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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1/03
    [AD] 디지털 예술의 미래
    두더지-1
  2. 2006/01/03
    [AD] 네트에서 삶 나누기
    두더지-1
  3. 2006/01/03
    [AfterDigital] 러디즘(Luddism), 사이버공간, 그리고 희망
    두더지-1
  4. 2006/01/03
    디지털 이후 선언문
    두더지-1
  5. 2006/01/03
    [연세대 대학원신문] 디지털 노마디즘의 모순적 지위
    두더지-1
  6. 2006/01/03
    [진보넷] 자유주의 시민운동의 허약증후군
    두더지-1

[AD] 디지털 예술의 미래

AD 칼럼 (2001. 7.) 디지털 예술의 미래 이광석(AD편집인·뉴미디어평론가) 정확히 10년이 지난 두 번째 뉴욕 나들이다. 맨하튼에 들어섰을 때, 발길이 제일 먼저 닿 았던 곳은 휘트니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이다. 휘트니 미술관은 맨하튼 의 센트럴 파크를 왼쪽으로 끼고, 매디슨 거리와 75가가 만나는 지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인근의 수많은 미술관들을 제쳐놓고 휘트니를 향한 건 나름의 이유가 있다. 3월말부터 시작 해 이제 막바지에 이른 디지털 아트 전시를 보기 위함이었다. 디지털 시대의 예술을 주제로 <비트스트림스 Bitstreams>와 <데이터 다이나믹스 Data Dynamics>란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미 언론에도 이번 기획전이 소개된 바도 있었고, 앞서 열렸던 샌프란시스코 현대 미술관의 <010101>전이 워낙 크게 소개된터라, 상대적으로 이번 휘트니 전시는 김빠진 감 이 없지 않다. 실제 샌프란시스코의 기획전만큼 치밀한 준비도 느껴지지 못했고, 전반적 수 준에서도 크게 색다른 맛을 보기는 어려웠다. 소통하는 디지털 전시는 <비트>보다 <데이터>가 보다 친숙하다. <비트>가 기존 예술 장르에 디지털 현상 을 덧붙인 느낌이 든다면, <데이터>는 디지털 안에서 디지털 예술을 논한다. <비트>가 기 존의 디지털에 흡수되는 모양새라면, <데이터>는 디지털을 가지고 관객과 상호 소통한다. <데이터>는 디지털이 갖고있는 상호작용의 묘미를 살림으로써, 관객을 수동적 역할자로 가 두지 않는다. 반면 <비트>는 대상화된 작품전이란 면에서 전혀 과거의 전시 기획을 벗어나 지 못했다. 전시장과 벽에 걸린 작품이 관객에게 내모는 소외감은 <데이터>에도 여전하다. 관객은 항상 대기하는 위치로 떨어지고, '관람'의 수준에 그친다. 적극적인 개입의 여지란 없다. 그저 응시를 바라는 조작된 사물들만 줄지어 기다린다. <데이터>는 디지털 예술 가운데 특히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데이터의 흐름을 보여주기 위 한 인터넷 영상예술을 의도했다. 관객은 데이터의 흐름을 관찰하고 경험하고 거닐 수 있도 록 설계되었다. 물리적 지형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네트워크에 연결된 채 매순간 지속적으로 재변형/생산되는 디지털 영상의 새로운 형식미를 담고 있다. 물론 관객은 그 '역동성'을 조 작하는 주체로 나선다. 특히 관심을 끌었던 위즈니유스키(Maciej Wisniewski)의 작품 '네토 맷(NETOMAT)'은 인터넷의 잠재의식 속으로 이용자가 참여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이 용자가 모니터에 입력하는 단어나 문장에 따라 인터넷은 예기치않은 방식으로 영상, 문자, 음성, 음악, 동화상의 콜라쥬로 응답한다. 이용자는 끊임없이 인터넷과 색다른 대화를 지속 적으로 건네고 받는 것이다. <데이터>에 참여한 작가들은 거의 모두 95년대 이후에 웹 아 트에 두각을 보인 신세대군이다. 그만큼 작가들은 디지털과 함께 호흡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미학적 완성도를 떠나 새로운 디지털 미학의 인터페이스를 구성하는데 상당히 자유 롭게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줬다. 아날로그 디지털 <비트>에서 관객은 어울림이 불가능한 타자(the other)로만 남는다. 아날로그 시대의 수동 적 관찰은 그대로 유지된다. 새로운 예술의 매체 수단으로서 뉴미디어 기법의 응용이 특징 적이긴 하지만 작가와 관객과의 상호소통은 제한되어 있다. 오히려 작품의 추상성이 관객을 멀리 이격시킬 뿐이다. 물론 브레이트식의 '낯설게하기'(estrangement)와는 전혀 무관하다. 애초부터 관객은 작품으로부터 낯선 이방인으로 멀리 서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흥미있는 작품으로는, 먼저 짐 캠벨(Jim Campbell)의 '모호한 도상 5 번'(ambiguous icon #5, 1990)을 들 수 있다. LED의 붉은 스크린에 불명확한 화소로 만들어 진 인간 형상의 아이콘은 빔 벤더스(Wim Wenders)의 '이 세상 끝날 때까지'(Until the End of the World, 1991)에 나오는 꿈의 디지털 영상과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 라짜리니(Robert Lazzarini)의 작품 '해골들'(Skulls, 2000)은 사방의 흰 벽에 걸린 백색의 해골들을 일그러뜨려 관객에게 디지털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착시 현상을 유발한다. 실제 해골을 레이저 스 캐닝하여 만들어진 이 왜곡된 상은 사이버공간의 시각적 본질이 무엇인가를 되묻게 한다. 해독(Jon Haddock)은 실제의 보도 사진을 포토샵으로 재구성하여 마치 '심스'(Sims) 시뮬레 이션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게임의 케릭터 이미지들의 공간처럼 뒤바꾼다. 그의 작품들은 역 사의 있는 현실을 가상의 오락과 뒤섞어놓음으로써 현실과 가상간의 경계를 뒤흔든다. <비트>만의 다른 특이한 점은 주되게 청각적 매체를 이용했다는데 있다. 건축회사 로텍 (LOT/EK)이 설치한 '사운드채널'(Sound-Channel, 2001)은 디지털 시대의 음악을 관객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작업에는 '사이버네틱 작곡'으로 디지털 아 방가르드 음악을 선보인 디제이 스푸키(DJ Spooky, 본명: Paul D. Miller)가 참여하고 있었 다. 디지털의 예술값 부리나케 동전 주차한 곳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번 전시회에서 디지털의 형식적 차용이 아닌 디지털 감각이 제대로 체화된 미적 생산물들이 언제쯤 보편화될 수 있 을까하는 아쉬움이었다. 그러고는, <데이터>와 <비트>를 사이보그의 유형으로 본다면 안드 로이드(Android)와 인공지능(AI)에 빗댈 수 있다는 엉뚱한 생각이 돌연 들었다. 둘 다 기계 와 유기체간의 결합물이지만 합일의 배율이 틀리다. 단순히 보면 안드로이드는 기계에, 인공 지능은 유기체에 가깝다. 안드로이드가 인공지능에 비해 저급한 것은 기계의 유기적 구성도 에서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데이터>는 인공지능과, <비트>는 안드로이드와 닮 아있다. 그만큼 디지털을 새로운 시대의 미적 표현으로 활용하는데 차이가 있다는 얘기다. 디지털로 완전히 새로 쓴 예술의 문법은 작품과 관객의 관계 설정을 분명 달리해야 한다. 이 점에서 <비트>는 디지털을 덧칠한 정도다. 디지털이 지닌 무한히 자유로운 소통성을 고 려한다면 디지털이 단지 형식적 재료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뉴미디어를 예술 창작의 수단으 로 활용한다고 해서 디지털 예술이란 새 명패를 쉽게 달진 못한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데 이터>에서 디지털 예술의 긍정적 미래를 조금이나마 감지한데 있다. <비트스트림스> 참고사이트: http://www.whitney.org/bitstre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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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네트에서 삶 나누기

네트에서 삶 나누기 자본주의 소유권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 인터넷 곳곳에서 번져가고 있다. 네트에서 시작 된 컴퓨터 전문가들의 작은 정보공유 정신이 들불처럼 번지면서, 상혼으로 퇴색된 닷컴의 영역을 내부로부터 침식하고 있다. 네트워크를 통해 네티즌들은 자신이 가지고있는 정보를 교환하는 법을 깨치자마자, 덜익은 정보들을 서로의 노력으로 가공하여 완성시키는 법도 터 득해간다. 이탈리아의 한 연인 예술가는 이같은 네트의 정보공유 정신을 극단으로 밀고 간다. 열린 소스(open source)나 자원의 공개라는 차원으로는 부족해, 이들은 '삶의 공유'(life sharing)를 주장한다. 이들의 홈페이지는 컴퓨터 하드웨어의 내용과 일치한다. 그래서, 이 연인들의 페이지를 접속하여 만나는 메시지는 "이제 당신은 내 컴퓨터 안으로 들어왔다"는 내용이다. 홈페이지 안에는 그들이 깔아놓은 프로그램들뿐만 아니라, 서로 주고받은 은밀한 편지들, 내려받은 파일들이 디렉토리 형식으로 공개되어 있다. 홈에 들어가면 마치 윈도우즈 탐색 창처럼 내용들의 목록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게다 그 목록은 죽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사용자에 의해 갱신된다. 물론 하드웨어 목록의 어느 곳도 접근이 가능하게 열려있다. 대개 우리는 컴퓨터의 내용 열람을 막기위해 외부 접근에 대한 잠금 명령을 설정해두지만, 이들 컴퓨터의 내용은 전적으로 '공유'에 입각한다. 삶의 공유는 이들에게 일종의 예술 프로젝트다. 올 1월 1일에 시작한 이들의 프로젝트는 비록 미약하나마 예술단체의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새로운 예술 장르로 각광받는 네트의 예술이 제도화된 틀 안에 정착하는 최근 경향을 고려하면, 이들의 전위적 시도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음악파일들의 교환을 통해 정보공유 정신을 네티즌 스 스로 확인한 바처럼, '삶의 공유 예술프로젝트'는 냅스터에서 이루어진 MP3 파일 공유에 직 접적 영향을 받았다. 0100101110101101.org란 그들의 홈페이지 주소에서 뭔가를 상징하는 듯한 0과 1의 조합이 신선하다. 잠시만 한눈을 팔고 주소를 입력해도 에러 메시지가 튀어나오는, 암기력의 수준을 조롱하는, 그리고 누군가의 컴퓨터에 접속할 수 있는 암호처럼, 이 16자리의 홈페이지 주소 는 흥미를 끈다. 이들은 주소를 무작위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를 옮기면 '4BAD'란 의미를 갖는다. 닷컴에 대한 해악성을 일컫는 말일까? 이들 예술가는 이미 다른 예술 사이트들을 복제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여 예술계의 못말리는 악동들로 정평이 나 있던 참이어서, 이들 의 주소가 그저 우연만은 아닌 듯 하다. 이들의 페이지에 방문하는 네티즌은 컴퓨터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정보들을 나누는 것뿐만 아니라 하드웨어의 내용을 통해 이들이 디지털화한 삶을 같이 공유하는 방법을 체득해 간 다. 상대가 지닌 음악파일들에서 그의 취향을 읽고, 내려받은 파일들에서 그의 성향과 취미 를 간파할 수 있다. 이는 프라이버시의 논란을 넘어서, 상대에 의해 동의로 이루어지는 내밀 한 삶의 공유에 해당한다. 그러면서 닷컴 외곽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발견하게 된 다. 방문객은 은밀하고 조용히 공유의 정치적 메시지를 스스로 배워나간다. 네트의 전위예술 이 비자본주의적 태도의 중요한 매개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가면 갈수록 인간 뇌의 기능을 컴퓨터 하드에 의탁하면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의 입구에서 마주치는 "지금 당신은 내 컴퓨터에 들어왔다"라는 메시지는 '지금 당신은 내 삶으로 들어왔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컴퓨터 는 현대인의 삶과 뗄 수 없는 일부가 되고 있다. 그런 컴퓨터들이 공개되어 서로 엮이고 서 로를 공유한다면 그 삶들은 보다 풍요로워질 것이다. 마치 처음에는 보잘 것 없이 시작해도 냅스터에 연결된 네티즌들의 점점 증가하는 숫자들이 정보의 공유력을 엄청나게 배가하듯, 삶들의 공유가 하나하나 늘수록 거기서 얻는 윤택함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것이다. 그것이 열린 정보운동이 가진 힘을 실현하는 궁극의 공유정신이 아닐까? (2001. 5월) / 이광석: AD편집인·뉴미디어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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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Digital] 러디즘(Luddism), 사이버공간, 그리고 희망

러디즘(Luddism), 사이버공간, 그리고 희망 이광석: AD편집인·뉴미디어평론가 Kevin Robins, Into the Image: Culture and politics in the field of vision (London: Routledge, 1996) Kevin Robins and Frank Webster, Times of the Technoculture: From the information society to the virtual life (London: Routledge, 1999) 속칭 좌파 사이에서 정보기술이 자본주의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중심적으로 논했던 인 물은 드물다. 기껏해야 인터넷과 정보혁명의 위력이 가시화되고 나서야 그 가치에 주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케빈 로빈스는 이미 80년대초부터 프랭크 웹스터와 함께 이 방면에서 공동 작업을 수행했던 몇 안되는 중요한 인물이다. 이 둘은 공동 집필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정도로, 20년이상 같이 작업을 꾸준히 수행해오고 있다. 버밍엄 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있는 웹스터는 이미 국내에 {정보사회이론Theories of the Information Society(Routledge, 1995)}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사회학의 전통에서 정보사회 이론가들을 재해석했고, 최근에는 정보 시대의 교육에 관심을 두는 학자다. 웹스터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로빈스는 문화지리학 교수로 있다가, 몇 년 전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 커뮤니케이션학과로 옮긴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 족적에서도 묻어 나지만 문화론적 전통에 대한 감각도 뛰어나 현대 정보사회 해석과 관련하여 상당히 재치있 는 입담을 구사하고 있기도 하다. 로빈스가 지금까지 낸 수서너 권들의 저술에 비해 여기 소개할 두 권의 책은 현실 사이버 문화의 논의를 포괄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테크노문화의 시대: 정보 사회에서 가상 삶으로}는 책이 발행되기 이전까지 대중화된 주류 사이버문화론에 대한 광범 위한 비판을 수행하고 있다. 이 책은 비록 웹스터와의 공동 저작이긴 하지만, 3부의 일부 교 육과 관련한 장들을 제외하곤 이제까지 작업과는 달리 거의 로빈스가 주축이 되어 책을 집 필한 것으로 보인다. 책은 기존에 이들이 가졌던 러다이트에 대한 역사적 재해석과 이를 바탕으로 현재 논의되 는 사이버문화의 낙관적 견해에 대한 비판을 폭넓게 벌이고 있다. 이들은 산업혁명 초기 영 국의 기계파괴운동이었던 러디즘(Luddism)이, 일자리에 위협을 느낀 노동자들이 기계를 파 괴했던 무식하고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자본주의의 기술 변화와 재편에 대응한 폭넓은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파악한다.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기술 저항의 중요한 사건으로 러디즘을 평가하고 있다. 사이버문화의 새로운 현실에 이르면, 러디즘은 웹 을 이용한 네트워크 게릴라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지녔다고 본다. 러디즘의 역사적 전통을 통해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사이버정치의 기획을 짜자는 의도다. 러디즘에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읽는다. 로빈스는 정보사회를 주도하는 자본주의 기획이 전방위에 걸쳐 인간을 관리하는 통제 시 스템으로 본다. 일상의 '동원'(mobilization) 체계는 이를 지칭한다. 저자는 동원의 기제를 통해 여가와 노동 시간의 경계가 사라진 새로운 사회화된 노동자와 공장의 비관적 미래를 진 단한다. 또한 이런 현실을 정당화하는 기술 유토피아의 논의들이 갖고있는 신화의 논리를 조목조목 짚고 있다. 그의 단독 저술인 {이미지 속으로: 이미지 영역의 문화와 정치}는 사이 버문화의 신비화된 논리와 폭넓게는 현대 영상문화 전반이 갖고있는 주술적인 면모를 뒤집 는 작업이다. 기술 진보의 신화가 반영된 무의식이 '보이는 것'(the visual)에 삼투되어 현실을 어떻게 왜곡시키는가를 관찰한다. 두 권의 책은 현실에 숨어드는 사이버문화의 우파적 비전에 대한 구체적 비판의 증거물이 다. 물론 로빈스의 시각에는 권력으로부터 움치고 뛸 수도 없는 왜소한 일상 인간의 모습이 철저히 반영되어 있다. 혹자는 이렇게 완벽히 통제된 현실에서 과연 정치적 혹은 대안적 가 능성을 내올 수 있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로빈스의 장점은 정보 현실에 대한 철저한 비관론에서 나온다. 현실에 대한 참담한 해석이 새로운 가능성을 말살 하지 않는다는 역설을 주목하자. 오히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상황을 인정하는 것이 턱 없는 기대감보다는 생산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로빈스의 논의는 끝없는 절망이나 패배로 회 귀하지 않는다. 러디즘의 유산을 통해 새로운 사이버 문화정치의 가능성을 내다본 것처럼, 그에게 희망의 근거는 존재한다. 새로운 기술의 변화가 올 때 이와 결합된 권력의 실체를 이해하는 것, 대응하는 것, 그리고 이를 자신의 것으로 재전유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 의 희망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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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이후 선언문

디지털 이후 선언문 (After Digital Manifestos) BY 이광석 1. 디지털은 총체적 혁명이다. 기계 혁명이 단지 공장굴뚝시대에 국한된 힘이었다면, 디지 털은 새로운 시대에 완전히 새로이 쓰여지는 문법이다. 이제까지 혁명이라 얘기한 것들은 인간 삶의 일부만을 변화시켰을 뿐이다. 디지털은 이 모든 혁명들의 혁명이다. 삶의 결 하나 하나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것, 그것이 디지털이 만들어내는 거대 혁명이다. 과거 체제 적 모순의 반항이 공산주의였다면, 궁극적으로 인간 삶의 모순에 대한 극복의 기획이 디지 털 사회혁명이다. 디지털은 미래 우리 삶의 궁극적인 구상이다. 그 혁명은 과거의 것들을 새로이 디지털의 문법으로 바꾸고, 현재의 것들을 거대한 디지털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하고, '디지털 이 후'(After Digital)를 설계하는 역사의 흐름이다. 그래서, MIT 미디어랩(Media Lab.)의 네그 로폰테(Nichlas Negroponte)가 말한 '디지털이다'(Being Digital)는 과거형이다. 이제는 디지털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디지털이 된 사회의 미래를 우리 삶에 비추어 찬찬히 구상하는 '디지털이다' 이후의 또 다른 문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2. 디지털은 상호 관계이자 만남이다. 디지털이 고립되면, 곧 멍청해진다. 만나지 못하면 디지털은 반쪽일 수밖에 없다. 관계는 상대방을 전제한다. 더불어 상대와의 연결도 전제한 다. 상대방과 연결이 없으면 디지털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디지털을 연결하는 네 트워크가 중요하다. 디지털이 마음껏 흘러다닐 수 있는 통로와 그 디지털이 정박할 수 있는 컴퓨터들이 있다면, 디지털은 무럭무럭 자란다. 디지털이 한 곳에 몰리거나 가고자 하는 상 대에 갈 수 없다면, 디지털에 병이 생기고 장애가 생긴다. 디지털은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힘을 쓸 수 있다. 인간들이 사용하는 모든 멍청한 물건들에 디지털이 나다니는 통로를 만든다면, 그 멍청한 물건들은 분명 상호 관계를 맺고 똑똑해질 것이다. 이러한 관계 를 막는 어떠한 시도들도 반역이다. 디지털이 원하는 상호 만남의 원리를 위배하기 때문이 다. 디지털을 성숙시키는 방법은 장소나 때를 막론하고 서로 연결시키는 노력이다. 상호 관계의 현실태는 지구촌을 가로지르는 인터넷이다. 이는 인간들의 작은 관계망이 거 대화하여 만들어졌고, 지금도 계속해서 그 망은 자율적으로 구성된다. 우리는 그 속을 흐르 는 것을 디지털 정보라 지칭한다. '정보의 바다'는 그 망 속을 끊임없이 흐르는 무수한 정보 의 거대한 물결을 가리킨다. 미세한 관계망이 모여 거대한 정보의 물결을 형성하고, 우리는 그 파도를 타면서 정보를 낚아오는 것이다. 잘못된 관계와 연결은 잘못된 정보의 원인이다. 예컨대, 포르노 사이트의 암초에 좌초하거나 그 파도에 휩쓸리는 근거는 잘못된 관계와 만 남에 이끌릴 경우에 발생한다. 어쨌든 우리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무수한 관계망에 이 끌리고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이는 '디지털 이후' 사회에서 잘 적응해나가야 할 새로운 원칙 이다. 3. 디지털은 자유로움과 속도이다. 디지털에 있어서 자유는 맨 먼저 인간 살덩이로부터의 자유를 전제한다. 인간의 육체는 제약이고 족쇄이다. 초월의 욕망은 인간에게 근원적이다. 시공간의 제약을 극복하여 우리는 네트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다. 물리적 공간 이동 없이 도 붙박힌 자리에서 지구 끝을 배회한다. 프랑스의 도시연구가인 비릴리오(Paul Virilio)도 동의하듯, 지난 시기가 '동적인'(dynamic) 수송 장치들(기차, 오토바이, 자동차, 비행기 등)이 중심이었다면, 현대의 디지털 혁명은 '행동적이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behavioral inertia)의 속도-기계를 창조했다. 가만히 터미널에 고정된 인간에게 속도감은 시각적이지 않다. 디지털 속도감의 정체는 아직까지 시각적인 것보다 인간 상상 속의 자유로움이다. 즉 육체를 이탈하여 시공간을 넘어 다른 이와 접촉하고, 그 곳을 경험하고 있다는 상상력이 속 도감을 불러일으킨다. 디지털의 자유로움과 속도는 육체 이탈을 느끼는 중요한 수단이다. 둘 중에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인간의 디지털 체감은 떨어진다. 어디에서든 접속하기가 어렵 고, 어디든 가기가 힘들고, 변형이 불가능하다면 디지털의 자유로움에 장애가 발생한다. 마 찬가지로 디지털을 실어나르는 통로가 좁거나 없거나 가로막혔을 경우에도 속도감은 사라진 다. 디지털의 자유로움은 그 자체의 성질에서도 드러난다. 디지털은 아톰과 달리 무한히 변형 할 수 있고, 덧붙일 수 있고, 복제 가능하다. 디지털이 상품이 되려면 그 자유로움의 일부를 통제하면 된다. 디지털의 상품화를 원하는 자에게 그 자유로움의 통제권을 주는 것이다. 물 론 그 권한을 공개해버리면, 그 디지털 상품은 상품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한다. 그래서 디 지털의 고유한 자유로움은 개방되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4. 디지털은 평등과 해방이다. 디지털은 권위를 부정한다. 장소에 따라, 시간에 따라 배열 된 모든 사물은 디지털에 이르면 동일하게 취급된다. 설사 멍멍이와 대화를 나누더라도 우 리가 그것이 동물인지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것처럼, 디지털은 모든 사물을 동등하게 대한 다. 디지털은 그 자체로 불평등한 관계를 일소한다. 수직적이고 피라밋 구조는 디지털과 불 편하다. 디지털은 수평적 네트워크를 선호한다. 디지털은 해방이다. 모든 닫혀진 정보들은 디지털에 이르러 해방된다. 무한한 복제의 가능 성은 배고픈 이들을 위해 행한 예수의 기적만큼이나 해방적이다. 첫 작성자가 기록한 디지 털 정보는 의미가 없다. 다른 사용자에 의해 그 정보는 또 다시 변형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디지털 정보 앞에서는 주인이다.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디지털을 꾸미고 바꿀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 앞에서 '저자의 권위'(authorship)를 부르짖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디지털 이후'에는 디지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이를 이용할 수 있는지 여부가 더욱 더 중요하게 부각된다. 그것이 해방의 필요조건이다. 5. 디지털은 새로움과 잡종이다. 우선 디지털은 이제까지 존재했던 과거의 모든 문법을 뒤 집는다는 점에서 새롭다. 산업 시대의 모든 물건들은 디지털 시대에 다시 쓰여진다. 구시대 의 퇴물들은 인공 지능과 디지털 칩을 내장한 채 새롭게 태어난다. 한편 디지털 시대의 사 물들은 여태까지 없었던 새로운 쓰임새를 위해 준비한다. 디지털 정보도 끊임없이 갱신한다. 과거의 것들의 지속적인 업데이트와 버전업은 디지털 시대의 필수 조건이다. 무한히 변형 가능한 속성은 하나의 정보를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새로이 짜게 만든다. 누군가에 의해 변 형된 정보가 새로운 창작 활동이 되는 것이다. 진짜는 없다. 오직 '잡종'(hybrid)과 새로움이 있을 뿐이다. 디지털에서 순종을 찾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디지털의 자유로운 잡종은 새로움의 조건이다. 잡종은 디지털과 디지털의 난잡한 결혼이다. 이를 쉽고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디지털만이 지닌 기술적 특성이다. 결국 디지털은 근원이 없다. 단지 잡종과 혼합이 있을 뿐이다. 잡종이 되기까지 디지털의 관계와 만남이 전제되어야하듯, 새로움의 근거는 디지털간의 조우에서 마련된다. 될 수 있으면 서로 많은 디지털을 '관계하도록 하는 것'(communication)이 '디지털 이후'의 새로움의 실체들을 대할 수 있는 방법이다. 6. 디지털은 나눔과 공유이다. 디지털의 속성은 애초부터 배타적이고 독점적이지 못하다. 독점적 지위는 하나의 빵을 얻기 위해 다수가 경쟁하는 환경에서 나왔다. 디지털은 이를 극 복한다. 한 사람의 이용이 타인의 또 다른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의 정보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어도 자신의 원정보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디지털이 지닌 나 눔과 공유의 혁명적 특징이다. 디지털의 독점은 디지털의 자유로운 본성을 위배한다. 독점과 배타적인 점유는 근본적으로 나눔과 공유의 원리를 거스른다. 디지털은 모든 이들을 이롭게 하기에 '사회적'(societal)이다. 독식은 디지털이 공개되고 공유될 때 깨진다. 즉 디지털의 사회화가 이루어지면, 그 정보의 독식권은 영원히 사라진다. 게다가 네트워크를 타고넘음으로써 그 나눔과 공유의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물리적 경계를 뛰어넘는 디지털의 속성은 나눔과 베품의 정신을 전범위로 확대한다. 더딘 면대면(F2F) 커뮤니케이션을 디지털 네트워크로 연결함으로써, 누구든지 그 공유의 혜택에 한발 다가서게 된다. 7. 디지털은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엄밀히 얘기해서 디지털 그 자체가 아니라, 디지털의 '관계망'들(inter-networks)이 그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그 유기체는 고정적이지 않다. 계속 해서 끊임없이 자란다. 새롭게 태어나는 노드들(nodes)을 자신의 망 안으로 끌어들이고, 스 스로 몸집을 키워간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디지털의 순환은 자율적이고 비선형적이다. 물 론 정체되거나 막히는 지점도 존재한다. 하지만 대체로 그 디지털 흐름을 방해하는 어떤 장 애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생물 유기체 피부막 속으로 흐르는 혈액처럼, 디지털은 그것에 자양분을 공급한다. 살아 숨쉬는 생물처럼, 디지털 덩어리는 끊임없이 꿈틀거린다. 마치 <매트릭스>(Matrix) 영화에 서 터미널 인간들이 기계 탯줄에 온 몸이 매달린 채로 살아가듯, 우리는 네트의 광활한 자 궁에 접속되어 삶을 유지할지도 모른다. '매트릭스' 용어 자체가 '어머니'(mother)와 태초의 '자궁'을 암시하는 것처럼, 디지털 네트워크는 우리가 태어난 자궁과 같은 삶의 모태가 된다. 이 거대한 자궁은 우리 삶의 한가운데에 깊게 뿌리박고 서 있다. 8. 디지털은 그래서 문화요 삶이다. 디지털은 경제, 정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삶의 모든 측면의 변화이기에, 이는 문명의 전환이다. 총체적 변화이다. 문화가 인간 일상의 삶을 지칭 한다면, 디지털은 우리의 거대한 문화이자 삶의 변화다. 전자 상거래와 닷컴기업, 전자정부 가 디지털의 전부가 아니다. 하지만 차가운 은색의 디지털 비전만이 아니라, 디지털 자궁처 럼 친근한 무언가가 존재한다. 보다 근원적으로 디지털 문화의 핵심에는 인간이 있다. 유토피아의 미래에 인간이 빠지면 기형적 기계주의만 남는다. 우리의 '디지털 이후'는 인간과 문화가 중심에 선다. 경제, 정치 등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새로운 디지털 창조물들과 이를 이용하는 휴머니즘적 인간형을 합친 것이 디지털의 문화를 가꾸어나간다. 디지털 문화는 전 영역에서 상호 발달 하는 디지털 혁명의 가치를 고립분산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디지털 문화란 시각을 통해, 우리는 겉보기에 단순히 한 영역에서의 변화로 간주하는 것들이 다른 영역에서의 변화와 긴 밀히 엮여있음을 감지해낼 수 있다. 9. 디지털은 족쇄다. 디지털은 역설이다. 족쇄는 해방과 평등에 배치되지 않는다. 비록 족쇄 가 단지 미래의 가능성일지라도 억압적 미래상을 미리 그려보아야만 한다. SF소설을 쓰는 사이버펑크(cyberpunk) 작가들처럼, 우리는 미래의 암울한 모습에 대한 자화상을 비춰볼 필 요가 있다. 디지털 휴머니즘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한다. '디지털 이후' 는 단지 찬란한 디지털 시대만을 예견하지 않는다. 디지털은 빛과 마찬가지로 그림자를 지 닌다. 그 곳에는 화려하고 역동적인 도시가 존재하지만, 한 쪽 켠에는 축축한 빈민굴의 냄새 도 맡을 수 있다. 디지털이 지닌 혁명성이 누군가에 의해 거세되면, 자연 그것은 현실처럼 폭력과 억압이 공존하는 또 다른 족쇄가 된다. 디지털 혁명성의 찬란함은 더러운 반역의 거울 이미지다. 디 지털은 이처럼 야누스적이다. 디지털 현실과 미래에는 빛과 그림자가 뒤섞여 공존한다. 이렇 듯 디지털의 명암 속에서 인간의 얼굴을 찾아내는 작업이 디지털 휴머니즘의 살아있는 기획 이다. 10. 디지털은 결국 '인간의 얼굴'이다. 디지털 미래는 인간이 고민하고 만들어내는 세상이 다. 디지털 자체만으로 장밋빛 미래는 도래하지 않는다. 디지털의 생생히 살아있음과 새로 움, 해방감과 평등의 느낌은 '인간의 얼굴' 안에서만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땅에 딛고선 현실의 생생한 조건이다. 디지털 혁명과 그 문화를 체감하는 인간의 조건이 빠지면, 미래는 암울한 야만이거나 단지 상상계이기 때문이다. 또한 새로운 디지털 문화의 원형(prototype)은 비즈니스맨에서도 대중 정치가의 논의에서도 찾기 어렵다. 오히려 디지털 문화 현실을 깊게 호흡할 수 있는 '디지털 휴머니스트'가 필요하다. 이는 인간을 중심에 놓고 '디지털 이후'를 사고하는 자들을 지칭한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은빛의 차가운 냉기를 품어내지만 인간 의 얼굴을 한 디지털 전사들이 그들이다. 이제 우리는 '디지털 이후'에 살아갈 '인간의 얼굴' 을 그리는 작업을 시작하는 첫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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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대학원신문] 디지털 노마디즘의 모순적 지위

디지털 노마디즘의 모순적 지위 자유로움은 인간 신체의 해방적 느낌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느낌에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는 이제까지 크게 두 번이다. 우선 19세기초 자본주의는 봉건 권력의 토지에 예속되었던 인간 신체의 자유로움을 약속했다. 인간은 자유 계약을 통해 자신의 신체를 거 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형식적인 신체의 자유는 궁극적으로 통제와 구속의 거 울임이 드러났다. 자유 계약은 자본주의의 생산 관계에 들어가면서 신체 구속의 증명이 되 었다. 대표적으로 테일러 할아버지가 계시한 공장의 과학적 경영은 신체의 자유를 갈기갈기 찢어 시분할 관리하는 생산 미학의 절정이었다. 이제 20세기말 인간 신체의 자유는 디지털 혁명으로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게 되었다. 디 지털의 자유로움은 인간을 끊임없이 부유하게 만들고 있다. 디지털이 선사한 자유로움은 끊 임없는 유목과 이동의 전제가 되었다. 디지털은 공장과 사무실로부터 노동자들을 해방시키 고, 한 장소와 지역의 구심력에 구멍을 내고 있다. 이는 진정한 인간 해방의 징후인가? 아니 면, 디지털 기술이 마련한 노마디즘의 새로운 가능성이 고작해야 19세기에 자본주의가 제시 했던 자유 계약의 새로운 업데이트 버전일 뿐일까? 이 글은 신체 자유의 필요 조건인 노마디즘을 양가적 차원에서 본다. 권력의 노마디즘과 저항의 노마디즘. 전자는 후자를 필연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새로운 디지털을 이 용하여 노마디즘을 기획한다는 점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이다. 이에 반해 후자는 권력의 통제 에 대항한 힘의 생성을 포착한다. 디지털 노마디즘의 긍정적 가치는 물론 후자의 관찰을 통 해 얻을 수 있다. 권력의 노마디즘 새로운 권력의 특성은 디지털 네트워크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 디지털 노마디즘의 생성 조건은 애초에 권력의 아이디어에 가깝다. 과거에는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기 마련이었다. 볼셰비키 들이 쨔르 체제를 뒤집기 위해 크렘린 궁전으로 진격했던 것처럼, 권력에 대항하 는 혁명 그룹들은 대상화된 권력의 실체에 대한 '장악'의 개념을 사용했다. 장악과 진격은 멈춰진 대상을 필요로 한다. 멈춰있는 상태의 권력, 이는 '정주 권력'(sedentary power)이다. 새로운 권력은 자유롭게 이동한다. 네트워크망을 타고 전세계를 누빈다. 권력이 분산되고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쉽게 옮겨 다닌다. 네트워크망을 통해 권력의 공간 확장과 이동이 이루어진다.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란 책에서 마누엘 카스텔은 새로운 공간의 변화를 '장소'(place)에 서 '흐름'(flow)의 전환으로 파악한다. 그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모이고 흩어지 는 동태적인 권력의 '흐름'을 읽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디지털 네 트워크다. 그래서, 새로운 권력의 호칭은 '노마드 권력'이다. 이 새로운 권력이 요구하는 디 지털 노마디즘은 우선 효율성(efficiency)에 근거한다. 자본의 순환을 빛의 속도로 만들고, 적재적소에 자본을 분배하려는 욕구는 기본적으로 효율성의 원칙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어 떤 기업이든 원활한 정보 이동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자본간 경쟁에서 사멸할 수밖에 없다. 둘째는 연장(extension)이다. 다른 말로 연장은 통제력이다. 연장은 쉽게 생각하면 몸통에 달려있는 길게 연결된 보철물과 같다. [매트릭스] 영화에 나오는 신체의 구멍에 연결된 포 트 단자들을 상기하라. 연장은 관리와 통제를 행하는 중심을 갖는다. 그것이 연장인 이유다. 연장은 통제력의 확장/대 욕구에서 생긴다. 디지털 노마드 권력의 새로운 능력은 실시간 통 제력에 있다. 디지털 접속은 전세계를 단일로 묶고, 디지털 연장을 통해 권력을 확장한다. 마지막으로 공간의 소멸(disappearance of space)이다. 디지털 이데올로그들은 공간 압축 능력을 단지 디지털 기술의 가공할 능력을 설명하는데 이용한다. 하지만, 물리적 공간의 탈 출은 있을 수 없는 얘기다. 현실의 공간은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굴레다. 오히려 공간의 소 멸은 단일화된 권력의 장을 시사한다. 오늘날 공항에서 노트북을 챙기고, 셀룰러 폰을 목에 걸고, 개인 디지털 보조장치(PDA)를 손에 들고, 디지털 시계로 전자 메일을 확인하는 사람 들을 쉽게 목도할 수 있다. 현대의 이러한 일상 풍경이 주는 공통점은 접속된 인간의 모습 이다. 자유로운 신체 이동 능력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오히려 끝없이 권력에 접속되고 연결된다. 지구촌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일하는 지구촌 노동자의 미래상은 사이버펑크들만 의 지나친 공상이 아니다. 공간의 소멸은 물리적 공간의 소멸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이 행사 되었던 가시적 거리감의 소멸이다. 공간의 소멸은 권력의 새로운 디지털 장을 전제하고 있 는 것이다. 사이비 노마디즘 이 세 가지 전제들은 권력이 디지털 노마디즘에 집착하는 직접적 이유다. 효율성은 권력 의 생산에, 연장은 권력의 확대에, 공간의 소멸은 권력의 관리에 기여한다. 디지털 노마디즘 이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드러난다면, 이 세 가지는 현실 노마디즘의 본질과 목적을 드러낸 다. 권력의 노마디즘에는 정처없이 떠도는 정보의 흐름은 없다. 권력의 노마디즘은 일정한 방향을 갖고 움직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정형으로 보이지만 이것의 흐름에는 규칙성이 발 견된다. 그 규칙성은 권력의 위계적인 명령에 의해 부과된 것이다. 예컨대, 전세계 노드를 타고 흐르는 정보들 중 고급 정보들의 집적과 관리는 거대 기업본부(HQ)의 중앙 컴퓨터에 서 이루어진다. 평등하고 물활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던 디지털 정보들이 권력의 파장 에 걸리면 위계적이고 불균등하게 갈린다. 노마디즘의 자유로움이 권력에 의해 다시 한번 산산히 조각난다. 역설적으로 권력의 생산, 확대, 관리의 목적된 노마디즘은 진짜 노마디즘이 아니다. 이는 '사이비 노마디즘'(pseudo-nomadism)이다. 디지털의 진정한 가치와 거기서 생성되는 노마디 즘을 철저히 악용하는 구자본주의 생산의 논리다. 권력으로 지칭되는 주원천이 무엇보다 자 본력에 있다고 본다면, 권력이 이용하는 노마디즘의 정체는 쉽게 폭로된다. 부유하는 유목 자체의 자유로운 신체적 가능성보다 유목에 의해 유지되는 체계적 약탈의 역사에 디지털 시 대의 권력은 열광한다. 새로운 권력에게 유목은 자유로운 자본의 이동이다. 물론 고대의 노 마디즘과 다른 점은 디지털이란 수사어다. 비가시적이고 기동력있는 약탈의 노마디즘이 현 대의 권력이 주력하는 바다. 결국 디지털 노마디즘의 수사는 권력의 것이다. 각자의 목 뒷덜미에 포트가 뚫려 망망한 네트의 바다로 사라지는 비운의 미래 인간들처럼, [동물의 왕국]에서 꼬리표나 추적 장치가 붙어 초원으로 사라지는 야생 동물들처럼, 권력이 의도하는 노마디즘은 끊임없이 탈주하려 고 하고 탈주했다고 느끼지만 종국에는 권력의 파장에서 한발자국도 못벗어나는 사이비 노 마딕 현실을 기획하는 일이다. 저항의 노마디즘 진정한 노마드는 모든 권력화된 디지털 영토를 저항의 기폭제로 삼는다. 최근에 이탈리아 자율주의자인 안토니오 네그리와 듀크대학의 영문학 교수인 마이클 하트가 같이 쓴 {제국 Empire}(2000)이란 저술에서 얘기되었던 것처럼, 권력의 외부 혹은 바깥으로 보이는 장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곳에서 저항해야 한다. 그들은 저항의 편재성을 일 컬어 복수자들의 '저항되기'(being-against)로 표현한다. '저항되기'는 일상화된 저항의 표현이다. 저항되기는 노마디즘을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권력이 노마디즘을 재생산의 수단으로 이용하는데 반해, 새로운 디지털 야만인의 무리들은 이를 저항의 방식으로 이해한다.이른바 저항의 노마디즘은 권력이 악용하는 디지털의 노마드적 가치를 재전유한다. 유목적 약탈보다는 자유로운 신체를 전제한 유목적 가치에서 저항은 힘을 얻는다. 디지털 노마디즘은 제도, 관습, 경계, 명령 등으로부터 철저히 멀어지려 한다. 권력의 사이비 노마디즘은 저항의 다층적 연결과 동시다발적인 진지전에 의해 발작을 일으킨다. '저항되기'가 일상적이고 미시적 실천과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듯이, 유목민적 삶을 살아가는 현대의 야만인들은 권력이 쳐놓은 그물 하나하나에서 그 저항과 반대의 고리들을 발견한다. '저항되기'는 체념과 희망의 변증법이다. 체념은 권력의 파장으로부터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는 현실 인식에서 생긴다. 그러나 희망은 체념을 물구나무 세울 때 얻어지는 부정의 결 과다. 체념은 현실을 버리거나 외면하기 보다 희망의 씨앗을 가꾸기 위해 필요하다. 이런 점 에서 21세기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사이비 노마디즘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오히 려 철저히 권력이 지향하는 디지털 노마디즘의 가치를 주목하고, 현실 체념의 극한까지 밀 고갈 필요가 있다. 체념에서 멈추면 오직 나락만이 있을 뿐이다. 연이어 부정의 과정을 수행 해야 한다. '저항되기'는 체념을 극복하는 부정의 능동적 과정이다. 디지털 노마디즘을 가치 화하는 노력은 희망을 실은 '저항되기'에 있다. 현실의 '저항되기'는 희망을 가꾸는 방법이자 사이비 노마디즘을 무력화하는 힘이다. // (연세대 대학원신문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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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넷] 자유주의 시민운동의 허약증후군

자유주의 시민운동의 허약증후군 //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광풍이 인다. 미국은 정체불명의 '선악' 편가르기 전쟁에 빠져, 그 누구의 제지없이, 그 누가 억울하게 당하는지도 모른 채 제멋대로 시퍼런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 뉴욕의 동시다발 테러 이후 이름값하는 거대 언론사들의 보수적 논조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애국주의를 고취하는 내용이 지면과 방송을 장식하는 동안, 눈먼 폭탄에 스러진 아프간 양민들의 떼죽음은 아랑곳없다. 이에 질세라 언론을 쥐락펴락하며 왜곡 정보를 키우려던 국방부의 '영향정보국'의 구상이 억세게 운이 나빴던지 전세계 여론에 밀려 어쩔수없이 문을 닫게 됐다. 각종 인권 침해 소지를 안은 소위 '애국법'과 각종 보안, 감시법안들이 칼춤의 미친 바람을 부채질한다. 엄청난 반동의 흐름에 딴지를 거는 이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 힘은 미약하지만 애국주의의 대중 최면을 막아보려는 자유주의 시민운동단체들과 비판적 지식인들이 존재한 다. 하지만, 이들에서도 상황은 그리 밝지 못하다. 일부 시민운동 활동가들이 미친 칼춤의 동조자로 나서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난 해말 <뉴욕타임스>에 꽤 유명한 한 시민운동가가 글을 기고해 논란이 일었다. 문제가 된 '전자 신원카드(national ID card)를 왜 두려워하나' 란 칼럼에서 그는 잠재적 테러의 사회적 안전망으로 지문 판독용 칩을 내장한 전자 신원카 드의 도입을 뜬금없이 제안했다. 시민의 프라이버시 권리는 상황에 따라 그 기능이 달라져 야 하며, 국가 위기시에 그 권리를 돌볼 여유는 없다며 전자 신원카드 도입의 당위성을 강 변한다. 불과 두어 해 만에 급부상해 인터넷 시민운동단체로 자리잡은 '프라이버시재단'도 매한가 지다. 덴버 소재의 이 재단은 이제까지 디지털 녹화장치 '티보'에 의한 시청자 감청, 웹 페이지에 숨겨진 그림파일 '웹버그'와 전자우편을 통한 인터넷 이용자 감청, 각종 첨단장치에 의한 노동자 감시 등 기업들의 최첨단 정보 수집 능력을 폭로해 언론의 큰 관심을 끌어왔다. 그런데, 이 단체의 영향력을 좌우했던 한 활동가가 안면 판독과 전자 신원카드의 개발을 주 업종으로 삼는 보안업체를 차려 독립한 일이 생겼다. 어이없게도 정세 변화의 흐름을 탄 그 의 '기회주의적' 행보로 프라이버시재단의 장래가 아예 불투명하게 바뀌었다. 이미 애국전의 수행 이전에도 일부 시민운동진영, 특히 정보운동단체들에게서 그 보수적 징후들이 돌출하곤 했다. 예를 들어, '표현의 자유'에 대한 폭넓은 인권 해석을 소비자 권리 로 한정해 인터넷에서 나치물품 경매를 옹호하거나 인터넷상의 인종차별이나 어린이 프라이 버시 보호에 대한 미온적 태도를 보임으로써 전자프런티어재단(EFF) 등의 여러 정보운동단 체들은 이미 자신들의 부실한 정치적 지향들을 하나둘 드러낸 경험이 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에서 특히 이들의 보수적 입지가 드러나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시장 자유주의'의 철학에서 비롯한다. 계급이나 시민 개념보다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 주체 인 소비자를 중심에 두고 그 권리 신장에만 주력해온 시장주의 원칙이 이들 입지의 보수성 을 키워왔다. 그래서, 안건이 사회·정치적 논의로 확대되면 속수무책이거나, 심지어는 보수 집단의 바람잡이로 전락하는 경향이 있다. 자유주의를 소비권 확대로만 재려다보니 보다 큰 시야를 잃고만다. 다시말해, 넘쳐나는 '시장'에 비해 이들의 자유주의에는 '사회'가 빈곤했다. 소비자 권리의 일반화에 급급하면, 자연 일국내 혹은 국가간의 역사적 특수성과 맥락이나 사회적 불균등에서 비롯된 인권 침해 요인들을 간과하는 오류가 생긴다. 나치 옹호론도 그 빗나간 경우다. 소비자 중심주의와 시장 자유주의에 정신이 혼미한데다, 대정부 로비 중심의 활동, 비대화된 조직 구조 등 미 시민운동계의 고질적인 병폐들이 안에서부터 좀먹는데야 어찌 파시즘의 칼춤 장단에 휘둘리지 않고 견디겠는가. (진보넷 원고 200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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