 그림보다는 움직이는 동영상, 평면보다는 3D가, 넓은 길보다는 미로같은 길을 따른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적응력이 강하며, 빠르게 배워나간다. 특히 컴퓨터에서는 더욱 그렇다. 네트는 전후 맥락을 무시한다. 예컨대 하이퍼-링크 기능이 그것이다. 이리저리 네트를 통해 넘나들며, 네트의 속성상 그들은 잠시도 어디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로운 세계를 접한다. 인터넷의 홈페이지도 그 무한한 개성의 표현 방식이다. 영상과 이미지로 자신의 개성을 한껏 홈페이지에 각인한다. 채팅과 게시판에는 새로운 언어형식이 등장한다. '한글맞춤법표준'은 그들에게 권위일 뿐이다. 바로 그들이 새로운 언어의 조합과 통신예절을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다. 기성세대는 청소년 또래집단의 대화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터넷의 기술적 특성은 새로운 세대들에게 가장 적합하다. 스스로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최적의 기회를 디지털이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이들 새로운 세대는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헐렁한 바지를 찢어 질질 끌고 다니거나, 머리를 컬러로 물들이고, 부두교를 연상케하는 장식물과 피어싱(피부뚫기)으로 신체를 치장한다. 일본의 신주꾸 거리를 연상할 정도로 그들의 패션은 원색적이다. 기성세대가 보기에 N세대는 진짜 무서운 아이들이다. 신세대 스스로가 '어른들은 몰라요'를 항변하던 수세기가 가고, 이제는 그들이 미래이자 주인공의 자리로 발탁된다. 21세기는 기성 권위의 힘으로 미래를 헤쳐나가기에는 밑천이 부족하다. 기성세대는 걸림돌이다. 개인의 창조성과 실험성이 N세대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미래에는 N세대가 지닌 개성과 자유를 발산하는 방식이 중요해진다. 빠르게 적응하고, 혼란스러우나 스스로의 동일성을 찾아내며,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그들만의 문화가 부각되는 것이다. N세대의 아슬아슬한 생존 조건 최 근 주요 신문사마다 인터넷 생존 게임을 경쟁적으로 벌이고 있다. 사실 이 서바이벌 게임은 알고보면 물리적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 채, 정해진 시간과 한도액을 가지고서 오로지 인터넷이란 수단을 통해 버티는 미련스런 게임이다. 이 게임의 참여자들은 가상의 네트워크를 통해 떠돌아다닐 순 있어도, 실지 옷가지와 음식, 그리고 여타의 필수품들을 외부에서 일차로 조달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게임 주최측은 참여자들이 외부 접촉없이 정해진 공간 안에서 게임 시간을 초과하여 장기간 머무를 때 생기는 정신적인 스트레스 상황은 고려에 넣고 있지 않다. 어쨌거나 주최측의 의도가 인간에 대한 네트의 무한하고 풍부한 가능성을 계산하고 이벤트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역으로 이 게임은 결국 인간의 생존 조건이 물질 공간에서 주어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워쇼스키 형제가 만든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진정 인간 정신의 세계가 하나의 가상 영역을 만들어낸다. 무중력의 집합적 공동심리가 펼쳐지는 전자장이 펼쳐진다. 가상에서의 식사, 의복, 사랑 등 모든 영역이 진짜인 것처럼 느껴지는 세계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상의 정신 세계 밖에는 기계가 만든 자궁 안에서 인간 자신을 갈아서 만든 양수로 연명하는 자신의 육체가 전제된다. 이처럼 네트의 가상성이 부각될수록 점점 더 현실의 조건과 밀접히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본다면 N세대의 자유분방함이 제대로 된 생존 조건을 찾는 방법은 일차적으로 현실 삶의 결에 달려 있다. 단지 기계의 인터페이스를 통해 소통하는 삶의 조건만이 N세대의 생활 근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성세대의 역할은 중요하다. N세대를 둘러싼 물리적 현실의 질과 결을 규정하는 것이 부모세대인 것이다. 가상과 네트로의 도피가 자라나는 세대를 지극히 무익한 욕망 배설의 말초적 관심사로 빠뜨릴 수도 있다. 이 상황은 기성세대로 하여금 자라나는 신세대의 개성과 자유를 우선 현실 안에서 뿌리내리게 할 의무를 갖도록 한다. 또한 그들의 개성과 자유가 기업의 현금화 관심과 맞물릴 수 있는 소지가 다분히 있다. N세대의 욕망을 자극한 디지털 상품의 미끼라는 유혹이 도사릴 수 있는 것이다. 이미 그들은 거대하고 매혹적인 떠오르는 구매층이 되어버렸다. 예로부터 인구통계학적으로 보면, 젊은 구매자층은 여타 세대에 영향을 미치는 주된 견본 시장 역할을 떠맡았다. 이른바 '청년 숭배 혹은 물신'(Jugendfetisch)은 여타 세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신세대 중심의 상업화 논리를 극대화한 지칭용어이다. 이처럼 N세대에 대한 끊임없는 표적 작업과 유혹은 자유롭게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을 차단하고, 기업의 끝없는 이윤욕의 사슬로 그들을 얽어맬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 또한 N세대에 드리워진 미래의 우울한 '그림자'이다. N세대의 생존 조건은 결국 현실에서의 삶의 조건에 위태로이 매달려 있다. 하지만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럴수록 N세대의 가능성은 더욱 풍부하게 공존한다. 최근 국내에도 번역되어 발간된 {N세대의 무서운 아이들}이란 책에서, 돈 탭스콧(D. Tapscott)은 N세대의 긍정적 가치를 설득력있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기성세대가 지닌 N세대에 대한 우려, 예를 들어 컴퓨터 중독증과 개인주의 성향 등을 기우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N세대는 기성세대와 달리 네트에 상주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자연스레 네트를 통해 또래 집단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사회성과 공동체 의식을 키운다. 받아들여야할 사실은 이들 네트세대가 인터넷이나 영상을 통해 접하는 가공된 현실이란 그들 자신의 삶이자 현실이란 점이다. 그들의 문화 양식 자체가 과거 세대와 달라진 것이다. N세대에게 가상 안에서의 유랑은 현실과 마찬가지로 농축된 삶의 경험이자 바탕이 된다. 그러나 물질 세계의 텍스트에 친숙한 부모세대는 네트를 두려워한다. 부모세대는 네트를 수렁으로 보며, 자신의 자식들이 그 수렁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과거의 세대들은 자신의 두려움을 자식에게 전가한다. 통신모뎀을 빼앗고, 심한 경우엔 컴퓨터 자체를 못쓰게 만든다. 탭스콧의 말대로 앞으로 세상의 모든 변화를 N세대가 주도한다면, 기성세대는 새로운 세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늘릴 필요가 있다. 물론 어느 한 세대의 월권은 자칫 파국에 이를 수도 있다. 정보화 신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억압은 가능성의 영역을 차단하고, 기성세대에 대한 N세대의 완전 부정은 대안없는 일탈로 내달을 수 있다. 기성세대의 이성 능력과 신세대의 자유적 발상이 적절히 어우러질 때만이 N세대의 미래적 가치가 밝을 수 있는 것이다.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한진해운사보> 99. 10.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경희대 교지 <고황>] 인터넷 경제학' 비판 시론

인터넷 경제학' 비판 시론 경희대 교지<고황> 99년 여름호) 1. 네트의 '그늘' 밟기 우리나라 벤처기업이 피부로 겪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겪어야만 하는 현실을, 한 벤처기업가 사장의 말을 빌려 들어보자. "좋은 기술 만들어 인수/합병당하고, 다른 기술 개발해 또 합병당하고 하는 것이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얻는 최상의 성공입니다. 한가지 기술로 자자손손 경영할 회사 만들 생각 말아요."(한겨레신문 5월 24일자) 신지식인 경제 혹은 디지털 경제를 주창하며, '제 2의 건국'을 외치는 현재의 분위기와는 아주 딴판의 주장이다. '포지티브 썸'(positive sum)의 새로운 경제 논리를 달달 외는 디지털 전도사(guru)들이 들으면 찔려하는 구석일 수도 있다. 현재 이같은 현실 경제의 '그늘'은 압도적인 '빛'의 논리에 의해 거의 들춰지지 못하고 있다. 이미 새로운 사회에 대한 낙관론이 지배적이며, 무형의 디지털과 이를 빛으로 속도로 연결하는 네트의 우파 경제학이 우리의 사고를 잠식해가고 있다. 물론 나는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단순 낙관론이나 부정론을 경계하면서, 현재 도래하는 '빛'의 논리를 일부 긍정한다. 같은 맥락에서 현재 침체일로에 놓인 정치경제학이 재생하고 부활하는 길은, 사회 이행의 지표들을 적극적으로 사고하면서도 그 근본적 모순의 연속적 고리들을 밝혀내고 단절하려는 노력들이 부단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까스텔(M. Castells)이 내논 자본주의 '발전양식'으로서의 '정보양식' 개념 등은 그 의의가 크다. 그의 논의는 다름아닌 좌파 내부에 정보혁명과 맞물린 자본주의 경제 이행과 파장에 대한 적극적 사고의 요청이다. 그가 보기에 구체적 현실에 대한 무기력의 심연은 보드리야르가 80년대 이후에 실천 전략으로 삼았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inertia)의 나락일 뿐이다. 새 것에 이끌려 모든 것을 청산한 채 새로운 밀레니움의 선각자입네 하는 천박한 자들이 꼴불견이라 치더라도, 현실 변화에 너무나도 둔감한 채 전통의 잣대만을 들이대는 골통들의 의식이 더욱 전망을 어둡게 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새로운 현실과 관련한 진단과 처방에 긴요한 것은 낙관이냐 비관이냐라는 주관적 전망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 현실에 대한 모순과 발전의 변증법적 긴장을 긴 호흡으로 잡아내는 작업일 것이다. 이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글은 최근 신(新)경제, 네트워크경제, 정보경제 등으로 회자되는 새로운 경제관의 주체들과 그들의 핵심 주장, 그리고 그들의 전자공간에 대한 우파적 전망을 살펴보고, 이를 거슬러 네트의 사회적 성격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전망을 찾아보려 한다. 2. 빈곤과 수확 체감의 불안증 네트 시대의 시장 원리와 관련하여 신경제 이론가들과 디지털 계급의 경전인 [와이어드Wired]는 새로운 경제 신화의 근원지를 제공하고 있다. 이 잡지는 시장의 비예측적이고 결점으로 가득한 메커니즘을 생물학, 전염병학, 유기체론, 생태학, 비선형 물리학, 진화 경제학, 카오스 이론 등의 외피들로 단단히 감싼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자본주의적 시장의 비예측적이고 모순적인 속성 그 자체가 장점이자 네트워크 경제의 법칙인양 추켜세운다. 또 다른 우파 경제학의 산실, 산타페 연구소의 신경제 이론가인 브라이언 아써(W. Brian Arthur)의 그 유명한 논문, [수확 체증과 비즈니스의 신세계](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1996.)에 의거하면, 네트 효과는 산업시대의 '수확 체감'(decreasing returns)의 경제 원리를 물리치고, '수확 체증'(increasing returns)의 새로운 세계로 접어들게 만든 주요인이다. 달리 말해 산업시대의 희소성의 원칙이 네트워크 경제에 이르면 '마찰없는'(friction-free) 풍요의 법칙으로 대체된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l)이 보는 수확 체감이란 시장내 우위의 상품 혹은 기업이 종국에는 한계에 봉착하는 세계이다. 그 이유는 상품의 가격과 시장 점유에 있어서 예측 가능한 균형상태(equilibrium)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이 때의 시장 특성은 완전경쟁 시장, 시장의 예측 가능성, 균형/질서, 과학적 분석, 안정성 등이다. 한편 시장은 변화에 더디고 지속적이며 그 수확이 적다. 그래서 소비자의 수, 지역적 수요, 원재료 접근, 시장 등의 매점이 더 이상 불가능한 시장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네트 경제에서는 구시절의 경제 논리는 종결된다. 풍요와 수확 체증의 신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와이어드]지의 편집장, 케빈 켈리(Kevin Kelly)는 {신경제의 새로운 법칙들}(1998)이란 책을 통해서, 이를 뒷받침하는 두 가지 근거를 들고 있다. 우선 비트 혹은 디지털의 무한한 복제 능력으로 말미암아, 한계비용이 점차적으로 위축되고 상품의 희소성이 복제 능력에 압도당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네트워크의 노드(nodes) 숫자가 산술적으로 증가하나, 네트워크의 가치는 지수적(exponential)으로 폭발한다는 주장이다. 수확 체증의 세계에서는 네가티브(-)가 아닌 포지티브(+) 피드백의 메커니즘이 지배하며, 그 특성으로 시장 불안정성, 비예측성을 장기로 삼는다. 신경제의 이러한 특성들은 실지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서 출발한다. 이같은 모든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과거 좌파들에게 맹렬히 비판받던 시장 기제 등의 모순을 자신의 장점으로 흡수하려는 신경제학의 논리란 마치 스스로의 미천한 부르주아 경제학에 여타 이론들을 혼종교배하려 애쓰는 모습에 다름아니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애초에 산업 시대의 풍요가 경제이론가들에게 강심장을 낳았다면, 신경제적 특성에 대한 강조는 점점 더 압박해 들어오는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서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두려움의 표출이자 편집증적 해결이다. 하지만 신경제론자들이 파괴와 생성의 힘인 인도의 신, 시바(Siva)를 추종하여 자본주의의 불안정성과 비예측성을 논한다면 더 이상 논구할 대상이 못된다. 한편 수확 체증의 혜택은 지속적으로 포지티브한 승자들의 세계에서만 이루어진다. 이끄는 글에서도 한 벤처기업 사장의 말을 빌렸듯이, 시장은 수많은 다수의 약자들에게 어떠한 혜택도 돌아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수확체증은 강자들만이 점유하는 독식의 패권 논리다. 네트워크 경제의 기본 원리로 규모와 범위의 경제가 아직도 지배적인 한 새로움은 어디에도 없다. 결국 신경제론자들에게 네트의 경제적 가치는 실물 경제와 무관하게 주로 추상적 수준에서의 여타 잡종이론 포획의 지수 논리로 낙후한다. 3. 관용과 그 가상의 앙상블 미래 낙관론자들이 보기에 신경제는 공짜와 헐값의 관용으로 찬란한 '풍요의 시대'로 기록된다고 믿는다. 그들이 보는 풍요의 기제는 무엇일까? 그들은 새로운 시대의 두 가지 법칙을 꼽는다. 하나는 마이크로코즘의 혁명인 '무어(G. Moore)의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매크로코즘의 혁명인 '길더(G. Gilder)의 법칙'이다. 전자가 마이크로 칩을 염두에 뒀다면, 후자는 네트의 폭발적 힘을 과대평가 한다. 하이테크 이론가들은 이 두 법칙이 가격 형성에 있어 '逆가격'(Inverse Prices)을 발생시킨다고 본다. 그러나 단지 기술적 혜택만으로 이러한 상황이 도래할 수 있는가? 냉혈한 자본에 어떻게 이같은 아름다운 '공짜'의 미덕이 순간적으로 발기할 수 있을까? 초국적기업들의 소프트웨어 개발비만 해도 천문학적 단위가 투여되는 현실에서, 앞서 두 법칙만으로는 '공짜'란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옛 공장 형님이나 지금이나 그 '이윤'에 대한 헌신이 끈끈하게 맺어져 있는 상황에서. [와이어드]지 98년 3∼5월에 연재된 {신경제 용어사전}을 보면, A항목에 신경제의 핵심 용어로 'Attention Economy'란 개념이 등장한다. 그 번역은 '시선집중 경제'쯤 될까 싶은데, 이는 새로운 상황에서의 미디어 조건, 즉 소비자와의 상호작용성에 따른 시각적 잔상의 논리에 주목한다. 또 다른 연관 단어, 구시대 마케팅의 사활이었던 '시장 지분'(Market Share)에 대비되는 '정신 지분'(Mind Share). 시선을 집중하는 경제는 당연히 가시적인 점유율 뿐만 아니라 마인드의 지분이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아써의 또 다른 제언. 기업은 초기 점유율 확보(installed base)를 위해 엄청나게 할인하고, 능력만 된다면 공짜로라도 뿌려라. 그가 보기에 이같은 자본주의적 관용은 부수/2차 이익의 확보를 가능케 한다. 예컨대, 마이크로소프트(MS)사와 넷스케이프사의 웹 브라우저, 퀄컴의 메일 프로그램 유도라, 맥아피의 바이러스 퇴치용 소프트웨어, 썬의 자바 언어 등은 푸근한 관용과 공짜의 선례들이다. 풍요의 상품 세계에서 자사 상품의 덕목을 부각시키는 법은 '공짜'를 통해 사람의 주의를 끄는 것이다. 한 생산물이 공짜라면, 대개 이를 제공한 회사와 연계된 서비스 상품들은 마인드 확보에 성공한다. 네트 경제하에서 가치 창출이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로 도입되는 이러한 '선물 경제'(gift economy)의 부활은 허구일 뿐이다. 하우크(Wolfgang F. Haug)식으로 얘기하자면, 신흥 자본가들의 이같은 행위는 대중에게 '무관심성의 가상'을 연출한다. 즉 자본의 이윤 논리의 '현금화 관심'을 무관심성인 양 유혹하고 선전하는 행위로 위장한다. 그 궁극적 지향은 '선물 광고' 형식의 맛보기를 통해 구매 충동을 끌어올리거나, 소비자 욕망의 미세한 마인드를 중독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과거의 물리적이고 인구통계학적인 시장 분할식 마케팅 전략이 확장되어 마인드 점유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은 신경제의 소비자 포지셔닝 강도가 더 세졌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한번 하우크의 용어로 돌아가면, 항상 공짜와 헐값의 배후에는 한 기업이 보유하는 시장력 증대의 종합적/총체적/복합적 연출로서의 '현상형상'(Erscheinungsbild)이 자리잡고 있음을 간파해야만 한다. 4. 독점이여, 영원하라! 브라이언 아써는 자본이 시대적 불확실성을 타개하는 방식은 카지노 도박의 스타일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미래 예측력이 화투장을 교묘하게 놀리는 숙련된 자본꾼들의 손끝에 있다는 소리다. 모두 다 '주윤발'이 되라는 소리인데, 그는 이것이 자본 경쟁의 스타일이고 일종의 '방향 감각'이라 칭한다. 심리적 도박판에서 게임의 분별력을 소유한 빌 게이츠는 그래서 선각자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체로 이러한 논리가 첨단을 달리는 하이테크 산업내 경쟁에서 승리하는 비법으로 격상된다. 지식 경제에서는 승자가 모두 것을 차지하는 사활의 경쟁이며, 차기 기술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선각의 마술이 필요하다. 이 얼마나 과거보다 혹독하고 애매한 논리인가. 구시대에는 힘쓰는 자본끼리 나눠먹는 공생의 논리라도 있었다. 이젠 독식과 비상식의 논리가 나머지를 삼킨다. 신경제하에서 독점을 다루는 방식은 어떠한가? 그것은 기술적 용어로 '표준'(standard)과 '록-인'(lock-in)으로 표현된다. '표준'은 디지털 경제의 기본 원칙인 '편리성'에 기초해 보면 모두에게 이로운 것으로 상정된다. 표준의 배후에는 항상 표준을 이끄는 독점적 지배력이 숨어있기 마련인데, 이를 왜곡하는 것으로 사용자들의 '편리성'이 표준의 버팀목이 된다. 그들에게 독점의 폐해에 대한 보완책은 있다. 일개 기업이 기술적 한계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독점적 표준을 누리는 것은 부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한편 '록-인'은 한마디로 기술적 지배력에 도전하는 힘들이 침입하지 못하게 안쪽에서 걸어 잠그는 행위이다. 신경제하에서 기술적 우월에 입각한 록-인은 공정하며, 독점은 필요악이라 본다. 그들이 보기에 록-인은 소비자들에게 중대한 혜택을 주는데, 자본이 록-인을 위해 생산물 가격을 하락시켜, '역가격'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에게 돌아가는 관용의 시발은 록-인에서 온다는 발상이다. 그런 점에서 산업경제와 달리 신경제하의 독점 가격 형성은 별 걱정거리가 아니라고 판단한다. 또한 국가는 자본의 집중과 집적에 따른 독점적 향유를 인정해야 하며, 그 이유는 그들이 보기에 이 일시적 독점은 기업의 혁신과 위험에 대한 도전의 금전적 보상이기 때문이다. 즉 특정 자본이 개발하는 상품 유통의 초기 국면에서 혁신의 인센티브를 보장하는 아량을 보이는 것이 페어 플레이며, 궁극적으로도 그 자본이 시장에 대한 장기적 지배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논리다. 디지털 경제이론가들은 네트 경제에서 자연 독점의 불가능성에 대한 또 다른 이유로 '퇴화'(devolution)의 법칙을 든다. 네트 경제의 생태학적 특성에서 살펴보면, 네트워크나 유기체 환경은 지속적 유동과 비평형성을 강조한다. 퇴화의 원리는 창조와 파괴의 급변하는 커브 속에서 시장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들을 가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인정하듯 정상의 유동성과 수확체증의 국면은 초기 혹은 표준이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시점이다. 그 이후에는 시장력의 고착과 독점이 지배한다. 대체로 정보·통신산업 영역은 영세한 벤처자본에게 상대적으로 많은 새로운 시장진입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어 안정권에 들어서면, 구산업의 행태와 비슷하게 자본의 독점적 확장이 이루어진다. 신산업에 있어 표준과 록-인은 독점을 향한 새로운 히든 카드이다. 다시 한 번 하우크의 '현상형상'은, 네트 경제에 이르면 '고리 형성'(linking)과 '지렛대 작용'(leveraging)이란 독점화 과정으로 발현된다. 이 두 가지 과정은 한 제품의 이용층을 이웃하는 제품으로 자연스럽게 이동시키는 것으로, 이미 MS사가 O/S프로그램으로 DOS→Windows→Win95→Win98→MS Network로 패권화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이렇게 볼 때, 표준과 록-인은 혁신의 인센티브가 아니라, 장기적 독점의 과정을 돈독히 쌓는 작업인 것이다. 또 다른 독점화 과정은 심리적 전술에서도 이루어진다. 예컨대, 경쟁자에게 록-인되었다고 믿게 만드는 기법으로, 사전발표, 페인트(faint), 위협적 동맹, 기술적 치장, 미래적 제휴 관계의 매체 선전, 그리고 발표는 되었으나 상품화가 안된 베이퍼웨어(Vaporware)의 퍼레이드 등이 동원된다. 이로써 완벽한 심리적/물리적 시장 독점의 완벽한 구상이 꾸며지는 것이다. 5. 현실 정치의 비정치화, 그리고 경제화 이제까지 단상적으로 훑고 지나간 몇 가지 논의를 통해서 보자면, 신경제론자들의 네트 시대의 새로운 경제란 산업자본주의의 변형된 적자일 뿐이다. 이제 디지털 경제의 문제는 정치 영역에도 그 무한한 힘을 가동시킨다. 디지털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네트 시대의 정치는 크게 보아 디지털상품을 소비하며 네트에 접속하는 개인들에게 이루어지는 무한한 '권능'(empowerment)의 유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는 새로운 민주적 커뮤니케이션의 건설과 해방의 테크놀로지에 대한 언약으로 이루어진다. 일례로 글로벌 컴퓨터사인 썬(Sun Microsystems)사는 한 광고 지면을 통해, 현실의 종교, 정치, 잘못된 처방의 기술 등 역사적인 모든 것들이 네트워크 컴퓨터 기술과 대당에 서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바로 그들이 개발한 네트워크 기술만이 제현실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군림한다. 또 다른 하이테크 기업의 약속. 미국의 거대 텔레콤 회사인 MCI사는 인터넷 서비스 가입을 가상 공동체 편입의 전제로 약속한다. "매달 9.95달러에 인터넷을 무제한으로: 당신은 이제 시간 제한없이,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빠른 네트워크에 지역적 제한없이 액세스를 할 수 있다. 지금 빨리 전화하여 이 파격적인 3달간 할인 요금으로 가입하여, 글로벌 온라인 공동체의 일부가 되십시오."(Wired, 1997. 10.) 인터넷 접속 비용과 전화비를 낼 수 있는 능력만 된다면, MCI사의 인터넷 가입이 곧장 '글로벌 온라인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 등치된다. 온라인 서비스의 가입이라는 사적인 소비와 온라인 공동체라는 공적 모임이 뒤섞임으로써, 사적 소비 자체가 공동체의 본질인양 호도되는 것이다. 이같이 논의의 과도한 비약을 정보통신기업들이 차용하는데는 대중의 공동체에 대한 욕망을 적절히 간파하는 그들의 능력에 있다. 대중의 욕망은 현대의 지시물 없는 상실감에서 비롯된 치료제 역할로 전통적 공동체의 대체물인 가상공동체를 희구하는데 있다. 글로벌 사기업들은 명민하게도 온라인 공동체를 인터넷의 물적 배경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역할, 그리고 기술의 수용, 대중의 의식적 통합과 친근성, 상품 소비 등을 원활하게 이루기 위한 촉진제로써 보고 있는 것이다. 자본의 비정치화 주도는 결국 경제화를 위한 고리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가상공간의 민주주의적 전망이 사적 자본에 의해 자연스레 편입되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세계를 터는 강도'들은 물리적/정신적 영역에 걸쳐 우파의 비전을 세우고 있다. 그 파장을 비껴가는 길은 내가 보기에 먼지에 쌓인 '경제의 사회화'를 털어 일으켜 세우는 작업일 것이다. 예컨대, 시민단체와 정부 그리고 기업이 모여 신기술 개발의 공적 전망을 세우고, 정부가 나서서 과도한 집중과 독점을 방지하며, 이윤의 결과에 대한 수혜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것 등이 필요하다. 네트의 '빛'이 그 기술적 가능성에 있다고 본다면, 이용 주체들의 좌파적 전망과 사회적 적용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비정치화의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네트적 실천과 연대가 요구되어진다. 이같이 새로운 가상의 '그늘'들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그 속에서의 역공이 가장 큰 무기일 수 있기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네트워커] 우울한 특명: 파워레인저, 위험에 처한 인터넷 게시판을 구하라!

우울한 특명: 파워레인저, 위험에 처한 인터넷 게시판을 구하라! 이광석 (suk_lee@jinbo.net) 여섯 살 먹은 아들녀석이 요새 '파워레인저'에 흠뻑 빠져 있다. 도통 다른 건전 명랑 비디오들이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서부 총잡이와 사무라이식 폭력이 난무하는 이 비디오만 보면 여린 감성을 자제 못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파워 레인저! 기다려, 내가 구출하마! 괴물아, 덤벼라, 슉슉, 퍽, 으악". 시청하거나 그 이후에 보여지는 진기한 태도 변화다. 사태가 이쯤되면 난 늘 몸을 불사르며 아들을 상대하는 사악한 괴물이 돼야 한다. 아이가 그토록 좋아하는 파워레인저 시리즈물을 두루 섭렵하다보니 내 눈에 정말 온갖 나쁜 것은 다 들어온다. 폭력은 기본이고, 인종적 편견으로 똘똘 뭉쳤다. 우리 애가 유독 다섯의 레인저 가운데 붉은 옷을 입은 백인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항상 중앙에 서 있고 제일 힘센 백인 레인저는 다른 변두리 넷과 함께 정의의 이름으로 악을 처단키 위해 무력과 폭력도 불사한다. 게다가 파워레인저의 선악 이분법은 상상을 초월한다. 현실은 단순하다. 선과 악, 적과 나 단순 대칭뿐이다. 적같기도 하고 아같기도 한 중간의 인물 설정은 애초에 없다. 또한 극 전개상 악과 적은 뻗거나 반쯤 죽는 정도론 부족하고 완전히 죽어 터지거나 사라져야 직성이 풀린다. 단순무식성은 목적하는 바에 빠르고 쉽게 이르는 방도지만, 그 가는 길에 다양한 경우들이 무시받고 다칠 수 있다. 이분 구도에 사로잡혀 악과 적을 치려다 잘못해 동료를 다치게 하거나 상관없는 제 삼자를 잡는 경우도 생긴다. 마치 미 우익 매파들이 이라크 땅에 뿌렸던 '눈먼' 폭탄들처럼 악의 씨를 말리겠다고 초가삼간은 물론이야 무고한 어린아이들까지 저 세상에 보내는 험한 꼴이 나올 수 있다. 파워레인저식 단순성의 폭력은 사회 곳곳에 배어 있다. 그저 그렇게 나두면 큰 별탈없이 갈 것을 뭔가 가두고 단속해야 직성이 풀리는 심사들이 그렇다. 잡음과 탈이 영원히 사라져야 할 것으로 보이면 이에 대한 무식한 발길질이 저도 모르게 시작된다. 특별히 새롭게 부상하는 문화 현상에 대해 구태의 버릇에 빠진 이들은 스스로 파워레인저가 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젊은이들의 총천연색 머리에 가위를 대거나, 코나 입에 뚫은 링을 잡아당기거나, 인터넷방에 통금 시간을 매기는 둥 비상식의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 얼마전 뉴욕의 한 허름하고 작은 호스텔에 묶은 적이 있다. 뉴욕 맨하턴 시내에서 여러 날을 보내야 했기에 비싼 여관비를 감내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한창 바람의 대학 초년생들이 배낭 여행길 추억을 담기 위해 잠시 머문다는 호스텔이 내 잠자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욱 당황했던 것은 8개 간이 이층 침대가 놓여 있는 방에서 얼굴도 모르는 16명의 지구촌 젊은이들이 뒤섞여 함께 잤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각자 잠자리를 유지한 채로 말이다. 알고 보니 이 작은 공간에 느꼈던 내 당혹감이 얼마나 어줍잖던지. 남녀유별의 설익은 윤리에 감염되어 살아왔던 나로선 이 호스텔의 자율 논리를 금방 깨우치질 못했다. 여럿이 방을 공유하면 슬슬 눈에 보이지않는 에티켓과 질서가 자리잡게 돼 뜬금없이 욕정이 일어설 일이 없었다. 이것이 성인 남녀가 머리 맞대고 자도 별 일이 없던 이유다. 또한 자신이 덮었던 이불을 항상 개고 퇴실시 빨래 수거함에 넣고, 사용한 식기를 각자 닦고, 뒷사람을 위해 화장실의 젖은 수건과 휴지를 갈고, 타인의 수면을 위해 실내 조명을 조절하는 등 투숙객들은 해야할 몫을 한순간에 터득한다. 매일같이 방에서 보는 얼굴들이 여럿 바뀌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규칙은 누가 크게 일러주지 않아도 유지된다. 분명 파워레인저였다면 남녀 혼숙에 의한 음탕 조장 방조죄로 호스텔을 무자비하게 때려잡았을 것이다. 공명심에 부르르 떠는 파워레인저라면 호스텔을 러브호텔로 착각할만하다. 호스텔에 드는 이들이 많다보면 간혹 문제가 있기도 하다. 밖에서 방값을 치르지않은 동료를 몰래 불러들이거나 술먹고 취중 객기를 부려 타인의 수면을 방해하거나 귀중품을 훔치거나 먹고 씻고 뒷처리를 나몰라하는 등 여러 잡음과 탈들이 많다. 하지만, 이는 호스텔의 근본적 운영 규칙을 뒤흔들지 못한다. 수십년간 호스텔 주인이 무리없이 경영해온 노하우는 그저 성별로 갈라놓는 목욕탕같은 단순한 경계와 통제의 규칙이 아니었다. 주인은 자율의 논리가 통제와 감시보다 낫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안다. 요즘 인터넷 게시판을 관리하던 호스텔의 맘좋던 주인을 파워레인저로 전격 교체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 과정에 정보통신부가 나섰다는 얘기가 있다. 파워레인저에게 '실명제'라는 초강력 무기를 쥐어줬다는 소문이다. 이걸로 불순한 게시판문화를 때려잡겠다는 얘기다. 인터넷 문화 현상의 소소한 탈을 다스리겠다고 할 일 많은 한 나라의 정보정책 집행기관이 주책없이 흥분해서야 되겠는가. 그간 게시판의 자율과 건전성이 익명을 이용한 소수 악덕 네티즌들에 의해 위협받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탈을 막겠다고 벌인 실명제가 공공기관 등이 개설한 게시판 참여를 떨어뜨리고 그나마 찾던 발길마저 끊게 만들면서 아예 게시판 문화 존립의 목까지 조르고 있다. 금융 '실명제'로 검은 돈을 양성화해 건전명랑한 시장 경제를 회복하듯 인터넷 게시판문화를 이에 똑같이 견주려하면 곤란하다. 익명이 게시판을 살리고 건강을 키우는 전제라면 전세계 유례없는 실명 도입은 극약 처방과 같다. 파워레인저의 단순 무식한 칼바람만 게시판에 그득해서야 곤란하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전세계의 남녀가 만나도 신기하게 문제없이 잘 유지되는 호스텔의 자율적 논리는 온라인 게시판 또한 가지고 누려야할 문화다. 마땅히 지금 파워레인저에게 내린 정통부의 '위험에 처한 인터넷 게시판을 구하라'는 특명은 거둬져야 한다. 그래야 한국의 게시판 문화가 고사하지 않는다. <끝> 2003. 4. <네트워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명지대 교지] 네트의 '파워 엘리트'

네트의 '파워 엘리트' 명지대 교지 수록(99년 6월) 1. 21세기 '파워 엘리트' 분석을 위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와 관련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보다 주목해야할 부분은 과연 글로벌 시대의 '파워 엘리트'의 속성과 계급적 본질이 무엇인가이다. 과거 80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관련하여 소장학자들을 중심으로 붐을 이루었던 연구 내용 중 하나를 꼽으라면, 우리는 계급 분석을 들 수 있다. 그 당시 한국 사회의 계급분석은 대체로 한 사회구성체의 주/부 모순 관계를 밝혀, 적대 관계와 전선 형성 등을 통해 체제 이행의 가능성을 마련하는데 있었다. 주로 경제학이나 사회학계에서 이같은 작업을 수행하였는데, 변혁과 이행의 활로가 막혀버린 90년대에는 실지 계급 분석과 관련된 연구 영역은 비인기 종목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내가 그 비인기 영역을 반복하여 탐구하려고 이런 말들을 내어뱉는 것도 아니며, 본인이 그렇게 정치한 분석을 수행할 능력 또한 없다고 자인한다. 하지만 도대체가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적 권력 유형과 특성이라도 알아야 이에 저항할 수 있는 고리들이 생길텐데, 그 현실적 역학구도에 대한 감이 전혀 잡히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연 현대 권력의 정점은 무엇일까? 추상적으로나마 우리는 초국적 자본가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들간에는 격한 지각변동이 벌어지고 있다. 예컨대, 미래학자인 토플러((A. Toffler)의 '권력이동'이란 사실 글로벌 자본내/간 지각 변동에 대한 자본 내부적 고찰에 해당한다. 글로벌 자본가들의 지속적인 판세 유지와 그들의 새로운 영역 진출, 그리고 새로운 분야에 진출한 디지털자본가들의 전자 프런티어 자리잡기가 한창 진행 중에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서 일반 대중을 호도하는 토플러식의 하이테크 이데올로그들도 소리 높여 새로운 시대를 맞을 예언자적 역할을 자처하기 마련이다. 자유주의에 사로잡힌 정책 관료들은 탈규제 법안과 각종 혜택 조항으로 돈많은 신진 엘리트 회원들의 충실한 조정,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자임한다. 이 파워 계급/계층들은 거대한 물결을 만들어내면서, 새로운 밀레니엄을 위한 권능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2. '권력이동'의 내용 과거 물질 생산에 기반했던 다양한 핵심 인자들은 국제적 네트워크의 등장으로 인해 다종다양한 격변을 치른다. 역사적 조건하에서 진행된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모순이 잠재해있건 아니건간에, 라이히(R. Reich)의 '상징분석가', 토플러의 '코그니테리아'(cogniteria), 그리고 벨(D. Bell) 식의 '지식노동자' 개념 등은 테크노 기술에 의한 계급지형의 본질적 변화를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개념화는 특히 노동자 위상과 관련하여 노동 버전의 새로운 업그레이드를 상정한 용어이다. 즉 이 개념들은 한마디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중 노동자들의 노동 통제권과 관련하여 구상/실행이 통합됨으로써, 그들에게 생산 과정에서의 통제적 자율권이 신장된다는 '마찰없는 자본주의'(friction-free capitalism)의 신버전이다. 어쨌거나 현재 테크노 기술의 위상은 경제적·사회적인 유토피아적 가능성, 자유주의적 전망 등을 포함하며, 더 나아가 물질 세계의 해체까지도 주장하는 다양한 계급과 계층을 생산해내고 있다. 그 중 우리의 관심사는 새로운 지배계급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다. 아마도 90년대 현실의 정치적·경제적 지배계급을 가장 잘 묘사한 용어 중 하나는, 하이테크 이론가인 아서 크로커(A. Kroker)의 글로벌 '가상계급'(virtual class) 개념일 것이다. "인간의 일반 이익을 테크노토피아라는 특수 이익으로 제시하는", 이들 계급의 전선에는 미 행정관료와 디지털 신생자본가들이 포진한다. 크로커가 보는 가상계급의 주체들은, 우선 미래적 비전을 주도하는 실리콘 밸리의 하이테크 자본가들과, 위계상 한 단계 아래의 하이테크 벤처 자본가들, 인공지능 과학자, 엔지니어, 비디오게임 개발자, 컴퓨터 과학자들과 여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 등등으로 구성된다. 이들 가상계급은 20세기의 변종인 약탈적 자본가들과 신종 테크노 엘리트들이 결합된 형태를 띠고 있다. 곧 20세기 말의 하드웨어 지배자가 21세기 소프트웨어 문화를 통제할 것이란 전망이 가능하다. 이들 주체간 계급 전선의 형성은 주로 정책적 '테크노프로젝트'를 통해 이루어지며, 관심사의 조율까지도 이뤄낸다. 물론 가상계급의 전체 조정·관리권은 정부의 손에 달려 있다. 국가는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편견을 가진 개입자로 등장한다. 즉 시장지상주의는 정부의 행위를 줄이지 않으며, 실제적인 면에서 증가시킨다. 정부 행위의 본질적 측면에서, 의도된 산출물을 명령하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독점적 시장을 유지하는 것으로 그 임무를 이동시킨다. 이런 정황에 미루어 짐작해보면, 디지털이란 외피에 가려진 가상계급과 국가 권력장치간의 동침 관계가 새로운 지배계급의 내용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크로커는 90년대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하드 이데올로기'가 급격히 쇠퇴하고, 가상계급의 '소프트 이데올로기'가 주도한다고 바라본다. 포스트자본주의 사회의 통치 엘리트들이 사용하는 보편 언어가 그 중심에 선다는 입장이다. 그가 말하는 소프트 이데올로기는 디제라티와 미국 행정부관료, 디지털 자본계급의 테크노신화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웨스트민스터대학의 하이퍼미디어 연구소 소장인 바브룩(R. Barbrook) 식으로 얘기하자면, 미국 서안의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한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Californian Ideology)가 그 소프트 이데올로기에 해당한다. 3. 테크노 '파워 엘리트'의 속성: 정주권력에서 유목권력으로 도시사회학자인 까스텔(M. Castells)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대의 공간은 '장소공간'(the space of space) 보다 '흐름공간'(the space of flow)이 우위에 선다. 이 말은 자본의 국제적 이동 능력과 추상화가 그 어느 때보다 급진전되었다는 얘기이도 하며, 권력 소재지가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최근 주목받는 네트의 저항적 실천집단인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Critical Art Ensemble)에 따르면, 현대적 권력은 이미 각각의 정주화된 지역, 장소에 머물기보다는 네트워크를 흘러다닌다. 그래서 이들은 현대적 권력 재현의 방식이 정주적(定住的, sedentary) 형태에서 유목적(遊牧的, nomadic) 형태로 이동한다고 본다. 우선 그들이 저항 지점으로 보는 권력은 실체가 없다. 오직 권력은 그 표상으로 드러난다. 기껏해야 '통치계급', '파워 엘리트' 등과 같은 추상화된 명명뿐이다. 우리는 거대 권력을 소재가 상실된 '효과'에 의해서만 체험할 수 있다. 현재 국내를 포함한 아시아 금융 위기라는 사태가 글로벌 핵심자본의 취산(聚散) 과정 속에서 배태된다고 본다면, 그들의 논리는 설득력이 높다. 다른 한편 권력의 유목성은 '속도'를 필요로 한다.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흘러 다닐 때, 권력간 우위는 '시/공간 압축' 능력과 '중력장 극복의 속도전'(escape velocity)에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도시연구가인 비릴리오(P. Virilio)는 이러한 속도성의 원천을 '행동적이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behavioral inertia)에서 찾으며, 이를 과거 '동적인'(dynamic) 물리적 운송 장치들(기차, 오토바이, 자동차, 비행기 등)과 구분하고 있다. 그의 개념에 입각해 보면, 이같은 '속도기계'를 자신의 힘으로 체득한 특권 집단이 새로운 테크노 '파워 엘리트'인 것이다. 4. '역사의 종말'은 어디에도 없다 이제까지의 지배계급의 권력이동을 통해 보자면, 우파 이데올로그인 후쿠야마(F. Hukuyama)가 지리하게 언급한 '역사의 종말'과 같은 새로운 자본주의 역사의 시작은 어디에도 없다. 오직 있다면 자본주의의 계급적 모순과 불평등의 재생산 지형의 연장과 그 변형만 있을 뿐이다. 물론 네트가 마련한 풍부한 기술적 가능성이 우리 앞에 놓여 있긴 하다. 혹자는 네트가 미래의 새로운 천년왕국을 다시 세울 수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실지 "대중에게 모든 권력을!"이란 슬로건의 밑바닥에는 상품화 논리가 각인되어 있다. 최저 균등 이용 요금에서 이용당 요금지불 체계로, 정보의 생산에서 소비로, 정보 추구보다는 오락과 쇼핑으로의 전환은 한마디로 인터넷의 상업화를 지칭한다. 인터넷이 더 나은 것, 즉 정보초고속도로로 바뀔 수 있다는 가상계급들의 비전은 구계획 경제의 국가 프로젝트에 비견할만한 바다. 아니 규모면에서 보면 그 이상이다. 세계경제의 종주국인 미국 행정부에서부터 밀어붙이는 사업 내용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들의 비전은 물활적으로 움직여나가는 네트의 본성을 글로벌 기업의 이윤 동기하에 구획화하려는 음모에 가깝다. 네트의 자생을 가로막는 가상계급의 음습한 기도는 인터넷 모델을 역회전하여 새로운 자본 모델로 바꾸려는데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정치적 근원에서 새로운 계급은 사회적 원칙이 결여된 자유지상주의의 가치관, 정부와 하이테크 기업의 신우익적 행동 방식이 뒤섞여 있다. 새로운 엘리트들이 간간히 드러내는 자유주의적 속성조차 대체로 우파적 경제 논리에 의하여 압도당하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기존 보수 우익체제의 정치적 사고에 그 끈을 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민주적 담화에 역행하여 한층 새로워진 권위주의를 구상하고, 테크노토피아에 반하는 모든 반대를 억압하며, 의회정치를 지적 재산권의 전쟁터로 이끈다. 경제적 정의에 역행하여 약탈적 자본주의의 재부활과, 고용조정에 의한 만성적 실업상태, 사회복지예산 축소 등 신자유주의적이고 기술 합리적인 결합을 시도한다. 이들은 경제적 지형에서 보자면, 철저하게 글로벌 사업의 지배적 세력이자 독점적 세력이다. 이는 자본의 내적 (재)구조화 과정에 따른 구조개편의 경향성과, 신계급 중심으로의 형식적 계급이동에 다름 아니다. 즉 "20세기 하드웨어를 통제하는 자가 21세기 문화의 소프트웨어를 지배"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고전경제학의 역사와 정치를 초월하고 '종말'시키는 자들이 아니라 온존하게 계승하는 부르주아 형님들의 후계자들이다. 5. 신계급의 '위상학적 지형 그리기'를 제안하며 이제 권력에 대한 저항의 조건이 현실의 지배적 지형도를 확보하는 것이라 볼 때, 새로운 권력의 출처와 구성, 성격, 방향 등을 분석하는 일이 시급하다. 다시 말해 새로운 파워 엘리트들의 성격 변화와 그 변화의 진원지, 파워 엘리트를 구성하는 실세들과 그들간, 그들과 구계급간의 관계를 계보적으로 추적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하이테크 정보기술이 주는 무한한 가치만큼이나 이들 계급 내부의 지형도 정확히 결정내리기 어렵긴 하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권력의 확장과 지배에 직면하여 새로운 저항의 방식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으로 권력지형에 대한 밑그림이라도 그려야하는 것이 상책이다. 분명히 새로운 지배계급이 등장하는데는 그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을 것이고, 또한 그들의 연합세력 내지 이데올로그들과 잡다한 지적 돌팔이들이 기생 혹은 연합할 것이란 사실이다. 이 모든 전선을 구체적 일상에다 끌어오는 작업은, 현실 권력지형을 추상적으로 그려봄으로써 저항의 지점들을 확보하기에 중요하다. 일종의 가상계급의 '위상학적 지형 그리기'(topological mapping)가 필요한 것이다. 이 작업의 전략/전술적 의의는, 우선 우파적 정보 담론을 상시적으로 구체적 현실의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네트를 추상성의 나락으로 빠뜨리지 않으면서, 물리적 현실 속에서 좌표점을 찾을 수 있는 작업이다. 둘째, 새로운 지배계급의 계보 그 자체를 추척함으로써 계급간 모순의 지점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를 통해 새로운 저항과 연대의 전선 형성과 새로운 저항 방식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각각의 저항 단위들이 "이젠 그만!"의 즉자적 울림들을 합일된 전자적 파장으로 전환함으로써, 여기저기 권력의 '속도기계'에 속도 지체의 힘을 가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될 수 있는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문화과학: 서평] 이제 문제는 정보 게릴라전이다!

<주제서평> 이제 문제는 정보 게릴라전이다! *계간 [문화과학] 15권 1998 가을호 (쎄르지오 볼로냐·안또니오 네그리외 지음/ 이원영 편역, {이딸리아 자율주의 정치철학 .1}, 갈무리, 1997.) (해리 클리버지음/이원영·서창현 옮김, {사빠띠스따-신자유주의, 치아빠스 봉기 그리고 사이버스페이스}, 갈무리, 1998.) 현실 자본주의가 끊임없는 불안정성에 놓이는 중심 원인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정부성에 있는가? 아니면 자본의 태생적인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과 주기적 공황에서 비롯되는가? 오히려 발본적으로는 중세 이후 토지로부터 이탈하여 자본가와의 계약에 의해 노동력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게된 "자유로운 노동자의 통치불가능성"의 시발이 자본에게는 더욱 큰 불안정성으로 다가온다. 자본주의의 역사 이래로 관건은 운동의 객관적 법칙이었다기 보다는 노동 주체가 지닌 자율적 힘과 자본간의 역학관계에 주어져 있었다.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모든 '삶-시간'(life-time)을 '노동-시간'(labor-time)으로 흡수하여, "인간의 생산적 활동을 노동시간으로 전환시키는 가치화(valorization)"를 그 전략으로 삼는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순수 경제 영역을 넘어 '사회-공장', '사회적 테일러리즘'으로 확대하여 재생산 한다. 자본의 '가치화' 영역은 공장 체계를 넘어 전통적 노동자를 포함한 억압받는 모든 이들의 사회적 삶에 걸쳐 있다. 이에 대응하여 새로운 사회적 주체인 피억압자들은 '노동-시간'을 '삶-시간'으로 흡수하는 방향, 즉 네그리의 용어로 '자기-가치화'(self-valorization)의 운동을 취한다. '자기-가치화'의 운동은 '자기-활동성', '거부의 힘', '자생성', '자율성', '자발성', '다양성과 다차원성', '야성적 에너지', '주체적 구성', '과정으로서의 조직' 등등을 담지한다. 이제까지의 주장은 이탈리아 자율주의자들의 글들을 편역한 {이딸리아 자율주의 정치철학} 중, 총론격인 이원영의 [오늘날의 계급 구성과 '자율성' 개념의 발전]에서 찾아낸 주요어들이다. 반대로 자율주의자들의 적대어는 레닌주의적 기획, 주체화가 아닌 대상화, 관료화, 지도, 운동의 객관 법칙, 전위적 대리주의, 투쟁을 객관적 법칙의 효과로 보는 것 등등이 된다. 좌파 내부의 역사를 통해 이원영에게서 탐사된 이같은 적대어의 소재지는 엥겔스를 출발로, 레닌에게서 보다 강화된 형태로 드러난다. 그가 보기에 소위 정통적 좌파들의 역사는 "자기 충족적이고 자율적인 계급주체"와 "자생적이고 과정으로서의 조직관" 대신 계급 주체들의 자율성을 대상화하고 대리적 전위로 대치시키며 권위주의적 당 개념으로 흡수하는 '정박(碇泊)의 정치'였다. 그래서 그는 '정박의 정치'란 자율성의 야성적이고 변덕으로 가득찬 힘과 어울릴 수 없다고 말한다. 계급 주체들이 자기-가치화에 입각하여 "카오스 속에서 두려움이 아니라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정치, 그 유영(遊泳)의 정치"의 가능성을 그 과제로서 던진다. 이원영과 자율주의자들이 보는 '유영의 정치'의 미래 가능태는 디지털 속성에 어울리는 짝이다. 단 계급 주체들이 네트를 변형적이고 자기-가치화에 의거해 이용한다는 조건하에서만 기술적 속성, 즉 개방성, 자율성, 즉시성, 상호소통성 등등이 가능태로써 기다린다. 이 책에 실린 프랑꼬 삐뻬르노(Franco Piperno)가 [기술 혁신과 감성 교육]에서 지적한 바처럼, 문자 문화란 이론과 해석에 의해 결정과 범주로 치달아 버리나, 컴퓨터 기술은 '수행적(operative) 문화', 끊임없는 변형이 가능한 상황을 연출한다. 객관적이고 대상화된 얼개로 규정된 문자 문화의 정치에서 자율적이고 다양하고 다차원적으로 변형하는 디지털 문화의 정치가 자율주의자들의 정치철학을 보다 분명하게 현실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다른 한편으로 추상적으로만 언급된 이같은 자율 운동의 계급 주체들을 묶는 통일, 상호 보완, 연대 등의 과정적 힘 또한 네트의 네트워킹 개념에서 그 구체적 실효를 얻는다. 자율주의자들은 자기-가치화의 가능태를 현실태로 전화하는 진정 제대로 된 실험 대상을 발견했다. 인간의 존엄성, 희망, 삶-시간을 복원키 위한 최초의 정보게릴라 운동이 남미의 한 후미진 지역에서 시작된 것이다. 사빠띠스따가 추구하는 '복수의 울림들과 목소리들의 네트워크', '어조와 수준이 다양한 여러 목소리들의 네트워크'와 '저항과 희망의 네트워크'는 그들 외부에서 객관적 전망하에, 대리적 전위에 의해 대상화하여 그려진 모델이 아니다. 이는 그들 자신의 자기-가치화를 향한 실천을 통해서 생성되는 저항의 과정 모델에 가깝다. 미국내 국가안보의 두뇌집단들이 모여있는 랜드연구소의 연구원, 데이비드 론펠트(David Ronfeldt)는 3년전 내부 보고서를 통해 멕시코의 사빠띠스따를 다루면서, 이제 사회적 네트전(netwar)이 21세기 새로운 초국적 정보전쟁의 원형이 될 것으로 가늠했다. 멕시코 남동부 치아빠스 지역의 라깡도나 정글에서 벌어지는 마야 원주민들과 사빠띠스따들의 투쟁이 미국을 위시한 글로벌 자본의 지칠줄 모르는 확장을 거역하는 국지적 위협으로 상정되고 있는 것이다. 역으로 '야만적' 자본에 대한 이름 없는 한 밀림 지역의 울림을 현실 저항의 적극적인 정치 실험대로 평가하는 일군의 불경스런 이들도 존재한다. 이미 국내에도 알려진 바 있는 북미의 대표적인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이자 텍사스 대학의 경제학 교수인 해리 클리버(Harry Cleaver)도 이런 축에 낀다. 자신의 홈페이지가 차단될 정도로 미국내에서도 '악명'을 날리는 그는 현재 웹에서 '치아빠스 95'를 운영하며, 사빠띠스따에 관련된 자신의 디지털 논문들을 등록해 놓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 갈무리 출판사가 새로운 정보자본의 논리를 피억압 계층의 현실 대안적 무기로 되돌리려는 기획의 첫번째 일환으로 그의 디지털 논문들을 정리하여 이를 번역해 내놓았다. 클리버의 {사빠띠스따}에서는, 최근 국내에서도 구조조정의 고통을 감내할 것을 요구하는 초국적 금융자본체인 국제통화기금(IMF),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멕시코 자국내 제도혁명당(PRI)의 신자유주의에 맞서 그들이 왜 총을 들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그 지구촌의 변방에서 사이버전(cyberwar) 혹은 "말과 이미지의 정보전"을 펼칠 수 있었는가 등의 문제를 상세히 살피고 있다. 올해 초 뉴욕의 오토노미디어(Autonomedia) 출판사에서 발행된 {사빠띠스따!}가 사빠띠스따 혁명군 자신의 인터뷰, 선언문, 성명서 등을 모은 1차 자료라면, 국내에 번역된 {사빠띠스따}는 한 북미 지식인의 활동과 눈으로 본 2차 분석글이다. 2차 문건은 아무래도 정치적 해석의 정향성이 문제의 빌미로 비쳐질 수 있으나, 다행히도 클리버가 보는 저항 단위의 자기활동성에 입각한 분석은 사빠띠스따의 정보게릴라전의 구체적인 맥락에 충실하다. 역자인 이원영의 부록 논문에서도 사빠띠스따와 관련하여 좌파내 국제주의자와 자율주의자간에 벌어지는 엇갈린 평가를 정리하면서, 이같은 좌파내 논쟁의 승화를 통해 그 자율주의적 실험 안에서 자본에 대한 저항의 "새로운 상상력과 지혜"를 수확해낼 수 있길 바란다. 이 책을 통해, 더 나아가 그들의 정치 실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사실은, 최근 한창 과잉 포장되고 있는 전자공간에 대한 실천적 기대감이란 것도 현실 지형에서 행하는 저항 단위들의 권력에 반하는 거부와 실천 행위의 결합 없이는 디지털 허상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는데 있다. 그 반대로 디지털 영역의 새로운 가능성에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는 유아론적 운동 방식 또한 항간에 유행하는 담화로 표현하자면 '무대포 정신'에 집착한 소모적 몸짓일 뿐이다. 즉 네트의 혁명적 속성과 현실적 실천 내용간의 고도의 맞물림이 저항 효과의 기본 변인이라는 점에 착안해야 한다. 한편 이들을 주시하는 관찰자의 역할은 우선 새로운 투쟁방식을 제대로 이해하고 과장 없이 독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의 문제"로 투사하여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자세이다. 최근 출판 환경의 유익한 특징 중 하나를 꼽는다면, 인터넷에 업로드된 영문 논문들의 저작권을 '좌회'(copyleft)하여 번역 출간하는 경향이다. 지면에 소개된 {사빠띠스따}도 영세한 출판업계에 카피레프트 실현의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인터넷의 광대한 쓰레기 바다에서 항해하다 운좋게 건질 수 있는 디지털 '월척들'(wisdoms)을 시의 적절하게 (하이퍼)텍스트로 공유하고 배포하는 노력들은 미래 출판운동의 정보 게릴라 전술로써 기대할만한 바다. (이광석 /중앙대 신문학과 석사졸, 네트 분석가, [사이버 문화정치]의 저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프로그램심의조정위원회] 문화유산급의 디지털 마인드웨어를 키우자

新文化人 사랑방: 문화유산급의 디지털 마인드웨어를 키우자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민족국가 고유의, 여러 세대에 걸쳐 계승되고 발전하는 유/무형의 사회·문화적 자산을 지칭해 흔히들 ‘문화유산’이라 한다. 세상이 바뀌면 문화유산의 내용물도 변한다. 역사 유적처럼 방범용 유리를 사이에 두고 멀찍이 떨어져 관찰해야 할 문화유산도 있지만, 현재와 함께 호흡하는 무형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존재한다. 음식 맛, 춤사위, 소리, 관습 등은 다 형체는 없지만 우리만이 가지는 고유의 자산이다. 한편, 이제는 거의 실패한 유산이 돼버렸지만 ‘아래한글’ 소프트웨어도 민족적 자존심을 드높였던 점에서 이에 준한다. 나는 이 모든 무형의 자산들을 합쳐 ‘마인드웨어’로 보고 싶다. 마인드 가치가 물질을 압도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이를 문화유산이나 국가적 자존심으로 격상해 보려는 시각은 드물다. 특히 디지털로 만들어지는 마인드웨어는 시장에서 자라지만, 이를 벗어나 성장한다. 시장의 마인드, 즉 소프트웨어는 당장의 시장 이윤과 밀접하지만, 디지털 마인드웨어는 이를 넘어 한 나라의 경제 인프라와 살림의 백년대계를 세우는데 쓰인다. 결국 마인드웨어의 가치는 국민의 자긍심을 책임질 국가의 노력이 첨가돼야 생명력을 얻는다. 지금처럼 한 나라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즈, 익스플로러, 오피스, 서버 등 하나의 다국적 소프트 ‘제국’에 목을 맨다면 그곳의 디지털 마인드웨어 구상은 부질없다. 이미 올해초 엠에스의 취약한 서버들이 국내 ‘컴퓨터대란’의 주역을 떠맡고, 지난 5월에는 ‘패스포드’인터넷 서비스 이용자 2억명의 비밀번호가 외부에 노출돼 엠에스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판이다. 그럼에도 이 부실한 제국에 한 나라의 디지털 마인드를 담보잡혀 있는 상황은 큰 불운이다. 코드의 개방과 협업 과정에 의해 만들어지는 개방형 소프트웨어가 일반 상업 소프트웨어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상업용 소프트웨어에서 흔히 관찰되는 “보기만하고 만지지마라”식의 소스 코드에 대한 제한적 접근에 비해, 개방형 프로그램은 의도한대로 쉽게 변형 가능하고 여럿의 공유와 검증을 거쳐 보다 안정적 환경을 제공한다. 특히 그 대표격인 리눅스는 생산 과정에서의 경쟁과 비배제의 논리, 그리고 프로그램의 저렴한 가격과 안정성을 각국 정부로부터 인정받아 엠에스의 가장 강력한 대안으로 자리잡고 있다. 일본, 중국, 대만, 필리핀, 영국, 프랑스, 독일, 핀란드, 아르헨티나 등 갈수록 여러 정부들이 보안 능력, 안전성, 경제적 비용면에서 월등한 개방형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국가 정보정책의 미래가 달린 문제라 판단하고 이미 중앙 부처뿐만 아니라 하급 단위의 공공기관들, 자치단체들까지 개방형 소프트웨어를 독려한다고 한다.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진국과 일부 개발국의 이와 같은 독자적 디지털 마인드웨어의 구상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전세계 리눅스 확산을 막기 위해 엠에스가 펼치는 고도의 마케팅 전술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프로그램 할인은 기본이고 공격적인 자본 투자, 비영리 단체 기부나 지원, 프로그램의 일부 소스코드 공개 등으로 투자대상국이 딴맘 먹을 틈을 주지 않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선 우리 정부가 독자적 길을 걷는다 하더라도 비슷한 압력과 회유가 닥칠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하나에 대한 편애와 편중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대안의 가능성은 열어놓는 지혜가 필요하다. 현실적으로도 엠에스 것과 함께 다른 대체 소프트웨어들을 균형있게 쓰려한다는 명분으로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시장의 공정한 경쟁 법칙을 정부가 나서서 지킨다는데 그 누가 말리겠는가. 이것이 가까운 미래에 우리의 새로운 문화유산이 될 디지털 마인드웨어를 세우고 지키는 길이다. [월간 enter 2003. 8]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