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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2009 위기의 KBS 해부] <2> 시사보도 프로그램, 어디로 가려나

"KBS,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KBS는 권력의 방송 장악 논란의 한복판에 있어왔다. 이병순 사장은 취임하면서 '관제 사장' 논란을 촉발시킨데 이어 내부에서는 '탐사보도팀 사실상 해체' 등 조직의 경직화, 자율성 약화 등의 비판이, KBS 바깥에서는 정권 홍보성 시사보도프로그램 논란, 막장 프로그램 논란 등이 일어왔다. 또 KBS 노동조합 등 KBS 구성원에 대해선 공영방송 KBS를 지킬 의지가 있느나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이러한 논란은 '국민의 방송'이라는 칭호를 얻어온 KBS가 '공영방송'으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로 집약된다.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는 KBS가 과연 제기능을 하고 있느냐는 것. 이에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와 <프레시안>은 '2009 위기의 KBS 해부'라는 주제로 KBS를 진단, 감시하는 기획을 진행한다. 지난 23일전규찬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소장의 "'우물 안 개구리' KBS의 죽음을 애도함" 을 시작으로 미디어문화센터의 학자들이 KBS의 프로그램, 조직 구조, 수신료 문제 등을 집중 파헤칠 예정이다. 두번째 필자는 이광석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외래교수가 이어받는다. 이 기획이 공영방송 논의 지평을 넓히고 더 나아가 KBS 내부의 논의도 끌어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 편집자주

  프레시안

이병순의 KBS, '대한뉘우스'가 돌아왔다

[2009 위기의 KBS 해부]<2>시사보도 프로그램, 어디로 가려나


/이광석

지난 해 10월 중순경 국정감사 자리에서 이병순 사장은 이상한 말을 했다. 그는 공영방송 KBS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기계적인 중립주의' 혹은 '기계적인 공정성'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공정성이나 중립성에 대한 주장만큼 현실에서 편향되고 치우쳐 사용되는 논리가 없다. 세상에 가치 편향이 없는 보도라는 것이 가능한가? 공정이니 중립이란 공허한 말잔치는, 탐사 보도를 기초로 사건의 진실에 좀 더 근접했을 때만이 그 적정값을 얻는다.

그는 '기계적'이란 요상한 수사까지 덧붙였다. 덩치나 혹은 맷집에 상관없이 똑같이, 그리고 상황의 맥락을 거두절미한 기계적 중립의 논리야말로 편파의 근원이다. 필자가 보기에 '기계적'이란 말은, 군사 독재시절에도 보기 힘든 지난해 8월 8일 KBS 경찰 난입쇼에 맞섰던 KBS 사원행동 기자들과 PD들을 중징계한 것과 같은 상황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다시 11월, '기계적 중립주의'를 위해 KBS 간판 시사프로그램 <시사투나잇>은 문을 닫았다. '기계적인 공정성'을 위해, 조중동 보수신문과의 '기계적 중립'을 위해 <미디어포커스> 또한 사라졌다.

결국 '기계적'이라 함은 바로 관제 폭력의 정당성을 기리기 위해 고안된 수사학의 정치이고, 중립과 공정성이란 이 허구의 껍질 속에 감쳐둔 관제화의 다른 이름이다. 그렇게 KBS의 간판 시사프로그램들이 역사 속으로 줄줄이 사라지거나 다른 이름으로 거세됐다. 공영 방송 KBS의 철학 그리고 중립, 공정성의 가치는 사망 신고를 했다. 그리고, 화면 밖에선, 마지막 사라지는 방송의 엔딩 크레딧을 보며 담당 PD들, 기자들, 앵커들은 비통함의 눈물을 흘렸다.

시사보도 위기의 시대, '대한뉘우스'의 시대

이 명박 정권 1년, KBS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시사보도 위기의 시기였다. 상황 추이로 보자면 그 반역의 세월은 앞으로 더 길어질 듯 보인다. '낙하산 인사' 구본홍 YTN 사장을 통한 시사 보도채널 방송 장악기도, '광우병' 파동 이후 아직까지 검찰의 재수사 표적이 되고 있는 MBC, 시사평론가 정관용 씨의 방송 하차 등 열거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언론 위기와 정론의 상실 시대다. 성역 없는 비판과 올곧은 진실을 밝히는 시사프로그램들이 가을 방송 개편이란 명목으로 사라지고, 또 다른 이름을 달고 순한 양들이 되어 등장했다. 말랑말랑하고 기이한 '시사 멜로' 프로그램들이 생겨나고, 기존에 연명하던 것들 또한 그 비슷한 길을 걷기 시작한다.

지 난해 있었던 비상식의 반역들이 가져온 효과는, 이미 여러 곳에서 불거져 나온다. 최근 KBS <뉴스9>에서 용산 참사 보도를 의도적으로 희석한 것이나 보신각 타종행사 생중계를 조작한 것 등은 그 시작에 불과했다. KBS의 <시사기획 쌈>같은 프로그램들은 도를 넘어서고 있다. 지난달 말 방영된 '대통령 취임 1년-남은 4년의 길'은 확실히 '대한뉘우스'의 부활이었다. 그 험했던 시절 '대한뉘우스'와 '땡전뉴스'의 불쾌감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진다면 이는 뭐가 한참 잘못된 꼴이다. 이 프로그램을 만든 KBS 보도제작국의 권순범 탐사보도팀장은 현 정부에 너무 우호적이지 않느냐는 질문에, "국민의 방송이자 공영방송인 KBS에 맞게 중립적인 방송이었다"고 답했다 한다. 역시 KBS 이병순 사장처럼 '기계적' 중립주의에 충실하다. 이런 정황이면 KBS에 국민의 방송이나 공영방송의 명패를 주는 것도 심히 부담스럽다.



▲ KBS <시사기획 쌈>이 지난 24일 방영한 '대통령 취임 1년-남은 4년의 길' 프로그램 화면. 정권 홍보 방송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KBS

KBS 시사보도프로그램이 살 길

KBS 시사프로그램의 위기는, 실지 현재 대한민국 언론의 위기이자 표현의 자유의 참담한 현주소이기도 하다. 허나, KBS 시사 프로그램의 연성화 경향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심각한 문제로 꾸준히 문제 제기됐었다. <취재파일4321>은 여전히, 종부세의 쟁점을 회피하고 부자들의 고통을 다루거나, 용산 참사를 외면하면서 철거민의 애환을 주제로 다룬다. 비슷한 시점에, <추적 60분>은 강호순 특집을 부각시키면서 용산 참사도 미네르바도 없는 기이한 사회 고발 프로그램의 역할을 다했다. <뉴스 9>과 <시사기획 쌈>은 그 방법의 타당성에 의문을 불러왔던 이대통령 국정운영 지지율 상승과 관련된 여론조사로 비판을 받았다. <시사 투나잇>을 대체했던 <생방송 시사 360>은, 첫 방송부터 '미네르바'와 관련된 사실 관계 왜곡으로 누리꾼들의 원성을 샀다. 시사와 보도의 알맹이 없는, 깍지들의 향연이다.

해외의 소위 권위 있는 BBC의 <파노라마>와 <쟁점(Hardtalk)>이나 미국 CBS의 <60분>과 똑같은 시사보도 프로그램을 KBS에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시민들의 고단한 삶을 만져주고 권력 남용의 끈을 끊고 사회 진보의 명제를 함께 고민하도록 돕는, 그런 '공영방송'에서 생산되는 시사보도 프로그램을 바랄 뿐이다. 이러한 보도 철학과 비전이 KBS 방송사 내에 유지될 수 없다면, 공공의 주파수를 반납하고 방송을 접어야 한다. 아니면 한나라당의 시나리오대로 관제와 관영 방송의 길을 받아들여 연명하는 법도 있겠다.

KBS 시사보도 프로그램은, 이렇듯 21세기 신권위주의형 '대한뉘우스'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다. 진정 KBS 시사보도가 공영 방송이란 이름을 걸려면 적어도 다음과 같아야 한다. 용산 참사의 화염 속에 죽임당한 이들의 목소리를 뉴스를 통해 프레이밍하는 내부 현실을 자성해야 한다. 미디어 관련법 개정 처리 시한의 '100일' 간 유예가, 타협의 미덕이 아닌 시간벌기와 힘빼기의 불온한 정치 술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와 권력의 논리가 미디어 산업 경쟁과 대민 방송 서비스 질 제고의 빈약한 논리로 둔갑하는 정황도 알려야 한다. 정론을 향한 내부의 자성 없인 밖의 개혁 또한 어렵다는 점을 깊게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것이 KBS 시사보도 프로그램이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을 막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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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인 09년 2월] 오바마의 블랙베리 폰과 전지현의 휴대전화

[시사인 73호] 2009년 02월 02일 (월) 10:45:26

오바마의 블랙베리 폰과 전지현의 휴대전화

이광석

한국에서 휴대전화는 노조를 만들려는 노동자의 모임을 위치 추적해 감시하거나, 소속사 연예인의 사생활을 관리하는 일에 적극 악용된다. 정보통신 선진국 대한민국의 천박한 자화상이다.



취임하기 전부터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블랙베리 폰(휴대전화의 모양이 산딸기를 닮았다 하여 붙은 이름)에 거의 목을 매다시피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도로 따지면, 웹서핑으로 밤을 꼬박 새웠던 우리의 노무현 ‘올빼미 대통령’만큼이나 오바마 또한 휴대전화 광팬이라 한다. 요새 나오는 스마트폰 기능을 보면  그럴 만해 보인다. 문자 메시지 보내고 메일 보내고 일정 기록하고 인터넷 검색하는 정도는 기본이다. 바쁜 대선 일정에 쫓기는 그에게 이런 블랙베리의 기능은 어지간한 비서 이상의 능력을 보여줬을 것이다.

그러면서 취임 이후에도 오바마가 애지중지하는 휴대전화를 계속 가질 수 있는지가 세간의 화제가 됐다. 통신 보안이 가장 취약한 곳이 무선 영역이라니, 그의 블랙베리는 도무지 백악관 입성이 불가한 항목처럼 보였다. 전임 부시조차 낙향해 그동안 보안 문제로 백악관에서 전혀 못했던, 전자메일이나 친구들에게 보내면서 쉬고 싶다고 하는 것을 보면, 무선이든 유선이든 마음먹고 벌이는 도청과 감청에는 당해낼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결론은 오바마가 워낙 이 휴대전화를 갈망하는지라, 도·감청으로부터 상당히 강한 특수 스마트폰을 제작해 휴대하는 것으로 낙찰을 보았다. 하지만 이도 마음먹고 덤비는 도·감청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니, 대국 대통령의 통신이라 하여 철옹성인 것만은 아닌 셈이다. 

* 오른쪽 그림은 새로 오바마가 지니게 될 것이라 예견되는, 제너럴 다이나믹스가 개발한 쎅테라(sectera)라는 모델이다.


1년 6개월간 휴대전화 1만2000대 복제돼

비 슷한 시기에 한국에서는 배우 전지현의 소속사 싸이더스HQ가 조직적으로 벌인 휴대전화 불법 복제가 주요 기사로 떠올랐다. “내 스타일이야”를 속삭이며 삼성 애니콜 폰을 광고하던 그녀가, 바로 그 휴대전화의 복제로 그녀의 문자 메시지 등이 열람되고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그녀의 휴대전화 복제 행위의 당사자에 싸이더스 대표가 개입되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한국 사회의 정보 인권 불감증이 문제다. 지난해 10월 국감 기간에 방통위가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08년 상반기까지 불법 복제된 휴대전화가 1만2000여 대에 이른다고 한다. 사태가 이 정도면, 소속사가 한 연예인의 휴대전화를 복제하는 것은 너무나 손쉬운 일일 수밖에 없다.     
 
첩보전으로 따라갈 만한 나라가 없는 미국, 그것도 대통령 오바마의 블랙베리조차 외부 침입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아 골머리를 썩는 것이 오늘날 전세계의 통신 현주소다. 허나 오바마의 블랙베리와 한국 배우 전지현의 복제 전화 사건은 배경이 많이 다르다. 불안한 무선 통신의 현주소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발생 지점과 사안이 별개다. 한국만큼 사회 영역에서 이토록 빨리 휴대전화가 사회 통제의 도구로 쓰이는 나라는 드물다.

2005년 유야무야 종결된 삼성SDI의 노동자 휴대전화 위치추적 의혹이 그 대표 사례다. 전세계 휴대전화 기기 매출 1, 2위를 다투는 그 기업에 의해, 그 회사에서 만든 휴대전화를 이용해 후진적 노동 통제가 공장 담벼락을 넘어서까지 가능한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첨단 통신 기기인 휴대전화가 주는 편리성은, 일부 한국 사회의 질곡과 결합하면서 점점 나쁘게 변하고 있다. 휴대전화는 의사 소통의 기능에 더해, 정당하게 노조를 만들려는 노동자들의 모임을 위치 추적해 감시하거나 소속사 연예인의 사생활을 관리하는 등에 적극 악용되고 있다. 이는 오바마의 블랙베리나 대다수 선진 국가의 통신 현실과는 무척 다른 척박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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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휴대전화로 저항의 방아쇠를 당겨라

[시사IN 69호: 메스 미디어] 2009년 01월 05일 (월) 11:48:27

휴대전화로 저항의 방아쇠를 당겨라

이광석

앞으로 시위 현장에서 드러날 휴대전화의 가공할 능력은 인터넷, 카메라, 휴대용 1인 미디어 등 디지털 매체의 사회적·정치적 구실과 관련해서 중요하게 다뤄질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각종 악법이 해를 넘겨 의회 쿠데타의 순간만 엿보고 있다. 상식이 무참해지고 모든 다양성이 우향우로 내달린다. 다치고 찢긴 개인적 허망함은 올올이 국민의 분노로 뭉치고 있다. 그러다보니 분노와 저항의 에너지가 급상승한다. 앞뒤 무시하는 권력의 ‘속도전’에 맞서, 맨 먼저 언론노조의 촛불시위가 아래로부터 군불을 지핀다. 국면으로 따지자면, 새로운 정치의 ‘티핑 포인트’(전환점)에 이르렀다.

지난해 여름을 달궜던 촛불시위 이래로 억압의 조건이 점점 국민의 목을 죌수록,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시위 문화 또한 더 기발해지고 유쾌함을 더해간다. 인터넷, 카메라, 휴대용 1인 미디어 등 다양한 전자 매체의 기민함과 평화 시위 문화가 결합되면서, 이제야 대한민국이 ‘정보통신 강국’이라는 이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우선은 시위 문화 속에 점점 역할이 증대하는 휴대전화의 기술적 가능성에 잠깐 주목하자.

사례 하나. 2008년 12월26일 여의도, 언론노조 총파업 출정식 현장에서 기발한 휴대전화 시위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방송법 개정을 밀어붙이는, 이른바 ‘언론 5적’(김형오 국회의장,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 고흥길 국회 문방위원장, 정병국 한나라당 미디어특위 위원장, 나경원 한나라당 문방위 간사) 중 일부에게, 당시 출정식에 참여했던 2000여 노조원이 문자 보내기 퍼포먼스를 벌였던 것이다. 방식은 이랬다. 사회자가 이들의 전화번호를 알리면, 참석자는 일제히 “언론관계 악법을 철회하라”는 항의성 단체 문자를 날렸다. 인터넷을 통해 이를 지켜보던 누리꾼 또한 ‘5적’의 휴대전화로 단체 문자를 날렸다고 한다. 항의와 분노의 목소리가, 해당 정치인의 휴대전화를 불나게 만든 하루였다.

‘언론 5적’에게 문자 보내기 퍼포먼스


사 례 둘. 휴대전화 컬러링 캠페인이란 말이 시민단체 사이에서 운동 방식으로 서서히 확산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컬러링 캠페인이, 요새 휴대전화 도·감청을 합법화하려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운동에 도입되었다. 방식은 3대 통신사의 휴대전화 컬러링 상업 서비스를 이용해,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삽입하는 것이다. “이 전화는 국정원에 의해 도청될 수 있으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혹은 “휴대전화, 더 이상 도청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습니다”와 같은 경고용 컬러링 인사말이다. 휴대전화 사용에 따른 국가의 개인 프라이버시 침해 위협에 대한 경종으로 휴대전화의 컬러링 서비스가 역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 그 기발함이 번뜩인다. 

지난해 촛불집회 평가와 관련해 많은 지식인은 그 힘과 세에도 불구하고 촛불을 실패로 봤고 그 원인이 촛불을 현실 정치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동력 부재라는 사실에 한탄했다. 그러나 촛불 이후의 정치적 무기력에도 불구하고, 촛불시위 한가운데 펼쳐졌던 문화적 상상력에 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냈다. 이 점에서 촛불의 대안적 정치 세력화도 중요하나, 권력이 만들어내는 허구의 정치를 깨뜨리는 시위와 표현 방법을 더욱 다각도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지난해 촛불에서 스티커·‘짤방’·플래카드·풍선·인터넷·카메라 등의 구실에 더해, 이제 그 기동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휴대전화가 새로운 촛불의 친구로 떠오르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시위 현장에서 드러날 휴대전화의 가공할 능력은, 미디어 운동가들과 일부 예술가가 논의하기 시작하는 디지털 매체의 사회적·정치적 구실과 관련해서도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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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메스 미디어) 살짝 ‘애드리브’한 서평 기사 저작권은 누구 것?

시사IN: 메스 미디어 -- [65호] 2008년 12월 09일 (화)

살짝 ‘애드리브’한 서평 기사 저작권은 누구 것?


이광석

책 홍보 기사를 홈페이지에 게재한 것이 저작권 침해라면 방송 프로그램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내건 수많은 맛집도 초상권이나 상표권 침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전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한 출판사 사장에게서 들었던 얘기를 쓸까 한다. 창피해 어디 가서 입도 뻥끗 말라 하셨던 그분에게 혹여 누가 될까봐 조심스럽긴 하지만, 요놈의 입이 가벼워 참을 수 없으니 꺼내어 풀 것은 풀어야겠다.

국 내 출판사 대부분이 언론사나 잡지사 등에 신간을 위한 자체 제작 홍보용 기사를 뿌린다는 것쯤은 많이들 알고 계실 것이다. 출판사에서 보낸 맞춤형 글에 자신의 글 몇 줄을 가감해, 힘들여 읽지 않고도 희한하게 서평을 써댄다(물론 한겨레신문의 최재봉 같은 걸출한 서평 전문기자도 있음을 외면하지는 않는다). 그리곤 법적으로 그 기사에 대한 저작권은 언론사가 갖는다.

내 가 아는 영세한 출판사의 사장은, 기획도 하고 책도 만들고 번역도 하고 거의 모든 일을 홀로 하는 외곬의 책쟁이다. 그이는 여느 때처럼 기자들에게 신간 소개 기사를 보냈고, 기자들은 받아서 서평을 썼다. 의당 책 선전도 할 겸, 그이는 자랑스럽게 활자화된 서평 기사를 출판사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언론사를 대리하여 한 변호사 사무실로부터 소송이 들어왔다. 저작권자인 언론사의 동의 없이 감히 글을 무단으로 올린 죄란다. 불쌍한 사장은 법적으로 붙어봐야 이길 수 없는 싸움, 그저 벌금을 물고 물러섰다 한다. 

시장 논리를 굳이 따지자면, 글의 권리가 언론사에 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원저자 혹은 원창작자로 따지면 정작 출판사 사장이 그 당사자다. 언론사는 원래 글에 ‘애드리브’하고 저작권을 쉽게 가져간 꼴이다. 대부분을 직접 쓰고도, 그리고 남도 아닌 본인의 출판사 홈페이지에 게재한 글을 저작권 위반으로 옭아매는 행위는 촌극 수준이다. 저작권이 얼마나 비상식에 근거하는지를 극명히 보여준다.

선진국 수준의 저작권법 적용은 무리


분 위기가 이 정도에 이르면 수많은 맛집 주인도 초상권이나 상표권 침해로 다 고소당해도 할 말이 없다. “어디 어디 텔레비전, 무슨 프로그램이 방영!” 하면서 대문짝만하게 앵커나 연예인이 나오는 방송국 프로그램의 일부 사진을 ‘영리 목적’으로 ‘무단 전제’했으니 불법 단속의 대상이 될 만하다. 최근 누리꾼의 개인 블로그 게시물이나 UCC에 대한 단속 수위에 견줘보자면, 조만간 맛집에 내걸린 사진의 전체 수거령도 상상해봄직하다. 

애초 저작권이라 함은, 저자가 수행했던 창작에 대한 최소 법적 보상체제임과 동시에, 일정 기간이 지나면 모두의 공공재로 자유롭게 하자는 합의의 소산이다. 한 축에 저작권자의 권리 규정과 함께, 다른 한 축에는 (저작권자의) 공익적 역할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작권은 점점 사적 재산권 행사의 장으로 변질된다. 더구나 저작권 소멸 전에도 저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이용자들의 ‘공정한 이용’ 혹은 ‘저작권 제한 조항’조차 제 기능을 잃고 있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앞서 출판사 사장의 경험은 사실상 ‘공정 이용’에 의해 충분히 보호될 권리였다.

디지털 케이블, 위성, DMB, 그리고 이제 IPTV까지, 대한민국은 뉴미디어 천국이다. 허나 많은 이들은 넘쳐나는 매체에 비해 정보와 콘텐츠의 빈곤을 개탄한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적 상상력의 빈곤을 채우기 위해 선진국 수준의 팍팍한 저작권법을 적용하려 하는 것은 가당찮다.

우리의 누리꾼 문화를 보라. 제약으로부터 멀수록 창작 과잉과 풍부한 상상력이 발휘된다. 미래 문화산업의 관건은 이용자의 권리를 생각하는 융통성과 상식에 근거한 저작권 행사에 달려 있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숭배해 마지않는 시장경제의 활성화에도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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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 윈도우중독작전

참내, 내가 이런 글도 썼구먼...


[미국] MS ‘윈도우 중독’ 작전
이광석 통신원 2002년 11월 08일
 
 
세 계 소프트웨어 운영체제(OS) 시장에서 94퍼센트를 점유하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독점을 굳히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 정보 독점체는 중독을 강화하기 위해선 신규 구매자보다는 평생 사용자를 공략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점을 ㅤㅋㅐㅀ컸杉? 마이크로소프트는 올 7월부터 윈도우 프로그램의 가격 정책을 가입비 모델로 전환했다. 소프트웨어를 한번 팔고 마는 것이 아니라 전기세처럼 꼬박꼬박 가입비를 받아내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독불장군식으로 가격 정책을 바꾼 덕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올해 3분기에 매출을 6억달러나 늘릴 수 있었다.

하지만 저항의 바람도 만만치않게 일고 있다. 더이상 초국적 기업의 정보 독점을 방치해서는 곤란하다는 위기론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정책을 만들어내는 국가 상위 조직으로부터 그 위기감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이 예전과는 다른 점이다. 각국 정부가 나서서 소프트웨어 시장 경쟁의 기초를 회복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 중국, 프랑스, 독일, 브라질, 아ㅤㅌㅘㅍ箸설?등 25개국에서 이런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 정부는 윈도우 운영체제의 가장 큰 대항 세력으로 꼽히는 리눅스 운영체제와 같은 ‘열린 소스’(open-source)를 정책적으로 채택하는 것을 서두??있다. 이들 정부가 열린 소스를 정책적으로 유치하려는 이유는 ?洑求? 윈도우가 지닌 독점적 폐쇄성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열린 소스의 개방성에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전세계 소프트웨어 종속 위기감 고조


열린 소스의 개방성이란 누구나 소프트웨어에 쉽게 접근해 자유롭게 이용하고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장기적으로 프로그램 사이의 ???높이고, 정부 지출을 줄일 수 있는 신경제 효과와도 연결된다.

반 면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상업적 소프트웨어는 일반인이 소스코드에 접근하는 기회를 박탈한다. 프로그램 갱신은 업자의 몫일 뿐이다. 사용자는 구입과 업데이트 비용을 지불하면서 그저 쓰기만 할 뿐이다. 이용자는 수동적 지위로 남는 것이다. 열린 소스를 수용하려는 국가들은 그런 정보 독식의 폐단을 미리 내다봤다. 그저 수수방관하다가는 소프트웨어 종속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는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영국 정부가 후원한 한 독립 연구단체가 발표한 보고서는 그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보고서는 선진국의 지식재산권과 소프트웨어 독점으로부터 숨통을 틔우기 위해서라도 열린 소스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지 난 9월 영국 정부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정보 독점에 반대하면서 중앙 부처뿐만 아니라 하급 단위의 공공기관들에까지 열린 소스 프로그램 사용을 적극 독려한 것도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영국 정부는 대외적으로는 정보 독점이 가져오는 종속 상황을 부각하면서, 영국 내부의 정보 독립성을 확보하겠다는 강한 정책적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영국 이외에서도 이런 움직임은 많이 보인다. 올 여름 페루에서는 열린 소스의 정책 입안을 주도했던 한 국회의원이 영웅으로 떠오?竪?했다. 에드가 비야누에바라는 이 국회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에서 재정난으로 고민하다 열린 소스 프로그램을 채택한 뒤 효과를 보았다. 그는 곧이어 이를 국가정책에까지 적용해 입안하면서 화제를 모았다.

그를 스타로 만든 것은 마이크로소프트의 페루 지사장과 주고받은 서신 내용이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면서였다. 비야누에바는 오직 한마리의 사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불공정 경쟁의 독점체, 즉 ‘레오폴리‘(Leo-polies)가 페루의 건전한 시장에 독약처럼 퍼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소프트웨어 시장에 기회균등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열린 소스를 경쟁에 참여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러기 위해선 정부의 의식적 역할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시장 경쟁주의자를 자처했던 마이크로소프트 지사장이 구사하는 정보 독점의 논리를 또 다른 시장 경쟁 논리로 간단히 물리쳤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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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학술동향] 좌파내 정보통신 기술분석 새로운 관계 돌입

[해외학술동향] 좌파내 정보통신 기술분석 새로운 관계 돌입 이광석 / 미국 텍사스-오스틴 주립대학 신방과 박사과정 실지 좌파 정치경제학의 논의는 2천년대에 이르러서도 거의 80년대 논의 구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정체 상황은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이 발간되면서 크게 벗어난다. 특히 이들의 ‘제국’이란 의제 설정이 이미 전자 네트워크와 비물질적 노동에 기반한 자본주의 재생산 구도를 직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제국 분석에 의한 좌파 논의의 활성화와 더불어, 비물질 영역에 대한 사유화를 경고하는 미국내 자유주의자들의 지적 재산권 논의는 학계의 또 다른 큰 축을 형성한다. 상식이 통하는 시장을 원하는 미국내 ‘현실주의’적 법학자들은 자본가들의 새로운 이윤원, 즉 저작권이 인류의 창작을 저해하는 핵심이라 보고 다양한 학회 모임과 포럼, 저술, 단체 설립 등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적극 표출하고 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스텐포드 대학의 레식은 이의 주도적 인물이다. 저작권 비판은 현재 단순히 정보 이용자들의 보다 확대된 정보 자율권뿐만 아니라, UN산하 세계저작권기구(WIPO)의 다국적자본 친화적인 조직 성격을 바꾸려는 비판적 논의로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법학자들의 논의는 자본주의 생산구조 변화에 대한 문제 제기보다는 부르주아 법 환경의 제도적 개선에 집중되고 있어 그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현재 좌파내 정보통신기술의 논의는 자본주의 경제의 질적 전환에 대한 분석에서, 그 초점을 새로운 대안 현실의 재구성에 무게 중심을 이동하고 있다. 들뢰즈가 한 때 얘기했던, 네트워크에 상주하는 권력의 시대인 ‘통제사회’의 유연성에 대해 능동적으로 저항하는 주체들(네그리와 하트의 ‘다중’)에 그 힘을 싣고 있다. 언론학에서는 인터넷을 이용한 저항과 불복종의 사례 발굴이 이와 같은 연구의 주종을 이룬다. 최근까지 정치학과 사회학 분야에서는 이라크전과 관련해 대안적 저널리즘과 블로그 문화에 대한 분석들이 대량 생산됐고, 인류학 분야에서는 전자 소통에 의해 어떻게 권력 담론의 파괴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주목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프라이버시 연구도 한 단계 진전하고 있다. 프라이버시 침해는, 기존에 개별 사적 정보의 원치 않은 노출이란 개념에서 권력이 신체에 가하는 통제욕으로 해석되고 있다. 특히 각국 정부가 ‘유비쿼터스’의 장미빛 담론을 유포하는 상황에서, 최근 프라이버시 연구는 ‘모바일’에 기반한 권력 확장의 유연성과 편재성을 경고한다. 현재 문제는 자본주의의 재생산을 반영구적으로 보장하는 정보와 지식의 사법적 질서에 대한 문제제기를 오로지 자유주의 법학자들에게 맡겨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미국 내에선 마이클 페럴만과 같은 아주 소수의 정치경제학자들만이 현실 자본주의내 저작권의 핵심적 기능을 지적했던 정도다. 희망컨대, 관련분야 국내 신진 학자들이 저작권과 권력 재생산의 관계, 디지털 권력의 유형 분석, 그리고 이의 저항과 대안적 사회 모델에 대한 고민을 왕성하게 내어주길 기대해본다. 중앙대 대학원 신문 (2005년 10월, 이동미 편집위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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