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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중소 지역 언론의 신장론이 득세

중소 지역 언론의 신장론이 득세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NBC, CNN, 폭스 등 미국의 주요 거대 매체들은 부시 대통령의 연두교서가 있었던 시점 에 즈음하여 모든 이라크 반전 광고를 전면 중단했다. 한참 몰아쳐도 부족할 판에 애국전을 흐리는 시민단체들의 광고들은 안팔아도 그만이라는 강짜를 놓는다. 말하기 싫은 것은 끝까 지 침묵하는 것도 거대 매체들의 속성이다. 미 연방통신위원회(FCC)가 독점 언론들의 살을 더욱 늘려줄 태세를 취하자 이해 당사자인 언론들은 정확한 사실을 알리는데 침묵한다. 대 중이 몰라야 그들에겐 득이다. 원치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자며 미국내 반한 감정을 주도했던 <뉴욕타임스>의 보 수 평론가 윌리엄 새파이어조차 요사이 언론들의 독점의 폐해를 강도높게 비난할 정도니, 그 상태가 정말 심각하긴 한 모양이다. 일례로, 1200여개의 방송국을 소유한 클리어채널 (Clear Channel)과 같은 언론 괴물이 내보내는 방송의 질을 따져보자. 지역 사정과는 전혀 무관한 중앙의 프로그램들이 비용 절감을 핑계로 계열사에 무더기로 복제되어 분산된다. 저 질 상업화를 부추키는 바이러스가 따로 없었다. 지난 달 언론 독점의 해악을 밝히는 대규모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언론발전기획'(Project for Excellence in Journalism)이라는 이름을 건 이 연구 단체는 98년부터 시작해 5년간 전 미 방송 시장의 25%을 대상으로 자본 규모에 따라 기업군을 넷으로 나눠 33000개 이상의 뉴스를 정밀 비교 분석했다. 애초에 시청자들의 뉴스 프로그램 선호도 등을 보려했던 이 기획은 근래 FCC의 지나칠 정도의 언론 독점에 대한 옹호가 미워 연구 방향을 전격 선회했다고 밝히고 있다. 뭐든 클수록 낫고 다양성이 증가한다는 FCC 위원장 마이클 파월의 감언 이 정말 근거가 있는지 따져보자는 심사였다. 20여 페이지로 정리된 이 언론 보고서를 읽고나면 파월의 독점 옹호론이 정말 새빨간 거 짓말 같다. 보고서 결과는 중소 규모의 지역 방송국이 독점 언론보다 그 지역에 양질의 뉴 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결국 자본 규모에 따라 지역 방송 뉴스의 내용이나 공익적 관심을 드러내는데 차이가 있더라는 설명이다. 전체 연구 결과에서 신문이 방송을 소유하는 등 교 차소유의 효과를 긍정하는 결과가 일부 나오기는 했지만, 소유의 집중이 지역 뉴스의 질을 갉아먹는 해악임이 충분히 입증됐다. 이들 보고서에 중소 규모의 언론 신장론과 시장 독과 점에 대한 규제론의 이중 메시지가 잘 담겨 있는 것이다. 언론계에 종사하는 현직 기자들이 언론계를 진단하며 쓴 책 <뉴스의 뉴스: 위기의 미 언 론>에서 보면 '나쁜 언론'의 세 가지 특징으로 알려야 할 사실을 알리지 않거나 일부러 잘 못 알리거나 피상적으로 알리는 태도를 꼽고 있다. 가만 보면 이 셋을 두루 겸비한 위험하 고 나쁜 언론은 상업적 이윤에 눈먼 독점업체들이다. 이렇듯 사방에서 독점 언론의 폐해에 대한 반대 증거와 여론이 늘고 있는데도 이를 관장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FCC는 아랑곳없 다. 이번 보고서가 시민단체들의 언론 독과점 반대의 유용한 증거가 되겠지만, 거대 언론들 과 이미 한통속이 된 FCC 관료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자극이 될 진 미지수다. (미디어오늘 2002.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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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시청률 싸움에 생기는 새로운 전쟁

시청률 싸움에 생기는 새로운 전쟁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이라크의 핵사찰도 못미더운 미국은 예정대로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이제는 동맹국 들간 합의 기제도 귀찮다 싶어 독불장군처럼 앞만 보고 갈 태세다. 임박한 전쟁의 기운이 잔뜩 감돈다. 뉴스에선 이라크와의 전쟁이 벌써 시작됐다. 특히 케이블 텔레비전의 뉴스 전문 방송사들 은 냉정을 잃은지 오래다. 경솔하게 이라크 결전의 카운트다운을 세는 일은 보통이다. MSNBC사는 무기 사찰 보고서가 유엔에 제출되는 이달 27일을 아예 전쟁 개시일로 잡고 방송 화면에서 전쟁 날짜를 꼽는다. 각종 자극적 음향과 군대 리듬을 배경에 넣고 연일 전 쟁 속보같지 않은 속보들로 시청자 주위를 끌며 분위기를 다잡는다. 9-11 동시다발 테러 이후 보여줬던 언론의 극우 애국주의가 요즘 또 다시 본연의 상업주 의로 외장을 바꾸고 있다. 애국주의의 싸구려 약발로 버티던 전쟁 촉발의 기운이 점차 잦아 들자 시청자와 광고를 위해 벌이는 뉴스사간 진흙탕 싸움이 자연스레 전쟁을 예정된 사건으 로 만들고 있다. 그러고보면 광고 매출에 목숨 거는 미 언론사 사주들이 테러 사건 후 희생 자를 기리기 위해 온종일 광고를 전폐했던 것은 시장 자본주의 역사상 앞으로도 정말 보기 드문 진풍경으로 남을 일이었던 셈이다. CNN은 폭스 뉴스에 빼앗긴 시청률 탈환을 위해 이라크전에 사생을 걸었다. 다가올 전쟁 보도에 이미 3,500만 달러를 추가 예산 편성하고 일백여명의 기자들이 이라크 내외에 특파 될 모양이다. 전쟁이 없으면 진짜 큰일날 판이다. 무엇보다 지난 해 1억 3천만 달러의 광고 수입과 1백만 시청 가구를 넘어선 폭스 뉴스는 시청률 경쟁 게임의 진수를 보여준다. 한 자 유주의 언론인조차 폭스 뉴스를 "선전공장"이라 비꼴 정도면 그 수준을 대강 짐작할 만하 다. 지난 해부터 <뉴욕타임스> 신문 전면광고를 빌린 폭스 뉴스의 CNN 공격이 이 달 들어 점입가경이다. 폭스는 지난 해 여름 빈 라덴 녹화 테이프를 손에 쥔 CNN에 대한 질투성 비 난에 이어 이번엔 CNN 간부의 보도 경쟁 발언에 발끈해 반격에 나섰다. 경쟁사를 흠집내며 자사 뉴스의 '공평무사'를 부각시키는 요령을 썼다. "우리는 알리고 판단은 국민이 한다"는 폭스 뉴스의 오묘한 슬로건에 기대어 폭스는 '신뢰'요 CNN은 '술수'의 대명사라 주장한다. 어찌됐건 시청률 1위를 뉴스 신뢰지수 1위로 둔갑시키는 폭스나, 특종이나 기사 독점에 혈 안인 CNN이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평균 뉴스 시청자보다 케이블 뉴스 시청자의 영향력을 높게 사 고 있다. 정책 결정자, 언론인 등 사회의 유력 계층이 주시청 대상이란 설명이다. 3천만명에 달하는 공중파 방송 뉴스의 시청자수에 견주어 250만명이 그리 녹녹치 않은 숫자임을 짐작 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도 충분한 매체 위력을 지닌 뉴스 채널 3사가 언론의 공적 책 임을 저버리고 이라크전을 기정 사실화해 피의 전쟁을 보려 안달이니 실로 위험천만이다. 시청률 싸움에 살육전 유치 경쟁이란 정신나간 파국에 이른 꼴이다. (미디어오늘 2003.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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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로 가는길] 네티즌들의 새로운 행보

네티즌들의 새로운 행보 인터넷은 가능성으로만 존재하고 흩어져있던 저항의 힘들을 모으거나 새로운 가치를 담은 조직체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사이버공간에는 현실의 시민운동 단체들 이 그 곳에 사이트를 만들어 네티즌을 규합할 뿐만 아니라, 작은 목소리로 출발했으나 서서 히 커다란 공진을 일으키며 성장하는 그룹도 존재한다. 흔히 현실의 시민운동 단체들은 운동의 목표나 대의에 의해서 조직의 성격이 결정되는 경 향이 컸다. 그 구성원의 특성은 장기적 비전에 의해 움직이고, 조직의 실천은 대의나 목적에 의해 이끌리기 십상이었다. 이렇듯 경화된 조직 안에서는 구성원의 개별 가치들은 대의에 의해 쉬 억눌리고 상처받는다. 하지만, 네트에서 활동하는 새로운 저항 단위들은 개별적 취 향이나 가치에 의해 모이고 사안별로 움직이는데 강한 친화력을 갖는다. 그만큼 움직임 자 체가 상당히 자생적이고 유동적으로 변했다. 그 흐름을 바꾸는데 인터넷 기술은 커다란 매 개체가 되었다. 이 글은 인터넷의 기술적 특성을 기반으로하여 활동하고 있는 미국내 네티즌들의 관찰 기 록이다. 현재 쟁점화하는 몇몇 사안을 통해, 어떤 단체나 개인들이 새롭게 네티즌의 파워를 키우고 있는지 그 흐름을 한 번 짚어보려 한다. 기업에 대항하는 개별 프로그래머들 인터넷의 가장 민감하고 거대한 화두는 단연 정보 공유의 열망과 관련한 움직임이다. 이 미 음악 공유프로그램인 냅스터(Napster)의 서비스 중지 판결로, 네티즌들의 격한 반발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냅스터를 지지하는 네티즌들은 네트를 통해 자발적으로 음반산업계에 대 항하여 씨디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했고, 재판의 결과에 불복한 냅스터는 '보이콧 주간'을 선 포하기도 했다. "냅스터는 기업이 아니라 일종의 운동이다". 한 인터뷰에서 그누텔라(Gnutella)의 프로그 램 개발자인 지니 칸(Gene Kan)이 언급한 대목이다. 그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보아왔던 거 대 조직체로 운동을 바라보는 상식을 깨고 있다. 최근 유력한 언론의 인터뷰나 토론 자리에 이 나이 어린 프로그래머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프트웨어 개 발자가 이제는 운동의 뱅가드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분권화한 기술에 기반한 네티즌들의 정보 열망은 냅스터뿐만 아니라 그누텔라, 프리네트 (Freenet), 스카우어(Scour) 등의 후속 프로그램들로 번져나가고 있다. 개별화된 해커들의 정보 공유 움직임도 주목할 만하다. 이미 소송에 들어간 디브이디(DVD) 암호 해독용 프로 그램인 DECSS의 배포와 관련해서, 미영화협회에 반대한 해커 잡지 2600 성원들과 전자프 런티어재단(EFF)의 공동 움직임은 사회적 여론을 조성하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예들은 애초 거창한 목표나 상업적 이익과 무관했던 프로그램들이 네티즌들 사이 에서 확산되자 개별 프로그래머나 해커가 자발적으로 세력화하는 경우다. 기본적으로는 오 픈소스의 리눅스(Linux) 정신에 입각한 정보공유 운동도 각 개별 프로그래머들의 의식에 상 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 향후 인터넷 문화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이러한 개별 프로그래머 들의 의식적 흐름이 프로그램 개발 시점부터 전략적 운동으로 취해질 확률이 높아졌다. 한 편 특징적인 것은 개인이 개발한 프로그램이 법정 싸움으로 비화될 때에, 시민자유연맹 (ACLU)이나 EFF 등 관련 시민단체들의 전문화된 변호사들이 개입하여 여론을 이끄는 역 할을 겸하고 있다는데 있다. 시민단체와의 연대가 무력한 네티즌들의 힘을 상승시키는 중요 한 기법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정당한 이용'과 소비자 운동 인터넷에서 소비자 권리를 되찾는 움직임도 중요한 흐름이다. 앞서 프로그래머의 예들과 마찬가지로 논쟁의 출발은 근본적으로 지적 재산권을 옹호하려는 입장과 소비자의 '정당한 이용'(fair use)의 권리를 지키려는 입장이다. 후자의 입장은 소비자가 화폐를 가지고 구매한 정보를 비상업적인 동기에서 이용하는 것은 디지털 시대의 정보 복지에 필수적이라는 주장 이다. 반대로 전자는 이러한 이용이 상업적 정보의 미래 가치를 위협하고 있다고 본다. 어쨌 든 소비자 권리는 미국의 대다수 시민 운동단체들의 공통 관심사다. 일례로, 마이크로소프트 의 반독점 판정의 핵심 근거에는 소비자 권리 침해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 즉 소비자의 권 리 침해가 명백한 독점 행위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만큼 미국 사회에서는 전반적인 시민권에 대한 논쟁보다는 우선적으로 소비자의 권리에 민감함을 알 수 있다. 디지털 사회의 기술적 쟁점들과 관련하여 새로운 단체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 중 주목할 만한 것은 홈레코딩권리연합(HRRC)이다. 이 단체는 가정에서 쉽게 행해지는 레코딩의 권리 를 보호하기 위해 생겨났다. 이들은 디지털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원하는 시간대에 레코딩을 행하는 시간 이동(time shift)과 다른 매체에 옮겨 담을 수 있는 공간 이동(space shift)의 정당한 이용권을 지속적으로 보장받길 원한다. 최근 이들은 ACLU, EFF와 함께 HDTV, 케이블 셋탑박스, VCR 등에 레코딩 방지용 암호화 기술을 도입하려는 영화협회의 기도에 반발하면서 의회 청원서나 인터넷의 집단 시위를 유도하고 있다. 인터넷 검열에 대한 저항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미 수정헌법은 거의 모든 시민단체들이 법정 변호에서 의지하는 핵 심 논리다. 필터의 잣대를 들이대거나 정보의 등급을 매겨 처음부터 접속을 막으려는 동기 는 인터넷에서도 잠재한다. 성적인 내용이나 매춘, 아동학대, 마약 등으로부터 네트를 차단 하려는 의지를 무리하게 적용하면 검열의 수단으로 뒤바뀌기 십상이다. 이미 그러한 위험성 을 지적하면서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한 그룹들이 존재한다. 우선 센서웨어 프로젝트(Censorware project)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네트에서 자유롭게 다 운받아 설치할 수 있는 필터링 프로그램들의 위험성에 주목한다. '센서웨어'는 그 의미상 필 터링 프로그램들을 검열 소프트웨어로 보고 있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으로, 각 공공 기관이나 기업, 정보제공업자가 사용하는 필터링 프로그램들이 애초의 도덕적 의지 와는 달리 검열의 도구로 확대되고 있다고 본다. 필터링 프로그램들의 적용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유용한 사이트들에 대한 네티즌들의 접근이 박탈당하고 있다는 얘기다. 비슷한 목적 을 가진 사이트로는 피스파이어(Peacefire)인데, 특히 이 사이트는 각 필터링 소프트웨어들 이 어떤 오류들을 지녔는지 인터넷을 통해 자세한 사례를 공개하고 있다. 이 두 단체의 일 치된 의견은 이미 검열의 수위가 기술적 수단에 의한 자동적 검열을 적용하는 단계로 접어 들고 있다는데 있다. 디지털 시대의 인권단체로 출발한 디지털자유네트워크(DFN)의 최근 반필터링 경연대회도 이러한 필터링의 사전검열에 대한 냉소를 연출한 좋은 사례다. 이 특별 행사에는 국제적으 로 수많은 네티즌들이 참여하여 어처구니없는 검열의 사례들을 공개했다. 한편 ACLU는 공 공 교육기관에서 검열되는 교재들을 연례 보고서 형식으로 인터넷이나 가판에 배포하는 활 동도 벌이고 있다. 이는 일상에서 행해지고 있는 검열들을 공론화하는 참신한 아이디어로 평가받고 있다. 전자눈으로부터 프라이버시 지키기 이른바 '전자눈'(electronic eye)으로 비유되는 디지털 감시 기술의 개인 정보 수집 능력은 무섭게 커져가고 있다. 특히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위협받는 것은 사법기관이나 기업들의 디지털 기술력에 의지한 개인 정보들의 수집과 유용이다. 한창 논란 중에 있는 미 FBI의 인 터넷 도청 장치인 카니보어(Carnivore)와 닷컴기업들의 스파이웨어(spyware)나 상업적 목적 의 소비자 정보 거래로 인해, 프라이버시 문제가 인터넷의 커다란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네티즌의 행동 반경을 훔쳐볼 수 있는 쿠키(cookies) 등 각종 인터 넷 기법들도 문제다. 각종 정치적 목적의 불법 도청과 함께 상업적 의도로 이루어지는 개인 정보의 수집은 프라이버시의 영역을 개인 사생활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 로 보게끔 하고 있다. 이미 네트에서는 사회적 책임을 생각하는 컴퓨터 전문가들의 모임(CPSR), 민주주의기술 센터(CDT), EFF, ACLU 등이 관련 사안에 따라, 법적 투쟁, 청원서, 대규모 학술대회 등의 전통적 방법과 국회의원들에게 일시에 전자우편을 보내거나 가상의 연좌농성 시위 등의 새 로운 저항 방식들을 다양하게 벌이고 있다. 인터넷에서 프라이버시 문제만을 다루는 전문 단체로는, 특히 미정부의 기금으로 운영되는 워싱턴 소재 전자 프라이버시 정보센터(EPIC) 와 영국 런던에 소재하고 워싱턴에 지부를 가진 프라이버시 인터내셔널(PI)를 들 수 있다. 이 두 시민단체는 전세계 인터넷의 프라이버시 침해에 관련한 사례들을 알리고 있다. 특히 이들이 함께 매년 발간하는 "프라이버시와 인권보고서"는 프라이버시 침해의 심각성을 잘 정리하고 있다. 네트 운동의 새로운 경향 필자의 전자우편 주소만 보아도 알겠지만, 이제 힘없는 개인도 도메인을 얻어 단돈 몇 만 원에 평생 웹호스팅을 받으면서 사이트를 운영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이를 통해 자신의 사이트에서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을 규합하여 논의의 장을 만들고, 이를 저항과 대안의 도 구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분명 커졌다. 문제는 네티즌들이 규합할 때 가질 수 있는 전망의 지속성과 조직의 긴밀도다. 사안에 따 라 흩어지고 모이는 조직은 과거의 시민운동 단위들과 달리 그 지속성과 힘의 결속력이 떨 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도 네트에는 새로운 이슈를 가지고 사이트를 개설하려는 많은 개별 네티즌과 그룹들이 존재한다. 이 중 일부는 대중적인 동의를 얻어 급속하게 성장하기 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거의 어떤 힘도 반영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도 존재한다. 미국의 최근 네티즌의 경향을 관찰해본 결과는, 특별히 소수 개별화된 운동이 점차 두드 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이나 소수의 인원이 모여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사이트를 운영 하여 특정 사안에 반향을 일으키거나 목적한 바를 이루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이 글에 서 검토되지못한 각종 아방가르드적 지향을 담고 활동하는 소규모 그룹의 사이트들이나 패 러디 사이트들은 그 정치, 문화적 지향의 특이성으로 인해 네티즌에게 그 활동이 알려진 경 우도 많다. 이는 내부 성원의 지향을 확실히 드러내지만, 현실적으로 인터넷의 흐름을 바꿔 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단점도 아울러 지닌다. 원자화하고 소수화하는 네트 운동의 새로운 경향에 위험과 가능성이 상존해 있음은 바로 이에 근거한다.(정보화로 가는길, 200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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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텔레콤 ] 만인평등의 사회, 통신의 자유가 이끈다.

만인평등의 사회, 통신의 자유가 이끈다.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2002년 대선, 전세계 유래없이 인터넷과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은 새 대통령을 세우는 일등공신이 됐다. 그렇게 만든 대통령이 지난 3월 탄핵되자 다음 카페에 '국민을 협박하지 말라'는 사이트가 네티즌들의 자발적 참여로 개설됐다. 탄핵 정국 이후 단 10여일만에 회원수 10만 육박에다, 페이지뷰가 하루 2, 3백만에 이르렀다. 비록 휘발성이 높은 단기간의 응집이라 하더라도, 그 집결력은 초유의 사건이다. 디지털 카메라 정보교환 사이트인 디시인사이드의 '디시폐인'과 유머사이트 '웃긴대학'의 웃대생이 거리로 나서고, 라이브이즈 닷컴의 네티즌들은 발랄한 정치 패러디물로 모두 구정치의 구린내나는 악습을 조롱한다. 동호회나 인터넷 카페 등은 취미, 오락, 관심사, 철학, 인생, 운동 등을 공유하는 정기 소모임들에서 이제 오프라인으로 뭉치며 정치 세력화하거나, 약자와 소수자의 억눌렸던 가치들을 서로 모여 분출하는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광화문 한복판에는 부패 정치인 청산을 외치며 오프라인에 대거 모인 네티즌들의 촛불 물결로 넘실거린다. 철저히 막혀있던 정보 독점의 '똥꼬'에 새로운 수평 커뮤니케이션의 '똥침'이 꽂힌다. 총선이 다가오면서 1인 미디어인 블로그나 미니 홈피도 집중화된 정보 권력에 못지않은 정보생산의 활동 주체임을 선보이고 있다. 이메일과 게시판은 기본이요, 모바일로 선거 운동을 하고 총선 속보와 뉴스, 출마자 프로필 등을 수시로 내려받는 정보 서비스가 등장한다. 바야흐로 최첨단 쌍방향 시대다.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은 수평의, 민주적, 상호소통의, 다중의, 파워 중심이 없는 유연함이다. 디지털이 선사한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은 끊임없이 위아래없이 서로를 이어주고 소통하며 자유로운 유목과 이동의 전제가 되고 있다. 통신의 자유는 문화에 다양한 결을 심는다. 걸으면서 즐기는 젊은이들의 '스탠딩 문화'는 모바일 세대의 소위 '노마디즘'(nomadism)을 부추긴다. 노마디즘은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민적 속성을 지칭한다. 걸으면서 스타벅스 커피를 '씨핑'(sipping)하고, 일대일(P2P) 파일교환 프로그램을 통해 엠피 음악을 구워 듣고, PDA로 하루 일정잡고, 휴대폰으로 시사정보와 뱅킹 업무를 보고, 랩탑에서 원하는 뉴스 정보를 한 곳에서 모두 읽을 수 있고(Really Simple Syndication; RSS), 특수하게는 휴대전화의 대중화로 이뤄진 모바일 문화가 인터넷의 접속과 함께 쌍방향 기동성을 극대화한다. 잠깐 우리의 불운한 과거를 되짚어 보자. 60년대말부터 군사정권의 권위에 바짝 긴장하고 상명하복에 목숨걸고 정보와 지식을 한곳에 걸어잠그는 수직의 권위 커뮤니케이션이 현실을 압도했다. 장발족들은 잦은 단발령에 길거리 한모퉁이에서 머리에 땜통을 만드는 수모를 겪어야 했고, 통금 싸이렌에 밤거리 광장을 누빌 자유를 박탈당했고, 저항하다 이유없이 곤봉에 맞거나 갇히는 억압의 논리가 압도했다. 불만을 토로하다 머리깨질 수 있는 살벌한 흑백의 세상에서, 90년대 중반 이후 퍼져나간 민주적 소통기술들은 현실의 수직 커뮤니케이션에 숨통을 틔웠다. 너무도 오랫동안 개성이 억눌리고 사회적으로 획일화를 강요당해서인지, 새로운 수평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은 자유의 바람에 엄청난 뒷심으로 작용한다. 사회에 상식이 잡혀가면서 억눌렸던 다양한 목소리들이 민주적 소통을 통해 성장하는데 큰 힘이 되고 있는 것이다.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은 정보의 흐름과 규모, 방향, 신뢰도 등 모든 면에서 과거의 상식을 뒤집었다. 인터넷 이용자가 늘고 상호 링크에 의해 서로서로 연결된 노드수가 증가하면서 권위 커뮤니케이션은 도전받고, 수직의 룰이나 구습은 위협받기 마련이다. 예턴대, 한국사회에 팽배했던 지식 생산의 독점을 깼던 <오마이뉴스>의 실험도 이러한 민주적 커뮤니케이션의 힘에 기인한다. 즉 신문 기자의 특권으로 보였던 기사 생산에 모든 인터넷 이용자들이 동등한 주체로 참여하고 개인의 능력은 게재된 글의 조회수와 반응으로 평가받는다. 지식 독점의 룰이 깨지고 누구든 정보에 접근하고 그에 대해 누구든 표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역으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의 상호 연결 구조는 의도적 바이러스 침투나 공격에 삽시간에 도미노처럼 함몰당하기 쉽다는 점도 일깨운다. 그 파급력은 얽히고 ㅤㅅㅓㄺ혀 도저히 풀 수 없는 전자적 관계망의 구조에서 비롯된다. 긴밀하게 짜여질수록 하나의 문제가 퍼져나가는 속도는 종잡을 수 없게 된다. 기업의 데이터와 전화, 전자메일 등이 다른 커뮤니케이션 경로를 움직이던 시대가 지나 모든 정보가 같은 경로로 초속의 광대역 망을 탈 때 그 파급력은 더 확대되고 순간적이다. 물론 파급력은 파괴력의 다른 이름이다. 조작하기 힘들고 그 파급력이 강하면 순간적 파괴력 또한 거대하다. 2003년 1월 25일 '인터넷대란'은 외부의 공격에 전국의 인터넷이 어떻게 파죽지세로 무너질 수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또 하나, 모바일 세대의 상호소통 능력과 기동성은 부유하지만 어디에서든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확인시킬 수 있는 위험성도 동시에 지닌다. 이러한 특성은 흔히들 얘기하는 전자 모바일 감시의 가능성을 야기할 수 있다. 지난 해 개인 사생활 침해와 관련해 논쟁을 불렀던 강남구 CCTV 도입과 종로구 인사동거리의 인터넷 생중계, 휴대폰 전화 도청 시비 등은 모바일의 기동성과 자유를 가로막는 악재로 기능하고 있다. 주택가 현금인출기를 쓰든, 식당에서 계산을 하든, 공연을 보기 위해 티켓을 끊던, 룸살롱에서 술을 마시던 간에 끊임없이 모바일로 어디서든 빠른 네트워크를 타고 자료와 정보가 한곳에 전송, 집적되어 가공될 수 있다는 사실은 현대 모바일의 위험한 일면을 상기시킨다. 한편 행정 편의주의적 발상에 의해 구상되어 문제가 된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도 행정 권력에 의한 개인 정보의 집적에다 발달린 정보들의 유출 위험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모바일 시대의 새로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어디서든 존재하는 '유비쿼터스'의 비전이 실지 촘촘한 감시망으로 오용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결국, 쌍방향 기술에는 이처럼 자유와 통제의 야누스적 얼굴이 작동한다. '바리깡'이 이발소를 나와 거리를 활보하면 통제의 땜통 제조기가 되듯, 모바일과 전자네트워크의 소통 기술이 잘못 쓰이면 일거수 일투족을 낱낱이 헤아리는 전자 족쇄가 되는 법이다. 당연히 그 쓰임새는 사회 성원들의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신장하는 쪽으로 나아가야할 것이다. (SK텔레콤, it(잇), 2004.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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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넷] 대중매체여, 이제 고이 잠들라!

대중매체여, 이제 고이 잠들라! 텔레비전이 나온지 어언 반세기. 그 건방진 태도는 여전하다. 근대적 가치 체계와 피의 동맹 을 맺은 이 단순무식하고 포악한 선전-기계는 아직도 대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메시지와 정 보에 일방적인 순응을 강요해오고 있다. 그나마 이 기계가 자신의 부드러움을 과장하기 위 해 통신원 제도, 시청자 참여/감시 프로그램 등의 되먹임(feedback) 과정을 도입해보지만, 힘의 우위에 입각한 메시지 생산자와 수동적 수신자간 경로의 암묵적 일방향성이 사라지는 데는 역부족이다. 몇 해 전 대한민국 방송사 이래로 초유의 선전-기계 시설의 폭력적 점거로 기록된다는 '만 민중앙교회' 열혈 신도들의 MBC 방송국 난입 사건. 그러나 이 사건이 '교주'를 위해 한 몸 바치려는 광신도들의 빗나간 점거 전술이라는 점에서, 애석하게도 대중매체에 대한 제대로 된 대중의 폭력적 교란과 전복의 전사(前史)는 아직까지 없다. 이 선전-기계는 나날이 그 파워를 배가해 나간다. '진지한' 활자 언어를 찍어대는 일간지들과 더불어, 이 영상 선전-기 계는 일상 삶의 영역을 구태의연하게 그리고 획일적으로 대중 선동과 체계 훈육의 장으로 길들인다. 굳이 프랑스 사회학자인 부르디외가 '텔레비전에 대하여' 얘기한 내용을 들먹거리 지 않더라도, 이 기계는 '균질화', '통속화', '순응화', '탈정치화' 등을 자신의 최대 장기로 삼는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대는 이 영상 기계에 맞서 새롭게 바리케이트를 치는 게릴라 테크놀로 지에 미래 희망의 빛을 던져주고 있다. 이미 전세계 정치적 실천 그룹들에게 80년대부터 꾸 준한 사랑을 얻었던 8미리 비디오는 그 한 예이다. 빗발치는 다국적 위성 전파의 여백에 '자 유의 새로운 공간'을 일구는데, 이 게릴라 기계는 큰 힘을 발휘했다. 국내에서 8미리는 90년 대 중반이후, 일부 소규모 지역/노동 운동가에 의해서 제 몫을 찾아나가고 있다. 8미리 비디 오는 선전-기계와 다르게 그 게릴라적 특성과 어울리는 대상 세계의 다름에서 빛을 발한다. 즉, 게릴라 기계는 이를 다루는 주체들의 성격과 그들의 세계에 대한 정치적이고 이질적이 고 비순응적인 가치와 함께 살아 숨쉬어야 한다. 이에 대응하여 권력의 선전-기계가 이용하 는 홈비디오 수렴/포섭 과정은 이러한 비순응적 주체와 가치에 대한 체제내 길들이기에 다 름아니다. 예컨대, 이미 거대 매체의 프로그램 옵션으로 간간이 등장하는 일부 시청자 참여 비디오 프로는 선전-기계에 순응하는 법을 터득한 '죽은' 필름들로 기록될 것이다. 이제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면서, 다시 한 번 이 게릴라 기계는 제대로 된 도약의 부푼 꿈을 키우고 있다. 이 아날로그 영상기계과 디지털 6미리 영상기계가 광활한 네트워크를 타고넘 음으로써 자신의 힘을 끊임없이 복제하는 것. 체제 저항 집단들의 정치/문화적 감수성을 값 싼 공유 기술로 표현하고 그것을 일파만파로 확장하는 새로운 디지털 영상의 '장'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그 '장'의 전제는 또 다른 선전-기계들의 현금화와 상업화 수단으로 묶이는 현재와 같은 500개 이상의 인터넷 방송 붐이 아니라, 특유의 대상 세계를 갖고 비순응적인 태도를 지닌 집단들이 생산하는 디지털 대안방송의 '볼륨을 높'이는 장이어야 한다. 체제의 질곡은 끊임없이 반(反)정보를 생산해낸다. 체제의 질곡은 '역능'(potentia)에 비례한다. 역능은 권력에 반하는 가능성의 힘이다. 한 시스템 내에서 힘들간의 충돌은 대개가 체계적 권력과 게릴라식 역능들의 경합 과정에 결정된다. 그러나, 그 양자의 힘겨루기 과정은 대개 체제에 손을 들어주기 십상이다. 그 이유는 시스템의 거대한 흐름에, 브레이크 없는 자 본주의 폭력의 기차에 휩쓸려 모두 동승해야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트 게릴라들의 역능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단순무식한 선전-기계의 포악함이 지배할 여지가 훨씬 크다. 이에 대비하여 우리는 '너무 낙관적이지 않게' 새로운 디지털 게릴라 영상기계들 의 전성 시대를 예감하고, '정리해고'될 거대 언론 공룡들의 영원한 빙하기를 '전투적으로' 그리는 일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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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디자인] 디지털 시대의 아방가르드 예술

디지털 시대의 아방가르드 예술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디지털 기술을 응용한 새로운 예술 활동이 서서히 증가하고 있다. 미디어 기술의 발전은 예술의 장르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 한 시대의 예술은 한 시대를 특징짓는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에 규정되기도 하지만, 역으로 그 수단들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동하기도 한다. 특히 그 후자적 입장에서 디지털의 예술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샌디에고 소재 캘리포니 아 대학의 영상 아트 교수, 레브 마노비치(Lev Manovich)같은 이는 디지털 '미학 선언'을 통해, 디지털 시대에 맞는 미학적 관점의 출현을 역설하기도 했다. 즉 산업 시대의 미디어를 가지고 디지털 시대를 구성하려 하는 것은 현대인들이 가질 수 있는 오감의 발전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지 못한다고 본다. 인간의 변화된 정서에 맞는 새로운 미학과 이를 표현할 수 있는 미디어 수단의 개발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미학이 정확히 어떻게 현 실적으로 구성될지는 아직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의 선언은 분명히 일리가 있다. 예컨대, 인 터페이스의 구성에 있어서 이제까지 우리가 전혀 고려하지 못한 새로운 미학적 관점을 적절 히 반영할 수 있고, 예술 작품에 있어서도 다양한 뉴미디어 기법을 사용하여 창작에 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인간의 감성과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 해 충분한 고려가 없으면, 이런 선언은 단지 일회적인 사건에 불과하다. 디지털 아방가르드의 전사(前史)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가지고 인간 감성의 새로운 차원을 개척하는 시도는 과거에 도 존재했다. 특히 예술 분야에서 선도적으로 이같은 실험 정신을 추구하는 이들을 우리는 '아방가르드'(avant-garde)라 칭한다.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였던 생시몽(Henri de Saint-Simon)이 1820년대 초반에 등장했던 새로운 예술적 경향을 일컬으면서 생긴 이 용어 는, 줄곧 사회에 복무하는 예술의 해방적이고 선도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의미로 통용되어왔 다. 아방가르드는 중립적 용어가 아니다. 가치 함축적이다. '전위'라는 의미에서도 드러나지만, 앞서 나가는 것, 보수적 장벽을 깨는 것, 혁신적이고 도전적인 것이 그 긍정적 쓰임새이다. 하지만 아방가르드는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것, 시대적 정서와 맞지않는 것, 거부감이 드는 것, 엘리트주의로 똘똘 뭉친 자기만족적인 것 등의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한다. 어쨌거나 아방가르드는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 체계의 변방에서 실험적인 예술 기법을 통해 서구 문화의 모순들을 지적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해왔다. 즉 현대 사회의 키치화된 예술과 상품화에 반발하여 그들만의 자율적인 문화 영역을 꾀하면서, 사회·정치 해방의 보다 광범위한 프로그램의 연장선상에서 자본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역할도 동시에 가졌다. 아방가르드의 제대로 된 전범은 단연 1915년 쮜리히에서 등장했던 다다(Dada)다. 사전에 서 무작위로 뽑아서 만들었건, 아이의 울음소리를 따서 만들었건, 말의 따그닥거리는 소리를 흉내내어 지었건, 다다란 용어의 정확한 뜻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다다의 상식을 끊 는 비상식적 명명을 주시해야 한다. 다다의 예술 작품은 예술의 우위성에 대한 거부로 출발 한다. 이전까지 예술 자체의 공력에 집중했던 개인화되고 주관주의적인 예술의 가치를 가차 없이 부정한다. 베를린의 다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들은 또한 자본주의의 문화에 대한 비판과 정치적 비판을 결합하려 애썼다. 또한 그것은 정치적으로 그 당시 성장했던 볼세비 즘의 비전에도 크게 갇혀있지 않았다. 파시즘과 자본주의의 물신화된 권력에 대한 비판, 그 것이 중심 목적이었다. 커뮤니케이션 수단에 있어서도 이전의 전통적인 예술가들이 시각 매 체에 치중했다면 이들은 다양한 매체 수단을 활용하여 미디어 기법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주 었다. 쮜리히에서 결성되었던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는 전통적인 시각 자료들의 전시뿐만 아니라 음악, 퍼포먼스, 낭송 등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활용했다. 또한 1920년에 처음 시도되었던 베를린의 국제 다다 전시회에서도 다양한 미디어들이 동원되었다. 한편 베 를린 다다의 핵심이었던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가 시도한 '포토몽따쥬'(photomontage)와 같은 기법은 파시즘의 잔인성을 널리 알리는 기제로 사용되면서, 20세기의 시각문화의 가장 특징적 장르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다다의 이같은 아방가르드 예술이 현대에 와서 가질 수 있는 중요한 함의는 무얼까? 우선 은 지속되어야할 실험정신이다. 다차원적인 미디어 활용은 디지털 예술에 오면 더욱 빛이 날 수 있다. 둘째로 예술의 자기함몰적이고 주관적인 자세에 대한 극복이다. 방법에 있어선 집단적 창작이 수시로 모색될 수 있겠고, 관점에 있어선 보다 넓은 사회적 차원을 고려하는 예술가가 나와주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 정신이다. 눈에 보 이기도 하지만 비가시적으로 숨어든 자본주의 권력에 대한 지속적 저항 정신이 에술가라면 필히 가져야 할 덕목이다. 필자는 이런 다다이즘의 덕목을 현대에 와 새롭게 출현하는 한 예술 실험 집단을 통해 관찰하고 싶다. 다다의 후예,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CAE)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Critical Art Ensemble)은 1986년 여섯 명이 모여 결성한 미디어 예 술 창작집단이다. 지금은 한 명이 빠져나가 다섯 명의 전문적 미디어 아티스트들로 구성되 어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 그룹 내에서 각각은 자신이 지닌 독특한 능력들, 퍼포먼스, 북 아트, 그래픽 디자인, 컴퓨터 아트, 필름/비디오, 텍스트 아트, 사진, 그리고 저술 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이 예술적 재능들을 전술적으로 활용한다. CAE는 예술적 수단을 청중의 성향과 그 특수한 상황에 맞춰 선택하고 창작 작업에 들어간다. 창작물을 만드는 매체 수단에 중심을 두기보다, 특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맥락을 중시한다. 매체는 말하고자 의도한 토픽과 상황/맥락을 위한 수단으로만 유용할 뿐이다. 장소에 있어서도 화랑, 박물관, 라디오, 텔레비전, 페스티발, 클럽, 술집, 인터넷, 길거리 등 예술적 표현이 극대화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리지 않는다. 이들이 펼친 중요한 퍼포먼스로는 우선 에이즈 위기에 대한 미국 정책을 비판하면서 플로 리다에서 이루어졌던 멀티미디어 이벤트, 뉴욕 사창가의 매춘부들과 함께 벌인 퍼포먼스, 영 국 쉐필드에서 벌어진 '실업자들을 위한 국제 끽연 캠페인'에서의 거리 시위, 유전공학의 위 험성을 알리는 유럽 순회 퍼포먼스 등이 있다. '아르스 일렉트로니카'(Ars Electronica)와 같은 국제적 디지털 예술가들의 각종 모임에서도 시연, 강연 등을 해오고 있다. 94년 '무용성의 기술'(Useless technology) 기획을 시작으로 앙상블은 온라인(critical-art.net)과 오프라인 모두에서 적극적인 예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특히 이들은 94년부터 지속적으로 집단 저술을 벌이고 있는데, 뉴욕의 아우토미디어(Autonomedia) 출판사에서 이제까지 발간된 네 권의 게릴라북들은 '전자적 시민 불복종'이란 개념을 가지고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인터넷 저항 전략과 전술을 모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의 책들은 누구든 이용할 수 있게 온라인상에 전문을 공개한다. 이들은 단지 예술가들의 모임이라기보다는 폭넓은 학제간 연구의 실험 집단과 같다. CAE 는 예술, 테크놀러지, 비판이론, 정치적 행동주의가 서로 삼투하는 접점을 찾고자 한다. 예술을 정해진 경계안에 가두는 행위는 폭넓은 지식 체계의 접근권을 스스로 막는 행위라 본다. 또한 이들에게 '예술가'란 명칭은 시대착오적이다.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는 오히려 '문화 노동자'의 지위에 처해, 자신의 노동의 결과물을 가장 비싼 값에 팔아먹는 예술가 아닌 예술가일 뿐이라는 시각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저항하는 아방가르드라는 적극적 의미를 살려 예술가를 '미디어 전술가'(tactical media Practitioner)라 칭하고자 한다. 이들의 운동이 바로 새로운 시대의 아방가르드 정신을 살린 '미디어 전술운동'이 된다. 이러한 운동을 수행하는 근거는 기본적으로 서구문화에 깊게 가로놓인 권위주의적 토대들 을 드러내고 이에 도전하려는데 있다. 특히 앙상블은 아방가르드의 저항 정신을 고무한다. 그들의 창작과 실험은 모두 이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에 있었던 혁명처럼 일시 에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환상도 거부한다. 현대 권력은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거 대화된 힘이라고 본다. 이들에게 혁명은 죽은 아이디어다. 설사 혁명이 일어나더라도 일상화 된 문화에 각인된 권력의 흔적들은 제거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앙상블이 취하는 저항은 영구적이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다양한 층위와 형태들을 계속해서 뒤집고 조롱하고 비판하는 작업을 끝없이 벌여나가는 길밖엔 없다. 차츰 권력으로부터 벗어난 자율의 영역을 개척해서 세워나가는 것이 그들의 예술적 목표이다. 디지털 아방가르드 정신 CAE의 예술적 실천은 아방가르드, 특히 다다이즘의 특성과 유사하다. 예술적 시연에 있 어서 거의 모든 매체들을 이용하는 것과 학제간 영역을 넘나드는 것이 이들을 다다의 실험 정신과 가깝게 맺어주고 있다. 매체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창작의 각종 장소들 또한 앙상블 이 최대한 원하는 결과를 얻기위해 고려되는 선택 범주다. 그리고 예술의 범위를 좀 더 포 괄적인 지위 속에서 고려하려는 시각 또한 비슷하게 닮아있다. 더욱이 이들은 정치적 저항 을 고민하는 예술 집단이라는 것이 다다와의 근친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인터넷 시대의 저 항 전술에 대한 그들의 고민이 요약된 앙상블의 저술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만, 이들은 권 력에 대한 비판 의식과 함께 새롭게 변화된 저항의 다양한 실천 방식을 동시에 고민하고 있 다. 물론 이들이 디지털 시대의 다다이즘을 공식적으로 표방하지는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앙상블이 새로운 시대의 디지털 예술이 나가야할 바람직한 방향을 중심에서가 아니라 변방 에서 실험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앙상블은 우리의 상식을 뒤집으며 예술적 실천의 새로운 방식과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미학을 세워나가고 있다. 단지 우리가 경계해 야 할 경향은 예술적 실험성 자체에만 의존하는 부류다. 순종 엘리트주의에 기대어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예술에 써먹는 고급 예술가 혹은 그 극단의 데카당도 존재할 수 있다. 이들에 게 부족한 것은 비판과 저항 정신이다. 오직 실험으로 관객을 우롱하는 엘리트 예술가들의 생명줄은 그만큼 짧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앙상블이 지닌 아방가르드 정신이 디지털 시 대의 예술 흐름에 중요한 한 축으로 자라나길 고대한다. (웹디자인, 200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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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디자인] 네트 극장의 배우들

네트 극장의 배우들 인터넷은 현실의 반영물이다. 삶이 이루어지는 현실에서 사업을 꾸리던 사람들은 인터넷 에도 역시 가게를 열거나, 연예인들은 자신의 이미지를 가꾸기 위해 전용 홈페이지를 개설 하거나, 사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인터넷을 뜻이 맞는 단체간의 연대에 이용하거나, 언론 매체들은 이미 소유하고 있는 공중파 방송이나 인쇄매체와 함께 인터넷 방송국을 열거나, 현실에서 사기로 돈을 모은 사람은 인터넷에서 비슷한 수법으로 네티즌들을 우롱하거나, 선 거철에 정치가는 자신의 홈페이지를 이용해 득표를 유도하려 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현실의 것들이 네트에 고스란히 자리잡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일들 은 역시나 현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의 연장인 셈이다. 하지만, 디지털 네트워크는 무조건적인 현실의 반영만은 아니다. 분명 현실에서 볼 수 없 는 새로운 것들도 관찰할 수 있다. 이전에 전혀 볼 수 없던 새로운 언어 표현과 문법이 등 장한다든지, 컴퓨터 문법에 적응하여 글을 읽는 습관에 변화가 생긴다든지, 현실과 다른 이 중의 인격으로 네트에서 행동한다든지, 대규모 방송설비를 갖고서만이 행할 수 있는 방송국 을 단지 한 사람의 힘으로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내보낼 수 있다든지, 하루에도 전자 메일을 확인 못하면 마음이 초조해진다든지 등등, 이전에 컴퓨터와 컴퓨터 네트워크가 없었을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전혀 다른 문화의 생성을 감지할 수 있다. 그래서, 인 터넷은 한편으로 새로운 문화의 발원지다. 인터넷은 있는 현실을 반영하지만 전혀 새롭고 또 다른 현실의 가능성도 보여준다. 이런 새로운 가상의 공간에 도대체 어떤 인간형들이 있을까? 인터넷 문화처럼 인터넷에 접속하는 인간들 또한 각양각색이다. 인터넷의 모양새와 마찬가지로, 인터넷과 더불어 사는 인간형은 크게 두 부류가 있다. 현실의 문제를 여전히 계속 붙들고 있는 자들도 있고, 인터넷의 새로 운 문화와 관련된 논의를 이끌어가는 자들도 있다. 분명 그들 중에는 주연급도 있을 것이고, 인터넷 문화의 입맛을 느끼게 하는 단역 배우인 까메오들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바로 이 런 인간형들에 대한 인터뷰다. 인간이란 대체로 삶이나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위 해 살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동물인지라, 대체로 인간형의 구분은 그들이 인터넷을 바라보는 시각차에 근거한다. 물론 인터뷰 대상과 내용은 내 자신의 상상물이다. 여러 부류 들의 동시다발적인 인터뷰 형식은 그들의 입장 각각이 서로 옳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보 다 객관적으로 그들의 입장을 비교할 수 있다. 내 마음대로 이들 인간형들을 분류하고 그 중 누가 옳은 관점에 서있다고 얘기한다면, 그 또한 독자에 대한 심리적 억압일 것이다. 이제 그들 각각이 주장하는 인터넷의 효과와 이를 바라보는 관점을 기록한다. 그들이 볼 때 이런 것이 인터넷의 영향이고, 각각이 보는 인터넷의 문화와 미래관은 이러저러해야 한 다는 주장들이다. 독자들은 일부는 편견에 사로잡힐 수도 있는 각 인간형들의 얘기를 들어 보고,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기 바란다. 인터넷 극장의 주역과 단역은 이미 구분되어 있다. 그것은 얘기된대로 인터넷은 현실의 반영물이기에 스타는 정해져 있다. 그렇지만 장차 단역 이 주역을 밀어내는 일도 생길 수 있음을 감안하길 바란다. 그것도 마찬가지로 인터넷은 새 로운 가능성을 지니기에 새로운 스타 출현의 예감을 배제하지 않는다. 1. 디지털 엘리트 우리들은 인터넷의 가장 큰 배역을 맡고 있다. 항상 그래왔듯이 산업시대 이후로 줄곧 엘 리트는 이 사회의 핵심적인 의사 결정권자들이다. 디지털 사회의 엘리트, 우리는 통칭 '디제 라티'(digerati)로 불린다. 가상 공간의 지배계급이라 하여 '가상계급'(virtual class)이란 별칭도 갖고 있다. 우리는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갖는다. 과학 기술자에서부터 경영자, 정치가, 미래학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듯이,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미 상원의원 뉴 깅리치, 미래학자의 거두들 앨빈 토플러, 조지 길더, 피터 드러커, 21세기 디지털 문화를 선도하는 [와이어드(Wired)] 잡지에 모이는 열성 논객들 등이 우리 모임의 정회원이다. 우리는 각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고, 기술 정책에 관한 의사결정에서부터 인터넷 미래의 예측까지 도맡아서 해왔다. 전세계 대중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기대한다. 우리는 그 큰 흐름의 주도자이다. 우리의 공통점은 이 세상이 손끝의 클릭으로 이루어지는 때를 기원한다는데 있다. 인터넷의 미래는 모든 것이 풍요로워지는 세상이다. 빈부 격차없이 모든 것을 나눠가질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이다. 문제는 인터넷 시대의 무임승차자다. 우리는 비용만 지불하면 무 한대의 정보를 최고의 서비스로 제공할 수 있는 세상을 원하며, 자본주의의 새질서를 깨뜨 리려는 일부 몰지각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의 악성 불법 절도자들이나 철없는 해커들이 설 치지않는 세상을 원한다. 그들은 디지털 사회의 골치덩이들이다. 인터넷의 명랑 사회 건설은 이들 상습 건달들의 배격 없이는 이루어지기 힘들다. 정당한 화폐의 지불 없이 우리가 만들 어내고 재산권을 행사하는 정보들을 절취하는 행위는 절도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신뢰하는 집단은 무릇 미래의 '프로쥬머'(prosumer)들이다. 이제 대중들은 단지 소 비(consumer)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산(producer)에 관여하는 프로쥬머로 자리매김되고 있 다. 우리는 그들을 숭배한다. 우리는 소비하고 생산에 관여하는 이 모든 대중을 최상의 손님 으로 모신다. 이들의 자료들은 확실히 챙겨서 우리의 전략적 데이터 베이스에 보관된다. 혹 자는 디지털 시대에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정보 접근권을 우려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미 그에 대비하고 있다. 빌 게이츠의 업적을 보라. 학교나 가정에 저렴한 가격으로 컴퓨터 등이 보급되고 있다. 사회 안정을 위해 인터넷 엑세스의 보장은 우리의 절대 과제다. 누구나 인터 넷에 접속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는 우리의 노력은 가열차게 이루어져 왔다. 정보격차는 우리가 가장 배격하는 것이다. 일부 엉터리 비판론자들이 우리의 이런 노력을 매도하는 주 장을 펼 때면 정말 참을 수가 없다. 우리는 세계의 리더들이자 힘을 지닌 사람들이다. 모든 중요하고 돈되는 일을 선도한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정보 사회의 복지를 등한시하며, 자신 만의 영리를 취할 수 있겠는가? 우리를 믿고, 미래를 확실히 우리 디지털 엘리트들에게 맡 겨라. 2. 네트 자유주의자 인터넷은 혁명이다. 디지털 엘리트들이 찬양하는 인터넷 혁명과 우리의 시각과는 질적으 로 차이가 있다. 우리는 애초부터 인간의 자유와 발언권을 막는 어떠한 시도도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특히, 인간이 지닌 자유를, 사업을 한답시고 자유의 공간에 금을 이리저리 쳐서 장사를 벌이는 인간들을 미워한다. 그렇다고 우리는 네트를 무법천지로 만들거나, 아예 장사 자체를 못하게 막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경제적인 이득 추구로 좌우되는 것을 최소화하 고, 사회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표현을 할 수 있고, 정보를 공유하며 살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원한다. 우리는 종종 네트 엘리트들과도 공조를 한다. 디지털 정책과 경 제를 쥐어흔드는 그들에게서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생각들을 관철시키려 애쓴다. 물론 가끔 씩 디지털 엘리트들에게 휘말려 배신의 쓴맛을 보기도 한다. 한편, 해커들과 사이버 히피들 과도 친분을 유지한다. 그 친구들이 당할 때는 우리가 나서서 돕는다. 비록 이 친구들이 과 격하거나 철모르고 행동하는 경우가 있지만, 우리가 적극 옹호하는 표현의 자유를 이 친구 들이 침해당했다면 발벗고 나서서 도와준다. 인터넷은 새로운 프런티어다. 그러나, 그 신천지도 이제 거의 사라질 지경에 처했다. 예전 에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했던 디지털 엘리트들이 절교를 선언하고 있다. 우리의 자유에 대 한 신조가 살아 숨쉬던 사이버공간은 시장의 논리가 도배하기 시작했다. 인터넷 초창기에는 우리가 주연급 배우였다. 우리의 주장이 통하던 시대가 있었다. 장사치들이 판치던 작금에 비하면 그 때가 좋았다. 왕년에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배우를 꼽으라면, 존 페리 발로우, 미 첼 케이포, 하워드 레인골드 등이 있다. 곧 죽어도 우리는 인터넷의 미래를 믿는다. 아무리 장사치가 판쳐도 인터넷의 무한한 기 술적 속성을 막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 마지막 보루다. 인터넷만은 권력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자율적인 공동체를 실현시키는 것, 이것이 우리의 비전이다. 3. 사이버히피 우리는 세상의 시간을 삼등분으로 나눠 살아간다. 자고, 일하거나 먹고, 인터넷에서 사람 을 만나는 것. 사실 그 중 일하는 것도 어차피 네트에서 처리한다. 육신의 부자유스러움이 거추장스럽다. 훨훨 살덩이를 벗어 던지고 네트에 점프해 들어가 그 속에서 영원히 살고 싶 다. 우리의 태생이 워낙 자유 정신을 신봉하던 터라, 가상의 공간은 새로운 우리의 실험대로 자리잡았다. 우리의 형님들은 70년대 히피들이다. 그들이 자연을 벗삼아 마약의 엑스타시를 꿈꿨다면, 우리는 네트를 벗삼아 몽환(hallucination)의 기쁨을 누린다. 애초부터 우리는 권위와 위선을 증오했다. 권력이 부재한 세상, 즉 아나키적 미래가 우리 의 목표다. 권력은 상하를 가르고 억압을 키운다. 위선은 권력의 외부에 흐르는 독이다. 네 트의 수평적이고 상호적인 평등 관계는 위선과 억압의 힘들을 무너뜨린다. 네트 자유주의자 들은 우리와 비슷한 듯 보이지만 다르다. 그들은 권력의 힘에 거주한다. 디지털 엘리트와 일 을 꾸미거나, 제도화된 틀 속에서 움직이길 좋아한다. 우리의 히피 형님들은 이처럼 두 부류 의 인간형들을 만들어냈다. 우리같이 구제하기 힘든 사이버히피들과 제도권에 타협하는 자 유주의자들을 말이다. 우리는 네트 자유주의자들처럼 디지털 엘리트에게 배신을 당하는 일 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삶이 이미 권력에 비타협적이기 때문이다. 기술에 의한 권력의 전복, 이것이 우리의 전술이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미래의 건설은 네 트를 벗어나서 맨주먹으로 일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네트의 힘을 통해 키우는 것이다. 러다 이트(Luddite)들이 맨주먹으로 기계를 부수면서 기계를 증오해 했다면, 우리는 기계를 활용 해 기계를 증오한다. 우리는 그래서, '네오-러다이트'라고도 불린다. 우리의 행동 방식은 다 소 개별적이고 영웅주의적이기도 하다. '해커'라고 악의적으로 통칭되는 집단도 우리의 일부 다. 언젠가 우리도 공동 관심사가 생기면, 무서운 태풍의 힘으로 돌변할 지도 모른다. 그 두 려운 징후들이 이미 각국의 연구소나 기업, 언론사들에서 발생하고 있지 않은가. 비록 우리 가 단역이긴 하나, 디지털 시대에 무시 못할 존재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4. 네트의 신좌파 우리는 네트의 기술적 가능성을 믿는다. 하지만, 현실의 억압적인 족쇄는 그 가능성을 부 정한다. 인터넷의 미래가 감싸안기에는 현실의 골이 너무 깊다. 사이버히피나 네트 증오자들 은 아나키적이고 개별적이지만, 우리는 연대와 단결을 중요시한다. 네트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억압받고 힘없는 소수의 목소리를 서로 연결해 얘기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열 렸다. 일례로 멕시코의 한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사빠띠스따의 투쟁은 인터넷을 타고 전세 계에 후원자들을 만들어냈다. 우리 스스로가 네트 극장에서 거의 얼굴도 찾기 힘든 단역 배우인 것을 안다. 아직은 외 소하다. 그럼에도 우리의 가장 큰 적인 디지털 엘리트를 향해 감히 도전한다. 그들은 산업 자본주의 이래로 끊임없이 모든 것을 독식하고 미래를 독단적으로 결정했던 집단이다. 이제 사이버공간도 그들의 점령지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의 폭력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 다. 외소한 힘들의 결집은 인터넷으로 가능하다. 억압받는 자들이 모이면, 그 힘은 거대 권 력을 압도한다. 우리의 비전은 인터넷을 통해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세우는 것이다. 사이버히피의 방 종은 어처구니없다. 이들을 경계하면서, 우리는 질서 잡힌 평등한 세상을 원한다. 바로 인터 넷은 이를 위한 도구이다. 만국의 네티즌들이여! 네트를 통해 총궐기하라! 5. 네트 증오자 한마디로 기술은 아니올시다다. 인간이 말들어낸 모든 문명은 인간을 타락시켰다. 사이버 히피들이 기술을 통해 문명을 전환한다지만, 이는 결국 기술의 꼬임에 넘어가는 일이다. 우 리는 맨손으로 기술 문명을 파괴하는 과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일명 '유나바머'라는 사 람은 우리의 우두머리다. 폭탄 제조를 통해 우리는 기술과학 문명의 위험을 지적해왔다. 인 간에 의한 현실 문명의 비극은 폭력의 정당성을 수긍하게 한다. 우리를 네트 극장의 악역으로만 몰고가는 분위기는 권력의 계획된 음모다. 게다가 인터넷 시대는 기술을 신봉하는 분위기를 만연시키고 있다. 통탄할 일이다. 인간의 본연은 자연이 다.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표다. 그 때가 올 때까지 우 리의 어떠한 폭력도 정당화될 것이다!(이후 논의는 지나치게 과격해 생략했슴.) <웹디자인> 2000.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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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에총/월간말] '김자지'씨의 수난과 희망

'김자지'씨의 수난과 희망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김자지(金自知)'란 실명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한번은 그가 한 포탈 사이트에서 정보를 얻 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등록하려다 번번이 실패했다. 원인은 그 사이트에 소위 유해 정보 차단을 목적으로 설치된 검열 프로그램이 남성 성기를 지칭하는 비속어인 '자지'란 단어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몇 차례 업자에게 진정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던 그는 내친 김에 이 름을 아예 '남근'으로 바꿔 등록해버렸다. '자지(自知)'를 '남근(男根)'의 눈으로 단번에 재려는 족속들에 대한 그의 통렬한 냉소적 표현이었다. 실제 이 일화는 미국에서 있었던 사건을 우리식 이름으로 바꾼 것이지만, 국내 여건도 이 에 못지 않다. 자퇴생 사이트 아이노스쿨 폐쇄, 누드사진을 올린 한 시골 교사의 홈페이지 폐쇄, 동성애자 카페들의 잇따른 폐쇄 등은 김자지씨의 어처구니없는 수난과 맥을 같이 한 다. 엄밀히 보면 이름값을 톡톡히 치른 김자지씨의 경우가 기술적 장치에 의한 사전검열의 피해자라면, 올들어 진행된 사이트들의 각종 폐쇄 조처들은 법적 근거를 내민 사후검열의 피해자들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검열의 주관적인 잣대를 예사로 들이대긴 다같이 동속이 다. 이처럼 내용에 등급을 매겨 차단하는 검열의 빗장은 물리적이고 기술적인 장치 모두에 걸쳐 있다. 정보 선진국의 예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정보통신윤리위원회란 준사법기구가 전면에 나서 고 일명 '통신질서확립법'이 발효됨으로써, 인터넷공간에는 '유해'한 디지털 정보를 사그리 불태우려는 분서갱유의 분위기가 감지된다. 인터넷 정보에 대한 강력한 규제 장치들이 사회 적 여과없이 '질서확립'의 끈을 두르고 수많은 선량한 '김자지'씨들을 남근의 몽둥이로 후려 치려 하고 있다. 악법은 대개 모호할수록 효력을 발한다. 모호함은 자의적이고 주관적 해석을 돕고, 적용 대상과 범위의 한계를 비웃는다. 이번 '통신질서확립법'도 '내 맘대로'와 '누구나'를 특기로 삼는다. '윤리위'에서 만든 내용등급의 '질서'를 '내 맘대로' 강제 '확립'하고, 이를 어기는 모든 정보제공자는 '누구나' 그 처벌의 굴레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내 맘대로'에 걸리면 정치적 표현물 등 청소년의 '유해'와 무관한 정보도 위협받기 쉽다. 또한 '누구나'란 대상에 끼지 않기 위해서 사업자건 개인이건 자나깨나 자기검열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 어쨌거나 말많은 악법은 이미 발효되었다. 이제부터는 이 악법에 대한 지속적 감시가 필 요하다. 규제 범위를 넘어선 표현 자유의 심각한 침해건들에 신속히 대응하기 위해서는 관 련 정보운동단체들의 연대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 법률자문을 받을 수 있는 상시적인 통로 가 마련되어야 한다. 또한 강제적인 법 집행이 자연스레 개별 정보들에 들러붙는 프로그램 '코드'의 검열로 옮겨가는데 대한 대비도 시급하다. 각종 정보차단 프로그램들의 효과 분석 과 문제점 진단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악법에 저항한 진보 넷 등 국내 정보운동단체들의 활동이 국제적 연대의 가능성을 한층 밝게 했다. 해외 관련 시민단체들과 사안별로 공유할 수 있는 전술적 고려도 필요하다. 인터넷은 더 이상 완벽한 자유를 보장하는 디지털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현실의 권력은 네트에 터를 잡고 각종 정보에 검열의 자의적 가위질을 시도하려 한다. 물론 그 방식은 폭력적이기보다는 점점 정교해지고 은밀해진다. 부지불식간에 인터넷의 자동 차 단된 검색 목록에 자신의 페이지가 올라올 수도 있다. '김자지'씨처럼 타고난 이름이 '외설' 로 취급되면 자동으로 정보 접근에 막히는 억울한 경우도 일어난다. 하지만, 인터넷은 완벽 히 통제가 가능한 공간도 아니다. '김자지'씨가 '남근'이란 가명으로 바꿔 천편일률적인 검열의 날을 피해 오히려 이를 조롱하듯, 인터넷에는 통제에 대비한 우회로가 항시 열려 있다. 이것이 수많은 건전 명랑한 '김자지'씨들에게 검열의 속박을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주는 근 거다. 민예총,『일일문화정책동향』. 2001. 7. [월간 말] 2001 년 9 월 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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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경실련] 글로벌 시대의 사이버 '제국'과 '다중'

글로벌 시대의 사이버 '제국'과 '다중'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축소되는 지구는 현대 기술의 축복 덕이다". 이런 류의 주장은 기술의 패권적 쓰임새를 가리고, 소위 강대국들의 독단적 의사 결정을 쉽게 범지구화와 등치시킨다. 물론 범지구화를 방해하는 모든 것은 시류를 거스르는 반역에 해당한다. 미 뉴욕타임스에서 통뼈가 굵은 토마스 프리드먼은 지난 달 제노바의 주요 8개국 정상 모임에 항거했던 이들을 바로 이런 논리로 나무란다. 한마디로 기술의 진보성도 모르고 범지구화에 역행하는 '반(反)글로벌주의자'로 못박는다. 시위자들은 졸지에 하나되는 세계의 진보를 거역하는 과거 회귀론자들로 낙인찍힌다. 하지만 제노바의 시위 현장에서 '축소되는 세계'의 청사진은 오히려 지옥에 가까웠다. 미 로스엔젤레스 경찰국에서 파견된 교관들의 특별 훈련을 받고 첨단 기술로 무장한 제노바 경찰들이 전세계 시위대들을 향해 휘두르는 무력 진압과 유혈의 얼룩들은 글로벌화의 정체를 여지없이 폭로했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공동으로 펴낸 제국(Empire)을 보면, '제국'의 3대 통제력으로 폭탄, 화폐, 정보/기술(ether)을 든다. 역사적으로 폭탄을 통한 힘의 독점이나 화폐의 규제가 부분적으로만 그 힘을 행사해왔다면, 정보 기술의 영향력은 범지구적이다. 이는 모든 대안적 경로를 억압하고 자본의 힘 아래 전 지구사회를 복속시키는 가공할 힘이다. 어쨌거나 미국은 이미 이러한 제국의 세 가지 요건을 두루 갖춘 국가다. 두 저자의 재미있는 지적처럼, 미국은 워싱턴(폭탄), 뉴욕(화폐), 로스엔젤레스(정보 기술) 모두를 지니고 있다. 지구화가 미국화와 등치되는 이유에 대한 적절한 지적임에 틀림없다. 제국의 기획은 바깥이 없는 지구 영토의 구상이다. 외부가 없는 공간의 아이디어는 21세기 정보 패권을 노리는 미국의 아이디어와 일치한다. 미국의 글로벌 정보 초고속도로의 기획은 이와 맞닿아 있다. 익히 알려진대로 미국은 일찌감치 '서비스경제모델'을 도입하여, 경제의 정보화를 적극적으로 수행한 나라다. 1930년대에 안토니오 그람시가 옥중수고를 정리하면서 예견했던 '미국주의'의 상이 현재 미국이 갖고있는 정보 패권의 힘인지도 모른다. 그람시가 보았던 미국의 모습은, 유럽에 비해 청산할 과거의 기생적 유산들이 적어 자본 축적의 고도화를 빠르게 수행하고, 내부적으로 경제적 '구조'가 상부구조를 더욱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단순 합리화된 거대 부르주아 국가였다. 미국이 신경제론과 현실을 전세계에 강요하기까지 과거 공장시대의 본원적 축적이 현재에 이르는 바탕이 되었다는 얘기다. 작년 미국 상무부 보고에 따르면 정보기술 분야의 국가간 경쟁력에서 단연 1위는 미국이었다. 미국의 대외 경제정책 중 전자상거래는 대통령의 필수 과업이었다. 미국에게 정보와 정보망은 전세계의 주권과 국경을 빛으로 무너뜨려 세계시장을 도모하는 거대한 힘이다. 특히 미국이 지닌 정보 패권의 유지와 확대는 거대 자본에 의한 기술의 독점에서 비롯된다. 지난 수년간 사상 최대의 기록을 세우며 벌어지고 있는 정보통신기업들의 합종연횡과 정부의 탈규제 정책은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은 내부적으로는 고전적인 타자본 흡수를 통해 독점력을 배가하고, 국제적으로 지적 재산권 등의 국제적인 공인을 글로벌 외교나 협상 채널 등을 통해 강제하면서 성장했다. 이것이 미국이 앞장서 벌이는 글로벌화의 진면목이다. 물론 미국이 지닌 글로벌 하이테크 독점은 개발국가들에게 미국식 모델을 따르고 따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글로벌 동원의 합의 기제를 필요로 한다. 한국과 같이 '정보입국'의 꿈을 꾸는 나라들에 심어진 벤처기업의 신화는 신경제론을 강화하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미국식 자유주의 정신과 시장주의를 적절히 뒤섞어 정보경제를 자본주의의 미래로 추켜세우는 미국의 전략은 개발국들에게 쉽게 먹혀들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들 국가로의 새로운 정보모델 이식은 미국이 지닌 정보 독점력을 확장하는데 기여한다. 제국의 독점은 쉽게 '코드'의 독점으로 넘어간다. 기술적 코드의 독점은 기업간, 국가간 불균등을 영속화하는 수단이다. 일단 한 기업에 의한 코드의 독점이 이루어지면 또 다른 관련 코드들도 독점적 기술로 편입되고 깨기가 힘들어진다. 산업 시대의 자본 독점의 폐해에 비해 정보 독점이 더 심각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미국은 이러한 코드의 독점력을 움켜쥐고 전세계를 새로운 미국식 자본주의의 비전인 '신경제'로 끌어들인다. 이것이 과거 제국주의의 위상과 비교해 새롭게 달라진 제국이 가진 위험천만한 모습이다. 하지만 제국의 구상은 간단하지 않다. 제노바 시위대의 모습에서처럼 글로벌 제국에 대한 글로벌 '다중'(multitute)의 저항은 새로운 시대의 정치적 가능성을 열고 있다. 다종다양한 정치적 실천 집단들이 네트로 연결되어 '가상 연좌시위'(virtual sit-in)를 벌이고, 이를 현실의 오프라인 공간에서 분출시키는 범지구적 저항의 새로운 모습이 등장한다. 이들이 문제삼는 것은 범지구화 과정의 투명성과 민주화이다. '축소되는 세계'에서 더불어 같이 사는, 그리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삶의 조건을 요구한다. 인터넷, 위성, 이동통신 커뮤니케이션에 기반한 범지구적 가상공간은 제국의 기획에 쉽게 말려들기도 하지만, 전세계의 시민 단체들에게는 제약없는 연대와 활동의 힘을 가져다준다. 기술 세례의 명목으로 더욱 가속화되는 글로벌 불평등의 구조를 깨기 위한 국제적 연대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이다. 이제 저항의 국제적 연대는 물리적 공간과 가상의 온라인 공간에 걸쳐 펼쳐지는 제국의 탐욕에 대한 강력한 보루로 등장한다. 그럴수록 전세계에서 공동의 이슈를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글로벌 민주화의 강력한 요구가 그리 우울하지않은 미래에 대한 희망의 징후로 비친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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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디자인] 가상 현실의 진정한 꿈

가상 현실의 진정한 꿈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누구나 가상현실이라는 새로운 기술에 호기심을 갖고 대한 적이 있을 것이다. 80년대 중반 이후로 미래 SF영화들의 소재에는 끊임없이 가상현실의 현대적 기법들이 시도되었고, 그것 자체가 영화의 중요한 소재로 등장했다. 비록 현대의 첨단 기술 과 함께 본격화되었지만, 인간에게 가상현실에 대한 욕망은 이미 태고적부터 존재했다. 우리 는 로마의 자연주의자 플리니(Pliny)의 이야기 속에서 거의 2천여년전 사람들이 가진 가상 현실의 비전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로부터의 신화이지만, 현대 가상현실의 모 습에 가장 근접해 있다. 여기 고대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두 가상현실 프로그래머간의 일화 를 인용해 본다. "파르하시우스(Parrhassius)는 제우시스(Zeuxis)의 동년배이자 경쟁자였다. 기록에 따르면, 한번은 이들이 그림을 그려 경쟁하였다. 제우시스는 너무도 솜씨좋게 포도 그림을 그려서 새들이 날아올라 그 가상의 포도를 쪼기 시작했다. 곧이어 파르하시우스는 너무도 실물과 똑같은 커튼 그림을 그렸다. 새들의 행동에 의기양양한 제우시스는, 파르하시우스에게 당장 그 커튼을 걷고 그림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였다. 제우시스는 그 자신의 말이 실수였다는 것을 한참 후에서야 깨달았다. 제우시스는 포도 그림을 통해 단지 새를 속였다면, 예술가인 그 자신을 깜빡 속인 파르하시우스에게 겸손한 존경을 표했다. 그리고선 경쟁에 졌음을 시인했다." 이 인용문의 내면에는 인간이 바라는 근원적 소망이 깔려있다. 그것은 태고적 인간이 지진 사물의 완전복제(essential copy)의 소망이다. 완전복제의 추구는 현대 가상현실 기술의 바 탕이다. 인간의 지각을 속이는 수단을 개발하는 것이 가상현실의 목적이다. 인간의 감각을 철저히 착각하게 만들어 진짜인 것처럼 기만을 유도하는 디스플레이를 개발하는 것이 인간 이 가진 또 하나의 욕망이자 꿈으로 자리잡았다. 가상현실의 꿈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그 꿈은 어떻게 진화되었으며, 그것의 진정한 목표는 무얼까? 이제부터 그 꿈을 따라가 본다. 1. 가상현실의 흐릿한 꿈들 가상현실의 꿈은 최초 완전 복제에 대한 소망으로 표출된다. 화가의 경우, 자신의 캔버스 를 통해 가상세계로 가는 거울 혹은 마술창이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마치 세계를 창문 을 통해 보는 것처럼 리얼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생각은, 대표적으로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알베르티(Leone Battista Alberti)의 작품세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알베르티는 투시도법 기 술을 통해 너무나도 완벽한 그림을 제작함으로써 마치 창을 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보여주 었다. 사진 기술의 도래와 함께 완전복제의 꿈은 더 한층 강화되었다. 1857년 홈즈(Oliver Wendall Holmes)는 그 당시 최초로 입체경을 만들어 착용함으로써, 가상현실의 미래를 보 여주었다. 홈즈는 입체경을 통해 마치 3차원처럼 나타나는 사물을 바라봄으로써, 새로운 매 체 혁명의 도래를 예견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나오면서, 완전복제의 꿈이 보다 선명해진 다. 특히 1930년대 초에 이탈리아의 미래파(Futurist)와 같은 예술가 그룹은 텔레비전과 라 디오의 기술력에 열광하면서, 가상현실의 도래를 광신적으로 선전했다. 미래파는 원격재현 (telepresence)의 비전에 덧붙여, 근육노동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인간 정신을 무한히 자유 롭게 만드는 미래의 기계를 예감했다. 완전복제와 가상세계에 대한 소망은 컴퓨터혁명의 시작으로 보다 구체화된다. 2차 대전 이 거의 끝날 무렵 나온 배니버 부시(Vannevar Bush)가 내논 미멕스(Memex)의 청사진([ 웹디자인] 12월호 참고.)은, 이후 고등연구기획국(ARPA), 제록스 파크(XEROX Park)의 스 탠포드 리서치 연구소(SRI), 그리고 그 외 수많은 연구소의 핵심 엔지니어들에게 심대한 영 향을 끼쳤다. 홈즈의 3차원 입체 사진에 매료된 것을 반영하듯, 부시는 입체기술의 향상이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다고 역설했다. 부시의 미멕스(Memex)와 더불어 완전복제의 개념에 중요한 진전이 이루어진다. 그가 언급한 장치인 미멕스를 통해, 완전복제의 개념은 모든 정 보의 가상환경으로 발전한다. 그의 미멕스는 정신이 생동하며 활동하는 환경이다. 부시는 현 대적인 형태의 가상현실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다. 부시의 현대적 비전은 모튼 헤이리그 (Morton Heilig)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감각 경험과 일치한다. 헤이리그는 1950년대초 입체영 화인 시네라마(Cinerama) 등에 호기심을 느끼게 되었다.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느낀 시네라 마의 경험은, 그의 인생에 중대한 충격을 주었고, 가상현실을 향한 태고적 비전을 이어받게 만들었다. 1955년에 출간된 그의 책 {에스파시오스(Espacios)}에서, 우리는 감각적 현실의 완전복제 기술에 대한 태고적 소망이 현대에 이르러 다시 되풀이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 다. 후에 가상현실 엔지니어들은 1962년 특허권을 획득한 헤이리그의 다중감각 시뮬레이터, 센소라마(Sensorama)의 '체험극장'(experience theater)에 대한 비전을 구체화한다. 헤이리그의 이 탑승 여행기계는, 결국에 다중감각의 체험 매체를 만들기 위한 가상현실 계획의 일부가 된다. 2. 가상현실의 보다 선명한 꿈들 가상현실을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궁극의 매체'(ultimate media)로 바라보는 현실적 시각 은, 컴퓨터 그래픽과 가상현실 분야에서 선구자였던 이반 서덜랜드(Ivan Sutherland)의 작업 을 통해 나왔다. 1960년대 서덜랜드는 가상현실 기술의 기초를 세운다. 그는 디지털 컴퓨터 에 연결된 디스플레이를 통해서 물질세계의 현실화할 수 없는 개념들에 대한 친근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고 보았다. 이 매체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안경이자 컴퓨터에 의 해 존재하는 물질을 통제하는 방과 같다고 보았다. 현대의 가상현실 체험의 비전과 유사한 서덜랜드의 생각은 수많은 과학자들에 의해 설득력을 얻었다. 서덜랜드의 꿈은 가상현실의 실현을 이끄는 논의들 중 하나였다. 가상현실이란 용어가 대중적으로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쟈론 래니어(Jaron Lanier)의 덕 이다. 음악가이기도 한 그는, 가상악기인 '에어기타'(Air Guitar)를 선보일 정도로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1989년에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시뮬레이션에 몰입할 수 있는 머리에 쓰는 디 스플레이(HMD)와 데이터 장갑(data-glove)을 고안해낸다. 그는 92년 VPL이라는 자신의 회 사를 통해 이 새로운 가상현실 장비들을 소개했다. 래니어는 가상환경, 가상세계, 가상공간, 인공현실 등의 단어들을 지금의 '가상현실'이란 용어로 통합하였다. 그는 가상현실이 인간과 기계간 상호작용의 궁극적 형식이자, 인간의 정신을 확장하는 최초의 매체로 보았다. 래니어 의 이러한 가상현실 개념과 실험은 언론에 의해 빠르게 전파되었고, 대중에게 그 상호작용 기술에 대한 유혹을 불러일으켰다. 가상 기술의 군사적 응용이 지배적이었던 상황에서, 래니 어의 가상현실은 대중화로 이끄는 첫걸음이었다. 한편 가상현실 체험을 문화적 극단에서 표현한 대표적 인물은, 히피들의 우상이었던 티 모시 리어리(Timothy Leary)다. 리어리는 체험을 조절하는 마약, 특히 환각제의 일종인 LSD와 가상현실 기술간의 관련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졌다. 그에게 마약은 지각을 변 화시키는 전통적이고 저기술(low-tech)의 통제하기 어려운 수단이라면, 가상현실은 실리콘 의 정교한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정신 몰입의 장치였다. 일부 과학자들이 가상현실 체험의 일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마약에 대한 은유를 이용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리어리의 생각과 괘를 같이 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과학자들은 래니어나 리어리와 같이 대중적 센세이션을 추구하는 이들을 기피했고, 특히 마약과 가상현실간의 관련성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꺼려했 다. 3. 가상 현실의 진짜배기 꿈 이제까지 가상현실의 계보를 통해서 두 가지 공통점을 끌어낸다면, 하나는 가성성 혹은 의식 확장의 욕망, 다른 하나는 이로부터 생기는 인간 오감의 경이감 혹은 몽환 (hallucination)의 느낌이다. 전자가 목적에 해당한다면, 후자는 그 부산물이다. 전자가 기술의 영역이라면, 후자는 문화의 영역이다. 인류가 꿈꿔왔던 가상현실은 이 두 가지의 상호 과정이었다. 후자가 없었다면 전자의 과정은 지루했을 것이다. 반면 전자가 없으면 후자는 한낱 꿈으로 끝났을 것이다. 가상성과 의식 확장의 욕망은 새로운 정보 현실을 만들었다. 이제는 3차원 공간, 음향, 촉 감, 냄새, 그리고 움직임의 물질 세계를 거닐 수 있도록 기술이 진전되었다. 정보를 가상 현 실화하는 것은 정보에 보다 감각적인 특성을 부여하며, 궁극적으로 사이버공간의 거대한 바 다를 보다 수월하게 항해하게 만들 것이다. 가상현실 기술의 3차원 인터페이스는 사이버공 간의 광대한 데이터의 바다에서 정보를 조직하고, 여행하고, 찾아내는데 손쉬운 도구 역할을 한다. 맥루한(Marshal McLuhan)은 이미 신체가 근본적인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이고 물 질 세계가 그 신체의 내용임을 분명히 했다. 맥루한이 지적한 것처럼, 모든 미디어는 '감각 의 확장' 혹은 감각을 전하는 통로이다. 가상현실은 인터페이스 설계에 있어서 신체 감각의 확장에 초점이 맞춰진다. 가상현실 인터페이스의 목표는 인간의 감각을 전하는 통로들의 완 전 몰입을 통해 컴퓨터로부터 생생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상적인 가상현실 시스템에서 신체는 커뮤니케이션으로 감싸지고 정보로 맥박친다. 이제까지 미디어는 항상 외부 환경이 었다. 다시 말해서 라디오와 텔레비전이란 매체는 그것이 이용되는 방과 이를 보고 듣는 사 람들을 지배한다. 그러나 가상현실의 환경은 인간의 감각들을 철저히 에워싼다. 물리적 현실 로부터 생기는 감각의 투입을 막아야만 가상현실 체험은 완벽해진다. 감각은 가상세계에 몰 입되어야 한다. 신체는 가상현실의 리얼리티 엔진에 맡겨진다. 두 눈은 머리에 쓰는 HMD로 덮인다. 실제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두 귀는 헤드폰으로 감춰진다. 현실을 둘러싼 음 향은 사라진다. 양손은 데이터 장갑을 낀다. 이로써 가상현실에 들어갈 수 있다. 이처럼 가 상현실 인터페이스의 논의는 항상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인 신체와 그 신체의 감각을 전하는 통로가 확장되는 방식에 대한 문제로 돌아간다. 가상적인 감각 확장으로부터 체험자는 몽환과 경이감을 겪는다. 실제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정보의 범위와 포용 능력을 넘어서면, 신비스런 감각 체험을 불러온다. 몽환은 가상 현 실 기술을 이끄는 힘이었다. 마치 리어리의 LSD에 의한 몽환 실험처럼, 가상현실이 인간을 끊임없이 사로잡은 매력은 이를 통해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들을 '꿈꾸는' 것이 가능했기 때 문이다. 그래서, 래니어는 가상현실을 '전자 LSD'로 표현하기도 한다. 현실적으로 보면, 우 리는 가상현실을 통해 추상화된 코드와 상징을 보다 분명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주택' 이란 단어와 같이 어떤 빈약한 상징을 주고받는 대신에 우리는 3차원 환경의 주택을 거닐며 '주택'을 음미할 수 있다. 이를 래니어는 '탈상징적 커뮤니케이션' 시대에 진입했다고 표현한다. 그것은 사물 그 자체 안에서 거주하는 시대이다. 그에 따르면, 상징은 인간이 교환하는 단어보다는 상징화된 사물에 가까운 어떤 것, 사물 그 자체(thing-in-itself)로 대체된다. 언어적 상징에 의해 감지할 수 없었던 내용이 가상 현실이 주는 체험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감각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주택의 3차원 모델이 "주택"이란 단어보다 더욱 많은 정보가 전달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주택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리란 보장은 없다. 가상현실은 진짜 사물 혹은 진짜 경험을 전달하기 보다, 어느 누군가의 생각에서 만들어진 관념으로부터 다른 누군가에게 그것을 전달하는 것일 뿐이다. 가상현실 안에서 3차원 주택은 단지 프로그래머가 느끼는 주택의 경험에 대한 정신 모델을 시뮬레이션한 것이다. 이것은 정보를 훨씬 나은 방식으로 코딩하는 것이다. 가상(virtual)이란 말이 너무나 진짜같은 가짜의 현실을 지칭한다는 점은 이와 관계한다. 가상현실의 위험성은 인간의 의식을 확장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프로그래머들이 만든 가상현실의 세계에 감각을 몰입하여야 한다는 점에 있다. 이 세계는 진짜의 세계가 아니라 허구의 세계다. 이 진짜같은 가짜 세계는 인간의 감각을 현실로부터 낚아챌 수도 있다. 세계 의 디지털 라이브러리에 보다 생생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상현실 인터페이스의 역할이 인간의 오감을 영원히 현실로부터 닫게 만들고 인간을 현실과 대치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신체를 버리고 가상현실에 영원히 머물고 싶어하는 SF영화속의 캐릭터들은 존재하는 현실보다 경이감과 몽환을 불러오는 가상의 세계를 진짜로 여긴다. 결국 가상현실의 인터페 이스는 존재하는 현실의 거부가 아니라 확장으로만 기능해야 한다. 물론 가상현실 기술의 전제는 인간 의식의 그 모든 역동성과 뉘앙스를 담아낼 수 있는 인터페이스여야 함은 물론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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