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권리, 게임으로 배워봐”

“권리, 게임으로 배워봐” [한겨레]2002-06-28 01판 13면 1271자 국제·외신 컬럼,논단 기술 발전이 힘센 사욕에 흔들리고, 정보 정책이 소수의 독단에 좌우되고, 변화하는 현실의 주체인 시민이 재갈물린 구경꾼으로 뒷전에 밀려나는 경우들은 디지털사회의 화려한 치장에 가려진 어두운 면면에 해당한다. 특히 새로운 정책·법률·기술 등의 형성 과정에 일반인의 접근과 이해를 어렵게 하고 참여 기회 자체를 전문가주의로 막는 행태가 줄곧 우리 현실을 지배해왔다.얼마전 미국의 온라인 인권 시민단체 두곳이 이런 독단의 디지털 논리에 반발해 인터넷 이용자가 즐기면서 스스로의 권리를 파악하고 배우게끔 도와주는 인터넷 게임을 개발했다. 이들 단체는 게임이란 대중적 매체 형식을 이용해 전문과 추상에 갇힌 논의를 끌어내려 이를 공개하거나 여론을 모으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잘 간파했다. 이른바 신세대용 정치 학습 프로그램을 고안한 셈이다. 작가·법학자·프로그래머·그래픽디자이너 등이 자원해 만든 이 게임의 이름은 ‘캐러벨라(Carabella) 1탄’이다. 캐러벨라라는 이름의 여성이 자신이 좋아하는 록밴드의 음악을 얻기 위해 벌이는 여러 선택 과정이 전체 줄거리를 이룬다. 음반가게에서 구매할 것인지, 온라인 음악 서비스 가입 뒤 파일을 내려받을 것인지, 일대일(P2P) 파일교환을 할 것인지의 선택, 서비스 이용 때 익명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 등 여러 경우의 수가 얽혀 있다. 게임 마지막의 득점은 이용자가 프라이버시와 저작권의 ‘정당한 이용’을 얼마나 잘 알고 이해했나에 따라 달라진다. 음악 시장의 현실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오는 잘못된 선택은 감점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어떻게 이용자 자신이 감시받고, 잠금 기술에 의해 이용이 제한되고, 정당한 이용이 위협받는가를 체험한다. 지루하지 않은 친절한 해설과 지침, 재미난 게임 화면은 이용자의 이해를 돕는 안내 구실을 한다. 시민단체들이 사회의 중요 안건을 대중화하기 위해 온라인 게임의 형식을 활용한 것은 꽤 신선해 보인다. 이들은 게임의 오락 기능을 빌려 딱딱함을 버리고 즐기며 배우는 정치적 학습 도구의 개발 능력을 보여줬다. 지난 몇 년간 인터넷 활동가들이 정당의 선거 전술이나 악덕 기업의 부도덕성을 고발하기 위해 동화상 제작 프로그램인 플래시를 이용해 컴퓨터 화면보호기 등을 표현 매체로 이용했던 것도 비슷한 학습 효과를 얻으려는 목적에서 출발했다. 이 모두는 소수에 의해 전유되고 아래로 소통이 막힌 독점의 논의에 맞서 대중의 판단과 이해를 넓히는 디지털 매체 형식에서 실천적 구실을 찾으려는 한발 앞선 시도로 읽힌다. 이광석 뉴미디어 평론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엠에스의 들통난 속임수

엠에스의 들통난 속임수 [한겨레]2002-06-14 06판 15면 1272자 국제·외신 컬럼,논단 평론가·기자·연구원·의사 등 각 방면 전문가의 권위를 돈으로 매수하거나 고용해 여론을 호도하는 것을 ‘제3자 기법’이라 한다.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는 이제까지 이런 전술을 즐겨 쓴 대표적인 기업으로 꼽힌다. 자연스레 기업의 돈맛에 쉽게 흔들리는 지식 장사치들이 주로 이 거대기업의 주구로 유입된다.물론 기업과 이들은 서로 무관하다는 인상을 풍겨야 하며 서로의 관계를 의심하는 어떤 물음에도 절대 함구하는 것이 철칙이다. 일단 거래가 성사되면 치밀하고 집요하게, 의뢰인이 부탁한 거짓말을 진실처럼 포장하는 것이 요령이다. 이번에 거짓말하려다 들통난 곳은 ‘알렉시스 드 토크빌 연구소’라는 보수 우익의 비영리 연구단체다. 비방 상대로 리눅스 운영 프로그램 등을 개발하며 성장한 ‘오픈소스’ 진영을 골랐다. 토크빌 연구소는 연구 백서를 통해 오픈소스 프로그램이 상업 프로그램에 비해 테러에 대비한 보안에 허점투성이라는 주장을 폈다. 흥미롭게도 백서를 작성한 이 연구소의 부소장은 지난해부터 마이크로소프트의 기업분할 결정을 반대하며 노골적으로 기업 독점 옹호론을 폈던 인물로 알려졌다. 연구소의 이런 입발린 거짓말을 이용한 데는 오픈소스 진영에 대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의 불편한 심기가 크게 작용한 듯하다. 최근 공식석상에서 그가 걸핏하면 연방 정부 부처 곳곳에서 점점 늘고 있는 리눅스 프로그램 이용을 비난한 것도 이와 관련돼 있다. 프로그램 코드의 개방과 협업 과정에 의해 만들어지는 소프트웨어가 일반 상업 소프트웨어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상업용 소프트웨어에서 흔히 관찰되는 “보기만 하고 만지지 마라” 식의 소스코드(프로그램 원본)에 대한 제한적 접근에 비해, 오픈소스 프로그램의 개방성은 의도한 대로 쉽게 변형 가능하고 여럿의 공유와 검증을 거쳐 더 안정적 환경을 제공한다. 토크빌 연구소조차 자신의 홈페이지가 오픈소스 서버인 ‘아파치’에 개설된 것조차 감잡지 못하고 언론을 통해 오픈소스 프로그램에 대해 사실무근의 험담을 늘어놓는 해프닝을 벌였을 때 오픈소스의 진가가 자연스레 드러난 셈이다. 지금까지 기업과 연구소 모두 백서 제작용 자금 지원 여부에 관해 아예 잡아떼고 있지만, 이번 일로 거대 사기업의 여론 공세를 등에 업은 기술·기업 죽이기의 더러운 실체가 조금은 확인됐다. 이 정도 도덕 수준의 기업이라면, 마이크로소프트가 선전해온 후진국 정보화 지원, 문화사업 출자, 청소년 정보 시설 지원 등의 사업도 선의의 동기와는 먼 꿍꿍이속에서 비롯됐다고 믿는 편이 옳을 듯하다. 이광석 뉴미디어 평론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영화 ‘X파일’의 힘

영화 ‘X파일’의 힘 [한겨레]2002-05-31 02판 16면 1312자 국제·외신 컬럼,논단 희뿌연 담배연기에 가린 얼굴없는 권력자들의 귓속말, 아몬드 모양의 기분 나쁘게 생긴 외계인들의 인간 생체 실험과 지구 정복 음모, ‘저 너머의 진실’에 편집증적으로 매달리는 한 연방수사국 수사관. 이쯤 하면 쉽게 떠오르는 방송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크리스 카터가 제작한 〈엑스파일〉이다.1993년 첫 방영된 엑스파일은 얼마 전 9번째 시리즈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9·11 동시다발 테러 이후 미국 정부에 대한 냉소적 표현물의 급격한 퇴조 경향과 더불어 시청률 하락, 주연 배우의 중도 하차 등의 악재로 인해 폭스방송사의 경영진들이 종영 시기를 서둘러 앞당긴 듯하다. 엑스파일이 공상과학 드라마의 전형이자 대중문화의 중요한 아이콘으로 자리잡기까지에는 제작자인 카터의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과 세련된 영상 표현 능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이 세상은 제 궤도를 이탈해 점점 통제가 불가능해져간다. 더이상 윤리나 도덕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현실을 영상에 담으려 했다.” 언젠가 카터가 〈뉴욕타임스〉와 나눈 대화 내용이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추문와 존 케네디 전 대통령 암살 등을 목격한 그에게 현실은 더러운 음모의 소굴이자 거짓 정치가 판치는 세상이다. 자연스레 그의 상상 속에서 현실의 모든 권위에 대한 믿음의 상실과 거기서 생기는 불안은 외계인의 무서운 음모, 악마와 결탁한 정부, 부도덕한 거대 기업이 만들어낸 기형의 괴물 등으로 쉽게 전이됐다. 외계인이건 초국적기업이건 강력한 소수의 음모가 역사를 배후에서 조정한다고 보는 엑스파일의 시각은 ‘음모론’ 맹신의 독을 퍼뜨리기도 했다. 음모론은 이 사회를 선·악의 이분법적 대결 구도로 축소하고 ‘저 너머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무관한 사실까지도 줄줄이 연결해 관련성을 따져든다. 현실 불안의 탈출구로 고안된 음모론이 이렇듯 인간에게 대체 종교인 양 군림하면 사회 현실을 보는 시야는 흐리멍텅해지기 마련이다. 과도한 병리성과 편집증이 현실 세계에 대한 비과학적 분석을 남발하게 부추기는 것이다. 계급·환경·성·기술 등의 정치경제학을 좀처럼 음모론에서 발견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엑스파일은 자신만의 특색 있고 파격적인 영상 언어를 통해 일상적인 삶을 관통하고 초월하는 권력의 가공할 힘을 잘 묘사했고, 다국적기업과 미국 정부의 정책·활동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는 적극성을 보여줬다. 비록 지나친 상상과 편집증이 개입됐지만, 요즘 한 프랑스인이 제기한 ‘미국 군산복합체에 의한 9·11 테러 배후설’과 같은 그럴듯한 음모론이 먹히는 데는 엑스파일이 무시못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광석 뉴미디어 평론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지식 공유의 새로운 구상

지식 공유의 새로운 구상 [한겨레]2002-05-17 02판 10면 1285자 국제·외신 컬럼,논단 '그레이트풀 데드'라는 전설적인 미국의 록밴드가 있다. 전설이 된 것은 음악성을 근간으로 한 기막힌 라이브 공연에 힘입은 바 컸지만, 그 근저엔 음악 팬에게 자신의 곡을 자유롭게 복제하고 공유할 수 있게 독려한 자유정신이 자리잡고 있다. 음반 판매량에 얽매이지 않는 그룹 맴버의 적극적인 팬 서비스가 오히려 수요층을 넓히고 라이브 등 가외 수익을 늘리는 활력소로 작용했다. 여럿이 함께 나눌수록 커진다는 공유의 정신을 자생적으로 체득한 경우다.최근 이 록밴드의 경영 방식과 비슷한 철학을 갖고 인터넷 공간에 개업 예정인 비영리 기업이 있다. 저작권의 기술적 통제를 지칭하는 '코드'란 개념으로 유명한 미국 스탠퍼드대학 법대 교수 로렌스 레식이 직접 사업에 나섰다. 그가 뜻있는 법률 전문가들과 함께 만들었다는 이 벤처기업의 명칭은 '창작공유터'(Creative Commons)다. 이제까지 알려진 바로는 이 회사는 사업 철학을 "좀더 건강한 첨단기술 경제"의 건설에 두고 있다. 시장과 맞선 정보의 완전한 해방이 비현실적 해법이라면, 저작권의 남용 또한 시장을 경직시켜 이를 좀먹는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라는 견해에 서 있다. 둘을 절충한, 시장에 친화적이고 공유의 가치를 도모할 수 있는 지적 재산의 좀더 유연하고 새로운 모델 개발이 필요하다고 본다. 창작공유터는 창작자와 사용자의 권리 회복을 강조한다. 우선 이들은 기업과의 강제 계약관계에 의해 송두리째 빼앗긴 저작물 통제권을 원창작자에게 되돌려주려는 사업을 구상 중이다. 예를 들어 기존 저작권을 대신해, 저자들이 창작물의 사용 방식을 자신과 이용자의 권리에 맞춰 폭넓게 정의하는 라이선스 개발도 그 일환이다. 방법은 원저자가 자신의 권리와 사용자의 창작물 이용 범위를 직접 콘텐츠에 명시하는 것이다. 이 라이선스로 보호받는 저작은 상업적 목적을 제외하곤 누구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더욱 흥미를 끄는 이들의 사업 기획으로 '공유자원보호회'라는 것도 있다. 기업으로부터 오래되고 사라질 프로그램의 소스코드(원본)를 기부받아 공유재로 바꾸는 사업을 담당할 모양이다. 기업의 프로그램 기부를 유도하려면 당연히 세금 감면 등 정부의 보조가 필요하다. 이들의 구상은 정보공유에 기초해 저작권의 폭력에 현실적인 방안을 갖고 대응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이제까지 산발적으로만 움직였던 인터넷의 공유 정신을 조직화한 사업으로 구체화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아무쪼록 이 신생 기업이 시장에 불어대는 '저작권의 외풍'에도 흔들림없이 지식 공유의 터를 개척하는 실험 집단이 되길 기대해본다. 이광석 뉴미디어 평론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저작권 진영의 분열

저작권 진영의 분열 [한겨레]2002-05-03 02판 11면 1355자 국제·외신 컬럼,논단 할리우드와 음반업계로 대표되는 저작권자들의 공세에 진저리치는 이들이 늘기 시작했다. 이는 지난 60여년 동안 열배 이상 강력해진 저작권법의 횡포에 응수하려는 전선이 폭넓게 형성되고 있음을 뜻한다. 저작물의 정당한 사용을 주장하는 이용자뿐만 아니라 컴퓨터.가전 등 실리콘밸리 업계와 콘텐츠 독점 소유자들 간에도 깊은 골이 패고 있다. 저작물 보호 요구에 지친 실리콘밸리는 이제부터라도 기술 혁신의 순수한 원칙을 충실히 따르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한 디지털 전문잡지는 할리우드와 실리콘밸리의 대결 양상을 거구의 미키마우스 인형이 칩 업체 인텔의 마스코트를 무참히 짓밟는 모습으로 형상화하기도 한다. 이제까지 음성.영상을 막론하고 복제를 가능하게 한 실리콘밸리의 새 기술들은 무조건 할리우드와 음반업계의 검열 대상이었다. 당연 실리콘밸리의 기술에 저작권의 강제력이 매번 개입하면서, 18개월마다 마이크로칩의 집적도가 갑절로 늘어난다는 이른바 '무어의 법칙' 또한 온전할 리가 없었다. 미키마우스의 발에 치인 실리콘밸리의 기술들은 죄다 찌그러지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실리콘밸리가 이제까지 동거를 청산하고 저작권 지상론자들과 당분간 별거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은 당연해보인다. 더이상 저작권에 밀렸다간 기술 발전은 고사하고 시장 확보의 폭넓은 기회도 막힐 수 있다는 판단이 섰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4년 전 디지털 음악의 보안코드 개발을 목표로 음반업계와 사이좋게 만들었던 한 유력한 기술 표준화 단체에서도 실리콘밸리는 최근 손을 뗐다. 인터넷을 통해 음악 파일들을 자유롭게 내려받아 이용하고 공유하는 것을 무조건 힘으로 막으려는 무리수는 별 승산이 없다는 점을 배웠다.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은 각종 기술에 저작권 코드를 도입할수록 이용자들의 소비 심리가 크게 위축되며, 오히려 이들의 정당한 사용을 어느 정도 보장할수록 소비의 기폭제로 작용한다는 점을 쉽게 깨우쳤다. 물론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음반업계 진영이 영원히 갈라설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서로의 의존적 관계가 확인되면 언제든 저작권을 보호하는 변형된 기술 장치들이 슬며시 새 상품에 숨어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최근 실리콘밸리마저 저작권 지상론자들에 반기를 드는 것은 위험한 수위에 이른 저작권 남용에 제동이 걸리고 있음을 방증한다. 달리 보면 저작권에 의해 강압된 기술보다는 오히려 능동적 이용을 보장하는 기술적 대안을 고무할수록 상품 시장이 더욱 활성화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얼핏보면 저작물의 해적질을 방조하는 듯한 "뽑아내서 뒤섞어 구워봐"(Rip. Mix. Burn.)란 엠피3플레이어의 광고 문구가 실리콘밸리의 한 유력 기업으로부터 나온 것도 같은 맥락에 근거한다. 이광석 뉴미디어 평론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미디어에 몰아치는 시장의 폭력

미디어에 몰아치는 시장의 폭력 [한겨레]2002-04-19 02판 10면 1296자 국제·외신 컬럼,논단 국가 기간산업의 사영화에 사활을 걸고, 이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을 인정사정 없이 후려치는 정부의 폭력은 시장 맹신이 신경질적으로 표출되는 경우다. 요새 기업가는 물론이고 정책 결정자들에게도 자유방임의 시장이 최고의 우상이 되는 것은 나라 안과 밖이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미국 역시 독점 기업의 놀 자리를 마련하느라 공적 규제장치의 고삐를 슬슬 풀기 시작했다. 새삼스레 시장 자유와 탈규제의 논리를 등에 업은 공중파.유선.위성 방송 등 언론 독점체들이 다시 몸집 불리기에 여념이 없다.이미 2만5천개 이상의 매체가 단 20여개의 언론재벌에 의해 지배되는 시장 현실에서, 최근 불고 있는 탈규제 경향은 그나마 버티던 지역 영세 언론을 완전 청산하는 불길한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언론독점)이란 책에서 벤 바그디키언이 지적하듯, 미국내 언론 대기업은 이제까지 시장 경쟁의 제거, 독점 가격 형성과 더불어 보수 일변도의 목소리를 키우는 등 언론 발전에 근본적인 해악을 끼쳐왔다. 이런 독점 기업에 대한 규제론의 쇠퇴는 고양이 앞에 생선을 던져주는 꼴이 될 것이 분명하다. 공정 경쟁을 위한 최소한의 규제 장치를 시장 '억압'으로 몰아세우고 약육강식의 흡수와 병합 과정을 '창조적 파괴'로 등치하는 독점 옹호의 희귀한 논리가 조지 부시 행정부의 정책에 그대로 묻어난다. 무엇보다도 소유권 제한 등의 독점 규제책을 마련해야 할 연방통신위원회가 오히려 시장내 힘의 논리를 조장하는 선두에 나서고 있다. "시장이 곧 나의 종교"라는 신념을 강조해온 이 기구의 마이클 파월 위원장은 지난해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임명받은 이래 그나마 최소한의 방어막으로 기능하던 각종 규제책마저 없애려 하고 있다. '기업 합병광'이란 별명을 지닌 그에게는 자본 집중이야말로 기업 혁신과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촉매제다. 급기야 지난달말 수도 워싱턴에서는 정보독점을 재생산하는 언론 재벌을 반대하고 연방통신위원회의 시장 논리를 비판하는 관련 시민단체들의 집담회가 크게 열렸다. 이들은 언론 독점 반대, 공공 정책에 기반한 시장 개입의 필요성, 밀실화한 정책 결정의 공개 등을 한 목소리로 요구했다. 채널은 늘어나는데도 한줌의 소유자가 정보를 관리하고 언론 자유를 막는 왜곡된 현실을 더욱 악화시킬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하지만 언론의 자본 집중에 대한 비판 여론에도 시장 맹신자들의 신념에는 일체 흔들림이 없다. 밖에서 들어오는 시장의 규제를 절대 사절하는 이들에겐 당연히 약이 되는 쓴소리도 육두문자로 들리기 마련이다. 경제 정책 입안자들마저 이런 앞뒤 꽉 막힌 시장우상에 사로잡혀 있다. 이광석 뉴미디어 평론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미 국방부 전시 홍보기업

미 국방부 전시 홍보기업 [한겨레]2002-03-08 06판 10면 1241자 국제·외신 컬럼,논단 못내 아쉬웠겠지만 도널드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는 동안 육군의 '제4심리조작반'과 함께 이데올로기 선전의 진지로 쓰였던 이른바 '전략영향국'의 운영을 최근 사실상 백지화했다. 국내외의 부정적 여론에 밀린 고육책이다.이미 폭로된 대로 전략영향국의 폐쇄는 거짓 흑색정보를 여러 매체에 실어 해외 언론공작을 합법적이고 본격적으로 펼치려다 무산된 고약한 경우다. 전략영향국이 제대로 활동도 못하고 문을 닫는다고 해서 미국 군당국이 서운해할 이유는 없다. 어떤 변형된 형태로든 그 비슷한 선전기관이 암약하리란 것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략영향국의 두뇌집단으로 관심을 끌었던 곳은 렌든그룹이라는 한 홍보전문 민간기업이다. 지난해 10월 말부터 국방부의 아랍권 선전전 수행을 도왔던 이 회사는 전략영향국의 존폐 여부와 상관없이 앞으로도 계속 국방부에서 뭔지 모를 일을 수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1981년에 세워진 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대통령선거 홍보를 맡으면서 불쑥 성장한 이 회사는 그동안 80여개 정부기관.기업 등을 대상으로 각종 선전.홍보 공작을 수행해왔다. 이 회사가 올린 국제적인 여론공작의 전과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신뢰를 얻게 한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교통안전 게임쇼 설계, 악명높은 다국적 화학회사인 몬샌토가 유발한 오염 지역들에 대한 지역여론 무마, 미국 국제개발국의 용역을 받아 수행한 스리랑카의 외자 유치 캠페인, 쿠웨이트 정유회사의 의뢰로 거둬낸 노동자 파업 해결 등은 모두 이 회사의 손을 거쳤다. 이 회사의 진가는 미국 국방부 및 중앙정보국과 오랫동안 맺어온 심리전 공작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89년 중미 파나마의 마누엘 노리에가 정권을 축출한 뒤 미국이 후원한 새 정권의 위기 관리, 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뒤 쿠웨이트 정부에 유리한 여론 공작, 걸프전 당시 반후세인 진영인 이라크 국민의회에 대한 후원 캠페인 등을 수행했다. 이들은 라디오.위성방송.인터넷은 물론 만화책.팸플릿.전시물 등 다양한 매체와 공간을 활용해 집요하게 의뢰인의 요구에 맞춰 여론을 움직이는 데 힘을 집중한다. 미국 국방부의 '전시 홍보기업'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니 아프간 공격에서 렌든그룹이 어떤 구실을 했는지는 짐작할 만하다. '눈먼 폭탄'에 죄없이 죽어간 아프간 민간인들의 주검더미 위로 원조식량을 뿌리며, 이를 인도주의의 상징으로 능숙하게 포장하는 것이 이 회사엔 성공적 홍보전략의 첫 단계였을 것이다. 이광석 뉴미디어 평론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이버테러와 피해망상

사이버테러와 피해망상 [한겨레]2002-02-22 05판 10면 1269자 국제·외신 컬럼,논단 프랑스의 철학자 폴 비릴리오는 한때 핵폭탄에 버금가는 기술 재앙으로 '정보폭탄'을 꼽았다. 재화와 자본이 전자 네트워크를 통해 빛의 속도로 이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보폭탄의 파괴력은 걷잡을 수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요즘은 정보폭탄에 대한 경고는 한물 가고 '사이버테러'란 말이 한참 인기를 누리고 있는 듯하다.미국 관리들은 요즘 "오사마 빈 라덴이 총부리로 미국을 위협한다면 그 손자는 마우스 클릭으로 덤빌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부터 사이버테러 권위자로 명성이 높았던 리처드 클라크 백악관 컴퓨터보안담당 보좌관과 이른바 '애국법' 제정을 주도하고 있는 존 애슈크로포트 법무장관은 사이버테러의 위기감을 선전하기 바쁘다. 연방정부는 올해 컴퓨터 보안에 25억달러(3조2천여억원)를, 앞으로 5년 동안 추진될 사이버보안의 연구.개발에는 45억달러(5조8천여억원)를 쏟아붓기로 결정한 상태다. 컴퓨터 보안관련 법도 하나둘씩 만들어지고 있다. 얼마 전 하원을 통과한 '사이버보안 연구개발법'은 컴퓨터 보안.감시 기술을 개발하는 대학과 연구소에 자금지원을 제도화한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내 컴퓨터관련 과학자와 기술자들의 최대 모임인 '전기전자기술자협회'(IEEE) 회원들이 이 법의 제정을 적극적으로 로비했다. 의회에 계류 중인 '사이버보안 진흥법'은 컴퓨터관련 범죄자의 형량을 최고 종신형까지 늘리고, 인터넷서비스 공급업자들과 경찰이 원활하게 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미국 법무부는 산하 과학기술국의 조직을 대대적으로 확대.개편하고 있다. 이 부서는 사이버테러를 무력화할 수 있는 각종 방안을 마련하는 독립 부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연방정부의 거의 모든 부서들이 사이버테러에 대처하기 위해 예산을 미리 확보하거나 기구를 앞다퉈 신설하고 있는 셈이다. 클라크 보좌관이 염불처럼 외우고 있는 '디지털 진주만기습'이 코앞에 온 듯하다. 걱정되는 점은 가상공간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반전.반자본의 정치적 저항을 사이버테러 집단으로 뭉뚱그려 취급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대표적인 군사연구기관인 랜드연구소는 최근 정규군이 벌이는 가상공간의 전쟁을 '사이버전'이라고 이름지으면서 테러범.마피아.해커들이 벌이는 저강도 인터넷전쟁을 '네트전'이라고 정의했는데, 인터넷 사회운동조직도 이 네트전을 일으킬 수 있는 부류로 분류해놓고 있다. 선의의 사회운동 단체들이 돌연 테러집단으로 대접받을 수도 있는 셈이다. "지나친 피해망상은 사물에 대한 분별력을 떨어뜨린다." 이광석 뉴미디어 평론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미 중앙정보국의 벤처투자

미 중앙정보국의 벤처투자 [한겨레]2002-02-08 05판 14면 1347자 국제·외신 컬럼,논단 9.11 미국 동시다발 테러 이후 민간 벤처자본들의 투자 성향이 확연히 달라졌다. 벤처 투자 위축에도 불구하고 보안 관련 닷컴 업종들은 전혀 마르지 않는 자금줄을 쥐고 있다. 더 큰 수혜자도 있다. 록히드나 보잉 등의 전통적인 군수업체들은 '테러와의 전쟁'으로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늘어가는 국방예산 가운데 군사기술 관련 연구개발비의 대부분도 이들 업체의 몫으로 돌아간다. 수익이 있는 곳이면 가리지 않고 흐르는 민간의 벤처 자본과 정부의 뭉칫돈이 기술 발전의 경로를 군사정보화하고 있는 것이다.이런 흐름 가운데 국방 연구개발비의 일부로 운영되는 인큐텔이라는 중앙정보국 산하 조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방정부의 예산 지원을 받으며 1999년 2월에 사업을 시작한 인큐텔은 중앙정보국이 원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닷컴 기업에 출자해 지원하는 벤처 투자회사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 이 회사는 수십억달러의 종잣돈을 민간 신생 기술 개발 기업에 나눠주고 단기간에 원하는 기술을 거둬들인다. 실리콘밸리의 벤처 생리를 본떠 만든 '신군산복합체' 모델에 가깝다. 동시다발 테러 이후 인큐텔의위상이 확실히 더 높아진 것은 물론 앞으로 기술 개발의 군사화와 관련해 새로운 사업 모델로 떠오를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인큐텔은 군비 지출에서 흔히 거론되는 거대 군수업체와 정부의 검은 밀약 등 음모론을 불식시키면서 유망 닷컴 기업에 대한 소규모 공개 투자를 특징으로 하고, 중앙정보국의 비밀스런 이미지와 전혀 무관한 젊은 닷컴 경영자의 영입과 독립법인화 등 개방형 조직 모델을 지향한다. 투자 종목이 군사정보화 기술에 편향된 점을 제외하곤 일반 벤처 투자자와 같은 선명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1500여개 기업의 투자 자문을 접수해 지금까지 23개 정도의 연구개발을 수행하고 일부 기술은 중앙정보국에서 활용될 정도니 단기간에 쾌속 성장한 셈이다. 투자 영역은 주로 정보수집.보안.감시 관련 기술이다. 개발된 기술은 바로 이용되지 않고 중앙정보국 산하 6개 독립 위원회의 136단계에 이르는 검증을 거친다고 한다. 인큐텔의 벤처 투자 금액이 아직까지 미약하지만 닷컴 기술 개발업체를 쉽게 끌어들이는 힘은 이런 다단계 기술 검증 기회와 정부 관련 기관 등의 추가 구매 시장 확보에 대한 보장 때문이다. 육군도 이런 벤처 투자사 창업에 나선다고 하니 인큐텔이 군비 지출의 유연성을 기르는 촉매제가 되는 셈이다. 세월이 바뀌어 국방비로 벤처 사업을 벌이는 것을 뭐라 시비걸지 않더라도 문제는 최근의 시류를 타고 형성되는 기술 시장의 기형적 발전에 있다. 군사정보화를 위해 지칠 줄 모르고 흘러나오는 자금들이 기술 개발의 향방을 미리 선점한다면 당연히 그 미래는 온전하기 어렵다. 이광석 뉴미디어 평론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무소불위의 할리우드

무소불위의 할리우드 [한겨레]2002-01-25 05판 07면 1246자 국제·외신 컬럼,논단 한 러시아 청년이 지난해 여름 컴퓨터 보안관련 기술을 발표하기 위해 미국 땅을 밟자마자 구속된 일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노르웨이에서 한 청년이 검찰에 의해 기소됐다. 멀리 떨어진 북유럽 나라 검찰의 기소와 미국은 무슨 상관이 있을까.진상은 이렇다. 청년의 이름은 욘 요한센(18)이다. 노르웨이에선 '디브이디-욘'으로 통한다. 그는 3년 전 15살의 나이에 오픈소스 운영체제인 리눅스에서 작동할 수 있는 디브이디 프로그램을 개발해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초 국가에서 주는 사회공헌상까지 받을 정도로 자라나는 컴퓨터 세대의 우상이었다. 문제는 그가 개발한 프로그램이 미국 할리우드에 커다란 위협 요인이 되면서 발생했다. 이미 알려진 대로 그의 프로그램은 오픈소스 원칙에 따라 디브이디의 보안 장벽을 무력화해 어디서든 재생과 복제가 가능하게 설계됐다. 그의 프로그램은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전파됐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 영화협회는 그 프로그램을 홈페이지에 연결시킨 본보기로 한 해커 잡지의 편집인을 기소해 지난해 두 차례 승소한 바 있다. 당시 재판에 피고쪽 진술자로 참가했던 요한센에 대해 할리우드는 극심한 반감을 품었을 것이다. 이후 그에 대한 검찰의 기소를 이끌어내기 위해 할리우드는 여러 해에 걸쳐 로비 공세를 벌이고 국제적 압력을 가했다. 노르웨이 검찰의 기소는 할리우드의 이해를 대변하는 미국 '디브이디복제방지협회'(DVD-CCA)라는 단체와 '노르웨이영화협회'의 끈질긴 노력의 산물이다. 한 시민단체는 이에 대한 증거물로 두 단체가 노르웨이 검찰에 보낸 편지를 공개했다. 이 편지는 요한센은 물론이고 그의 아버지와 관련자 모두를 사유재산권과 저작권 침해 혐의로 옭아넣을 작정으로 위반 항목을 조목조목 따져 적고 있다. 소프트웨어 업체를 운영하는 그의 아버지는 홈페이지에 올린 아들의 프로그램으로 인해 봉변을 당할 뻔하였지만 다행히 검찰의 기소를 피한 상태다. 지금까지 미국 저작권의 위세는 국제 저작권법이나 국제기구, 경제.외교 채널을 통한 국제협상 수준에 그치는 것으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할리우드의 힘이 다른 나라의 사법권에 압력을 행사해 한 청년을 구속시킬 정도로 강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할리우드에 거슬리면 한 나라의 주권마저도 무력화할 수 있는 것이다. 정보의 정당한 이용을 위해 프로그램을 개발했던 한 순진한 북유럽 청년을 단숨에 법정에 세우는 할리우드 자본의 가공할 능력과 끝없는 욕망에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다. 이광석 뉴미디어 평론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