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이곳저곳 기고했던 글들

[시사IN] ‘대한 늬우스’를 6000원 내고 보라고?

‘대한 늬우스’를 6000원 내고 보라고?

 

 

[122호] 2010년 01월 13일 (수) 17:49:32      이광석

 

 

600억원이 넘는 세전이익의 흑자를 내는 KBS에, ‘대한 늬우스’ 수준으로 전락한 KBS에,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상업적 국영방송’의 길을 걷는 KBS에 별다른 이유도 없이 수신료를 더 내라고?

 

 

 

새해 벽두부터 최시중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이 현재 2500원 하는 KBS 수신료를 6000원 수준으로 인상하자는 말을 꺼냈다. 그는 현 수준보다 두 배 이상이 넘는 수신료 인상액을 제시하면서 “상식선상에서” 수신료 인상이 이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상식선상에서’ 이렇게 인상하게 되면 “7000억~8000억원 규모의 광고가 민간시장으로 이전되는 효과”가 있으리라 장담한다. 그 어느 누가 봐도 비상식선상에서 나오는 막말이다. 정부가 시민의 주머니 털어서 KBS 광고 수입 없앤 비용을 조달받고, 그 돈으로 조·중·동 종합편성 채널 진출에 나눠주면서 레드카펫 깔아주려 한다는 말이 이제 기정사실화됐다.

KBS 김인규 사장 또한 신년사에서 수신료 인상을 올해 KBS의 ‘숙원 사업’으로 내세웠다. 우리의 수신료는 영국·독일·일본의 공영방송사에 비해 수십 년간 정체 상태다. KBS의 수신료 의존율은 40% 미만에 불과하다. 이제 외국처럼 수신료를 정상화해 서비스를 개선하자고 한다. 일견 수치상으로 보면 최 위원장이나 김인규 사장의 말이 명분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와 달리 KBS 현실을 보라. 600억원이 넘는 세전이익의 흑자를 매년 경신하면서 승승장구한다. 그에 발맞춰 KBS 방송은 최근 몇 년간 ‘대한 늬우스’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다. 전 세계 유례없는, 명실 공히 공영도 상업 방송도 아닌 ‘상업적 국영방송’의 큰길을 걷고 있다. 그런데도 이처럼 요상한 정체성을 지닌 KBS에 별 큰 이유 없이 수신료를 더 내란다. 가뜩이나 생활고와 만성 실업에 치여 우리네 삶이 울상인데, 마치 명분 없는 ‘인두세’처럼 정부가 또 한번 서민을 갈취할 태세다.

   
수신료 인상은 김인규 KBS 사장(위)의 숙원 사업이다.
조직의 독립성·자율성부터 확보하라

방송법 제64조에 명시한 바에 따르면, 텔레비전 수상기를 소지한 자는 대통령령에 따라 수상기 등록과 수신료 납부 의무가 있다. 안다. 또한 법적으로 수신료의 결정 또한 KBS 이사회의 심의·의결 후 방송통신위원회를 거쳐 국회의 승인을 얻어 확정된다. 다 좋다. 그래서 이제껏 우리나라 시청자는 전기세에 통합고지되어 나오는 수신료를 군소리 없이 꼬박꼬박 내왔다. 물론 시민이 크게 한 번 수신료 징수에 분노해 이를 뒤집은 적이 있다. KBS가 1986년 군부독재의 ‘나팔수’를 자처하면서 정신 못 차리던 시절이었다. 그때 시민의 분노를 지금도 파악 못하면 비슷한 일이 또 찾아올 수 있다. 

우리나라의 수신료 징수는 일본의 NHK와 비슷하게, 공공복지 서비스를 위해 시청자가 일종의 부담금을 내야 한다는 관점에 기초해 있다. 즉 수신료를 준조세적 성격의 공적부담금으로 본다. 예서 우리는 ‘공공복지 서비스’라는 단서 조항을 주목해봐야 한다. 방송법에 규정된 시청자의 수신료 납부 의무란, 먼저 전파를 사용하는 주체의 서비스 의무 이행이 적절히 이뤄질 때 계약 조건이 성립한다는 얘기다.

KBS가 공영방송이라면 그 격에 맞춰 상업주의나 청와대 등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 독립된 운영과 편성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도 없이 수신료만 챙기면 대국민 갈취요 사기다. 게다가 시청자의 주머니를 털어 수신료까지 올려 그 자금으로 또 다른 궁리를 한다면 이는 도둑 심보보다 더 나쁘다.

KBS가 지금의 ‘상업적 국영방송’ 비슷한 외양을 정리하려면, 수신료 인상 문제 등으로 새해부터 국민의 심사를 어지럽게 해선 곤란하다. 당장 내부적으로 개선해야 할 것이 얼마나 산적해 있는가. 진정 KBS가 ‘공영방송’의 이름값을 하려면 외압으로부터 조직의 독립성 보장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시사보도 프로그램 등에서 탐사 저널리즘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교양·오락 프로그램의 다양성 확보와 질적 향상 등에 힘써야 한다. 이와 같은 노력 없이 일방적으로 수신료 인상을 제안하다가는 외려 시청자의 ‘수신료 거부운동’이라는 전 국민의 저항을 부르기 십상이다. “상식선상에서” 암만 봐도, 수신료 인상은 때가 아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시사IN] 색 바랜 색깔론 피해자, 김제동·임헌영·마은혁

[시사IN 115호] 2009년 11월 26일 (목) 09:28:22 

 

 

색 바랜 색깔론 피해자, 김제동·임헌영·마은혁

 

 이광석

 

일부 보수 언론은 ‘부끄러운 친일’을 사죄하기는커녕 <친일인명사전>을 ‘좌파사관의 친일사전’으로 몰고, 언론 관련법 처리에 반대하며 농성한 민노당 당직자에게 공소기각 판결을 한 판사를 ‘좌편향’이라고 공격한다.

 

 

풍경 하나. 방송인 김제동은 얼마 전 한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세상의 어떤 일이든 97%는 내부에 있고 사실 3% 정도는 외부 요인을 가지고 있다”라는 말을 했다. 그의 말은 프로그램 하차의 외압 논란을 일거에 허물어뜨리는 힘을 가졌다. 그랬다, 역시 그릇이 달랐다. 그는 스스로의 모자람을 지적했다. 그래도 난 1%도 아니고 3%라는 그의 숫자에 영 마음이 쓰였다.

지난해 가을부터 KBS에서 보도탐사 프로그램이 갑자기 폐지되고 사회를 보던 가수나 앵커가 하차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상황에서는 누구나 KBS <스타 골든벨> 마지막 방송에서 흘린 그의 눈물과 이내 그가 겸손하게 숫자화한 3%에 씁쓸함을 갖게 된다. “웃음에 좌우도 없다”라는 그의 말에서 아이러니하게 우리 모두는 그에게 닥친 정반대의 쓴 현실을 봤다.

풍경 둘. 지난 11월8일 민족문제연구소는 일본에 ‘충성혈서’를 썼던 박정희 전 대통령, 동아일보 창업주와 조선일보 사장의 친일 행적 등 일제강점기 시절 4389명의 친일 행적을 담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다. 2001년 12월부터 시작해 8년 만에 이룬 쾌거다. 광복 이후 일제에 적극 공모했던 이들에 대한 역사적 심판이 부재했던 우리가, 이제라도 친일 행적에 대한 기록을 남겨 역사의 반면교사로 삼는다는 점에서 뜻깊은 일임에 분명하다.

유신 시절로 돌아간 듯한 보수 언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친일인명사전>(위)을 ‘좌파의 사전’으로 깎아내렸다.

한나라당의 친박계 한선교 의원이 한 라디오 방송에 출현해 박 전 대통령의 친일 논란을 일축하며 민족문제연구소를 ‘좌파연구소’라고 맹비난했다. 연구소 설립의 기원이 됐고, 지금은 작고하신 친일연구가 임종국 선생이 들으셨다면 기가 찰 소리다. 생전에 효창동 백범 김구 기념관에서 연설하던 모습이 아직도 내겐 또렷하다. 그는 영락없는 민족주의자였다. 대체로 그의 청중은 나이 지긋한 독립운동가 집안의 후손쯤 되는 그런 분들이었다. 그런 그의 평생 유지를 받들어 어렵게 이룬 연구소와 사전 제작을 싸잡아 ‘좌파’라 하니, 이에 무슨 대꾸를 하겠는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스스로의 ‘부끄러운 친일’에 사죄라도 하는 것이 기본이거늘, 오히려 “대한민국 정통성 훼손을 노린 좌파사관(의) 친일사전”(동아일보 11월9일자)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써댔다. 게다가 임헌영 연구소 소장의 과거 ‘남민전 사건’ 투옥 전력을 ‘좌빨’로 몰아가기까지 했다. 유신시대에 조작된 공안사건으로 이미 판결된 내용을, 이들은 마치 유신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똑같이 읊조린다.

풍경 셋. 서울남부지방법원의 마은혁 판사가 요새 곤혹스럽다. 언론 관련법 처리에 반대하며 국회에서 점거농성을 한 혐의로 약식기소된 민주노동당 당직자들에 대한 정식재판에서 모두 공소기각 판결을 한 것이 문제가 됐다. 당시 농성 중이던 민주당 쪽은 입건조차 않고 민노당 쪽만 약식기소한 것은 “검사의 공소권 남용에다, 형사소송법 위반”이라며 기각했다. 누가 들어도 타당하다. 그러나 조·중·동은 “편향적인 돌출 판결”이자 “판사의 이념이 개입”됐다고 난리다.

 조·중·동은 마 판사가 ‘우리법 연구회’ 소속에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에게 후원금 10만원을 낸 것을 “좌파 편향 판사의 좌파 정치인 후원회 참석”이라며 ‘시뻘건’ 이념 딱지를 붙인다. 끝내 동아일보는 마 판사가 “사회주의 혁명조직 핵심 멤버”(동아일보 11월12일자)였다고 주장한다.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친하게 지내고 어디 선언에 어떻게 연명을 하고 무슨 글을 썼고 언제 무엇을 했고 어떤 자리에 참석했는지, 이 모든 것이 정치 이념으로 재단되는 사회가 또다시 반복된다. 이념의 굴레에 갇힌 이들은, 세 가지 풍경 속 주인공 각각에서 보이는 소박한 웃음·정의·형평이란 희망의 메시지를 읽으려는 시늉조차 없다. 색 바랜 ‘이념’으로 단죄하는 이들의 목소리만 드높다. 세상이 정말 거꾸로 간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시사IN] 대한민국 움츠리게 하는 공익광고

[시사IN 112호] 2009년 11월 05일 (목) 13:38:27

 

대한민국 움츠리게 하는 공익광고


‘삼진아웃제’로 누리꾼을 윽박지르고 패킷 감청으로 모든 것을 뒤지면서 누리꾼의 안티 행위와 댓글 쓰기를 나라 망가뜨리는 테러 행위로 몰고 가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이광석

 

요새 라디오를 틀면 귀에 거슬리는 공익광고를 종일 듣는다. “악성 댓글, 당신의 영혼과 대한민국을 갉아먹는 흉기입니다.” “악성 댓글은 영혼까지 파괴하는 범죄입니다.” 공익광고 듣는 일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무슨 댓글 문화에 이리도 험하고 요란스럽게 낙인을 찍는지 그저 듣기에 소름이 돋는다.
 
지난 4월 미네르바가 무혐의로 나온 후에도, 여기저기 사찰과 감청의 부활로 대한민국이 정신없이 어지럽다. 국정감사 현장에서 속속 드러나는 정보기관들의 ‘패킷 감청’은 말할 것도 없고, 군사정권 시절에나 봄직한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까지 등장했다. 일선 경찰에서는 인터넷 사이트의 댓글과 첨부 파일을 감시하는 ‘보안 사이버 검색·수집 시스템’까지 가동한다고 한다. 

패킷 감청이란 쉽게 말하면 인터넷 회선을 오가는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중간에서 탈취해 들여다보는 방식이다. 패킷 감청 앞에서는, 최근 유행처럼 불었던 ‘사이버 망명’이 사실상 유명무실하다. 이용자의 메일 서버가 해외에 있더라도 누군가 가는 길목에 진을 치고 속속 열람하는 꼴이다.

   
댓글 문화를 흉기·범죄로 낙인 찍은 공익 광고.

법적으로도 전기통신사업법 54조의 통신자료 의무제출 규정으로 말미암아 검찰이 누리꾼의 정보를 국내 포털이나 통신 회사에 요구하면 의당 공개하는 것이 관행이다. 한때 9·11 테러 국면에서 미국 정보기관들이 통신기업에 ‘카니보어’라는 패킷 감청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개인 이용자의 정보 열람을 요청하곤 했다. 그런데 버라이즌 같은 초대형 통신 기업은 여러 차례 정보기관의 정보 요청을 거부했다. 이유인즉슨 소비자 개인정보 보호가 우선이었다. 시민의 인권을 지킨다는 명목도 아니요, 그저 버라이즌에게는 소비자를 위한 기업 서비스 원칙이 더 중요했던 셈이다. 역시나 소비대국의 프로 기업다운 처신이다. 우리네 통신기업과 포털은 어떠한가. 원하면 재깍이다.



이른바 ‘삼진아웃제’라는 것도 저작권법을  이용해 누리꾼의 표현에 재갈을 물리는 방식 중 하나가 됐다. 지난해 아프리카TV 대표가 저작권 위반 방조죄로 구속됐다. 당시 촛불 시위를 24시간 방송한 데 대한 정치적 괘씸죄였다는 판단이 중론이었다. 이는 저작권 위반 혐의로 내린 경고 세 번으로 충분히 게시판을 폐쇄하고 아웃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인권 독소조항이라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누리꾼의 말길을 막아서서 윽박지르고 그나마 간신히 소통하는 내용조차 감청과 사찰로 속곳 하나하나 다 뒤지는 형국이다. 이도 부족해 방송에서는 댓글을 사회에 대한 테러로 치환한다. 안티 혹은 댓글의 역기능이 극히 일부임을 부정하고, 그것이 지닌 사회 내 권력 감시의 긍정적 파워를 부정하려 든다.



누리꾼 스스로 정화하도록 하라


생각해보라. 일부 기업가·공직자·정치인 등 권력자들의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행위를 폭로하는 데 인터넷의 안티와 댓글보다 더 유효한 수단이 있는가. 내부 고발 행위를 보호해주기는커녕 이에 보복을 가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라면 이는 더욱 유효하다. 또한 정당한 소비자 주권을 지키는 데 폭로와 안티의 효과는 이미 도처에서 입증된 바다.



명예 훼손, 사생활 침해와 의도된 비방 등 악플과 안티의 부작용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렇지만 누리꾼의 안티 행위를 악플로 몰고 ‘대한민국을 갉아먹는’ 테러분자로 모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더군다나 그런 식의 공익광고는 가뜩이나 바짝 움츠러든 누리꾼의 ‘표현의 자유’를 더욱 얼어붙게 만드는 협박성 멘트로 다가올 수 있다. 지금처럼 댓글 문화를 상징 권력의 살벌한 광고 카피로 겁주기보다는 누리꾼들 스스로의 규칙 안에서 정화되도록 그냥 놔두는 편이 현명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시사IN] KBS, 시사 프로그램의 무덤?

KBS, 시사 프로그램의 무덤?

 

이광석

[시사IN - 메스 미디어] [109호] 2009년 10월 12일 (월) 14:39:47

 

KBS가 지난해 가을 개편에서 그 수많은 시사 보도 프로그램을 잘라내는 것도 부족했던 듯싶다. 이병순 KBS 사장은 얼마 전 이사회에서 생방송 <시사360>까지 폐지하겠다고 했다. 지난해 개편 때 <시사360>도 KBS 간판 시사 프로그램이던 <시사투나잇>을 잘라낸 뒤 만든 후속 편성이라 말이 많았다. 비판적 정론보다는 정치적 뉴스 사안을 연성화하려는 의도가 개입됐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이제는 <시사360>조차 부담스러운 시점에 이르렀다.

취 임 후 지난해 가을 개편부터 이병순 사장이 보여줬던 프로그램 개편의 험한 칼춤을 맞아 쓰러진 시사보도 프로의 참상이 바로 어제일 같다. 그런데도 또 칼춤 시늉이다. KBS <시사투나잇>과 <미디어 포커스>가 그렇게 사라졌고, <시사기획 쌈> <추적 60분> 등은 뉴스 아이템 연성화와 사실 관계 왜곡 등으로 시청자들의 원성을 산 지 오래다. 이미 지난해 가을 개편으로 KBS 내부에서 “탐사보도팀 사실상 해체”라는 얘기가 돌았던 정황을 고려하면, 이번 <시사360> 폐지 수순이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라는 자조 섞인 말도 나올 법하다.

수신료 현실화 논의는 어불성설

 

문제는 KBS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국면에서, 그리고 각종 집회 현장에서 시민에게 취재조차 거부당하는 굴욕을 당하고도 공정성과 탐사보도로의 회복 의지와는 반대 길을 걷는 데 있다. 군부독재 시절에 KBS는 국영방송으로 태동했다. 저개발 독재국가가 방송 등 미디어를 국민 계몽과 정치 선전 도구로 순화하려던 무렵이었다. ‘한국방송공사’의 설립은 적어도 KBS 조직상 정치 입김을 최소화하고 방송의 정치적 독립성과 방송 공영성을 세우려는 첫걸음은 됐다. 군부독재 시절에 정치적 부침과 위기가 있었으나, KBS는 ‘국민의 방송’이기에 이름값을 위해 공영방송의 요건을 착실히 쌓아갔다.

 

예컨대, 정연주 사장 임명과 함께 2003년부터 그가 해임당할 때까지 KBS의 영향력과 신뢰도는 줄곧 1위였다. 또한 MBC의 공영성 사수에도 KBS가 나름대로 든든한 맏형 노릇까지 했던 시절이 있었다. 적어도 지난해 이병순 사장 체제 전까지 KBS의 질적 성장과 약진은, 내부적으로 여러 잡음에도 불구하고 보도와 시사 부분에 힘쓰고 정부 감시 기능과 사회 약자 편에 선 방송에 힘입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KBS 신뢰도 추락을 이제 ‘수신료 현실화’라는 논쟁적 의제로 바꿀 때가 아니다.  지난 십수년간 KBS 수신 요금이 전혀 현실 반영을 못한 채 제자리였다는 점을 인정한다. 영국이나 일본의 공영방송에 비해 수신료 비율이 턱없이 낮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아래에서 KBS의 ‘대한 뉘우스’로의 전락이 문제시되는 현실에서 수신료 현실화 논의는 어불성설이다. 회사 광고 수입의 주요 원천이던 KBS2를 대기업과 족벌언론에 민영화해 던져주고 나머지 자급도를 높이기 위한 심산으로 수신료를 올리려 한다는 소문도 무성하다. 수신료 인상 이전에, 이제까지 국민의 지지를 누렸던 공영방송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관제와 국영 방송이란 오명을 짊어질 수밖에 없다.

 

KBS 위기와 관련해 필자는 온라인 뉴스 ‘미디어스’에 다시 실린, 전영일 전 KBS 수신료 팀장이 지난 1년간 KBS의 망가진 모습을 정리한 글을 최근 읽었다. KBS 사내 통신망에 올랐던 글로, 이병순 사장 1년 동안 KBS 신뢰도 위기 문제의 본질을 누구보다 정확히 잘 짚고 있었다. 사내 게시판에 그와 같은 글이 KBS 직원의 회사에 대한 충심에 의해 올라왔다는 점에서 아직도 희망이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현재 KBS 위기에 반응해 일어나야 할 변혁의 공감이 여전히 내부적으로 기민하지 못하다. 이에 이르면 아쉽고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정세 탓만 하고 굴종의 세월이려니 하여 그저 지나치려 마음먹기엔 앞으로 험한 날이 너무나 많지 않을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시사IN] 세계 시장에는 있지만 한국에는 없는 휴대전화?

세계 시장에는 있지만 한국에는 없는 휴대전화?

 

이광석             [시사IN 105호] 2009년 09월 15일 (화) 14:53:30 

 

정부, 단말기 제조기업, 이동통신사 모두 좀 더 다양한 차세대 모바일 기술을 통해 우리 소비자에게 가져다줄 이점을 먼저 생각해보자. 지금과 같이 닫힌 서비스로는 시장의 미래가 없다.

 

 

애플 사의 아이폰이 한국 휴대전화 시장에 입성하기가 이리도 까다롭고 어려운가? 일반 애플 유저는 물론이고, 최근 한국인터넷기업협회까지 나서서 소비자 권리를 외치며 아이폰을 수입하라고 하는 판국이다. 휴대전화 기기 하나 들여오는데, 왜 이리 오래 걸리고 주판알만 두드리는가.

올해 초 방송통신위원회도 외국계 휴대전화 수입의 걸림돌이던 우리식 모바일 플랫폼 ‘위피’를 이미 제거한 상태다. 한국에서만 유독 터치폰 시장의 성장세가 둔하고, 그로 인해 모바일 데이터서비스 시장이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옳은 선택이었다. 그런데도 이후로 전혀 진전이 없다. 이미 전 세계에서 새롭게 각광받는 터치폰의 진화가 이상하게도 한국 시장에 오면 작동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이폰을 포함해 지금 국내에 법인용으로만 수입되는 블랙베리폰, 그리고 구글의 안드로이드폰 등은 사실상 기술적 기능성에서 보면 소비자들의 휴대전화 문화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어느 나라보다도 진일보한 휴대전화 시장을 가진 우리가, 거의 대다수 나라에서 인정 받은 기기들을 이용조차 못 해보고 있다. 그러다보니 터치폰 시장이 아예 정체 상태까지 이르렀다.   
 

     
애플 사의 휴대전화 아이폰.

문제가 무엇일까? 우선 국내와 전 세계 휴대전화 기기 매출 1, 2위를 다투는 삼성과 LG를 보자. 이들이 아이폰의 수입을 꺼리는가? 신빙성이 있는 얘기다. 경쟁 업체이다보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들이 정부를 상대로 어떤 로비를 한다든가 하는 정황은 없다. 기술력 등에서 그리 크게 밀리지 않는 우리 휴대전화 기기업체들이 그리 옹졸할 것 같지는 않다. 선의의 시장 경쟁을 통해 이번 기회에 터치폰 기술 향상과 소비자 선택 및 가격 하락이라는 점을 고려하는 배포가 필요하다.

 

이 제 통신 규제를 총괄하는 방통위의 움직임을 보자. 위피를 제거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거꾸로 최근 아이폰의 위성항법장치(GPS)를 쓴 ‘구글 지도찾기’ 기능을 문제 삼고 나섰다. 국내 위치정보법에서 보면, 이는 애플이 위치정보사업자의 까다로운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얘기다. 일전에 구글 본사가 유튜브 문제와 관련해 우리네 인터넷 실명제를 거부한 때처럼, 우리의 어처구니없는 디지털 정책 현실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애플이 국내 입성을 자포자기하게 만들기 위해 꾸며진 일이 아니라면, 모바일 기기를 통한 지도 서비스에 대해 위치정보법의 좀 더 유연한 정비가 요구된다.    



아이폰, 무료로 무선 인터넷 쓸 수 있어

마 지막으로, 가장 혐의가 짙어 보이는 KT와 SKT 등 이동통신사 현실로 가보자. 아이폰에는 무료로 쓸 수 있는 무선 인터넷 기능이 있다. 국내는 전혀 다르다. 이용 시간에 따라 비용을 지불한다. 사실상 애플 것은 통신사들이 초 단위의 데이터 통신 서비스로 벌어들이는 주요 수입원을 갉아먹을 수 있는 기능이다. 이래서 수입을 꺼린다는 주장이 많다. 개연성이 높다. 아이폰의 무선 인터넷에 연결해 스카이프를 쓰면 소비자들은 공짜 통화도 가능하다. 게다가 ‘위젯’ 혹은 ‘어플’이라 불리는 다양한 모바일용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받는 ‘앱스토어’ 시장이 형성되면, 소비자와 벤처기업에 일대 혁신을 가져올 것이다. 

 

가뜩이나 음원 저작권 배분에서 대부분의 이윤을 이통사가 독식한다고 해서 여론이 좋지 않은 분위기다. 이통사들이 혹여 단기적 이익에 눈이 멀어 좀 더 나은 모바일 기기와 그에 맞는 서비스가 있는데도 이를 배제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정부, 단말기 제조기업, 이통사 모두 좀 더 다양한 차세대 모바일 기술을 통해 우리 소비자들에게 가져다줄 이점을 먼저 생각해보라. 장기적 이윤원을 모바일 데이터 서비스라고 본다면, 지금과 같이 닫힌 서비스로는 시장의 미래가 없다. 모바일 콘텐츠 시장을 제대로 키우려면, 이통사는 독식을 멈추고 과감히 해외 단말기 도입을 긍정하고, 다 죽어가는 벤처기업을 살리기 위해 애플의 앱스토어처럼 모바일 콘텐츠 시장을 활성화해야 한다. 그것이 모바일 시장도 살리고 소비자의 선택권도 보장하는 길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중앙대대학원신문] 불통의 정치, 소통의 저항들

불통의 정치, 소통의 저항들

 

2009년 9월 4일 (금)

 

이광석


사이토 준이치(齋藤純一)식으로 얘기하면, 우리는 ‘인간관계의 박탈’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은 고립 상태에 처해 있고 정치 권리는 박탈당하고 인권 유린의 사각시대에 내던져지고 있다. 정부가 나서서 소통을 내세우긴 하나, 소통의 원래 의미는 탈각된 지 오래다. 정부가 소통을 청한다 하면, 이젠 박제화되고 불통을 조장하는 대중 선전의 관변 말길을 지칭할 뿐이다. 아래로부터 나오는, 대중으로부터 뼛속 깊이 사무쳐 나오는 절규와 아픔을 보듬기는커녕, 권력을 쥔 자들은 대중의 목소리를 매번 무시하고 침묵하고 내친다.

 

대한민국 정치가 아수라장이라 해도, 적어도 정치 권력은 그에 맞는 형식 민주주의 정도는 취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강제적으로 법적 구성 요건을 갖춰 원하는 것을 폭력으로 밀어부치는 현 권력의 모습은 형식 민주주의를 악용하는 후진적 권위주의의 모습이다. 적법을 가장한 권력의 추한 행위는 수많은 선량한 이들을 생채기내고 건강한 정치의 발전을 저해한다. 이렇듯 정상성과 적법성, 그리고 민주적 소통의 원래 의미를 무시하는 행위는 최근 도처에서 발견된다.

 

가만 들여다보자. 재개발과 권력의 폭력으로 벌어진 용산참사가 반년을 넘겼는데도 권력자들 어느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도시 재개발의 폭력, 공권력과 정치권의 공모 역할, 그리고 권력의 묵인이 얽혀 죽임당한 이들만 구천을 떠돈다. 그저 통치권자들은 그들과 무관한 ‘사적인’ 문제라 내치며 모르쇠로 일관한다. 권력자들의 외면은, 당연히 종교인, 예술인, 활동가, 일반 시민, 빈민, 학생 등이 모여 전국으로 돌며 참극의 상황을 전하는 장정의 행렬로 풀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쌍용 자동차 농성의 강제 진압 과정도 다르지 않다. 사태의 해결보다는 폭력 진압과 검거가 남긴 선혈들이 낭자하다. 공권력의 도전에 대해 그들 식의 본때를 보여주는 것은 도를 넘어서도 노동자 인권을 지키는 데는 인색하다. 폭력의 잣대 또한 불분명하다. 노동자들의 폭력만이 폭력으로 간주된다. 분명 많은 이들이 공권력의 폭력을 경찰봉, 방패, 군화, 전기충격 테이저건, 그리고 대규모 사법처리 등으로 관찰했음에도, 그에 대한 책임과 성실한 답이 없다. 따져보면, 샹하이 자동차의 철수와 법정 관리라는 회사 상황에 대한 책임이 상당 부분 기업 운영자들에게 있었다. 그들이 비용절감을 위해 들이댔던 대규모 해고라는 고용조정 또한 일방적이었다. 그리고, 이로써 섣불리 대치 상황에 대해 공권력을 투입하고 과도하게 폭력으로 해결을 봤던 것도 문제의 일부다. 과거 군사독재시절 권력자들이 흔히 보여주는 위험한 불통의 정치와 다를 바 없다.

 

빈민, 노동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소통 부재의 폭력성과 함께, 시민들의 목소리를 여과없이 담을 수 있는 소통의 아고라로써 광장의 역할 또한 위기에 처하기는 마찬가지다. 정치 시위와 소통의 살아있는 광장은 분수대와 전시 공간으로 박제화됐다. 광화문 광장은 인공 조형물들로 분할되고 치장되어 ‘정원’이 되어 용도 변경된다. 새로운 ‘정원’에서 광장에서의 집회나 시위 행위는 경찰봉과 연행의 대상이 된다. 집회는 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고, 연행 또한 선택적으로 이뤄지며 현장의 폐쇄회로 TV와 카메라를 통해 공권력에 의한 체증이 시도된다. 광장은 이름만 남고, 오로지 권력에 의한 공간 관리과 시위 대중의 관리만이 남는다. 훈육의 심화요 통제의 강화다. 시위로 구속된 이들은, 구속 그 자체보다는 벌금형이 시위 가담자들을 애먹이는 특효약이 된다.

 

현실 공간의 문제는 곧 온라인공간의 문제와 연결된다. 이곳도 이미 단속과 불통의 감옥이 되가고 있다. 전세계 어디에도 없는 주민등록번호가 실명 인증을 위해 쓰이고,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린다. 조ㆍ중ㆍ동 신문 광고주 불매운동을 영업방해로 구속하려 하면서 최소한의 미국식 소비민주주의는 고사하고 보수언론과 검찰의 공생 관계까지 의심스럽다. 인터넷 ‘삼진아웃제’ 등 저작권 규제를 통해 블로거나 게시판 운영자들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경우도 급증한다. 다국적기업 구글의 유튜브 회사가 대한민국 인터넷 실명제를 거부하는 한심한 정황까지 이르렀다. 9-11 테러 이후 미국에서 인권 침해 논란을 일으켰다던 ‘카니보어’ 등 아이피(IP) 서버 감시용 프로그램이 수사용으로 이용되고 통신회사들이 속절없이 소비자 정보를 내준다는 말도 들린다. 민심을 어지럽히는 괴담을 인터넷에 퍼뜨린 이는 ‘미네르바’처럼 감옥행이다. 소통의 광장은 차벽처럼 자체 검열로 단절돼 있다.

 

언론의 영역도 다르지 않다. 국가 경쟁력과 미디어 산업의 국제 경쟁력 강화라는 시장 논리가 국가 대의가 되면서, 시민 대다수 여론은 불평과 잡음으로 취급된다. 결국 여론 무시의 정치는 미디어법 날치기 강행 처리라는 전세계 뉴스거리를 선사했고, 그 처리 과정조차 조악해서 신문법 대리투표 의혹에다 방송법 재투표 무효 논란까지 낳는 형국이다. 미디어 악법의 개정과 이들의 졸속 입안으로 이제 조중동 족벌 신문사들은 공중파 방송에 안착할 수 있는 길을 터줬다. 여당 정치인들은 굶주린 족벌언론에게 새로운 먹잇감을 던져주는 대신, 현 정부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미디어 환경에 보수 우익의 확성기를 여기저기 심어놓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8할 이상이 연예인 신변잡기식 잡담이요 음식 먹는 게걸스런 입들을 보여주는 맛집 소개 장면들이 대부분이지만, 아직까지 여론 형성의 위력이 공중파 방송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권력자들은 안다. 자유 시장의 경쟁 시장 논리를 통해, 극우 보수언론과 재벌을 미디어 영역의 지배적 주주로 키워 대중의 의식을 장악하는 법 또한 통치자는 잘 파악하고 있다. 


명분상 소통을 위해 존재한다곤 하나, 이렇듯 여기저기에서 보이는 현실 권력의 재현들은 불통의 상징들이 됐다. 대중의 분노와 절규의 신호가 강하면, 당연히 받는 쪽은 상응하는 반응 혹은 피드백을 보내야하거늘 그 기본 룰마저 무시된다. 지난 6월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 후 정국에서, 사회 각계에서 시국선언을 내놨으나 역시 청와대는 묵묵부답이었다. 이렇듯 교감과 소통의 정치 사회가 불가능하고 시민들의 절규가 독백이 되는 시대에, 소통의 복원을 외치는 행위는 적어도 이제는 철없어 보이는 해법이다. 불통, 무시, 묵인의 정치 행위는 폭력에 억압당하는 수많은 이들의 고통을 낳고 있다. 불가능한 대상과 맺으려는 소통은 하릴없다. 오히려 불통의 정치로 고통받는 폭발하는 분노와 저항들간의 소통을 꾸려야 한다. 불통으로 찢기고 밟혀 소외된 분노와 저항들 각각을 엮고 잇고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 그것이 지금과 같은 비상식을 끊는 길이지 않을까?

 

(2009. 9. 중앙대대학원신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